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예루살렘 총회(질문, 대답, 설명)08/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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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8-18 01:14 조회9,371회 댓글0건본문
8월 25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2분
● 연구 범위 : 행 15장, 갈 2:11~13, 출 12:43~49, 롬 3:30, 레 18:30, 계 2:14, 20
● 기억절 :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11).
2년이 지나서 바울과 바나바는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그 교회가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 신자들에게 선교 활동을 보고했다. 그런데 그 보고는 그들이 무엇을 이루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무엇을 이루셨는지에 강조점을 두었다.
물론 유대인들도 믿음을 많이 받아들였지만 그 보고의 초점은 이방인들 속에서 이뤄진 선교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고넬료의 사건 이후로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의 회심은 논란거리였다(행 11:1~18). 그럼에도 다수의 이방인들이 교회의 일원으로 용인되고 있어서 상황이 매우 복잡해졌다. 대부분의 예루살렘 신자들은 그런 소식이 달갑지 않았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들과 교제를 나누려면 먼저 유대교로 전향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도행전 15장은 심각한 수준에 이른 이방인의 문제와 그것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교회의 협력을 다루고 있다. 예루살렘 총회는 세계 선교와 관련하여 사도 교회의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기준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경험이 될 수 있는지를 배운다.
느끼기 : 한때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려는 노력에 공감한다.
행하기 :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거룩함과 더불어 복음의 포용성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한다.
➋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에 대표단을 파견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행 15:1~2)
※ 유대인 신자들과 복음 교리의 충돌 때문에 해결하기 위하여.
➌ 유대교화자들의 주장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행 15:5)
※ 전통과 풍습과 문화에 매인 신앙인지 말씀대로 신앙하는 것인지 확인해야 할 필요.
➍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했던 것으로 보입니까?(행 15:7~11)
※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구원으로 용납하신다는 것을 이해했다.
➎ 야고보의 지도하에 총회가 내린 결정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행 15:19~21)
※ 이방인 신자를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것이지 유대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 : 하나님의 교회는 그분의 뜻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언제나 그분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위해서 우리는 낡은 기준과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8월 19일(일) 논점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 15:5).
안디옥 교회는 시작부터 헬라파 유대인들과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다(행 11:19~21, 갈 2:11~13). 그들은 서로 화목한 교제를 나누며 지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한 무리의 신자들이 도착하면서 그러한 교제에 균열이 일어났다.
1. 행 15:1~5을 읽어 보라. 그 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행15:1~5]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 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답: 유대에서 온 신자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자,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바울의 교훈과 충돌되었다.
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리새파 신자들은 전통적으로 유대교화자(敎化者)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교회 안에 있는 바리새인들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는 바리새인이었다(빌 3:5). 그들은 자발적으로 안디옥에 갔던 것으로 보인다(행 15:24). 그런데 얼마 후에 안디옥에서 벌어진 사건을 보면 사도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그다지 편안해 하지 않았던 것 같다(갈 2:11~13).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유대교화자들을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 또는 “거짓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갈 1:7, 5:10, 2:4). 바울의 입장에서 그들의 진짜 동기는 복음의 영적인 자유를 약화시키고 이방인 회심자들을 율법주의의 종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요점은 매우 단순했다. 할례를 받고 유대교의 모든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 한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구약에 기초한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의 일원이 되는 다른 길은 없다(창 17:9~14, 출 12:48).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의 생각에 먼저 유대교로 전향하지 않는 한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물론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의 본질에 어긋나는 그 같은 조건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유대에서 온 방문자들은 논쟁에 불을 붙였다. 행 15:2에 나오는 그리스어 ‘스타시스’는 ‘갈등’ 또는 ‘불화’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역 교회가 단독으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교회의 연합이 달린 사안이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의 형제들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한 대표단을 예루살렘에 보내기로 결의했다.
<부가설명> 사도행전 15장 총회 이야기는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 통일되어 있다는 것과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안디옥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서 처리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대표를 보내어서 온 교회가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대답을 찾아야 한다는 정신이 성령의 정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별히 교리 문제가 그렇다. 당시 유대인 신자들은 구원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들어와야 한다는 사상이 강했고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믿었다.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고 하례를 받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간주되어서 율법을 지킬 의무를 지켜야 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는 모든 규례를 따라야 된다고 믿었다. 할례와 율법 수행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필수 요건이며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머무는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믿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언약은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약속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바로 그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예루살렘 총회는 이 문제를 성령의 지도로 잘 해결했고 베드로가 고넬료를 찾아가서 행한 것도 이 총회를 성령의 인도로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게 한 것이 되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미리 이방인도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구원에 들어온다는 것을 가르친 사건이 되었다. 우리도 성경으로 이끄시는 성령의 지도대로 신앙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에 대표단을 파견했던 이유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신자로 수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연합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8월 20일(월) 할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갈 5:6).
