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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과 욥기에서 배워야 할 교훈들(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2/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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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12-23 16:46 조회9,93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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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24분

 

기억절 :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연구 범위 : 고후 5:7, 욥 1장~2:8, 마 4:10, 마 13:39, 요 8:1~11, 히 11:10, 히 4:15

 

우리는 이번 기 욥기 연구의 마지막 과에 이르렀다. 많은 부분을 다루려고 노력했지만 다루지 못한 부분과 배우지 못한 교훈이 훨씬 많다. 물론 세상에서도 우리가 배우고 발견한 것들은 또 다른 배움과 발견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원자, 별, 해파리 그리고 수학 공식 등에서도 아직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은 얼마나 더 많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달을 수 없다고 해서 그분의 말씀을 의심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천연계의 경이로운 것들에 항상 둘러싸여 있다. 그렇다면, 영적 세계에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한 것이 있다고 하여 놀랄 것인가? 문제는 오로지 사람의 마음이 우둔하고 좁은 데 있는 것이다”(교육, 170).

그렇다. 오묘한 것이 남아있다. 특별히 삶의 가장 까다로운 질문들을 제기하는 욥기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난의 세계에서 욥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의 이야기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다시 살펴보려고 한다.

 

※ 핵심 요지

➊ 깨닫기 : 욥기에서 배운 핵심 교훈들을 복습한다.

➋ 느끼기 : 욥과 예수님 사이의 비슷한 점들을 인식한다.

➌ 행하기 : 고난 중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방법을 배운다.

 

A. 

❷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식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얼마나 다를까요?

※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소망과 목적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❸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고통의 문제와 목적을 어떻게 달리 생각합니까?

※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믿는 자들은 고통문제의 이면을 알기 때문에 인내로 연단을 받지만 그렇지 않는 자들은 원망하게 자포자기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B.

❷ 욥기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무엇을 배웠습니까?

※ 사랑과 동정과 이해의 정신으로 접근해야 한다. 

❸ 욥의 생애는 믿음을 지키신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반사했습니까?

※ 고통 중에서도 믿음을 잘 지켰다. 

 

결론 : 욥기는 매우 복잡하고 다각적이어서 그 교훈을 한 기의 교과로 압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기의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기별입니다. 욥기는 반복적으로 우리의 구속주와 구원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첫째 날(일) 12월 25일 눈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1. 고후 5:7, 4:18을 읽어 보라. 어떤 핵심 진리들이 이 말씀 속에서 드러나는가? 이 진리들은 우리가 주님의 충실한 신자가 되도록 노력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답: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들이다. 우리에게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게 한다. 

 

고후 4:18은 종말론적인 문맥 속에 있다. 그것은 마지막 때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은 온전히 볼 수 없지만 우리가 불멸을 입게 되리라는 위대한 약속에 대하여 말한다.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약속이다.

마찬가지로 욥기는 이 세상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과학이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규명하고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어느 설교자가 대도시의 한 교회 단상에 섰다. 그는 회중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요구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그는 라디오를 꺼내서 틀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라디오에서 온갖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이 소리들이 어디에서 오지요? 라디오가 만들어 낸 소리입니까? 아니요. 이 소리들은 전파로 공중에 떠다닙니다. 전파는 제 목소리처럼 실존합니다. 단지 우리가 라디오를 틀지 않으면 그것에 접속할 수 없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보거나 느끼거나 들을 수 없다고 해서 그것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 그 외에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답: 물리적인 세상에서도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실재하는 것이 엄청 많다. 우주에는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이 우주를 유지하고 있다고 과학이 말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것 외에도 엄청 많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은 영적세계의 실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욥기의 등장인물 중에 무엇이 실상인지를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심지어 그분의 성품과 창조의 능력에 대한 지식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눈에 보이는 뻔한 진실 곧 욥이 재난을 당하고 있는 현실의 배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실마리는 찾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보이지 않는 실재들에 대해 무감각할 때가 많지 않은가?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과 지각의 한계를 깨닫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필요가 있음을 배운다.

