제8과 창조주를 경배하라(질문, 대답, 부가설명)05/26/18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8과 창조주를 경배하라(질문, 대답, 부가설명)05/26/18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5-19 05:46 조회8,387회 댓글0건

본문

5월 2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3분

 

● 연구 범위 : 계 14:6~7, 마 24:14, 갈 3:22, 눅 23:32~43, 창 22:12, 계 14:8~12

● 기억절 :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

 

우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신자로서 ‘현대 진리’라는 성경의 개념을 믿는다(벧후 1:12 참고).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필요할 때마다 진리를 밝히시되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빛을 주신다는 개념이다. 창 3:15에 있는 최초의 언약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소망이 이르리라는 진리를 아담과 하와에게 계시하였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창 18:18) 되리라는 약속은 복음을 더 구체적으로 계시하였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오심은 당연히 더 위대한 진리의 계시였다.

오늘날 우리는 계 14:6~12에 기록된 세 천사의 기별이 모든 소망의 성취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을 위한 ‘현대 진리’라고 믿는다.

이번 주에 우리는 특별히 첫째 천사의 기별을 다룰 예정이다. 그 기별은 종말의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려 하는 자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첫째 천사의 기별을 이해하고 그것을 마지막 때의 ‘현대 진리’와 관련시킨다.

느끼기 :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갖는다.

행하기 : 세상에 이 기별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심판자와 창조주로 경배한다.

 

➋ 그대는 세 천사의 기별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계 14:6~12)

※ 참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도록 권고하고 심판으로 거짓이 드러나게 되어 사람들을 속임수에서 건지고 복음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➌ 우리가 전하는 세 천사의 기별이 영원한 복음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심판과 창조주 경배이다. 

➍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요청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다. 

➎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요청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라는 것이다. 

 

결론 : 첫째 천사의 기별은 세계의 운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전 세계의 모든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5월 20일(일) 복음의 보편성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

 

1. 계 14:6, 마 24:14, 28:19을 읽어 보라.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는 공통적인 주제는 무엇인가? 이 성경절들에 따르면 선교와 증거는 교회의 존재 목적에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가?

[계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답: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 첫째 천사의 기별은 마지막 시대에 주어진 ‘대사명’(마 28:19)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현대 진리’이다.

위의 세 성경절이 모두 온 세상,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강조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다시 말해서 이 기별은 범위에 있어서 전 세계적이며 모든 사람에게 들려야 한다.

 

2. 갈 3:22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온 세상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답: 온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갇혀 있기 때문이다. 

 

죄가 전 세계에 퍼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사명과 부르심도 전 세계에 관한 것이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 아래 갇혔다. 아담의 타락이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다. 어떤 민족이나 종족이나 백성도 죄에 대해 면역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죄의 즉각적인 결과에 노출되어 있다. 해결책이 없는 이상 우리는 모두 그것의 최종적인 결과 즉 영원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해결책이 제공되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부활 그리고 하늘 성소 봉사가 그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에게 제공하신 위대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전 세계로 가서 예수님의 기별을 아직 듣지 못한 자들에게 그것을 전하려고 하는 이유이다.

 

<부가설명>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이 죄를 아담의 타락한 영향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설명한다. 맞는 말이지만 정확한 말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이해와 설명은 죄를 도덕적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죄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상관없다. 어떤 사람들은 죄와 죄성(罪性)을 나누어 죄성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이라 하고 죄는 죄성이 죄를 짓는 행위를 할 때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한다. 아주 그럴듯하고 교묘한 설명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그런 구분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성경에 무슨 죄성이라는 말이 있는가? 성경은 죄에 대하여 말한다. 성경은 사람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가르친다.(엡2:3) 사람은 존재 자체가 죄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닌가? 딤전 2:14은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고 했는데, ‘빠졌음이라’는 말은 ‘게고넨’인데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가 되었음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즉 사람이 죄자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죄자체를 처리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죄자체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죄를 짊어지신 그분은 거룩한 공의의 진노를 견디시고 그대를 위하여 죄 그 자체가 되셨다.”(DA 755.1) 아담의 모든 후손이 죄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에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이 죄 그 자체가 되신 것이다. 성경은 이것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분명히 계시한다.(고전15:22)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바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고 죄가 된 존재들이다. 아담 이후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썩어질 씨로 태어났고(벧전1:23) 썩어져가는 구습을 행한다.(엡4:22) 그래서 죄가 온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 된 것이다. 율법이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주었고 예수께서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죽게 하시고 사망을 폐하신 것이다. 죄에 대한 바른 이해가 구원을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 자체가 되셔서 죄를 처리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자체가 되는 것이다.(고후5:21) 아멘.