이 논쟁의 최대 쟁점은 할례였다. 그것은 인간이 세운 제도가 아니었다(마 15:2, 9 대조).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그분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언약의 표징으로서 친히 할례를 명하셨다(창 17:9~14).
1. 출 12:43~49을 읽어 보라. 이스라엘 자손 외에 또 누가 할례를 받아야 했는가?
[출12:43~49]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가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44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45 거류인과 타국 품군은 먹지 못하리라 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47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 48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49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
답: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는 이방인이나 종이 유월절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하례를 받아야 했고 그럴 때에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 하나로 간주되었다.
언약의 복은 태생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할례만 받는다면 그 복은 그것을 원하는 노예와 외국인 이주민들에게도 확대되었다. 외국인 이주민들도 할례를 받은 뒤에는 하나님 앞에서 태생적인 이스라엘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출 12:48).
그러므로 할례는 (특히 남성에게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유대교화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먼저 유대인이 되지 않고 그분이 주시는 구원의 혜택을 누릴 이방인은 없다고 주장할 법하였다.
2. 롬 3:30, 고전 7:18, 갈 3:28, 5:6을 읽어 보라. 바울은 할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는가?
[롬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고전7:18]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답: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이해했고 유대인이 굳이 무할례자가 될 필요가 없고 이방인이 하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고 예수를 믿으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이해했다.
유대교에 가입하지 않고서는 어떤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들은 언약과 구원이라는 두 가지 구분된 개념을 혼합시켰다.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렘 4:4, 9:25). 게다가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아서가 아니라 받기 이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즉 의롭다 함을 받았다(롬 4:9~13). 구원은 항상 믿음으로 말미암는 반면 언약은 세상에 자신과 자신의 구원의 계획을 알리시려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대책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선택을 받았던 것이다(창 12:1~3).
그러나 이 신자들이 언약과 구원을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킨 나머지 할례를 공로로 간주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작용하는 곳에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구원의 방편으로 짐 지우려는 시도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고(갈 1:7, 2:3~5),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며(갈 2:21), 예수 그리스도를 쓸모없게 여기는 것이었다(갈 5:2). 더욱이 그것은 복음의 보편적인 속성을 부정하는 태도였다(골 3:11, 딛 2:11). 바울은 그런 식의 논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부가설명> 언약과 구원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새 언약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새 언약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은 사실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할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피 언약에 참여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4장에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를 여호와께서 죽이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그의 아내 십보라가 둘째 아들에게 할례를 하고 그 양피를 모세에게 던지면서 ‘당신은 나의 피 남편’이라고 외쳤는데,(출4:25,26) 피 남편이라고 한 것은 교회의 남편 되시는 예수님이 피를 흘려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분의 신부(新婦)를 삼은 사실을 표상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다만 몸에 할례하는 것은 민족적 이스라엘의 일원이라는 표가 되겠지만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가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을 표상한 것이다. 언약은 구원받은 표이고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의식에 드러내는 것이며 그 언약에 참여한 신자들이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준수하는 부활의 생명의 존재들이 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침례로 교체되었다.(골2:11,12)
교훈 :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 후손과 맺은 언약의 표징이지만 필연적으로 구원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8월 21일(화) 논쟁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행 15:19).
1. 행 15:7~11을 읽어 보라. 예루살렘의 논쟁에서 베드로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행15:7~11]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답: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바울이 전한 복음이 성령께서 하신 것임을 증명하는 역할을 했다.
누가는 회의의 모든 절차를 다 기록하지는 않았다. 유대교화자들에 대한 지지 발언뿐 아니라(행 15:5) 그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답변을 알았더라면 흥미로웠을 것이다(행 15:12). 우리가 베드로와 야고보의 연설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사도들 중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연설하면서 몇 년 전에 있었던 고넬료와의 경험을 상기시켰다. 그의 논리는 이전에 예루살렘의 형제들 앞에서 제기했던 논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행 11:4~17 참고). 하나님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와 그의 가족에게 오순절 때 사도들에게 부여하셨던 동일한 성령의 선물을 주심으로 그분께서 고넬료의 회심을 승인하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그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유대인 신자들에게 확신시키려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인물이 바로 베드로였다. 비록 구약의 법도와 규례의 혜택을 다 누리지는 못할지라도 믿는 이방인은 더 이상 부정한 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마지막 진술은 거의 바울의 말처럼 들린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행 15:11).
2. 행 15:13~21을 읽어 보라.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해결책을 제안했는가?
[행15:13~21]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답: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다는 결론을 맺었다. 이것은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결정은 이스라엘 땅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외국인 이주민들에게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외에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더 추가적인 제한 사항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야고보의 연설은 그가 권위의 자리에 있음을 암시한다(비교 행 12:17, 21:18, 갈 2:9, 12).
