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질문, 대답, 설명)07/07/18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6-30 04:22 조회8,524회 댓글0건본문
7월 7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6분
● 연구 범위 : 행 1:6~8, 눅 24:25, 24:44~48, 신 19:15, 행 1:9~26, 잠 16:33
● 기억절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예수님의 지상 임무가 끝나자 하나님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제자들을 인도하며 그들에게 능력을 부여하실 성령을 보내시고자 했다. 성령은 많은 표적과 이적으로 그들의 노력을 승인할 분이셨다. 예수님은 계속 그들 곁에 머무실 수 없었다. 성육신하신 몸으로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고 대신 성령께서 오셔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은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좇았던 이유는 예수님이 언젠가 로마의 세력을 이스라엘 땅에서 내쫓고 민족의 옛 영광을 되찾을 정치적인 해방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과는 주로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을 다룬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성령의 약속을 살펴보고, 예수님이 하늘에 복귀하신 장면과 초기 교회가 어떻게 오순절을 맞이했는지를 묘사하고자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예수님이 시작하신 구원 사역의 연속성을 깨닫는다.
느끼기 : 교회가 이어받은 구원 사역이 힘과 추진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행하기 :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 전파에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 점검한다.
➋ 행 1:6을 보면 제자들은 무엇을 궁금해 했습니까? 그들의 바람은 무엇이었습니까?
※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를 궁금해 했다. 세상에 최대 강대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➌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행 1:7~8)
※ 때와 기한은 너희 알 것이 아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라 하셨다.
➍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졌습니까?(행 1:10~11)
※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재림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➎ 오순절 전에 제자들이 기도에 집중했을 때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행 1:14)
※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➏ 늦은 비 성령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 안교소그룹은 어떻게 준비하는 것이 좋을까요?
※ 기도와 말씀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결론 : 부활하신 예수님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그대는 그러한 명령을 받았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그 능력에 사로잡혔습니까?
7월 1일(일) 이스라엘의 회복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행 1:6).
구약성경을 보면 메시아에 대한 두 종류의 예언이 있다. 하나는 세상을 영원히 통치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고(시 89:3~4, 35~37, 사 9:6~7, 겔 37:25, 단 2:44, 7:13~14),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죄를 위해 죽으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사 52:13~53:12, 단 9:26). 그 두 종류의 예언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연속적인 메시아 사역의 두 국면을 가리킬 뿐이다. 즉 그분은 먼저 고난을 당하시고 그 다음에 왕이 되신다(눅 17:24~25, 24:25~26).
그러나 메시아에 대한 1세기 유대인들의 기대는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정치적인 해방을 가져올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고난당하고 죽으실 메시아에 대한 개념을 모호하게 했다.
제자들에게도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고(마 16:16, 20), 그분이 보좌에 오르실 때에 자신들 중 누가 그분의 좌우편에 앉게 될지 종종 다투었다(막 10:35~37, 눅 9:46). 예수님은 본인이 마주하게 될 운명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분이 죽으셨을 때에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고 말하면서 당황하고 낙담했다.
1. 행 1:6~7을 읽어 보라. 그들의 질문에 따르면 그들은 아직도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는가?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셨는가?
[행1:6,7]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답: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권을 잡을 때가 되었는지 물었고,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이기 때문에 너희가 알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그들의 소망이 물거품이 된 줄 알았다가 그분께서 부활하시자 이전보다 더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예수님의 부활을 메시아 나라가 수립될 강력한 징조로 받아들일만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임박한 메시아 나라에 대한 소망을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시고 대신 때를 정하시는 일은 하나님께 속했으며 인간에게는 그것을 알 수 있는 권한이 없음을 상기시키셨다.
