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폭풍 속에서(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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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12-02 21:38 조회8,195회 댓글0건본문
12월 10일 안식일
일몰 : 오후 5시 14분
기억절 :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연구 범위 : 욥 38~39장, 요 1:29, 마 16:13, 고전 1:18~27, 욥 40:1~4, 욥 42:1~6, 눅 5:1~8
욥기의 등장인물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 또는 그분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관해서 할 말이 정말 많았던 것 같다. 알다시피 그들의 말 속에는 우리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 12:7~10).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 8:3). 이런 진술들을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욥이 고난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토론의 초점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첫 두 장을 제외하면 책의 내용이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무대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뀔 때가 되었다. 욥기에서 수많은 토론과 논쟁의 주제였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실 차례가 되었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세상의 여러 문제와 동떨어져 계신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결국 어떻게 답을 주셨는지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자신의 그릇됨을 깨달은 후에 욥이 느꼈던 철저한 자기부인에 공감한다.
➌ 행하기 : 하나님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와 그분이 어떻게 일하셔야 하는지에 대한 ‘나’의 주장을 내려놓기로 결심한다.
A.
❷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서 어떤 식으로 그의 질문에 반응하셨습니까?
※ 욥에게 질문하는 식으로 반응하셨다.
❸ 하나님에 대한 욥의 반응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우리도 무지한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또 사람에 대해서 논하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할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❹ 하나님을 정말 신뢰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내려놓아야 할까요?
※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정신으로 굴복해야 한다.
B.
❷ 하나님이 욥에게 구체적인 답을 주기보다 연속적으로 질문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스스로 자기를 성찰하게 하는 방법이며, 자기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❸ 왜 여러 지식보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때로 중요합니까?
※ 그때 자기의 실상을 올바르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❹ 과학적인 지식을 맹종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소개하면 좋을까요?
※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방법 곧 질문으로 자기의 실상을 깨닫도록 시도해보는 것이 어떨까?
결론 : 우리는 ‘그들은 틀렸고, 너는 옳다.’는 식의 판정 대신에 우리 모두가 틀렸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은 무의미해집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된 질문에 놀라운 답을 제시하십니다.
첫째 날(일) 12월 4일 폭풍 속에서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욥 38:1).
1. 위의 말씀을 읽어 보라. 이전의 대화와는 사뭇 다른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가?
답: 하나님께서 천연계의 위엄 중에 나타나시는 모습이다. 이것은 앞으로 욥에게 하실 말씀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은 욥 2:6에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고 하신 뒤에 사라지셨다가 갑자기 재등장하셨다.
그분의 등장에 대해서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욥 37장에서 엘리후의 연설이 끝난 직후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욥 38:1) 말씀하셨다. 돌연히 다른 사람들은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욥만 조명을 받는다.
‘폭풍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회오리’, ‘강풍’의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인간을 만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사 29:6, 슥 9:14).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갈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왕하 2:1).
이러한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대하여 구체적인 묘사는 없지만 하나님이 “세미한 소리”(왕상 19:12)로 말씀하지 않으신 것만큼은 확실하다. 오히려 그분은 욥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강렬한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물론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 이번 뿐만은 아니다. 성경에는 인간을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2. 다음의 성경절들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와 얼마나 가까워지실 수 있는가?(창 15:1~6, 창 32:24~32, 요 1:29)
[창15:1~6]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32:24~32]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답: 하나님은 직접 사람과 만나서 대면하여 대화도 하시고 만나서 씨름도 하시도록 가까이 하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죄를 친히 대신 지시고 속죄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나서 우리를 내버려두는 동떨어진 신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와 밀접하게 상호작용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어떤 슬픔과 고난이 있든지, 우리가 무엇을 만나든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하심을 믿고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실 때에 폭풍 중에 나타나셨다. 이 모습은 도덕적 성자의 모습이 아니다. 이것은 천연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은연히 나타내시는 암시가 있다. 이후 욥에게 하시는 말씀이 인간의 도덕과 도덕적 행위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고 창조와 창조하신 만물에 대한 섭리에 대하여 말씀하실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신 장명으로 보인다. 비록 이렇게 위엄찬 모습으로 임재 하셨지만 그분은 또한 사람과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시고 직접 사람과 씨름도 하시는 아주 친근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후에 그냥 피조물을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을 친히 섭리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욥기는 이런 사실을 아주 친절하게 지적하신다. 별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까마귀 새끼에 대하여서도 말씀하신다. 우주의 모든 천체들로부터 천연계에 일어나는 구름과 바람과 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까마귀 새끼 같은 미물에 대하여서도 말씀하신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 자상하신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와 가까이 하시는 사랑이 넘치시는 어쩌면 만나서 씨름까지 하시는 장난기까지 있으신 재미있으신 하나님이시다.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신가.
