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초기 교회의 삶(질문, 대답, 설명)07/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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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7-14 05:28 조회8,641회 댓글0건본문
7월 21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0분
● 연구 범위 : 행 2:42~46, 행 4:34~35, 행 3:1~26, 행 4:1~18, 행 5:1~11, 행 5:34~39.
● 기억절 :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초기 교회의 긴박감은 더 강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메시아 왕국의 수립 시기를 묻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모든 것이 성령의 임재와 사도들의 사명 완수에 달렸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었다. 그래서 오순절이 이르자, 초기 신자들은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성령을 받았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했다. 물론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세상을 향해 나갔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세상이 그들에게 왔다고 생각했다(행 2:5~11).
교회는 물질적인 사물에 무관심해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그들은 소유를 다 팔아 예루살렘에 머물며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전하고 배움과 친교에 전념했다. 그들의 공동체 생활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곧 문제가 되었다. 하나님은 교회의 연합을 보존하기 위해 개입하셔야 했다. 그때부터 초기 교회는 반대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들은 흔들림 없이 믿음을 고수했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복음의 부르심에 옳게 반응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느끼기 : 하나님과 신앙 공동체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증진시킨다.
행하기 : 믿음을 나누며 믿음에 따라 살기로 결심한다.
➋ 초기 교회의 공동체 생활은 어떤 특징들이 있었습니까?(행 2:42~47)
※ 가르침과 친교와 기도의 삶이 특징이었다.
➌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봉사와 전도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어떤 문제를 야기했을까요?
※ 그들의 권위에 위협을 느끼게 했다.
➍ 가말리엘이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행 5:35~40)
※ 하나님께 근원이 있다면 사람이 제지할 수 없고, 하나님의 대적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➎ 그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까?(행 5:1~11)
※ 하나님을 속이려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➏ 우리 교회 또는 안교소그룹이 초기 교회의 성공을 재현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 배우고 친교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결론 : 교회는 복음 사명의 신장뿐 아니라 교회 사명을 좌절시키려는 사탄의 시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7월15일(일) 가르침과 친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오순절 이후, 누가는 시선을 옮겨 예루살렘 교회의 내부 생활을 개괄적으로 묘사한다. 행 2:42에서 주목하고 있는 4개의 활동은 가르침과 친교로 축약될 수 있다. 46절에 따르면 가르침은 성전에서 이뤄졌고, 친교는 개인의 집에서 이뤄졌다.
성전 뜰은 지붕이 있는 문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곳에서 종종 랍비들의 수업이 이뤄졌다. 신자들이 사도의 가르침에 전념했다는 사실은 성령의 은사가 그들을 명상의 종교가 아닌 집중적인 교육의 과정으로 이끌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적과 표적을 통해 교사로서의 권위가 입증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행 2:43).
영적인 친교는 초기 기독교의 영성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뚜렷한 표지(標識)였다. 신자들은 꾸준히 성전뿐 아니라 그들의 가정에서 모여, 함께 식사하고 성만찬을 기념하며 함께 기도하였다(행 2:42, 46). 그와 같은 매일의 기념행사를 통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그들의 소망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메시아의 나라에서 그들과 예수님 사이의 교제가 회복되기를 염원했다.
개인의 가정은 초기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신자들은 성전에서 이뤄지는 매일의 의식에 참여했고(행 3:1), 짐작건대 안식일에는 동료 유대인들과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약 2:2). 하지만 가정에서는 독특한 기독교적인 예배의 요소들이 나타났다.
1. 행 2:44~45, 4:34~35을 읽어 보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친교에는 어떤 중요한 측면이 있었는가?
[행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4:34,35]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답: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와 필요를 함께 채웠다. 재림이 그들 생전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장기적으로 물질이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게 했다.
끝이 가까웠음을 믿고, 그들은 물질적인 소유물들 곧 사적인 재산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질적인 자원의 공동 사용은 적절해 보였다. 메시아의 나라에서는 그분이 모든 필요를 공급할 것이기 때문에(눅 22:29~30) 내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물질적인 자원에 대한 그들의 공유는 더 깊은 연합의 경험으로 이어졌고 비범한 기독교 관용의 모본이 되기도 했다.