<부가설명>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은 권한을 행사하려는 욕망에 자주 사로잡힌다. 바로 재림에 대한 시기를 알려고 하며 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는가? 윌리암 밀러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이다. 연대적 예언을 계산한 것을 잘한 일이겠으나 그것을 재림하실 때라고 해석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도행전 1장 7절을 바르게 이해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현실적 상태로 이루어지는 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는 시도가 된다. 본인이 의식하든지 아니하든지 그렇다. 작은 뿔은 때와 율법을 변개하려고 했다. 그것은 둘 다 하나님의 권한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 연대를 계산하는 것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재림의 날이라고 설명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루시퍼의 대열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타난 일에 충성하는 신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회복과 해방을 가져올 메시아가 되시기를 바랐지만 성경은 메시아의 역할에 대하여 더 큰 그림을 제시하고 있다.
7월 2일(월) 제자들의 사명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1. 행 1:8을 읽어 보라. 제자들은 예언적인 상상에 몰두하기보다 어떤 일을 해야 했는가?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답: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제자들의 사명을 언급하는 위의 말씀은 네 가지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
1. 성령의 선물. 성령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신다. 그런데 성경은 장차 특별한 성령의 강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사 44:3, 욜 2:28~29). 예수님이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 성령은 이미 예수님의 사역 기간에 활동하고 계셨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까지는 아직 이 땅에 즉위하신 것이 아니었다(요 7:39, 행 2:33).
2. 증인의 역할. 증언이란 직접적인 목격자의 진술이다. 제자들은 증언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했다(행 1:21, 22, 4:20, 요일 1:1~3 비교). 그들은 예수님과 나누었던 특별한 경험을 세상에 전하라는 사명을 위임받았다.
3. 선교 계획.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그다음은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했다. 그것은 점진적인 계획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중심지이자 예수님이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곳이다. 유대와 사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인근 지역들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기에서만 활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이 받은 사명의 범위는 전 세계였다.
4. 선교의 방향. 구약 시대에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께로 와야 했다(사 2:1~5 참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그들에게 모시고 가지는 않았다.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예를 들면 요나)가 있었지만 그 원칙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전략이 바뀌었다. 예루살렘이 여전히 중심이었지만 제자들은 그곳에 머물러 뿌리를 내리기보다 밖으로 나가 땅 끝까지 가야 했다.
부활 이후 제자들과 보낸 40일 동안(행 1:3)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설명하셔야 했다. 하지만 행 1:6에서처럼 그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언에 익숙했지만 이제야 십자가와 부활에서 흘러나오는 새로운 빛으로 예언을 바라볼 수 있었다(행 3:17~19 참고).
<부가설명> 성령께서는 태초부터 일하셨다. 창조 하실 때 수면에 운행하시며 지면을 새롭게 창조하셨다.(창1:2, 시104:30)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실 때 광야에서 그들을 교훈하셨다.(느9:20) 또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기 전에 성령께서 먼저 예수님을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하게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하는 역사(役事)는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은혜의 왕으로 즉위하실 때인 오순절에 성령을 세상에 보내시는 일로 시작되었다.(행2:33, 5:30,31)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이른 비의 역사라고 한다. 그래서 교회를 조직하게 하시고 교회를 운영하게 하시며 교회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신다. 사탄이 이 교회에 자신이 성령인 것처럼 몰래 들어왔다. 선지자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것이다.(계2:20) 그들이 성경을 잘못 풀이하고 잘못 이해하도록 이끌었다. 사람이 철학과 세상의 학문적 방식으로 성경을 연구하려는 경향에 사탄이 틈을 탄 것이다.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요16:13~15) 그래서 교회는 사탄의 활동무대가 되어 사탄은 마음 놓고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까지 참으시고 마침내 때가 이를 때에 선지자를 일으키시고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고 깨닫도록 이끄셨다. 그런 때에 성령께서 늦은 비적 역사를 하신다. 그때가 심히 가깝다. 재림성도들은 이 때를 위하여 지금 자신을, 또한 교회를 부지런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제자들은 새로운 선교의 방향을 제시받았다. 그들은 이방 민족을 예루살렘에 데려오기보다 그들에게 가서 구원의 기별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했다.
7월 3일(화) 그분은 다시 오신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9~11).