 

<부가설명>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은 믿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계시로 주신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음으로 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가르친다.(히11:1)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안다. 욥은 전에는 귀로 듣기만 했지만 이제 하나님을 대면하여 대화하고 그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요 유지자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도덕적 관계 속에 이해하던 하나님을 창조와 존재와 생명관계로 이해하게 되었다. 자녀들이 부모를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관계를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 요즘은 DNA다, 혈액검사다, 그래서 친자 확인을 과학적으로 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친부모가 아니라고 그 집에서 길러졌으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성립되었는데 그것은 전적인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존재와 생명관계는 믿음으로 엮어지고 이런 관계는 도덕적이기 보다는 생명적이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고약한 자식이라서 세상이 손가락질을 해도 부모는 그들을 위하여 아파하고 염려하고 어떻게 하든지 바르게 생활하게 하려고 애를 쓴다. 하나님은 인간 부모들보다 훨씬 더 그렇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그 증명이다. 

 

교훈 :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많다. 욥기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인식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친다.

 

 

둘째 날(월) 12월 26일 악한 존재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욥 2:7).

 

인간의 사상에서 가장 큰 도전 과제 중 하나는 ‘악’의 문제이다. 일부 철학자 심지어 종교인들조차 악의 존재를 부인하며 그 용어를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악은 실재하며 이 세상의 일부이다. 우리는 악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 논쟁하지만 대체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보면 알 수 있다.

악은 때로 넓게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 두 분야로 나눠진다. 자연적인 악은 지진, 홍수, 전염병과 같이 자연재해로부터 생기는 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도덕적인 악은 살인, 절도와 같은 인간의 고의적인 행위에서 비롯된다.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이론들이 악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우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서 악이 한 피조물 곧 사탄의 타락에서 비롯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 유물론적인 철학적 사고에 영향을 받는 사회는 사탄의 개념을 거부한다. 그러한 거부는 사탄이 실제로 존재하며 인간을 해하려고 한다는 성경의 분명한 증언을 거절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특별히 욥기에서 드러나는 진리이다.

 

1. 욥 1:1에서 욥 2:8까지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세상에 편만한 악에 관하여 사탄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욥1:1~2:8]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6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7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8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19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2: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3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4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6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답: 사단이 그 모든 것들을 생산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욥기에서 욥에게 임한 도덕적인 악과 자연적인 악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모두 사탄에게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욥기를 통해 배운 교훈에 따르면 모든 불행과 고통이 필연적으로 마귀의 활동과 관련이 있지는 않다. 사실 우리는 욥기의 등장인물들처럼 참혹한 일들이 발생하는 이유를 다 알지 못한다. 심지어 욥의 불운에 관한 대화중에 ‘사탄’이란 이름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욥을 비난하기도 했지만 사탄은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욥기는 지구에서 발생하는 악의 최종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보여준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마 13:39)

 

<부가설명> 우리는 악의 실상을 바르게 알아야한다. 우리는 악을 도덕적인 것들에 적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과저자는 천연계의 재난도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적용이나 규정은 악의 실상을 오해하게 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마가복음 3:4을 보면 선과 악을 간단히 대조한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이 말씀을 찬찬히 읽어보라.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선의 실상은 생명이고 악의 실상은 사망이다. 오늘날 이 세상에 도덕적인 모든 것들은 비록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도 생명적 사상으로 볼 때에는 악이다. 도덕적 선이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이미 사람들은 사망이 되었고 결과 삶 자체가 썩어져가는 구습이다.(엡4:22) 세상의 도덕적인 선악은 예외 없이 다 사망이 만들어 놓은 썩어져가는 상태일 뿐이다. 사망이 악이다. 모든 것은 이 사망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해서 도덕적으로 선이나 악으로 판단하다. 사단은 도덕적으로 얼마든지 선하게 이끌 수 있다. 그는 광명한 천사 빛의 사자로 자신을 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후11:13~15) 우리는 선악을 도덕적 관점에서만 보는 눈을 지양(止揚)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진리를 비로소 바르게 깨닫는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 된다. 성경은 이 세상 자체를 악한 세대(마12:45, 눅11:29, 갈1:4)라고 단정적으로 계시하고 있다. 