 

교훈 : 온 인류가 죄에 감염되어 멸망할 운명에 처해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책을 담고 있는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민족과 개인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5월 21일(월)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영원한 복음

 

계 14:6을 보면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기별은 “영원한 복음”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기별이지만 겉으로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1. 눅 23:32~43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모든 죄인들에게 영원한 복음이 되는 어떤 희망을 드러내는가?

[눅23:32~43]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답: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즉각 영생의 확약을 받는다. 

 

엘렌 G. 화잇은 그 강도가 양심이 없는 범죄자는 아니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억누르다가 “점점 더 깊은 죄에 빠져들어 가 마침내 체포되어 죄수로서 심문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도록 선고되었다”(시대의 소망, 749)고 기록했다.

그런데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는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어렴풋이 깨닫고 이렇게 절규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예수님은 그에게 어떻게 대답하셨는가? ‘글쎄, 형제여,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그러면 죄에 더 깊이 빠지기까지 양심을 억누르지 말았어야지’라고 말씀하셨는가? 아니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하시면서 과거에 선포하셨던 설교 말씀의 일부를 인용하셨는가? 또는 어떤 식으로든 그 강도의 지난 과오들을 들추셨는가?

예수님은 의라고 할 만한 것은 행할 수 없는, 결함이 많은 성품을 가지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분을 저주했던 그 강도에게(마 27:44) 얼굴을 돌리시고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을 보듯이 그를 보시며 “내가 지금 약속하며 말한다. 너의 죄와 범행과 과오들이 용서를 받았다. 그러므로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첫째 천사의 기별의 기초가 되는 “영원한 복음”이 있다. 이러한 진리가 없다면 우리가 율법과 안식일과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해서 가르치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그 중심에 영원한 복음이 없다면 그러한 교리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부가설명> 그 강도는 자기가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하여 아무 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그 예수님께 자기를 맡기는 기도를 했을 뿐이다. 예수님은 즉시 그가 낙원에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가 예수님을 믿는 순가 그는 하나님의 의가 된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인정하신 것이다. 우리의 죽음이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다. 다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면 강도처럼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을 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는지 모른다.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해보라. 그것이 되는지? 만일 그 강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일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살았을까?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았을까? 여전히 강도로 살았을까? 우리는 스스로 속이지 않아야 한다. 그 강도는 죽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우리는 아직도 생활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제는 예수께서 그런 사람 안에서 사시게 된 것이다.(갈2:20) 예수께서 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하시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구원받은 사람 안에서 생명으로 작용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것을 나도 하고 ...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다. 자신을 속이지 말자.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은 사람이다. 받은 구원을 빼앗으려고 사탄과 그의 세력이 총력전을 펼친다. 예수 안에 깊이 숨어서 받은 구원을 결코 빼앗기지 않게 하자.(계3:11) 이것이 복음이다. 

 

교훈 : 우리가 세상에 선포해야 할 세 천사의 기별의 중심에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에 관한 영원한 복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5월 22일(화)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할 영원한 복음을 가진 첫째 천사는 그 기별을 확장한다(계 14:6). 우리는 영원한 복음을 전할 때에 그 복음의 일부로서 오늘날에 필요한 진리를 포함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시대를 위한 ‘현대 진리’는 계 14:7을 포함한다.

 

1. 계 14:7을 읽어 보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천사의 말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두려워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가? 이러한 개념이 어떻게 복음과 조화를 이루는가?

[계14: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답: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공포를 느끼라는 뜻이 아니다. 그분을 진정으로 경외하라는 뜻이다. 한자로 경외(敬畏)는 공경할 경(敬)과 두려워할 외(畏)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이 예의를 갖추어 공경하고 항상 마음으로 그분을 흠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과 두려워하는 것은 손등과 손바닥 같은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권고는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의미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 전자는 곧바로 후자로 이어진다.

