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과 우리 주 예수님의 재림(질문, 대답, 설명)06/30/18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6-23 04:10 조회9,352회 댓글0건본문
6월 30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7분
● 연구 범위 : 사 13:6, 9, 마 24:30~31, 단 2:34~35, 딤후 4:6~8, 살후 1:7~10
● 기억절 :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7).
T. S. 엘리엇의 시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내 시작 속에 내 끝이 있다.” 그의 언어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우리의 명칭에서도 볼 수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이 말은 두 개의 기본적인 성경 교리를 담고 있다. ‘제칠일 안식일’은 6일간의 창조를 매주 기념하라는 안식일 계명을 위한 것이며, ‘예수 재림교’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가리킨다. 영생의 약속을 포함하여 성경의 모든 소망과 약속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것이다.
세상의 창조(우리의 시작)와 예수님의 재림(우리의 끝, 곧 죄악 세상의 종말) 사이가 아무리 멀다 해도 두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요 1:1~3)은 다시 오셔서 “마지막 나팔”(고전 15:51)이 울릴 때 순식간에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가져다주실 하나님이시다.
이번 주에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 일어날 마지막 사건들 중 마지막 사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사건의 실재성과 그것이 가져오는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점을 이해한다.
느끼기 : 주님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날을 기다리며 기뻐한다.
행하기 :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➋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반길까요? 또 어떤 사람들이 그분의 오심을 꺼리게 될까요?
※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반기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꺼린다.
➌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해도 재림이 믿는 자들에게 큰 소망을 주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재림은 확실하고 그때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되니까.
➍ 재림이 단지 영적으로 성취될 뿐 실제로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가 될까요?
※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모두 죽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소망이 없다.
➎ 그대가 아는 성경 지식에 따르면 재림 이후에 우리가 누릴 새로운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 성경에 묘사한 사실 그대로다. 묘사한 곳은 계시록 21장 22장, 이사야 11장 35장 등등 많다.
결론 : 예수님의 재림은 기독교 신앙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근본적인 신조입니다. 그것은 인류의 모든 꿈과 희망을 완전하게 성취하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6월 24일(일) 여호와의 날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사 13:9).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신약에만 나오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죽음, 부활과 승천 이후에야 재림을 둘러싼 진실에 대하여 온전하고 풍부한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다른 교훈들과 마찬가지로 재림 역시 그것이 일어나기 오래전에 이미 구약 성경에서 그에 관한 암시와 흔적이 계시되었다. 예수님의 재림에 관하여 신약 성경 기자들은 새로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미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고 지금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구주의 관점에서 재림의 약속이 더 온전하게 이해되며 인식되고 있다.
1. 사 13:6, 9, 슥 14:9, 단 12:1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어떤 사실을 알려주는가?
[사13:6,9]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슥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단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답: 여호와의 날인데 악을 멸절하는 날이 될 것이고 여호와께서 홀로 왕이 되실 것이며 책에 기록된 모든 사람이 구원 얻는 날이 될 것이다.
여호와의 날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파괴와 슬픔과 혼란의 날이 되리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날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빌 4:3, 계 3:5, 13:8 참고). 악인들은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은 보호와 보상을 받게 될 ‘여호와의 날’은 최초로 구약 성경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여호와의 분노의 날”을 맞이할 테지만 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부르심에 주의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는다(습 2:1~3).
2. 마 24:30~3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멸망할 자들과 구원 받은 자들 사이를 가르는 거대한 양분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마24:30,3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답: 악인들은 통곡하며 재림을 볼 것이며 선택된 자들은 천사들이 모을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재림은 창세기부터 예언되어 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 재림과 1000년기 후에 완결된다. 더 철저히 살피면 창세기 1:1에 이미 재림의 약속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창세기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고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읽을 때 그것이 보인다.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은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의 창조를 복원할 것이라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복원하는 것은 예수께서 초림하시는 것을 시작으로 재림하시고 1000년기가 지나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기록이 이 사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도 재림에 대한 기록들이 신약성경보다 그 빈도(頻度)가 더 잦다. 이사야서에는 찬란한 결과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메시아가 재림해야 구원의 봉사가 완성되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약속은 반드시 예수님의 재림으로 연결된다. 다니엘서 2장의 우상으로 보여주신 세상의 역사는 돌이 우상을 부수고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구에 성립되는 것이다. 그것은 1000년기 후에 완결된다.
