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오순절(질문, 대답, 설명)07/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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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7-07 05:03 조회8,630회 댓글0건본문
7월 1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4분
● 연구 범위 : 행 2:1~4, 요 14:16, 행 2:5~13, 욜 2:28~32, 행 2:22~39, 시 110:1~3
● 기억절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2~33).
영어 단어 ‘펜티코스트’는 유대인 절기인 오순절(출 34:22)의 그리스식 명칭 ‘펜테코스테’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칠칠절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민 28:26). 그 말은 ‘50번째’를 뜻하며 유월절 다음날에 보릿단을 드린 후로 50일째 되는 날을 기념했다는 데서 비롯됐다. 그날은 백성들이 밀의 첫 소출을 여호와 앞에 드리는 기쁨과 감사의 날이었다(우리말성경, 출 34:22).
그 절기는 기독교의 첫 번째 영적인 추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날 성령은 이전보다 더 풍성하게 부어졌고 하루에만 3천 명이 침례를 받았다(행 2:41). 예수님의 승천에 이은 성령의 강림은 무식하고 이름 없는 갈릴리 출신의 사도들을 세상을 바꿀 확신과 용기의 사람들로 변화시키는 갑작스럽고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
오순절은 교회의 탄생일로 불리며 유대인과 이방인들(나중에)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지상에 수립된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로 승인을 받는 날이었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오순절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느끼기 :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임하시는 성령의 감화를 체험한다.
행하기 : 성령께서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어떻게 풍요롭게 하시는지를 사례를 들어 간증한다.
➋ 제자들은 어떻게 갑자기 외국어를 잘 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행 2:1~4)
※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했기 때문이다.
➌ 성령께서 그들에게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외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신속히 전하기 위하여서이다.
➍ 그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행 2:17, 33)
※ 요엘의 예언 성취로 이해했고 예수님이 하늘보좌에 즉위한 것을 깨달았다.
➎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과정들이 차례로 일어납니까?(행 2:38)
※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게 된다.
결론 : 오순절에 제자들이 말씀과 기도로 하나가 됐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와 같은 성령의 부어주심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7월 8일(일) 성령의 강림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 2:1~3).
신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성령이 오신다는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그들은 열렬한 기도와 진실한 회개와 찬양을 드리며 성령을 기다렸다. 그날에 그들은 한 곳에 모였다(행 2:1). 그곳은 아마도 사도행전 1장의 그 다락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은 공공장소로 자리를 옮기게 될 것이었다(행 2:6~13).
1. 행 2:1~3을 읽어 보라. 성령이 강림하시는 순간 어떤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나타났는가?
[행2:1~3]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답: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갈라진 불의 혀 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
그 장면은 강렬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온 공간을 채우는 강한 폭풍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화염처럼 보이는 것이 나타나 그곳에 있던 자들 위에 머물렀다.
성경에서 바람과 불은 종종 신의 현현(顯現)과 관련되어 나타난다(예, 출 3:2, 19:18, 신 4:15). 또한 바람과 불은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기도 한다(요 3:8, 마 3:11).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이든지 오순절에 나타난 그 같은 현상들은 약속대로 성령이 부어졌던 구속사의 한 특별한 순간을 소개하는 표적이었다.
성령은 항상 일하셨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감화력은 종종 현저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단지 충만하지 않았을 뿐이다. “부조들의 시대에도 종종 성령의 역사가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나기는 했으나 결코 충만히 임하지는 않았다. 이제 구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자들은 이 선물을 위해 탄원하였고, 이에 더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간구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에게 부어 줄 성령의 선물을 간구하셨다”(사도행적, 37).
침례 요한은 메시아가 오시면 성령의 침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눅 3:16, 행 11:16 비교). 예수님도 그것을 여러 번 언급하셨다(눅 24:49, 행 1:8).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신 그분의 첫 번째 중보 사역이었을 것이다(요 14:16, 26, 15:26). 오순절에 약속이 성취되었다. 오순절 성령의 침례는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와 승천에 관계된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계속 재현되어야 하는 경험이기도 하다(행 4:8, 31, 11:24, 13:9, 52, 엡 5:18).