 

2. 아래의 성경절들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무슨 관계인가? 창 22:12, 출 20:20, 욥 1:9, 전 12:13, 마 5:16

[창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출20: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욥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답: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정신과 행동을 뜻한다. 

 

위의 성경절들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개념은 그분께 순종하는 행동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즉 의를 행할 때에 우리는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간혹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을 경외하며 존경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그 의미는 그보다 더 심오하다. 우리는 타락한 죄인들이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악한 행위로 인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어떤 벌을 받아야 마땅한지에 대하여 깨닫고 깜짝 놀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먼저 우리를 용서의 십자가로 인도하고 그다음에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영혼을 잃게 했을 그 죄로부터 정결해지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두려움이다(마 10:28 참고).

 

<부가설명> 두려워한다는 말은 무서워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존경하여 따른 것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는 행동을 삼가 그가 존경하는 사람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한다. 그렇게 삼가는 모습에서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와 같다. 아울러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심판하실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심판하시는 눈에 우리의 모습이 합당하게 드러나도록 생활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닌가. 그래서 두려워하는 정신에는 그분에게 영광이 되도록 사는 삶의 모습이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 정신으로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예배할 때 행동을 아무렇게나 하지 않는다. 언어도 조심하고 마음도 바르게 가진다. 이것이 영광을 돌리는 두려움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된다.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을 만나면 두 손을 모으게 되고 언어와 태도를 조심스럽게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두려워하여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다. 우리 하나님께 우리는 어떤가? 나는 어떤가/

 

교훈 : 마지막 시대에 선포되는 영원한 복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요청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용서와 은혜의 십자가로 인도한다.

 

 

5월 23일(수) 그분이 심판하실 시간이 이름

 

첫째 천사의 기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개념은 심판과 연결되어 있다(계 14:7). 하나님이 공의와 심판의 신이라는 개념은 성경의 어느 가르침만큼이나 분명하다. 이 세상에는 너무도 결여되어 있는 공의와 심판이 정말 실현될 날이 온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영원한 복음에 심판의 소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두 요소는 어떤 관계인가? 복음이란 좋은 소식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법을 범하였을지라도 심판의 날이 임할 때에 십자가의 강도처럼 죄와 범법으로 인하여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1. 마 12:36, 전 12:14, 롬 2:6, 고전 4:5을 읽고 이렇게 자문해 보라. ‘나는 나의 공로를 기초로 얼마나 잘 할 수 있을까?’

[마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롬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고전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답: 인간의 행위가 비록 선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공로라고 제시할 수 없다. 

 

우리의 머리카락도 헤아리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복음이 우리에게 복된 소식인 이유이다. 심판이 이를 것이지만 정죄함이 없을 것이다(롬 8:1). 왜냐하면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이시며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심판을 통과할 것이다.

“사람은 이 비난들에 스스로 대항할 수 없다. 그는 죄로 더러워진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서 그의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회개와 믿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지켜 주도록 그분께 바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탄원하신다. 그분은 그들을 변호하시고, 갈보리의 강한 논증에 의하여 그들의 비난자를 물리치신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심으로써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그분께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분은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자비와 화해를 그분의 아버지께 주장하신다”(교회증언 5권, 471).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위, 생각, 말, 감정, 행동들을 살필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 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비록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해도(빌3:6) 하나님 앞에 그것은 해가 될 뿐이다. 인간의 도덕성이 높고 도덕적 행위가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 앞에 구원의 공로로 제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반역이다. “만일 그대가 사람에게 있는 선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고 사랑스런 모든 것을 함께 모아서 그것들이 인간의 영혼의 구원이나 공로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천사들에게 제시한다면 그 제안은 반역으로 간주되어 배격당할 것이다”(믿음과 행함, 24). 인간의 선행이 아무리 탁원해도, 예수님만큼 탁월해도 그것은 구원받는데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된다. 바울은 이것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하고 그것이 해로운 것이라서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하였다. 우리도 이런 깨달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의롭다고 판결 받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 예수님뿐이다. 그분이 나의 존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교훈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의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가까웠다는 소식은 복음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롭다 함과 거룩하게 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5월 24일(목)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계 14:9~10).

