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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욥의 구속주(질문, 대답, 부가설명)12/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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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12-09 21:39 조회7,6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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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7일 안식일

일몰 : 오후 5시 15분

 

기억절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연구 범위 : 욥 19:25~27, 요 1:1~14, 욥 10:4~5, 눅 2:11, 갈 4:19, 눅 9:22, 사 53:1~6

 

38장이 시작되면서 여호와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말미암아 욥기는 절정에 도달했다. 하나님은 강렬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욥에게 자신을 나타내셨고 욥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을 책망하셨고 욥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욥은 그 후로 수한을 다 누렸다.

그러나 아직 그 내용과 결말에 뭔가 석연치 않고 만족스럽지 못한 요소가 있다. 하늘에서 논쟁하던 하나님과 사탄이 장소를 지구로 옮겨서 가엾은 욥의 삶과 육신을 둘러싸고 쟁투를 벌였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하늘에 남아 아래를 지켜보시는 동안 욥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맹렬한 전투를 견뎌야 했다는 것은 공정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못다 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 그것은 수백 년 뒤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밝혀진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 욥기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질문들에 대하여 훌륭하고 위안이 되는 해답을 찾을 수 있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인간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는지 연구한다.

➋ 느끼기 : 십자가 고난을 겪는 아들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느꼈을 고뇌에 공감한다.

➌ 행하기 : 그리스도를 본받아 속량함을 받은 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A. 

❷ 욥은 절망 중에서도 구속주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욥13;16) 자기의 경건이 구원이 될 것이라고 고백했고 또 부활로 구주를 볼 것이라고 고백했다.(욥19:25~27)

❸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진정한 구속주가 되실 수 있습니까?

※ 그분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며 사람과 같이 되어 완전한 생애와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B.

❷ 예수님은 어떻게 인간의 모든 고통과 사정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 그가 100%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사는 삶을 겪어보셨기 때문이다. 

❸ 인간의 모든 문제와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해답을 준다고 생각합니까?

※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죽음을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❹ 우리는 우리의 고통과 사정을 잘 아시는 예수님을 누구에게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요?

※ 이웃에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소개해야 한다. 증인이 되어야 한다.

 

결론 : 욥은 예수님이 오시기 오래 전부터 자신의 구속주가 살아계심을 알았습니다. 그 구속주의 십자가 죽음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인류가 겪는 고통과 슬픔의 총량을 다 감당하기에 넉넉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고난 속에서도 속량을 입은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첫째 날(일) 12월 11일 나의 구속주가 살아계심

 

“내 구속자가 살아 계시고 그분이 결국에는 이 땅 위에 서실 것을 나는 알고 있다네 내 살갗이 다 썩은 뒤에라도 내가 육신을 입고서 하나님을 뵐 걸세”(욥 19:25~26, 우리말성경).

 

하나님이 욥기 38장에 나타나셨을 때에 그분은 자신을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며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욥 38:25~26)는 창조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냥 창조주가 아니시다. 그분에게는 또 다른 중요한 호칭과 역할이 있다.

 

1. 욥 19:25~2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구원의 소망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욥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답: 구속자께서 땅에서 서실 때 부활로 그분을 만날 것을 고백하였다. 

 

이 성경절을 보면 욥에게 구속주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은 죽을지라도 무덤 너머에 소망이 있다. 그런데 이 소망은 언젠가 세상에 오실 구속주에게 달려있다.

욥의 고백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가리키고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주이시라는 진리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타락한 세계에서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우리에게는 창조주 그 이상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구속주가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구속주가 되신다(사 48:13~17 참고). 우리가 영생의 위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그 두 가지 역할을 하시기 때문이다.

 

2. 요 1:1~14을 읽어 보라. 여기서 요한은 창조주와 구속주로서의 예수님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요1: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답: 말씀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어 우리 중에 거하시고 그를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자들이 된다고 계시하였다.

 

요 1:1을 보면 하나님을 창조주로 계시하는 창 1:1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던지 요 1:10~12은 창조주와 구속주를 불가분의 관계로 엮어놓는다. 참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구속주도 되실 수 있다.