아모스의 예언에서 다윗의 장막의 재건(다윗 왕조의 회복)에 대해 그가 어떻게 이해했는지와는 상관없이(암 9:11~12), 야고보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방인들에게 재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에 참여할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그들도 이스라엘에 편입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결정은 이스라엘 땅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외국인 이주민들에게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외에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더 추가적인 제한 사항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부가설명> 현재 재림교회도 이런 문제에 부딪힐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 외의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도자들이 성숙한 신자가 되면 증언의 권고도 받을 것이다. 예언의 신의 증언에 대한 것을 충분히 알도록 가르쳐주지 않고 예언의 신의 증언을 강요하듯이 주장하면 초대교회 유대인 신자들이 하던 것과 다를 것이 별로 없지 않을까? 교회는 새 신자들이나 구도자들에게 예언의 신에 대한 진리를 성경에 근거하여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을 올바르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이 없이 증언의 말씀을 강조하게 되면 새 신자들이 당황하게 될 수도 있다. 화잇 여사는 “그들은 그들의 믿음에 관하여 불신자에게 이야기 해 주면서 그 증거를 제시해 달라는 요구를 받을 때 그 증거를 제시해 주기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나의 저서를 읽어 주었다. 이와 같은 방법은 모순이 많고 불신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할 것임을 나는 보았다. 증언들은 그 참 뜻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 그런 경우에는 증언들이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증언보감 2권 P284) 예언의 신의 이 증언을 유의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교훈 :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방인들을 믿음 이외의 다른 조건 없이 받으셨다. 예루살렘 총회는 이방인들에게 최소한의 요구 외의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8월 22일(수) 사도들의 칙령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행 15:29).
1. 행 15:28~29을 읽어 보라. 총회는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어떤 네 가지 조항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는가?
[행15:28,29]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답: 1) 우상의 제물과 2) 피와 3) 목매어 죽인 것과 4)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총회의 주요 안건은 만족스럽게 해결되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기에 이방인 신자들이 교회에 편입할 때에는 할례가 면제되었다. 단지 그들이 삼가야 할 것은 다음의 네 가지였다. ⑴ 이교 의식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다음 성전 만찬으로 제공되거나 시장에 팔린 육류, ⑵ 피의 섭취, ⑶ 목매달아 죽인, 즉 피를 빼지 않은 동물의 고기, ⑷ 여러 형태의 성적인 부도덕함.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음식물의 금지조항(1~3)들을 한시적인 권유로 이해한다. 그런 것들이 특히 유대인들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 금지조항들은 단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의도였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레위기에 나오는 음식법(레 11장)과 안식일 계명(출 20:8~11)을 포함한 모든 구약의 율법들이 목록에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이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들의 칙령은 한시적인 것도, 구약과 관련된 일체의 것을 배제하는 새로운 기독교 윤리 조항도 아니다. 사실 사도들과 교회의 장로들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행 15:28) 레위기 17~18장에서 이스라엘의 거류민들에 대해 다루는 부분만을 재언급했을 뿐이다.
레위기의 문맥에서 이러한 금지 조항들은 이교 신앙의 포기 선언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땅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모든 외국인은 이전에 행했던 그 같은 이교의 행습들을 포기해야 했다(레 18:30).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방인들도 이교 신앙을 거부하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러한 계명들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했다. 그러한 계명들은 본질적으로 의식법이 아니라 안식일(창 2:1~3)이나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별하는 것(창 7:2)과 같이 모세 시대 이전에 주어진 보편적인 것들이다. 그 칙령은 분명히 한시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계 2:14, 20은 첫째와 마지막 금지 조항을 언급하는데 이는 다른 두 가지도 유효함을 암시한다. 사실 역사적인 증거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신약 성경 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칙령을 규범으로 간주하였다.
<부가설명> 역사가 지나면서 교회는 성경말씀보다 인간의 해석을 더 믿는 경향으로 빠졌다. 신학적 해석이다. 성경은 신학이 아니라 성령의 지도를 받아서 성경을 성경으로 깨닫도록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기름부음은 성령 받은 것을 뜻하는 말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요16:13~15) 사도들의 칙령은 성령께서 초대교회의 토론을 통하여 결정하신 진리이다. 교과 저자의 말대로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편리를 앞세우면서 은혜로 율법을 폐했다고 주장하고 아무렇게 먹어도 괜찮고 안식일 안 지켜도 괜찮다고 해석하여 교인들을 그렇게 가르친다. 아내의 말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 교회도 학자들이 해석한 신학을 듣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버린다. 재림신자들도 어떤 면에서 그렇게 빠질 수 있다. 우리는 아주 철저히 성경말씀 자체에 굴복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께서 복종시킨 믿음으로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사도들의 칙령은 새로운 율법의 조항이 아니라 외국인 거류민들에게 적용했던 법의 재언급이었으며 한시적인 법이 아니라 계속 적용해야 하는 법이었다.