<부가설명>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증인들이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그들은 절망하였다. 그런데 그분이 부활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만져보고 모시고 함께 음식을 먹었다.(행10:41)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그들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그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신다는 약속도 분명한 것이고 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죽기 전에 예수께서 재림할 것을 기대했다. 늦게 예수를 믿은 바울도 그것을 기대한 마음을 그의 여러 편지에서 읽혀진다. 그러니까 하루하루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이 있으면 족하였다. 그들의 삶에 재물을 모아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서로 나누어 사용해도 즐거웠다. 이제 곧 영원한 하늘나라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그렇게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된 것으로 믿었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에는 그 믿음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들은 다 죽었다. 제자들이 죽고, 예수님을 친히 보고 따랐던 사람들이 차례로 죽었다. 예수께서 오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재림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시들어갔을 것이다. 사도들 중에 가장 오래도록 생존한 요한은 그가 밧모섬에 본 계시를 기록하고 또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초기 교회의 믿음에 대하여 예언과 계시의 말씀 위에 굳게 서도록 권고하였다. 재림은 틀림없을 것이고 속히 오실 것이다. 그 속히 오신다는 뜻이 역사적 시간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바울도 그것을 지적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역사만큼 오래 생존해 있지 않다. 그들이 죽는 날이 개인에게는 세상 끝이다. 그들이 호흡하고 있는 동안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을 상태로 살아야 한다. 그들이 죽는 그 이튿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을 것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는 세월이 없다. 그가 죽는 날이 세상 끝이다. 그러므로 죽는 그 이튿날 재림을 맞을 것이다. 진실로 속히 오신다. 내일 아침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을 것이니까. 아멘.
교훈 :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소망하면서 말씀과 친교에 전념하며 물질적인 소유를 공유하였다.
7월16일(월) 앉은뱅이를 고침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행 3:1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쯤 기도하러 성전에 갔다. 이는 초기 기독교 신앙의 유대교적인 특성을 가리킨다. 사도들이 성전을 찾은 이유는 새로운 회심자들을 만나거나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유대인이기에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기 위해서였다(행 20:16, 21:17~26). 적어도 그 시점까지는 그랬다. 그들은 그곳에서 깜짝 놀랄 만한 기적을 행하였고(행 3:1~10), 이를 통해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설교할 기회를 얻었다.
1. 행 3:12~26을 읽어 보라. 베드로는 설교하면서 주로 무엇에 강조점을 두었는가?
[행3:12~26]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답: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님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과 그분이 메시아인 것은 그분이 부활하신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것과 그분이 승천하셨다는 것과 재림하실 것과 그러므로 회개하고 그분을 믿고 영생을 받으라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 설교를 특징짓는 5가지 요점은 이렇다. ⑴ 예수님은 고난 받는 메시아이다(행 3:18). ⑵ 하나님은 그분을 부활시키셨다(행 3:15). ⑶ 예수님은 하늘로 들리셨다(행 3:13). ⑷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다(행 3:20). ⑸ 죄 사함을 얻으려면 회개가 필요하다(행 3:19).
비록 상황은 달라졌어도 우리가 지금 세상에 전하고 있는 기별도 그때와 여러 면에서 동일하다. 사도들은 여전히 유대교적인 환경 가운데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종교를 바꾸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메시아를 영접하고 중생을 경험해야 했다.
상황은 다르지만, 기별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다시 오실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분에게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가 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의 기별을 선포할 때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부활하셨으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기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선봉이 되어야 한다. 세 천사의 기별에는 안식일 진리를 소개하여야 할 사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기별 속에 있는 다른 진리들과 함께 이 안식일 진리를 전하되, 주목하여야 할 가장 위대한 중심인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복음교역자, 156).