<부가설명> 신학계에서는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을 말할 때에 표현에 편리를 위하여 신성의 1위 성부, 2위 성자, 3위 성령이라고 한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계에서 이렇게 표현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삼위 신성의 계급적 서열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이렇게 표현하게 된 원인은 마태복음 28장 19절이 아닌가 생각된다. 거기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라고 썼기 때문이다. 삼위를 말하려니까 표현상 차례대로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 전체로 봐서 항상 이런 순서로 기록되지 않았다. 고전 12장에는 성령, 성자, 성부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후 13:13에는 예수, 성부, 성령의 순으로, 엡 4:4~6에는 성령, 성자, 성부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증언에 성령을 신성의 삼위라고 했기 때문에 성령은 계급 상으로 성부 성자 보다 아래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화잇 선지자가 그렇게 쓴 것은 신학의 일반적 표현을 빌려 쓴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령은 예수께서 세상에 탄생하실 때 동정녀에게 성자가 탄생하게 하는 일을 주장하신 분이다. 성자가 세상에 오셔서 성령에 대하여 가르치기 전에 이미 성령께서 성자를 세상에 사람으로 잉태하는 일을 주관하셨다. 우리가 성령에 대하여 성경이 계시하는 범위를 신학적으로 벗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령 충만이 어떤 것일까? 신약성경에 ‘성령의 충만’이라는 말이 6회, ‘성령이 충만’이른 말이 6회 나타난다. 충만한 것이 어떤 뜻인지 설명한 곳은 없다. 성령이 충만히 임한 곳에 어떤 현상들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의 역사(役事)에 대하여 많이 말하였어도 ‘성령 충만’에 대하여 한 번 말하였다.(엡5:18) 기록에 나타난 상태를 보면 성령 충만은 사람이 전적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아 생활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령 충만을 말할 때에 비교로 술에 취한 것을 예로 들었다. 술에 취하면 그 술 취한 사람은 술에게 지배를 받지 않는가? 그처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전적으로 성령이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성령이 주장하는 생명작용으로 생활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훈 : 성령은 역사의 모든 순간에 우리를 위해 일하셨지만 오순절에는 신자들의 삶에 충만하게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나타내셨다.
7월 9일(월) 방언의 은사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행 2:4을 보면 성령의 은사가 방언을 통해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다양한 은사 중에 하나이다(행 10:45~46, 19:6). 거기에는 예언(행 11:28), 이상을 봄(행 7:55), 영감적인 설교(행 2:8, 28:25), 치유(행 3:6, 12, 5:12, 16), 봉사할 수 있는 역량(행 6:3, 5) 등이 포함된다.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가 나타난 이유는 그것이 성령을 받았다는 전형적인, 또는 가장 중요한 증거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목적은 초기 교회의 세계 선교를 출범시키는 것이었다. 즉 행 1:8에서 주어진 부르심은 방언의 은사가 필요했다. 문화적인 장벽을 넘어 세상 끝까지 가려면 복음을 다른 언어로 전할 수 있어야 했다.
1. 행 2:5~13을 읽어 보라. 그날 사도들이 기존의 언어로 말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행2:5~13]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답: 각 지역에서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 통용하는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어서 그들이 다 알아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사는 곳에서 일상적으로 말하는 언어였다.
1세기 무렵 세계 유대인 인구는 약 8백만에서 1천만 명 정도였으며 그중 최대 60퍼센트는 유대 땅 이외의 지역에 거주했을 것이라고 추산된다. 그래서 절기를 지키러 외국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자들은 당시 유대인의 언어였던 아람어로 말하지 못했다.