 

교훈 : 현대 사회는 악의 개념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성경은 그것이 실재하며 그 책임이 사탄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셋째 날(화) 12월 27일 이런 친구들과 함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요 8:7).

 

욥기에서 그에게 말한 네 사람은 모두 좋은 동기를 가지고 왔다. 그들은 그에게 일어난 소식을 듣고 와서 그를 “위문하고 위로하려”(욥 2:11)고 했다. 그러나 욥이 말문을 열고 자신에게 임한 비극을 한탄하자, 그들은 돌연히 고통을 겪고 있는 친구의 심정에 용기를 북돋기보다 그의 분수를 깨닫게 하고 그의 신학을 바로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매번 완전히 빗나갔다. 만약 그들이 모두 옳고 욥이 정말 응분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어땠을까? 설령 그들이 신학적으로는 옳았을지라도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욥에게 옳은 신학이 필요했던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다른 무엇이 필요했던 것인가?

 

1. 요 8:1~11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여기서 욥의 친구들에게 매우 부족한 어떤 점을 드러내셨는가?

[요8:1~1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다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 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답: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정죄하지 않으셨다. 용서하고 격려하셨다. 

 

간음을 행한 여인과 그의 비난자들 그리고 욥과 그의 비난자들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그 여인은 죄가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비난자들보다 그녀의 죄가 가벼울 수도 있고, 어떤 감면 사유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공개된 그녀의 죄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적어도 욥에게는 비난자들이 지적하는 그러한 죄는 없었다. 설령 욥에게 그녀와 같은 죄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욥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과 동일한 것 곧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은혜와 용서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내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받고 싶은 것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욥기를 통해 배우는 교훈이다. 물론 책망과 대립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태도를 취하기 전에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게 신학을 설명하지 않으셨으나 행동을 예수님의 신학을 보여주셨다. 동시에 그 여자를 정죄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성경의 바른 신학을 보게 하셨다. 성경의 신학은 이론이 아니고 원칙이고 생활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의 드러남이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고 이 생명은 용서와 대속과 구원과 영생으로 엮어진다.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 동일하게 이 신학을 배우고 깨달아야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신앙은 도덕적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것은 사망의 세상이 하는 논리이다. 썩어져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썩는 것을 방지해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것이 교육과 도덕과 법과 종교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부패를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생명을 주어서 부패하지 않게는 못한다. 부패를 단번에 없애는 것은 생명으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 예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이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는 세상과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표상한다. 그 무덤 앞에 오신 예수님은 이 사망의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나타낸다. 썩고 있기 때문에 냄새가 나는 나사로는 말씀을 살려내셨다. 단번에 썩는 것이 중지되었다. 아니 생명의 활기로 차게 되었고 이제는 생명의 향기를 드날릴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의 복음은 도덕 논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생명과 존재 논리이다. 

 

교훈 :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겸손과 온유의 태도로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고 은혜와 용서의 정신을 나타내야 한다.

 

 

넷째 날(수) 12월 28일 가시덤불과 엉겅퀴보다 더 심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8).

 

모두가 잘 알다시피 삶은 만만치 않다. 타락 직후에 에덴동산에서 곧바로 삶이 얼마나 힘들어 질 것인지에 대한 암시가 주어졌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상들로 하여금 그들이 죄를 범한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게 하셨다(창 3:16~24 참고). 그러나 이것은 그냥 암시에 불과했다. 만약 우리에게 닥칠 도전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뿐이었다면 인간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고통, 질병, 가난, 전쟁, 범죄, 불황, 오염, 불의뿐이 아닌가? 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사람들이 애곡하는 어느 사회에 대해 기록했다. 그곳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가 장성하여 마주하게 될 슬픔과 고통을 생각해서 사람들이 애곡했다는 것이다. 너무 과민한 반응 같지만 전혀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인간의 상황에 대한 기별을 듣는다. 욥은 고통 받는 모든 인류를 상징한다. 그런데 우리가 겪는 고통은 온당하지도 않고, 우리가 불가피하게 범한 죄의 경중과 맞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욥이 억울한 것처럼 우리도 억울하다.