행 1:9~11을 읽어 보라.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그들에게 두 명의 천사가 이야기했다는 사실에는 어떤 중요한 뜻이 있는가?(신 19:15 참고)
[신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답: 제자들이 보는데 들려 올라가셨다. 구름이 가려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제자들이 그 광경을 목도하였다. 두 천사가 온 것은 그들이 증언이 확실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승천 기사는 생각보다 간략하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계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축복하시는 도중에 하늘로 올려지셨다(눅 24:51). 이 장면은 인간의 시선에 사실이 아닌 것 같다는 식의 현상학적인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은 지구를 떠나셨다. ‘위로 올리셨다’라는 말 외에는 달리 가시적인 형태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기적처럼 예수님의 승천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이다. 누가가 그 장면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수동형 동사 ‘에페르테’(그가 올려졌다)’가 이를 암시한다(눅 1:9). 이 형태의 단어가 신약에서는 한 번 등장하지만 70인역(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에는 몇 차례 등장하는데 모두 하나님의 행위를 묘사한다. 즉 이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하늘로 데리고 가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행 2:24, 32, 롬 6:4, 10:9).
누가는 예수님이 구름에 가려 이미 보이지 않았을 때 흰 옷을 입고 제자들 곁에 서 있던 두 천사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의 묘사는 빛나는 옷을 입고 등장하는 다른 천사들에 대한 묘사와 일치한다(행 10:30, 요 20:12). 그들은 예수님이 올라가신 같은 방법으로 다시 오시리라 확신하게 되었다. 오직 사도행전만 그들의 눈앞에서 예수님이 올라가셨다는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행 1:9).
따라서 그분의 가시적인 승천은 그분의 가시적인 재림을 담보한다. 역시 구름이 등장하겠지만 이번에는 “능력과 큰 영광”(눅 21:27)으로 오신다. 개인적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오시며(계 1:7), 게다가 이번에는 홀로 오시지 않는다(눅 9:26, 살후 1:7). 재림의 영광은 승천의 영광을 훨씬 능가할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여러 번 승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요14:1~3, 요6:62, 마19:28, 등등 여러 곳에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도 그들에게 그 말씀이 감춰진 말씀이었다.(눅18:34) 성령께서 오셔서 비로소 그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교회에도 일어났다. 세상의 지식과 학문이 성령의 인도를 대신하면서 성경의 진리를 교회와 교인들에게 감춰진 진리가 되었다. 기록된 그대로만 읽어도 명백한 것을 인간의 학문과 전통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해석하여 명백한 진리를 감춰버린 것이다. 이 모두 사탄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행한 것이다. 승천에 대한 것도 ‘보이지 않게 하더라.’는 말을 강조하여 제자들이 보지 못하게 올라갔다고 우긴다. 그래서 보지 못하게 오신다고 주장하는 교단도 있다. 부활도 영적인 것이라고 우긴다. 그들이 눈에 감춰진 진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고 제자들이 보는데서 올라가신 그 모습대로 이제는 천천만만의 천사들과 함께 대단히 웅장한 행렬로 하늘로부터 친히 강림하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천사들의 영광으로 장엄하고 웅장하게 강림하실 것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교훈 : 부활하신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그분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능력과 큰 영광을 가지고 재림하실 것이다.
7월 4일(수) 오순절 준비
“…그들이…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행 1:13~15).
행 1:7~8에서 예수님은 시간에 대한 약속은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은 성령께서 오시고 제자들이 사명을 완수하면 그분이 다시 오실 것임을 자연스럽게 암시했다(마 24:14 참고). 천사들의 언급(행 1:11) 역시 그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그때가 머지않았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눅 24:52)갈 수 있었던 것 같다. 확정되지 않은 때에 있을 재림의 약속은 끝이 가깝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선교에 대한 더 큰 동기를 부여했다. 이후의 전개는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1. 행 1:12~14을 읽어 보라. 그 다락방에 또 누가 있었는가? 그들은 성령의 강림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가?