오순절에 회심을 경험한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들 지역의 언어로 복음을 들은 타지의 유대인이었다. 그리스어 ‘디아렉토스’(행 2:6, 8)는 사도들이 미지의 신비한 언어가 아닌 기존의 언어로 말했다는 증거이다. 그 단어는 어느 민족이나 지역의 언어를 의미한다(비교 행 21:40, 22:2, 26:14). 그들은 기존의 여러 언어들로 말했다. 무지한 갈릴리 사람들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언어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기적이었다. 유대 지역에 거주하며 그 장면을 목격한 유대인들에게는 그 언어들이 익숙하지 않았다. 사도들이 술에 취했든지 의미 없는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는 것이든지 둘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행 2:13)고 했다.
<부가설명>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신 표가 각 자의 머리 위에 혀 모양이 불이 보인 것이다. 혀로 보인 것은 바로 말하게 한다는 암시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게 할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 말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각 지역의 언어였다. 방언이라고 번역된 말은 주로 헬라어 ‘글로사’인데 직역하면 ‘혀’이다. 교과에 적힌 행2:6,8에 방언이라고 번역된 말은 ‘디아렉토스’인데 ‘대화, 담화, 사투리’라는 뜻이다. 영어로 dialect이다. 즉 여러 지방 사람들이 각각 자기 지방의 언어로 알아듣도록 그 지방의 말을 하게 한 것이다. 복음이 신속히 온 세상에 전해지도록 하기 위한 성령의 역사였다.
오늘날 교회들에서 방언이라고 지절거리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고전 14:2에 방언은 알아듣는 사람이 없고 영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는 구절을 오해해서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참 어처구니없이 오해한 것이다. 고전 14:27,28에는 교회에서 방언할 때에는 반드시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만 하라고 했다. 통역하자는 자가 있다는 것은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방언은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이 구절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주장이다. 28절에는 만일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하였다.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하라고 했다. 2절에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방언에 대한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 은사는 언어가 다른 지역에서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할 경우에 성령께서 역사하여 복음을 그들의 언어로 전하게 하신다는 보증이다. 지금도 필요하면 그렇게 하신다. 그러나 대부분 외국어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통역하기 때문에 이 은사는 드문 것이다.
교훈 : 오순절에 성령의 은사가 방언을 통해서 나타난 이유는 각국에 흩어져 살다가 절기를 지키러 온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7월 10일(화) 베드로의 설교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 2:14).
술에 취했다는 비난에 베드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설명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먼저 성경을 인용하며 성령의 강림을 예언의 성취로 설명하였다(행 2:16~21).
1. 행 2:17을 욜 2:28과 비교하라. 베드로는 예언이 성취된 때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행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욜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답: 오순절에 성령 강림하신 것이 예언 된 그 때라고 이해했다.
요엘의 예언은 미래에 있을 구원의 시대에 관한 것이었다(욜 2:32). 그때가 되면 천연계에 몇 가지 징조가 나타나고 성령이 풍성하게 임할 것이었다(욜 2:28~31). 오순절의 사건을 그 예언에 비추어 해석함으로써 베드로는 그 순간의 역사적인 의미를 강조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요엘서를 인용하는 방법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요엘은 보통 상당히 먼 미래를 가리키는 의미의 “그 후에”(욜 2:28)라는 말로 시작한 반면 베드로는 구원의 위대한 드라마에서 마지막 장이 막 시작됐음을 암시하는 듯한 “말세에”(행 2:17)라는 말로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종말 사건의 상세한 묘사라기보다는 초기 교회를 특징짓는 고상한 긴박성의 증거라고 해야 옳다. 그들은 끝이 언제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그것이 그렇게 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2. 행 2:22~32을 읽어 보라.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요점은 무엇이었는가?
[행2:22~3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답: 너희가 죽인 예수가 바로 구주이시며 성경의 예언대로 그분은 부활하셨다.