 

<부가설명> 구원은 재창조이기 때문에 창조주가 아니면 구원을 할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후5:17)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새로운 피조물의 창조자라는 뜻이다. 그분이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는 것은 태초에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다는 의미가 전제된 계시의 말씀이다. 성경은 당연히 예수께서 창조주요 구원의 주라는 것을 강조한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43:11,12) 이 구절은 여호와 외에 구원자가 없다고 단언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 외에 구원자가 없다고 단언한다.(행4:12) 예수님은 구원하시는 여호와시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는 말씀이다. 우리는 창조주시며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확실히 믿는다는 것을 제7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교훈 : 욥은 자신을 구원해 주실 구속주가 살아계신다는 소망을 고백했다. 우리에게 있는 영생의 소망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시자 구속주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둘째 날(월) 12월 12일 인자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욥 10:4~5).

 

우리는 욥기 서두에서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를 엿볼 수 있었다. 알다시피 그것은 하늘에서 시작되어서 지구에까지 이르렀다(계 12:7~12 참고). 욥기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하늘에서 시작된 쟁투가 땅으로 옮겨진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쟁투는 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 욥 10:4~5을 읽어 보라. 욥의 불평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요지는 무엇인가?

[욥10:4~6]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5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하시나이까.

 

답: 욥은 하나님이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사정을 잘 아실 수 있겠느냐고 불평한다. 

 

욥의 요지는 단순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며 우주의 주재이시자, 창조주이시니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이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2. 다음의 성경절들은 욥의 불평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는가?(눅 2:11, 요 1:14, 눅 19:10, 마 4:2, 딤전 2:5, 히 4:15)

[눅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마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답: 하나님은 욥이 제기한 질문에 말씀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사람이 겪는 삶의 경험을 다 겪으시는 일로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인간의 비애를 아실 턱이 없다는 욥의 불만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해소되었다. 예수님은 신성을 전혀 잃지 않으시면서도 온전히 인간이 되셨다. 그런 인성 안에서 그분은 욥과 모든 인간이 겪는 고통과 고뇌가 어떤 것인지 아셨다.  복음서를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사셨으며 인성을 입고 어떤 고통을 겪으셨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욥의 불만에 답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은 위장된 인성이 아니었다. 그는 인성을 취하시고 인성으로 사셨다.… 그는 육신이 되셨을 뿐 아니라 죄로 가득한 육신의 모양이 되셨다”(화잇주석, 눅 22:44).

 

<부가설명>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같은 줄로 착각한다. “네가 이런 짓들을 해 왔어도 잠잠히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로 여기는구나. 나 너를 벌하리라. 네 눈앞에 네 행실을 펼쳐 놓으리라.”(시50:21, 카톨릭 번역 성경) 예수께서 심판을 베푸실 때 그분이 우리와 같은 상태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죄인이 아니셨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분이시다.(마1:18, 눅1:35)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탄생하셨기 때문에 영이시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다 육체가 된 사람들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영이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실수를 범하여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다.”(쉬운성경) 사람이 죄(실수)를 범했기 때문에 육체가 되었다. 성경이 육체라고 할 때 몇 가지 경우를 나타내는데 가장 많은 경우가 바로 죄인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그냥 살을 가리킬 때도 사용했는데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하셨을 때 육은 죄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의 세상에서 육보다 훨씬 고난을 많이 당하셨다. 이것은 깨끗한 흰 옷을 입고 흙탕길을 걸으며 옷에 흙이 한 점도 튀지 않게 걷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다. 더러운 옷을 입고 그런 길을 걸으면 흙이 튀어도 표가 나지 않는다. 조심하지 않아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흙탕길이나 자기 옷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티 하나 없는 흰옷을 입고 흙탕길을 걸으면서 흙 한  점 튀어 옷이 묻지 않게 걸으신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욥의 질문은 예수님의 이런 삶으로 완전히 대답이 되었다. 그렇지 않는가?

 

교훈 : 욥은 하나님이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과 비애를 모르신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은 이런 불만과 오해를 완전히 해소한다.