[행1:12~14]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답: 11제자들과 예수님의 형제들과 또 여자들이 있었다. 120명쯤 되었으니 제자들 외에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이다.(15절에 수가 있다.)
감람산에서 돌아온 후로 제자들은 2층 구조로 된 예루살렘의 한 개인집 다락방(라틴어로 cenaculum : 케나쿨룸)에 모였다. 여제자 몇이랑(눅 8:1~3, 23:49, 24:1~12)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모였다.
예수님의 형제들(막 6:3)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예수님의 어린 동생들이거나(마 1:25, 눅 2:7) 요셉의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들이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을 때 그는 홀아비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에 대해 항상 회의적이었기 때문에(막 3:21, 요 7:5) 그들의 등장은 제자들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형제 야고보에게 나타나셨던 일이 모든 상황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고전 15:7). 후에 야고보는 베드로를 대신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한다(행 12:17, 15:13, 21:18, 갈 2:9, 12).
그들 모두는 끊임없이 기도하고(행 1:14)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눅 24:53) 회개하고 자백하며 죄를 버리는 시간에 동참하였다. 비록 그들은 성령의 강림이 곧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영적인 태도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오시는 성령의 강림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요7:5) 그러나 예수 부활하신 후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실체를 보이셨다. 예수께서 특별이 형제들 중에 맏이인 야고보에게 나타셔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셨을 것이다.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하면 자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썼다. 맏이의 신앙고백은 곧 아우들에게도 믿어졌고 그 형제들이 다 예수님의 종으로 굴복하였다.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도 예수님의 형제 유다이다. 그도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썼다. 이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다. 이들이 요셉과 마리아 사이의 아들들인지, 요셉에게 전처가 있어서 그들 사이의 아들들인지 학자들은 심심찮게 논의하는 것 같다. 우리 성경은 예수의 아우들, 또는 동생들이라고 번영했다. 이것은 오역이다. 헬라어는 그냥 ‘아델포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형제들, brethren, brothers’이다. 형이나 아우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만일 마리아의 친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모친을 요한에게 부탁했을까? 또 친 아들이라면 형님 예수를 그러게 대접했을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교과 저자는 개신교의 일반적 견해를 약간 용납하는 듯한 표현을 하면서 또 요셉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아우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하였다. 증언의 말씀은 분명하게 그들은 요셉의 아들들이라고 하였다.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맏아들을 낳았다는 표현은 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표현이다. 그 후에 마리아에게 자녀가 태어났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요한이 모신 것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평생 동정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히므로 그들이 부부 생활한 것을 나타낸다.(마1:25) 속지 말자.
교훈 :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뒤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형제들과 연합하여 철저한 회개와 기도의 시간을 보내면서 성령을 맞이할 영적인 준비를 갖췄다.
7월 5일(목) 열두 사도
약 120명으로 이뤄진 초기 기독교 공동체(행 1:15)가 취한 최초의 행정적인 조치는 유다의 후임자를 선출하는 것이었다.
1. 행 1:21~22을 읽어 보라. 유다의 후임자에게는 어떤 자격이 요구되었는가? 그러한 자격이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행1:21,22]
후임자가 필요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위해서였다(행 4:33 비교).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진리이자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후임자의 선택은 예수님의 사역 기간 동안 제자들과 함께 다녔던 자들 중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나중에 바울은 자신이 비록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럴지라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분을 만났기 때문에 그분의 부활을 증언할 사도직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주장했다(고전 9:1).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 15:8) 같다고 했지만, 다른 사도들보다 자격이 부족한 자로 간주하지는 않았다(고전 9:2, 갈 2:6~9). 오직 열두 사도와 바울만이 전문적이고 합법적인 의미의 사도였다(행 1:25~26).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절(使節)과 기별자라는 의미에서 그 말은 다른 복음 사역자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행 14:4, 14, 갈 1:19).
1. 행 1:23~26을 읽어 보라. 맛디아는 어떻게 사도로 선출되었는가?