그러나 욥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고, 삶이 결코 헛되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세상의 작가들과 무신론주의자들은 죽음으로 영영 끝나는 삶의 허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뇌한다. 그들은 답을 찾으려고 씨름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생에서의 삶은 자체적으로 아무 답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허무주의(nihilism)’라고 불리는 철학 사조가 있다. 그 말은 ‘무’를 의미하는 라틴어 ‘니힐’에서 유래했다. 허무주의는 이 세상과 우리의 삶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가르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는 허무함이다. 그러나 욥기는 그런 허무함 너머의 한 초월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욥기는 우리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세상과 하나님을 가리킨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그냥 따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분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시며, 언젠가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큰 문제들이 남아 있고, 인생의 의미는 한 줌 재에 불과해 보인다(창 3:19, 욥 2:8). 그러나 욥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소망 중의 소망, 현재의 감각이 인지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소망을 주고 끝난다.

 

<부가설명>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삶을 힘들게 했지만 그것은 사망이 된 인간들을 위하여 베푸신 창조주 하나님의 자비이다. 사람은 생명의 존재인데 사망의 세상에서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을 때 그의 존재가 바로 사망이 되었다. 그는 생명에서 사망으로 옮긴 것이다. 사망이 되었기 때문 그는 존재를 완전히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창조주의 말씀을 성취할 수 없다. 창조주께서는 그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기간을 주시기로 하였다. 그것이 수명이다. 그런데 완전한 천연계는 사망이 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당장 사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망의 존재가 허락된 수명을 누릴 수 있도록 천연계의 법칙을 변질시킨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은 변질된 사람들이 허락된 수명까지만 생활할 수 있도록 된 변질된 천연환경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통 고통, 질병, 가난, 전쟁, 범죄, 불황, 오염, 불의뿐”인 것은 사망의 졸개들의 이름일 뿐이다. 사람이 목숨이 끊어지면 이런 것들이 없어진다. 죽은 목숨을 유지하려고 하니까 이런 것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 이것이 복음이다.(딤후1:10) 우리는 사망의 모습을 생명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논리를 만들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담에 생명에서 사망으로 옮겼듯이 마지막 아담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 

 

교훈 : 하나님을 모르고 고통과 삶의 의미를 추적하는 자들은 허무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삶의 목적과 영생의 소망을 깨닫는다.

 

 

다섯째 날(목) 12월 29일 예수님과 욥

 

오랫동안 성경 연구자들은 욥과 예수님의 이야기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욥은 제사 제도에서 사용되는 동물들처럼 예수님의 ‘표상’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 유사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러한 유사성에서 욥기의 또 다른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즉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지불하셨는가에 대한 교훈이다.

 

1. 욥 1:1을 요일 2:1, 약 5:6, 행 3:14과 비교해 보라.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욥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요일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약5:6]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행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답: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났던 것처럼 예수님은 그보다 더 온전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그는 정죄되고 고통 중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2. 마 4:1~11을 읽어 보라. 예수님과 욥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존재하는가?

[마4:1~1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답: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고 공격했다. 욥을 공격한 것도 마귀, 곧 사단이다. 

 

3. 마 26:61, 눅 11:15~16, 요 18:30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욥의 경험과 얼마나 비슷한가?

[마26:61]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눅11:15~16]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요18:30]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답: 이 말들은 욥의 친구들이 도덕적으로 무죄한 욥을 정죄한 것과 유사하다. 

 

4. 욥 1:22과 히 4:15을 비교해 보라. 어떤 유사성이 존재하는가?

[욥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답: 욥이 도덕적으로 무죄한 상태에서 시험을 당한 것처럼 예수님도 도덕적으로나 생명적으로 완전히 무죄하셨지만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위의 말씀들은 예수님과 욥의 경험 사이에 흥미로운 유사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욥이 예수님처럼 무죄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늘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는 신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욥은 예수님처럼 마귀의 모진 시험을 받았다. 욥기 전체에서 욥이 잘못된 비난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거짓 고소를 당하셨다.