교훈 : 엘리후의 연설이 끝난 직후 하나님은 갑자기 폭풍 중에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그분이 인간의 문제에서 멀리 떠나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둘째 날(월) 12월 5일 하나님의 질문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욥에게 매우 긴 침묵처럼 느껴졌을 시간이 흐른 뒤에 마침내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첫 마디는 욥이 듣기를 기대했던 말씀이 아니었다.
1. 하나님은 처음부터 욥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가? 그 질문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욥 38:2)
[욥38: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답: 사람은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때까지 그들이 주고받은 말들이 바르지 않았다는 것도 암시한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인간에게 질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는 그분이 답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훌륭한 교사들이 늘 그러하듯이 하나님은 질문이 우리로 하여금 상황을 돌아보게 하고, 스스로를 마주보게 하며, 문제들을 잘 헤쳐 나가 적합한 결론에 이르게 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잘 아신다. 하나님이 물으신 질문들은 그분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 문제들을 깨닫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질문은 사람들이 진리에 이를 수 있도록 돕는 수사(修辭)적인 도구이다.
2. 하나님이 하신 다음의 질문들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 이러한 질문을 하신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분의 요점은 무엇인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창 3:11).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9).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답: 사람이 자기의 상태를 돌아보아 확인하게 하는 질문과 하나님을 바르게 알도록 이끄시는 질문들이다.
욥은 하나님에 대해 할 말이 많았지만 하나님은 그가 창조주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셨다. 사실 하나님이 욥에게 던진 첫 번째 질문은 친구들이 그에게 했던 말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욥 8:1~2, 11:1~3, 15:1~3 참고).
<부가설명> 하나님의 첫 질문은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니다.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존재이다. 그런데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존재들이다. 사실은 자기의 존재 실상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모르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가 안다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배우고 경험하는 것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지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외부로부터 들어온 그것을 마치 자기 안에서 이루어진 것인 줄 착각하고 그것으로 자기 외의 것들을 비판하고 평가한다. 욥의 친구들이 그와 같이 하였다. 엘리후도 그랬고 욥 자신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말했다. 결국 욥이 지적한대로 모두 거짓을 말한 꼴이 되었다. 우리의 일상도 이런 경우와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 아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겸손히 시인하고 나 외의 것에 대하여 너그럽고 배우는 자세로 대하도록 스스로 훈련되어야 할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예수님께 굴복해야 할 것이다. 욥의 회개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교훈 : 마침내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욥이 기대했던 답을 주시기보다 오히려 그에게 질문하셨다. 그분은 욥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 바라셨다.
셋째 날(화) 12월 6일 창조주 하나님
1. 욥 38:4~41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욥에게 어떤 질문들을 하셨는가? 그러한 질문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욥38:4~41] 찾아 읽어보자.
답: 38장 2절부터 41장 14절까지 질문에 85개쯤 있다. 그것은 창조와 존재와 섭리에 대한 질문들이다.
만약 욥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재난의 이유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기대했다면 기대가 빗나갔을 것이다. 대신 그가 얻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과 욥의 유한함과 무지를 대비시키는 웅변적인 질문의 소나기였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나님은 땅, 바다, 빛, 어둠의 기원의 예를 들어 창조를 떠올리게 하신 후에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마도 알리라 네가 그때에 태어났으리니 너의 햇수가 많음이니라”(욥 38:21).
그런 다음 하나님은 땅의 기초뿐 아니라 날씨와 별들의 신비를 총망라하는 웅변적인 질문들을 제기하면서 창조 세계의 기이함과 신비를 가리키신다.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욥 38:31). 그분은 다시 땅으로 돌아와 사람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욥 38:36), 야생 동물들의 삶(욥 38:39~41)을 주목하신다. 이 주제는 다시 39장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욥기가 오늘날 기록됐다면 하나님은 ‘누가 양성자와 중성자 속에 쿼크를 결합시켰는가?’ ‘내가 처음 플랭크 질량을 측정했을 때에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 ‘너의 지혜로 질량이 공간과 시간을 휘게 하는 것인가?’라고 물으셨을 것이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같다. ‘아닙니다.’ 그런 일이 생길 때에 욥은 그곳에 없었다. 하나님이 언급하신 현상들에 대해 그는 아는 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요점은 이것이다. 욥이 아무리 지혜롭고 지식이 많을지라도, 설령 그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옳은 견해를 말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욥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부족은 창조 세계에 대한 그의 무지를 통해 극명히 드러났다.
창조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면 창조주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 수 있겠는가? 창조주와 창조 세계 사이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정말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과 욥을 대조시키셨다. 예수님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미약한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그분과 영원히 더불어 살 소망을 주시기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보라.