교훈 : 구약에서 예수님의 재림은 여호와의 날이라는 표현으로 암시되었다. 그날은 악인들에게는 멸망의 날이요 의인들에게는 구원의 날이다.
6월 25일(월) 다니엘과 예수님의 재림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단 2:45).
예수님 시대에 살았던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와서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세계 최강국으로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강림은 초림이든지 재림이든지 그런 기대와 관련이 없다. 하나님은 단순히 죄와 타락의 세계를 재배치하기보다는 그분의 신실한 백성들의 미래를 위해 훨씬 큰 무엇인가를 마련하셨다.
새로운 세계는 옛 세계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것의 기원은 완전히 다르다. 구약 성경에서 다니엘서 2장만큼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계시하는 곳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니엘서 2장은 네 개의 제국 즉 바벨론, 메대-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그 후로 로마는 오늘날의 유럽 국가들로 분열한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신상(네 세력의 연속성을 상징함)은 극적인 방식으로 부서진다. 이는 현 세계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오는 세상 사이의 큰 단절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1. 단 2:34~35, 44~45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이 세상의 운명과 새로운 세상의 특징은 어떠한가?
[단2:34,35, 44,45]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답: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산에서 뜨인 돌이 이 세상 나라들을 부서져 겨와 같이 되어 바람에 날아가서 흔적도 없고 그 돌이 온 세계에 태산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것은 영원한 나라이다. 뿌리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위치는 같은 지구이다.
이 성경절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전혀 모호함이 없다. 눅 20:17~18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 그 돌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단 2:35을 아람어로 보면 금, 은, 진흙, 철, 동이 부서진 다음 그것들이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다고 했다. 즉, 예수님이 재림하신 뒤에 옛 세상의 잔재는 없을 것이다.
한편 옛 세계의 모든 자취를 파괴한 그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23절)게 된다. 예수님의 재림의 결과로 수립되는 이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영원히 설 것이라”고 했다(단 2:44).
다시 말하지만 지구에 살았던 모든 인류에게는 두 가지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든지 아니면 겨처럼 세상과 함께 무(無)가 되어 사라지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이쪽이든지 저쪽이든지 영원한 결말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부가설명> 다니엘서 2장의 예언은 바벨론에서 시작한 열강들의 흥망성쇠를 가르쳐주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성립되는 것을 자세히 가르쳐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은 사람의 손에 의하여 건국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에 의하여 건국된다. 그 돌이 산 돌이신 예수님이시다.(벧전2:4) 그분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재창조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다니엘서 2장은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 세상에 건국되는지 잘 설명해주신 계시이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성립된다. 바벨론 메디아-페르시아, 헬라, 로마, 분열된 나라가 세상의 역사적 사건으로 성립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역사의 종말에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셔서 세상의 역사를 끝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 그것이 마치 바벨론 다음에 페르시아가 일어난 것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이 지구에 건국된다. 그 돌이 우상, 즉 바벨론 등의 나라들이 건국되었던 그 자리에 태산을 이루었다. 그것은 온 세계, 곧 이 지구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이다.
4. 하나님의 나라의 연대는 영원하다.
5. 하나님의 나라의 국민은 산 돌이신 예수님께 여결 되어 산 돌들이 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렇게 산 돌들이 되어 그 나라에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옛 세계는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오며 우리 모두는 영원히 살든지 영원히 사라지든지 둘 중 하나의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6월 26일(화) 긴 안목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1. 위의 말씀을 읽어 보라. 우리에게는 어떤 위대한 소망이 있는가? 그러한 소망의 이유는 무엇인가?
답: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소망이다. 그것은 복된 소망이다. 그때 영광으로 영생에 들어갈 것이다.
어떤 강사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설명하면서 “무한한 밀도를 가진 작은 덩어리가 무로부터 튀어나왔고, 그 덩어리가 폭발하면서 그 폭발로 인해 우리 우주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강사는 그 무한한 밀도를 가진 작은 덩어리가 어떻게 무로부터 튀어나왔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추측했을 뿐이다.