8월 23일(목) 예루살렘에서 온 서신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행 15:30~31).
1. 행 15:22~29을 읽어 보라. 총회의 결의와 관련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추가적인 조치들을 취했는가?
[행15:22~29]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26 (25절에 포함되어 있음)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답: 총회 결의를 편지로 알려주는 조치를 했고,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를 함께 보내어 결의 내용을 직접 확인하도록 하는 조치를 했다.
첫 번째 조치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결의된 사항들을 알리는 것이었다. 사도들과 교회 장로들의 이름으로 기록된 그 서신은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위(사도들의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가 반영된 공식적인 문서였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예루살렘 총회의 추정 연대는 기원후 49년이다. 그렇다면 이 서신은 가장 오래된 기독교 문서 중 하나가 된다.
예루살렘 교회는 또한 유다 바사바와 실라를 대표자로 임명하여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동행하도록 결의했다. 그들의 임무는 서신을 가지고 가서 그 내용을 확증해 주는 것이었다.
2. 행 15:30~33을 읽어 보라. 안디옥 교회는 그 서신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행15:30~33]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답: 아주 기뻐했다.
안디옥 교회는 용기를 주는 그 기별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할례는 의무가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서신에 담긴 요구 사항에 반대하지 않았다. 초기 교회에 찾아온 최초의 심각한 균열은 그렇게 봉합되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총회가 마치자 예루살렘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서 수용과 신뢰의 표시로써 그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손을 내밀었다(갈 2:9). 그럼에도 유대교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유대인 신자들이 모든 점에서 의식적인 부정함에 머물러 있는 이방인들과 식사한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의 소지가 커 보였다.
예를 들어 그러한 문제는 베드로가 연루된 사건에서도 드러났다(갈 2:11~14). 엘렌 G. 화잇은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모두 그 회의의 결정을 쾌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사도행적, 197)라고 말했다.
<부가설명> 생활과 사회 문화로 자리 잡아 생활습관이 된 규례들은 탈피하기가 심히 어렵다. 베드로가 대표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울이 그것을 공개적으로 책망했다.(갈2:11~14) 바울은 헬라파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히브리파 유대인보다 성경을 성령의 인도대로 깨닫고 이행하는데 문화적으로 좀 쉬인 위치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대 땅에 머물러 살면서 수천 년 매려온 문화와 풍습과 생활철학이 되어 몸에 깊이 배어 있는 것을 고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에 굴복할 때만 가능하다. 재림신자들은 순간순간 자신이 말씀에 굴복하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생각, 말, 감정, 태도가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되는지 숙고하면서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순복하도록 말씀으로 자기설득을 하는 것이 좋다. 유대인 신자들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복음을 그들의 전통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아주 느렸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배우면서 우리는 정말 그렇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초기 교회는 말씀을 기초로 분열 대신 연합을 선택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대표자 둘을 파송하여 총회의 결의를 확증해 주었다.
8월 24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대체적으로 유대인 회심자들은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섭리처럼 빨리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였다. 사도들이 이방인 가운데서 수고한 결과로, 이방인 회심자의 수효가 유대인 회심자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교인이 되는 조건으로 유대인의 율법의 제한과 의식을 의무적으로 부과하지 아니한다면 지금까지 그들을 다른 모든 민족과 구별되게 하였던 유대인의 민족적 특수성이 복음 기별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서 마침내 사라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사도행적, 189).
“성전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연히 한 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이 가진 특별한 특권들로 마음이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대교의 의식과 유전에서 떠나는 것과 유대인의 풍습 속에 담겨진 그 특별한 신성성이 새로운 신앙의 빛 가운데서 곧 소멸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변화를 일으킨 장본인인 바울에게 분개하였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모두 그 회의의 결정을 쾌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의문의 율법에 대하여 열심이 있었으므로 유대인 율법의 의무에 대해 느슨한 원칙을 가졌다는 시선으로 바울을 냉대하였다”(사도행적, 19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옳은 교회’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를 들어 고대 이스라엘은 일종의 ‘옳은 교회’였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리 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의 일원이 되어서 얻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 옳은 진리가 그의 사상과 생활이 되지 않으면 말씀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구원의 보장이 되지 않는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진리교회는 바른 진리를 제시하고 신자는 그것을 배울 수 있는 특권이 있다.
➋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을 어떻게 신앙공동체로 수용할 것인지는 초기 교회가 직면해야 했던 최초의 중차대한 행정적인 문제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유사한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를 다룰 때에 사도행전 15장의 예는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 우리교회는 예언의 신의 증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문제가 있다. 예루살렘 총회를 자 생각하여 우리의 태도를 바르게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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