 

 

셋째 날(화) 12월 13일 그리스도의 죽음

 

1. 아래의 성경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답: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생활할 모든 일의 모본이 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의문의 여지없이 예수님은 인간의 모본이셨다. 그분의 생애, 그분의 성품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방해야 할 모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유일하고 완전한 모본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그분의 형상으로 다듬는 것이 구속주로서의 그분의 사역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죄인의 처지에서 인간은 성품을 계발하는 것 이상이 필요했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실 대속자였다. 그분은 우리에게 완전한 삶의 모본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당할 죽음을 대신 죽기 위해 오셨다. 그렇게 해야 그분의 완전한 삶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2. 우리는 다음의 성경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막 8:31, 눅 9:22, 눅 24:7, 갈 2:21)

[막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눅9:22]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24: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갈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답: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오직 예수님의 대속의 길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했다. 왜냐하면 율법에 대한 순종이 기독교인의 삶의 핵심이라 할지라도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21).

만약 어떤 법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오직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영원한 대속물로 바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히 10:12).

 

<부가설명> 예수님은 우리의 모본이신 것이 분명하지만 모본을 보이기 위하여 생활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모본이기 전에 우리의 생명이다.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을 때 모본이라는 말도 바르게 깨닫는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에(요일5:11,12) 우리 생명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생활하시는 대로 우리가 생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모본이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 아닌데, 그분이 사신 모본되는 삶을 내가 훈련해서 그분의 품성과 삶을 내 안에 이룬다고 해도 그것은 구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스스로 노력해서 생명을 얻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스스로 노력해서 살아날 수 없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오직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교과 저자가 말했지만 그분의 완전한 모본과 완전한 생애가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니고 그분이 아담 안에서 죽은 우리의 사망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딤후1:10) 완전히 드러내시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는 것은 내가 하게 되고 그분이 하지 않는 것은 내가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모본을 제시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오신 가장 큰 이유는 대속의 죽음을 죽기 위해서였다.

 

 

넷째 날(수) 12월 14일 인자의 고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

 

1. 사 53:1~6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사53:1~6]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답: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적으로 우리가 당할 것을 대신하여 당하신 대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 53:4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지셨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욥의 비애와 슬픔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물론 욥의 고통뿐 아니라 온 세상의 고통이 전부 해당된다. 예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서 욥기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욥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던 동일한 하나님을 본다. 그분은 독수리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시고 쿼크로 중성자와 양성자를 만드신 분이다. 그런 분께서 욥 또는 우리 모두가 겪은 또는 겪을 수 있는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당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슬픔과 괴롬을 그분은 총체적으로 감당하셨다. 그분이 인성을 입으시고 죄가 온 세상에 퍼뜨린 온갖 고난의 총공세를 감내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그분께 고통에 대해 강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슬픔과 괴롬을 알 뿐이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을 경험하셨기 때문이다.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욥 38:33)고 욥에게 물으셨던 하나님은 더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그분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히 2:14)기 위하여 땅의 육신을 입으시고 육체 가운데서 죽으셨다.

십자가 없이 볼 때보다 십자가를 통해서 볼 때에 욥기는 더 이해하기 쉬워진다. 왜냐하면 욥기에서 답을 찾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십자가에서 해답을 얻기 때문이다.

‘사탄의 참소를 반박하기 위해서 욥이 지상에서 강제로 고통을 겪는 동안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신 것이 과연 공정한가?’ 이것은 욥기의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욥 또는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심각한 고통을 겪었을지라도 우리 구주는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과 약속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가장 심각한 고통을 자원하여 겪으셨다. 십자가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욥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구속주가 되신 창조주로 본다(빌 2:6~8). 그분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욥이나 그 어떤 사람도 겪어보지 못한 방법으로 죄의 고통을 겪으셨다. 그 같은 광경을 보고 우리가 욥처럼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부가설명> 인간의 죄는 아담 안에서 죽은 사실이다. 성경은 죄가 하나라고 계시한다. “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롬5:18) 아담의 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 받아 죄인이 되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죄인인데 스스로는 죄인인 것을 모드고 태어났다. 태어나보니 사람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는 존재였다. 즉 죽음에 이르는 병을 유전으로 받은 상태였다.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하였다. 세상에서 사람이 병이 들면 환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을 유전으로 받은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하며 그들은 반드시 죽는다. 인간의 일생은 죽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들은 아담 안에서 ‘썩어질 씨로’로 태어났다.(벧전1:23)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행하는 옛 사람들이다.(엡4:22) 썩어져가는 구습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죄들이다. 도덕적 죄의 모습이다. 그것을 노력을 썩지 않게 해도, 즉 선을 행하고 품성을 예수님의 도덕성만큼 높여도 그것이 썩어지는 것에서 썩지 않는 생명을 얻게 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인간의 이 죽음 자체를 십자가에서 폐하신 것이다.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시고 예수 안에 있는 예수 생명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교훈 : 하나님은 대쟁투로 고난을 겪는 백성을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직접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가 겪는 고통의 짐을 십자가에서 다 감당하셨다.