[행1:23~26]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답: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죽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선출하기 위하여 자격을 갖춘 두 사람을 선택하고 제비뽑아 맛디아를 11 사도의 수에 가입하게 하여 12이 되었다.
맛디아를 선출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제비뽑기는 의사결정을 위한 오래된 관습이었다(예, 레 16:5~10, 민 26:55). 게다가 그것은 무작위 선택이 아닌 사전에 인지된, 동등한 자격을 갖춘 두 명의 후보자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이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뜻이 이뤄지리라고 믿었다(비교 잠 16:33). 그러한 결정이 도전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의 직접적인 지도 덕분에 제비뽑기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행 5:3, 11:15~18, 13:2, 16:6~9).
<부가설명> 성경은 제비뽑는 것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제비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케 하느니라.”(잠18:18)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모든 일의 최종적인 결정을 하나님이 하신다. 교회의 일은 더욱 그렇다. 아니 하나님의 일은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성경의 기록을 알아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과의 기록대로 그 후로는 한참 동안 성령께서 친히 지도하여 교회의 일꾼들의 사명을 맡기셨다. 그러나 모든 전도지역에서 그렇게 했다는 기록은 없다. 사도들이 각 지역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웠다. 디모데서와 디도서에는 장로와 집사들의 자격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였다. 교회는 이 자격에 합당한 사람들을 선출했다. 요즘은 교회 직원 선출에 성경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가 힘을 잃어간다. 성경적 표준으로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학식이다. 재물이나 인지도나 이런 것들을 생각해서 직원으로 선출한다. 직원이 된 후에 합당하게 성경적인 상태에 이르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를 어렵게 만든다. 교회라는 단체 안에서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태도를 나타낸다. 어떤 때는 세상에서도 있지 못할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지금도 차라리 제비 뽑아 세우는 일이 합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기도 한다. 교회가 정신 차리고 성령의 지도를 따라 성경이 계시한 원칙대로 직원을 선출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늦은 비의 경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교훈 :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맛디아를 열두 사도 중 하나로 선택한 이유는 유다를 대신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증인의 사역을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7월 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오순절과 파루시아(재림) 사이의 전 기간은 (길든 짧든) 성령의 능력을 입은 교회의 세계적인 선교 활동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그가 초림하여 이루었던 일들을 알리고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믿어 그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훈계해야 했다. 그들은 ‘땅끝까지 이르러’(행 1:8) 그리고 세상 끝까지 그의 증인이 되어야 했다.… 우리는 그 두 끝에 이를 때까지 정지할 자유가 없다.”—John R. W. Stott, The Message of Acts: The Spirit, the Church & the World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90), p. 44.
“제자들에게 맡기신 구주의 명령에는 모든 신자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세상 끝 날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를 포함한다. 영혼 구원 사업이 안수 받은 목사에게만 의존된다는 생각은 치명적인 잘못이다. 하늘의 영감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 사업이 위탁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은 저희 동료들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이 사업을 위하여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그리고 이 신성한 맹세를 짊어진 자들은 모두 그때부터 그리스도와 동역자가 되겠다고 서약하는 것이 된다”(시대의 소망, 82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행 1:7은 막 13:32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엘렌 G. 화잇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시기에 근거를 둔 기별은 결코 다시 주시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강림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정확한 시기를 알 필요가 없다”(가려 뽑은 기별 1권, 188).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해와 날과 시간을 알리는 기별을 선포하는 자는 누구든지 멍에를 뒤집어쓰고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는 기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 Sept. 12, 1893. 이 같은 진술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 시기 정하는 일을 그만두고 마지막 기별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의 직무를 수행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역사만큼 길게 살지 못한다. 다만 호흡하는 동안만 살고 있다. 그 기간에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
➋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변호사들보다 증인들을 더 필요로 하십니다.” 그대는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 괜찮은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확증을 위하여 많은 목격자가 있으면 좋다. 그러나 분명히 목격자이면서 또한 정직한 목격자여야 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