<부가설명> 예수를 믿는 신앙과 종교는 예수님의 교훈을 실행하는 것 이상이다. 불교나 유교는 창시자의 교훈을 따라 각자가 실천하면 된다. 석가가 죽고 없어도, 공자가 죽고 없어도 또 마호메트가 죽고 없어도 그들이 교훈을 지키면 된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교훈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교훈을 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또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 아니라면, 또 그분이 참으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인류를 위하여 중보 봉사를 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이 신앙은 도덕적 교훈을 찾거나 옛날 유대인의 역사를 공부하여 그 지식을 얻는 것 외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 굳이 믿어야할 이유가 없다. 성경의 종교는 예수라는 말씀하나님이시며 인류의 사망을 십자가로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사망을 정복한 생명의 실상을 드러내신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 위에 서 있다.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끝났다면 이 종교는 가치가 없고 그런 종교를 믿는 신앙은 헛일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 살아야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하지만 우리는 살아계신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그분에게 자기 전체를 맡겨버려야 하는 것이다.
교훈 : 사도들이 성전에서 일으킨 기적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하는 기회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별에서도 항상 그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7월 17일(화) 반대가 일어남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
교회의 성공은 곧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반대를 야기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대제사장과 그의 관계자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그들 대부분은 사두개파였다. 그 시대에 산헤드린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었고 의장은 대제사장이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가르치는 베드로와 요한 때문에 대단히 심기가 불편했다. 성전 경비대에 붙잡힌 사도들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다음 날 의회로 소환되었다(행 4:1~7).
1. 행 4:1~18을 읽어 보라. 그들에게 무슨 권위가 있는지 묻는 질문에 베드로는 뭐라고 대답했는가? 베드로의 말 속에 담겨 있는 근본적인 기별은 무엇이었는가? 어떤 점에서 그 기별은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매우 위협적이었는가?
[행4:1~18]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답: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한다고 대답하였다. 기별의 핵심에는 너희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부활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기별을 위협으로 느꼈고 앉은뱅이가 고쳐진 이적으로 그들의 기별을 반박할 수도 없어서 아주 곤혹스러웠다.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제기된 권위의 문제는 곧 권력의 문제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기적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일어났을 뿐 아니라 구원이 오직 그분에게서 비롯된다고 선언했다. 사도들은 유대교의 최고 기관 앞에 섰지만, 훨씬 높은 권위를 바탕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식하고 학벌이 부족한 갈릴리 어부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언변은 그곳에 있는 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비록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이 예언하셨던 대로 성령에 충만한 상태였다(마 10:16~20).
그 기적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치유를 받은 자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산헤드린은 사도들에게 설교하기를 그치라고만 명령했다. 그들은 그 운동의 성장만큼이나 그 기별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주어진 증거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채, 편견에 사로잡혀서 사도들의 행위를 정죄함으로 자신들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베드로의 최후 변론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주옥같은 말씀 중 하나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부가설명> 사도들이 전하는 기별에는 증명이 뒤따랐다. 예수께서는 지붕 뚫고 내려 보낸 환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을 때 서기관이 참람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네 자리를 가지고 가라고 하는 것과 죄 사함을 받았다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셨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쉽게 판단하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그 말씀을 아주 단순하다. 증명되지 않는 말은 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 지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자리를 가지고 가라.’는 말은 그 말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를 사람들이 그들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말을 했는데 환자가 꼼짝도 않고 그대로 있으면 그에게는 환자를 낫게 하는 권세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러나 그가 벌떡 일어나 걷고 중풍이 완치된 모습을 보인다면 그분은 그렇게 하실 권세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그분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도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할 때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치료된 완전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문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고 하여 그리스도인의 말은 삶으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교훈 : 사도들이 일으킨 기적과 그들의 기별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들은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고 단지 설교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7월 18일(수) 아나니아와 삽비라
초기 교회 내에서 물자의 공유는 강제가 아니었다. 즉 그것은 교인이 되기 위한 형식적인 조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전체 공동체를 감동시킬 만한 자발적인 자선의 사례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나바였다(행 4:36~37). 후에 그는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 공격이 시작되었을 쯤에 교회 안에서도 연합을 해할 만한 부정적인 사례가 발생한다.