 

 

다섯째 날(목) 12월 15일 가면이 벗겨진 사탄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1. 요 12:30~32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십자가와 대쟁투의 맥락에서 사탄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요12:30~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답: 사탄이 쫓겨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엘렌 G. 화잇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 뒤에 그분의 죽음이 그것을 지켜보는 하늘과 온 우주에 어떤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탄이 하나님의 품성과 정부를 거짓으로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이 진상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복종과 순종을 요구함으로 당신 자신을 높이는 일에만 힘쓰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창조주께서 다른 모든 존재들에게 극기하라고 강요하면서 자신은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주의 통치자께서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희생을 하신 것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셨기 때문이다. 또한 루스벨은 영광과 최상권을 얻기 위하여 죄가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놓은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멸하기 위하여 스스로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 드러났다”(각 시대의 대쟁투, 502).

 

2. 고후 5:19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어떻게 타락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불러왔는가?

[고후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답: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사망을 처리하시고 생명을 드러내셔서 생명이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세상은 죄와 배도에 빠졌다. 욥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세상은 사탄의 계략에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신성을 잃지 않으시면서도 동시에 인성을 입으심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파괴할 수 없는 연대를 구축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와 사탄의 최종적인 멸망을 보증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법적인 죄의 값을 지불하셨다. 그렇게 해서 타락한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키셨다. 우리는 사망 선고를 받은 죄인들이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받았다.

 

<부가설명>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는 생명자체이시다. 예수님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생명자체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은 생명자체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원천이신(요11:25,26, 시36:9)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않으면 생명의 존재로서 존속할 수 없다. 아담은 이 생명을 연결한 생명줄을 선악과를 먹는 것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사망이 된 것이다. 아담부부를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이미 아담 안에서 생명이 없어진 상태에서 출생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생육하고 번성하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수명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 수명이 끝나는 것과 함께 사망으로 떨어진다. 이 사망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후손으로 아담이 죽은 그 죽음으로 죽어야할 이유가 없어졌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사망의 죄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 얼마나 큰 은혜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의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을 드러내셨다. 이제는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산 자의 하나님의 산 백성들이 되는 것이다. 

 

교훈 :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은 화목하였고 사탄의 최종적인 패배와 멸망이 확정되었으며 우리는 영생의 약속을 받았다.

 

 

여섯째 날(금) 12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하여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것은 세계의 위기이다. 만일 내가 사람들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된다면 세계는 밝아질 것이다. 사람들의 심령을 붙들고 있는 사탄의 속박은 깨어질 것이다.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회복될 것이며 믿는 성도들의 가족은 마침내 하늘집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이다. 구주께서는 당신 앞에 펄쳐질 승리의 장면에 대한 명상에 잠기신다. 그분은 십자가와 그에 따른 모든 공포와 빛나는 영광과 함께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보신다.

그러나 인간 구속의 사업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의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에까지 나타난다. 이 세상 임금은 쫓겨난다. 사탄이 하나님을 비난하던 그 비난들은 논파된다. 사탄이 하늘에 퍼뜨린 비난의 말은 영원히 제거된다. 사람들과 같이 천사들도 구주께 이끌리게 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시대의 소망, 625~62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십자가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특별히 우리를 창조하셨던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시련을 겪고 있든지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큰 소망과 위로를 주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런 놀라운 진리를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그분의 선하심을 신뢰하게 됩니까?(롬 8:32)

※ 예수 안에 영원한 생명이 보증되었기 때문이다.

 

➋ 욥기는 대쟁투가 우주적인 문제이며,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쟁투가 지구 너머의 차원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하늘 영광을 아는 하늘의 존재들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보고 어땠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은혜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게 됩니까?

※ 죽어가는 사람이 생명을 얻은 은혜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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