 

1. 계 14:6~7을 다시 읽어 보라. 첫째 천사의 기별에 어떤 특별한 요소들이 있는가? 그것들은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계14:6,7]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답: 영원한 복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과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과 심판 때가 되었다는 것과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들은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기별에 포함된 내용들이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는 부르심은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부르심에 이른다. 당연하다. 영원한 복음, 증언하라는 부르심 그리고 심판과 같은 이 모든 ‘현대 진리’의 요소들이 창조주 하나님과 무관하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진리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진리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근본적인 진리에서 비롯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지상의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돌아본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과 미래의 소망이 모두 그분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제칠일 안식일 준수가 매우 중요하다.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오직 그분만을 경배한다는 특별한 방식의 인정이다. 즉 복음과 심판과 더불어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부르심이 여기서 중요하게 제시되었다.

 

2. 계 14:8~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계14:8~11]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답: 창조주 외의 어떤 것을 경배하라고 강요하는 일이 세상 권력으로 선포될 때 진정으로 창조주를 경배하는 여부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가 된다. 

 

 

마지막 사건들이 전개될 때, 짐승과 그 우상에 절하라는 압박이 온 세상에 가해질 것이다. 우리가 그 짐승과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의 최후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고려한다면 유일하게 인간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강조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위기가 닥치면 이 진리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의 하나님께서 경배 받으실 이유를 창조하신 사실로 계시하셨다.(느9:6, 계4:11) 창조하신 사실을 기억하고 마땅히 경배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굴복하는 것이 제7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거룩히 여기는 구체적인 삶이 바로 제7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날 예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이 어떻게 하든지 제7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며 다르게 경배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하지 않으면서 안식일을 대신하는 어떤 날이라도 그 날에 경배하도록 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재림성도들이 제7일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토요일에 예배하는 것과, 또 안식일이니까 교회 가서 예배한다는 심상한 생각으로 예배하는 것과 그 날이 정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종말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고 있는가?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서 예배하는 것은 다 성경의 참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도 모르게 다른 신을 경배하는 것이 된다. 두려운 일이다. 

 

교훈 : 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진리는 모든 진리의 토대가 되기 때문에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부르심은 거짓 예배가 강요되는 마지막 때에 더욱 중요하게 된다.

 

 

5월 2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오랫동안 성경 연구자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계 14:7의 호소와 출 20:11에서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었음을 가리키는 안식일 계명 사이의 연결점에 주목해 왔다. 언어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계시록의 본문은 하나님이 “물들의 근원”까지 만드셨다고 덧붙이고 있다.

존 발드윈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한다. “‘물들의 근원’이라는 구절의 배후에 신적 의도가 있을 것으로 가정한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메신저로 하여금 출애굽기 20:11에서 열거된 목록에서 벗어나도록 하셨는가? 그 천사는 ‘물들의 근원’에 대하여 말하면서 왜 나무, 새, 물고기 또는 산들 같은 다른 부류의 창조물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특별히 그렇게 ‘물들의 근원’을 언급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심판의 때가 이르렀다는 하늘의 선언이라는 문맥에서 볼 때, 아마도 독자들의 주의를 예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심판의 때로 이끌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요 14:7에 특별히 ‘물들의 근원’이라는 구절을 명시하신 것은 그 구절을 통해 홍수를 떠올리게 해서 하나님이 영원히 신실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되심과 마찬가지로 또한 심판하시는 하나님도 되신다는 진리를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두 가지 다 창세기 홍수 이야기에 증언되어 있다. 만약 그렇다면 ‘물들의 근원’이라는 구절이 일으키는 홍수에 대한 개인적이고 영적인 암시(allusion)는 독자들로 하여금 계시록 14장의 첫째 천사에 의해 선포된 임박한 하나님의 새로운 또 하나의 개인적인 심판의 종말적 과정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것이 될 것이다.”—존 발드윈(John Baldwin), 최종걸 편역, 창조, 격변 그리고 갈바리(Creation, Catastrophe, and Calvary: Why a Global Flood Is Vital to the Doctrine of Atonement), (서울 : 시조사, 2010), 33~3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그 강도가 만약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 이후에 생존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다른 삶을 살았을까요? 그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까?

※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을 것이다. 당연히 삶을 변화시킨다. 예수님 생명이 시고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 생명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의 삶과 같은 모습으로 타나게 될 것이다. 당연하지 않는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