오순절의 예언적인 의미를 강조한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삶과 최근에 벌어진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화제를 돌렸다. 강조점은 부활에 있었다. 부활은 복음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요소였다. 베드로에게 부활은 예수님을 입증할 수 있는 궁극적인 증거였다(행 2:22, 27). 그는 성경절을 인용하여 부활의 의미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예수님은 메시아였기 때문에 죽음에 붙잡혀 있을 수 없었다. 베드로뿐 아니라 신약의 다른 기자들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메시아로서 그분의 신분뿐 아니라 기독교의 기별을 위해서도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부가설명>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예수 부활 증거 행전이다. 예수님이 참으로 부활하지 않았다면 예수를 믿는 종교는 의미가 없다. 바울을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았으면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또한 죄 사함도 없다고 하였다.(고전15:17~19) 부활하신 것이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증명이다. 우리가 참으로 죄 사함을 받았으면 예수님 재림하실 때 생명의 부활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었는데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는 죄 사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한 것은 십자가 자체를 자랑한 것이기보다는 십자가로 사망을 폐하시고 부활로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패배의 표징일 뿐이다. 우리는 십자가와 함께 부활을 확신하고 증거 해야 한다. 부활이 빠진 십자가는 복음이 아니다. 복음의 핵심을 예수님의 부활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소망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라고 고백 간증하였다. 거듭나는 것은 이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이고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이 생명을 얻는 것이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교훈 : 오순절 사건은 예언의 성취였으며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중심으로 그분의 메시아 되심을 증명하고 구원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7월 11일(수) 높임을 받으심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설교의 세 번째 부분에서 베드로는 처음에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였던 방언의 주제로 돌아간다. 오전 9시에 술에 취했다면 당연히 이상한 일이겠지만 신자들이 방언을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늘로부터 성령이 내렸기 때문이다.
1. 행 2:33~36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은 것과 성령의 부어주심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행2:33~36]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답: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오순절에 부어주셨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권위의 자리이다(시 110:1~3). 성경을 기초로 한 베드로의 논증에 따르면 예수님이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하늘에서 그러한 위치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이 이전에 가져보지 못한 지위는 아니었다(요 1:1~3, 17:5). 오히려 그것은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주권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궁극적인 인정을 상징한다(행 2:36).
이 사건은 실제로 선과 악의 우주적인 쟁투라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우리를 이끈다. 요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지 않으셨다면 높게 들리실 수 없었고(요 17:4~5), 그분이 높게 들리실 수 없었다면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요 7:39). 달리 말해서 예수님의 격상은 성령 강림의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의 통치권을 찬탈한 자를 격퇴하시자(요 12:31)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것들을 인정하시고 그 의미로 성령을 내려주셨기 때문이다.
죄의 침입은 하나님께 그림자를 드리웠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를 속량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옹호하고 사탄의 기만을 폭로하기 위한 필연이었다. 구원의 시대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다(눅 4:18~21). 예수님은 마귀를 내쫓고 죄를 사하시며 사탄의 포로들을 해방시키셨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도록 그분에게 완전한 권위를 부여한 것은 십자가였다.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이 하늘에서 승인되었을 때에 사탄은 치명타를 입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도록 백성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
<부가설명>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일일이 하나님 아버지가 승인해야 하고 또 예수께서는 일일이 재가(裁可)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기록되었다. 그래서 삼위 신성의 최고 권위는 아버지 하나님께만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지위에 대하여 논의가 많았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일 수 없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금도 그렇게 믿는 기독교 교단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셨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것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안이겠는가? 삼위일명(三位一名 마28:19)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다는 사실이 동일하다. 그러므로 지위와 권위의 차등이 없다. 그런데 집회의 산에서 여호와 회의를 한다고 성경을 계시하였다.(사14:13, 렘23:18) 아담과 그의 자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 회의에서 삼위의 역할을 의논하고 각기 분담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원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성경은 분명히 계시하였다.(사9:6) 그런데 인류를 구원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온 우주에 드러내기 위하여 삼위 중에 한 분은 자기를 비어 낮추시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하기로 의논이 되었고 말씀하나님이 그 역할을 맡으신 것이다.(빌2:6~8) 그래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오셔서 구원을 위하여 하실 일을 다 이루시고 여호와 회의에서 의논된 대로 모든 일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신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높임을 받으신 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이며 오순절 성령 강림의 조건이었다.