이번 과 서론에서 본 것처럼 우리의 기원에는 결말이 있다. 그래서 이 강사에 따르면 우리의 결말이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적어도 길게 보면 그렇다. 무한한 밀도를 가진 작은 덩어리로부터 생긴 우주는 결국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소멸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물론 그 안에는 인류도 포함된다.
2. 딤후 4:6~8을 읽어 보라.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이며 그는 어디에 소망을 두고 있는가?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답: 주님의 나타나심으로 의의 면류관을 주실 사실에 소망을 두고 있다. 즉 예수님의 재림에 소망을 두고 있다.
바울은 곧 처형을 당할 예정이었지만 구원의 확신과 그가 “주의 나타나심”(딤후 4:8)이라고 말한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그를 위해 예비 되어 있는 “의의 면류관”은 분명히 자신의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는 것이었다(딤전 1:15). 바울은 재림의 약속에 대한 자신의 소망이 바로 그 의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감옥에 갇혀 사형을 기다려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긴 안목으로 보면 자신의 미래가 아주 밝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그가 눈앞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큰 그림을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바울은 의의 면류관이 자기를 위하여 예비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 의의 면류관은 의인이 아니면 받을 수 없다. 이어서 그는 그 의가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생활한다. 그들은 이 세상이 살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처하여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여 살지 않는다. 그들은 타국에서 천국을 바라보며 천국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바로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다. 바울이 그것을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생명의 면류관이다. 이긴 자들이 받은 면류관은 같은 면류관인데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정금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등등으로 불린다. 같은 면류관이다. 가장 좋은 이름은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여겨진다. 이것은 생명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면류관이다.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쓸 수 있도록 예수 안에서 이 생명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자.
교훈 : 허무한 기원에는 허무한 결말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현재의 상황과 관계없이 긴 안목에서 밝은 미래를 소망할 수 있다.
6월 27일(수) 하늘 구름을 타고
성경에 따르면 재림은 매우 결정적이고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 사건을 예수님이 실제로 오시는 사건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재림은 그분이 지구로 다시 오실 때가 아니라 그의 영께서 지상에 있는 그분의 교회를 통해 나타날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독교의 도덕적인 원칙들이 그의 백성들을 통해 나타날 때에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러한 주장은 거짓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어떤 장기적인 소망이 있겠는가?
1. 재림에 관한 아래의 신약 성경절들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의 재림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계 1:7).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살후 1:7~9).
답: 구름을 타고 큰 영광으로 오신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오신다. 각 사람의 눈이 그분이 오시는 것을 본다.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다. 이런 표현들은 상징이 아니고 실제적이고 사실적이다.
“하늘은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같이 보인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오는 영광이 사방으로 퍼져가는 것처럼 보인다. 산들은 마치 바람에 불리는 갈대와 같이 흔들리고 거친 바위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큰 폭풍우가 몰려오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난다. 바다에서는 사나운 물결이 서로 부딪친다. 마치 파괴 행위를 하는 악마의 소리 같은 태풍의 무서운 소리가 들린다. 온 지구는 바다의 물결처럼 아래위로 요동하며 그 표면은 파괴된다”(각 시대의 대쟁투, 637).
예수님의 재림은 실제로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엄청난 사건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 것이다. 예수님이 초림 때에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들이 재림 때에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의 예언은 상징적인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상징이 실제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였다. 다니엘서 7장의 짐승으로 상징된 것은 세상에 제국들의 흥망성쇠였는데 실제로 되었다. 예수님의 초림은 예언한 그대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그것에는 상징성이 없다. 동정녀에게서 탄생하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고 별이 나타나고 이런 것들은 실제적이고 사실(寫實)적이다. 예수님의 초림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그렇다. 성경을 읽으면서 상징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을 바르게 분별하고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상징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실제적인 것을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성경의 진리를 올바르게 깨달을 수 없다. 예수께서 수행하신 구원에 대한 모든 봉사는 실제적인 것이다. 재림도 분명히 그렇다. 그것은 구원 봉사의 마지막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봉사가 실제적이었던 것처럼 마지막 봉사도 실제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 아니면 초림과 그분의 봉사도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옛날 영지주의자들은 초림과 그분의 봉사를 실체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재림에 대하여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교단도 있고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속지 않아야 한다.