1. 행 5:1~11을 읽어 보라. 이 일화의 교훈은 무엇인가?
[행5:1~1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답: 속임수가 교회 내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화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돈을 떼어놓으려고 했던 시도보다는 공동체 내부에서 속임수를 사용하려고 했던 그들의 태도가 문제의 근본이었다. 그들의 죄는 충동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사전에 모의한 계획이자 “주의 영을 시험하려”(행 5:9)는 의도적인 시도의 결과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쳐야 할 의무가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로 했을 때는 아마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심지어 칭찬을 받을 만한 관용의 행위를 통해 형제들 사이에 영향력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토록 엄하게 벌하실 만한 이유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교회의 공동체 생활이 임박한 재림의 확신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행위는 시작 단계에 불과한 기독교 내에서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폄하하고 신자들 사이에 나쁜 감화를 줄 위험성이 컸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언급이 없는 이유는 기사의 짧은 길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그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악의적으로 행동했다. 비록 하나님이 항상 죄를 즉각적으로 처벌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죄는 하나님의 눈에 심각한 문제이다(겔 18:20, 롬 6:23). 오히려 우리는 종종 처벌이 지연된다는 사실로부터 항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해야 한다(벧후 3:9).
<부가설명>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계획범죄이다. 사탄은 그들 마음에 초대교회를 교란하려는 계획을 넣어준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속이려면 속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 사건이로 보인다. 태초에 여자에게 접근해서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던 사탄의 수법을 교회가 시작할 무렵에 이 부부를 통하여 시도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은 공명심이 강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제 번창해가는 교회에 헌금하는 것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교회에 뿌리내리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다. 사탄은 그런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 두 사람에게 하나님을 속이려는 계획을 수립하게 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유력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아마도 그들이 교회에서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바나바는 특별하게 초대 교회에 영향을 미친 지도자가 되지 않았는가? 속이는 자가 교회 지도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다. 바울은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다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말했는데 사탄은 초기부터 이렇게 교회 내부에 침입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단호하게 그것을 차단하셨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사탄은 이런 시도를 교묘하게 시도해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했고 세상은 이 거짓말쟁이의 속임수에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다. 우리도 정신 차리고 오직 진리에 굳게 서 있으면서 진리를 옳게 분변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는 돈에 대한 집착보다 하나님과 공동체를 속이려는 태도였다. 그들의 죄는 성령으로 충만한 초기 교회에 심각한 위협이었다.
7월 19일(목) 두 번째 체포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행 5:35).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처럼 사도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의 성공적인 치료 봉사는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을 통하여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거였다(행 5:12~16). 심지어 베드로의 그림자만으로도 사람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길 정도였다. 복음서에도 아주 비슷한 사례가 있다.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져서 치유를 받았다(눅 8:43~44). 그러나 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 실제로 베드로의 그림자에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대중의 미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은혜를 나눠주시고자 했다.
사도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이적과 표적을 많이 행하자 유대교 지도자들의 시기심도 늘어갔다. 결국 그들은 두 번째로 사도들을 체포했지만(행 5:17~18) 그들은 기적적으로 탈출했다(행 5:19~24). 베드로는 대중 앞에서 대범하게 설교하면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행 5:29)다고 강조했다. 그제야 지도자들 일부는 사도들에게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1. 행 5:34~39을 읽어 보라. 가말리엘은 사도들을 죽이려는 산헤드린의 계획을 어떻게 단념시키려고 힘썼는가?
[행5:34~39]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답: 그는 메시아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이 다 죽게 되자 그 운동은 흐지부지 끝난 예를 들어서 예수 운동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우리가 애를 쓰지 않아도 끝날 것이며 만일 하나님께서 하신 일면 그것을 막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산헤드린은 사두개파에 의해 좌지우지되었고, 바리새파는 소수였지만 영향력이 컸다. 가말리엘은 바리새파이자 율법학자였다.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존경심이 대단하여 사람들은 그를 ‘랍비’(나의 스승)’라고 부르기보다 ‘랍반’(우리의 스승)이라고 칭했다. 바울도 그의 제자 중 하나였다(행 22:3).