마지막으로 욥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더욱이 우리 모두를 위해서 예수님도 믿음을 지키셨다. 그분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죄 없는 생애 곧 하나님의 성품을 완전하게 구현한 생애를 사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의 발현이셨다(히 1:3). 그분에게만 구원에 필요한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 3:22)가 있었다. 욥의 고난은 컸지만 그가 고난 중에 보여준 신실함은 그의 구속주이신 예수님께서 욥과 우리를 위해 마주하신 고난과 신실함에 비하면 작고 불완전한 표상에 불과했다. 예수님은 진실로 다시 오셔서 후일에 “땅 위에 서실 것이”(욥 19:25)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생애를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는 것은 가당찮은 비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분은 생명자체이시고 도덕적으로도 결코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분이 당하신 모든 시험과 고통은 사망이 된 우리에게 닥치는 것들을 체휼하신 것인데, 체휼이라고 번역된 말은(히4:15, 벧전3:8) ‘함께’ 라는 ‘쉰’과 ‘고통’이라는 ‘파스코’가 합해서 된 단어인데 일반적으로 동정이라고 번역하지만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같은 처지에 들어가서 체험하고 동정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사망의 세상에서 생활하셨으니 그 고통과 불편함이 어땠겠는가. 그랬어도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견디셨는데 우리를 위해 견디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예수 안에서 우리도 예수님의 생명을 얻어서 날마다 생명의 성령의 역사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가게 해 주신다. 우리는 이 은혜를 이 약속을 굳게 믿고 붙들어서 예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존재로(엡1:12) 살아가도록 굴복하자.

 

교훈 : 욥의 생애는 끝까지 믿음을 지킨 예수님의 생애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야말로 욥이 필요로 했던 구속주이자 다시 오실 구원자이시다.

 

 

여섯째 날(금) 12월 3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세기를 거듭하며 욥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변형된 성경 기사들을 포함함)의 독자들을 전율시키고, 각성시키며, 시험하였다. 욥기는 해답이 없는 많은 질문들을 남겼다. 어떤 면에서 이는 당연하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해답 없는 질문을 남기지 않은 책이 어디 있는가? 심지어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스스로 제기한 모든 문제에 답하지 않는다. 성경이 다루는 주제 중에서 특히 인류의 타락과 구원의 계획은 우리가 영원토록 연구하게 될 주제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78 참고). 하물며 성경의 한 짧은 책이, 비록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을지라도 (딤후 3:16) 어떻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모든 답을 줄 수 있겠는가?

물론 욥기는 단편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계시된 큰 그림의 일부이다. 거대한 영적, 신학적 모자이크의 일부로서 그것은 보편적인 호소력으로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훌륭한 기별을 제시한다. 그 기별이란 바로 역경 중에 빛나는 신실함이다. 욥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살아있는 표본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예수님을 믿고 바르게 살려는 신자들 중에 간혹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고,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신자들 중에 믿음의 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도 없으며, 위로를 구하는 신자 중에 비난을 당해 보지 않은 자도 없다. 욥기는 이 모든 것과 그보다 더한 것을 당하면서도 믿음과 진실함을 유지했던 분의 한 표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인하여 욥을 위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을 신뢰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고 하신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대가 욥을 만나면 가장 먼저 어떤 질문을 던지겠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마지막에 어떻게 회개하게 되었는지 묻고 싶다. 그가 회개하도록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무엇이었을까?

 

➋ 욥기에서 제기되었지만 이번 교과에서 다루지 않은 문제들은 무엇입니까?

※ 사단이 왜 그렇게 욥에게 고통을 더하는 존재가 되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➌ 그대가 욥기를 공부하면서 깨닫게 된 가장 중요한 영적 개념은 무엇입니까?

※ 욥기의 핵심진리는 도덕론적 종교와 신앙관에서 창조론적 존재론적 생명론적 종교와 신앙관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즉 도덕론적 종교와 신앙을 창조론적 생명론적 종교와 신앙과 대조해서 바른 종교관 신앙관을 가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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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김명호 목사님, 은퇴 이후에도 왕성한 말씀 사역으로 교회에 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더욱 강건하시고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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