교훈 : 재림을 실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영적인 성취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만인이 목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재림하신다.
6월 28일(목) 산 자들과 죽은 자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친구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 내기 전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선포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예수님은 그같이 믿기 어려운 주장을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시기보다 이미 죽어서 악취가 나기 시작했을 법한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셨다(요 11:39).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죽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교리가 말하려는 전부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의 소망에서 그처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1. 다음의 성경절들에 따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분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롬 6:5, 살전 4:16, 고전 15:42~44, 53~55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고전15:42~44, 53~55]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답: 불멸의 몸으로 부활한다.
여기에 재림의 위대한 소망이 있다. 모든 시대의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들은 그분이 경험하셨던 것처럼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그분의 부활 안에 그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들어있다.
2.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빌 3:21, 살전 4:17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답: 예수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살아있는 신실한 백성의 신체는 계속 유지되지만 현재의 상태와는 매우 달라질 것이다.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몸은 죽음에서 부활한 자들의 몸처럼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살아남은 의인들은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된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그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였다. 그들은 이제 죽지 않을 몸으로 바뀌어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끌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645).
<부가설명> 성경의 종교와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이다. 부활이라는 말은 죽었다는 것이 전제되는 개념이다. 죽지 않았으면 부활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부활하기 전에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부활이 없으면 성경의 종교는 이 세상의 다른 종교들보다 그 질이 낫다고 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죽은 사람의 죽지 않는 영혼에 대하여 가르치신 일이 없다. 성경은 결코 그런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거짓의 아비가 한 말일 뿐이다. 예수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예수
게서 재림하실 때 첫째 부활 곧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고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들은 1000년기 가 지난 후에 둘째 부활 곧 심판의 부활로 일어난다. 그들은 최후의 심판으로 불 못에 들어갈 것이고 거기서 재가 되어 존재를 영원히 상실한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몸과 같이 되어 부활하고, 그때 살아있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보이신 그런 몸으로 변화한다. 부활한 몸과 변화한 몸은 동일하게 신령한 몸이다. 같은 상태라는 말이다.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신 사건이 변화산 사건이고 부활하신 일이다. 지금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생명 곧 진정으로 거듭난 생명을 얻어야 한다. 한 번 호흡이 멈추고 난 후에는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이 사모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생명의 부활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교훈 : 재림이 우리의 소망에서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날에 죽은 의인들이 다시 살아나고 살아 있는 의인들도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6월 2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님의 재림은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죄와 고통에 대한 슬픈 이야기의 후기나 부록이 아니다. 오히려 재림은 기독교 신앙의 장엄한 절정이자 위대한 소망이다. 재림이 없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인류의 이야기는 그저 비참한 장면 뒤에 또 다른 비참한 장면이, 비극 뒤에 또 다른 비극이 이어지다가 모두 죽음으로 끝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소망이 없다면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시끄러운 소리와 광포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재림의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반복해서 확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자신의 생명의 속전으로 대속하셨기 때문에 이 소망을 품는다(막 10:45). 예수님도 대가를 지불하셨으니 그 결과를 받으시기 위해 진실로 오실 것이다. 하늘의 별들은 우리에게 재림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들도 그런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이 세상에 대하여 선하고 희망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어느 날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2)는 사실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가 언젠가 고개를 들어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막 14:62) 보리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들어서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믿는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리스도의 재림이 단순히 신자들의 삶에서 기독교 정신이 온전하게 구현되는 것뿐이라면, 결국 우리에게 아무 소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 그것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성경의 종교는 생명의 종교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을 정복한 사실을 온 우제 드러낸 승리이다.
➋ 사람들이 우주가 무에서부터 발생했다는 개념을 믿고 또 발전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수밖에 없는지 토의해 보십시오.
※ 사탄이 사람들에게 창조주를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역사하기 때문이다. 창조가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서로 이야기해보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