7월 12일(목) 첫 열매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3:38).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청중들의 마음이 찔렸다. 그들 중 일부는 몇 주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던 군중의 일부였을 것이다(눅 23:13~25). 하지만 그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진실로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수긍하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며 탄식했다.
1. 행 2:38을 읽어 보라. 용서의 두 가지 기본 조건은 무엇인가?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답: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는 것.
회개란 단순한 유감과 후회의 감정이 아니라 죄로부터 돌아서는 획기적인 삶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행 3:19, 26:20). 믿음과 더불어 회개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선물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거부할 수 있다(행 5:31~33, 26:19~21, 롬 2:4).
침례 요한 이후로 회개는 침례와 연결되었다(막 1:4). 즉 침례는 회개의 표현이자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씻고 도덕적으로 거듭남을 상징하는 의식이 되었다.(행 2:38, 22:16; 딛 3:5~7 비교).
2. 행 2:38~39을 읽어 보라. 회개하고 침례를 받은 자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약속이 주어졌는가?
[행2:38,3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답: 성령을 선물로 약속하셨다.
오순절에 백성들은 죄의 용서뿐 아니라 개인의 성장,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봉사, 특별히 선교 사역을 위해 성령 충만을 받았다. 교회가 존재하는 주된 이유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벧전 2:9) 이것은 모든 복 중에 가장 큰 복이었다. 따라서 그 후로부터 그들은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교회의 부름에 따라 선교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부가설명> 어쩌면 베드로 자신도 놀랐을 것이다. 그는 학문 없는 범인이었다.(행4:13) 그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겠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도망가고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웅변적 설교를 했다는 것은 스스로도 놀랄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자기의 행동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성령의 역사로 그 많은 청중들 중에서 3000명이 침례를 받았다. 사도들의 증거 사역이 성령의 열매인 것과 함께 회개한 3000명도 초대 교회의 성령의 첫 열매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령의 은사의 첫째가 구변(口辯)이다.(고전1:5) 고전 12장에는 많은 은사들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1장에 맨 먼저 언급된 것이 구변이다. 베드로는 기탄없이 설교하고 심문에 대답하였다.(행4:13) 기탄없다는 말은 막힘이 없이 할 말을 다 한다는 말이다. 성령의 은사이다. 재림성도들은 자기가 믿는 구원의 복음, 생명의 도리를 기탄없이 증거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도 회개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할 것이다.
교훈 : 회개하고 침례를 받은 자들에게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이 약속되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선교와 봉사를 위해 준비되었다.
7월 1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은 하늘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었고 세상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수용하셨는지에 관한 중대한 진리를 드러냈다. 또한 성령의 부어주심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의 희생을 기초로 우리를 위한 하늘의 사역에 취임하셨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놀라운 사건들은 하늘과 땅이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밝혀준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의 제자들이 약속된 축복을 받게 되리라는 신호였다.… 하늘 문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며 보좌에 오르셨다. 이 예식이 마쳐지자마자 성령은 풍성하게 제자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영원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모든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셨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주의 취임식이 끝났다는 하늘의 통고였다. 그분은 당신의 약속에 따라 하늘로부터 성령을 그의 제자들에게 보내셨는데 이것은 왕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분이요, 따라서 그의 백성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시라는 증거였다”(사도행적, 38~3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오순절의 경험 중 현재 교회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재현될 수 있고, 무엇이 재현될 수 없습니까?
※ 방언과 증거 하는 일은 언제든지 재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상태의 성령 강림은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
➋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오순절 기별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가 어떠했든지 간에 메시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영적인 탐지에도 잡히지 않았고,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자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바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할까요? 최근 유행하는 가르침들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왜 성경의 가르침에 먼저 충실해야 할까요?
※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사람이 측량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구원사업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계시에 전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➌ 행 2:38은 침례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죽기 전에 침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결국 멸망한다는 뜻입니까? 그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구약에는 침례예식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이 없다. 또 십자가의 한 강도는 침례를 받은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침례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경우에는 예수께서 양해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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