가말리엘은 최근에 신도들을 결집시켜 소요를 일으킨 두 개의 반역 단체를 상기시켰다. 지도자들은 모두 처형당했고 추종자들은 완전히 흩어졌다.
그는 만약 그리스도당 운동이 단지 인간적인 기원에서 비롯되었다면 그것 역시 곧 사멸할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운동이라면 그것을 막을 도리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말리엘의 충고에 설득력이 있었다. 사도들은 매를 맞고 다시 한 번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석방되었다.
<부가설명> 이 세상에 사람들에게 내세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는 세력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영원하신 생명이시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다른 하나는 거짓의 아비인 루시퍼 사탄이다. 드다, 유다처럼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것은 곧 소멸되었다. 물론 그 배후에도 사탄의 역사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거짓이 성공하는 것도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도덕성에 기초를 두는 것이다. 사람은 비록 타락하였으나 도덕적 존재이며 도덕적이려고 애를 쓰는 존재들이다. 그것이 사회생활에서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인격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도덕성을 함양하고 고양해서 내세를 준비하려는 것이다. 인간이 자력으로 내세를 확보하려는 가르침과 종교이다. 인간이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은 잘 먹혀드는 방법이다. 루시퍼는 이것에 자기 계획의 기초를 놓고 일한다. 도덕성을 가장 강조하는 것이 종교이다. 세상에 고등종교들은 다 도덕성을 강조하고 도덕성에 따라 내세가 결정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종교와 신앙은 드나, 또는 유다 등이 벌인 운동과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세상에서 엄청난 성공으로 생명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생명과 사망, 곧 존재에 대한 것을 기초로 신앙과 종교를 가리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한다. 도덕으로 내세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자기가 생명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살아 있는데 도덕적으로 잘못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어 벌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선업을 이루면 속죄되고 내세가 보장된다고 믿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비판하면 죽은 자가 스스로 선을 행하여 살아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드다, 유다 등은 실패했으나 지금도 하나님의 뜻과 다른 종교와 신앙이 버젓이 성공적으로 유지하는 이유가 궁금할까 하여 설명했다.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생각해 볼 재료는 될 것이다.
교훈 : 유대교 지도자들은 계속되는 사도들의 활약에 시기심이 가득했지만 일부는 기독교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운동일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7월 2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는 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돌보셨던 그분의 사람들과 사업을 돌보도록 부재중이신 주께로부터 위탁을 받은 청지기들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책임을 지우고 하늘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나타나심을 위해 우리가 깨어 기다리기를 기대하신다. 갑자기 그분께서 오실 때 우리가 잠자는 상태에서 발견되지 않도록 우리의 책임에 성실하자”(교회증언 8권, 37).
“하나님의 사업에 대하여 맹세하고 서약한 것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가를 백성들에게 깊이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한 서약을 한 사람들은 대체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 어음만큼도 그 서약에 대한 의무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서약을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말로 한 약속을 무시할 것인가? 어떤 법적 계약서나 약정서도 하나님께 대한 서약보다 더 강제성을 띠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화잇주석, 행 5:1~1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유산을 남겨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세계적인 선교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우리의 선교 사명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 당연히 수행해야 할 사명이다.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
➋ 어떤 사람은 “우리는 예수님이 오늘 오실 것처럼 살되 몇 백 년 뒤에 오실 것처럼 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말에서 어떤 지혜를 배워야 할까요?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삶과 부르심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 그와 같은 생활자세로 허락하신 삶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➌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부활과 재림이 왜 복음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까? 이런 요소들이 없는 설교는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 그것이 구원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빠진 설교는 복음 기별이 아니다.
➍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선한 의도이든지 악한 의도이든지 다른 사람의 동기를 판단하기란 얼마나 어렵습니까?
※ 하나님 앞에 정직하라는 교훈이다.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기초한 분별은 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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