<부가설명> 이미 일요일 부가설명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욥의 질문에 구체적으로 대답하시지 않으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근원적인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근원적인 일에 대한 질문을 하신다. 이 질문에 대해 욥이 깨달으면 자기의 모든 의문과 질문의 답을 얻게 될 것이다. 근원적인 것이란 존재와 존재의 유지에 대한 문제이다. 우리의ㅣ 생은 존재하면서 시작한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런 진리를 욥이 깨닫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4절에서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고 질문하신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욥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담도 아직 존재하기 전이다. 그런데 욥이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가? 이 질문 다음에 하나님은 창조와 그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섭리를 말씀하신다. 그런 질문에 욥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적 대답을 만든 것이 진화론이다. 진화론도 땅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대답이 없다. 저절로 이미 있었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러면 땅이 자존자가 된다. 이성도 없고 생명도 없는 것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욥은 이런 질문에서 자기는 창조주의 피조물이고 피조물을 존속하도록 관리해주시는 창조주의 손길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이때까지 욥은 이미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논리를 전개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자기의 관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총체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교훈 : 하나님은 창조 세계의 태고적 신비와 눈에 보이는 수많은 현상에 대한 인간의 무지를 드러내시며 그분의 위대하심으로 우리의 질문에 답하신다.
넷째 날(수) 12월 7일 지혜자들의 꾀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고전 3:19).
오늘날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던진 질문들을 보면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욥과 같은 인물들이 창조 세계에 관하여 얼마나 지식이 부족했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류는 기원후 16세기가 돼서야 태양의 움직임이 지구 자전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전에만 해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믿었다.
현대 과학 덕분에 우리는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지식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창조 세계와 그 기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1. 욥기 38~39장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했던 질문들을 읽어 보라. 현대의 인류가 그 질문에 얼마나 더 잘 대답할 수 있을까?
[욥38:1~39:30] 본문이 너무 길어서 각각 찾아서 읽어보자.
답: 38장은 천체와 천연계 현상에 대하여, 39장은 동물들에 대하여 질문하셨다. 동물들도 포유류와 조류들에 대하여 질문하셨다. 현대에는 욥보다는 좀 나은 대답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모릅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과학은 이전에 감춰졌던 진실의 다각적인 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기이함과 오묘함을 제거하려는 점을 제외한다면 과학은 여러 면에서 이전의 세대들이 알지 못했던 천연계의 심오하고 복잡한 특성들을 훨씬 훌륭하게 밝혀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신 29:29)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업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 결코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않으셨다. 인간의 과학으로는 지존자의 오묘를 찾아낼 수 없다. 그분의 창조력은 그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다”(부조와 선지자, 113).
2. 인간 지식의 한계에 관한 다음의 성경절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경고는 무엇인가?(고전 3:19, 1:18~27)
[고전3: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고전1:18~27]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답: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미련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지식은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지극히 제한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부가설명> 사람은 자기 자신도 다 모른다. 거울이 없다면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뒷모습도 그렇다. 속은 더욱더 모른다. 의학 기기가 발달해서 인체를 촬영하고 해부해서 내장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다. 인간 자체도 그런데 천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우리 눈에 흔한 피조물에 대해서도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엄청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우쭐대고 있다. 욥의 친구들이나 욥이나 엘리후가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정성을 다했지만 사람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올바르게 변호할 수 있겠는가? 결국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결과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자기 지식과 이해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창조주께서 계시해 주신 것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 한계 밖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교만하여진다고 경고했다.(고전4:7) 우리는 말씀과 주님 앞에서 겸손하자.
교훈 : 현대 과학이 고대의 인류가 알지 못한 창조 세계의 신비를 많이 밝혀냈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 기원에 대해서는 너무도 제한적인 지식만 있을 뿐이다.
다섯째 날(목) 12월 8일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함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1. 욥 40:1~4과 42:1~6을 읽어 보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욥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욥40:1~4]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4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욥42:1~6]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답: 자기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한 것을 깨달았고 회개하였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것에 크게 압도되었다. 사실 그가 욥 42:3에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라고 했을 때에 그는 단순히 자신에게 던진 하나님의 질문을 반복할 뿐이었다. 욥은 이제 답을 알게 되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말했던 사람은 바로 욥 자신이었다.
욥이 42:5에서 한 말도 주목해 보라. 그는 이전에는 하나님에 대해 듣기만 했지만 이제 그분을 보았다. 즉 그는 이제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분명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자신을 부인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했던 이유이다.
2. 사 6:1~5과 눅 5:1~8을 읽어 보라. 여기서 나타난 반응들은 욥의 반응과 얼마나 비슷한가?
[사6:1~5]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눅5:1~8]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답: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이사야와 예수님의 권능을 경험한 베드로의 반응은 욥의 반응과 비슷하다.
이 말씀들에서 우리가 본 모습들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성경의 핵심 진리를 밝히고 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 1:1)였다. 하나님에게서 떠나도록 사탄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욥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다. 그는 굳세고 신실한 신자였다.
하지만 이사야나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거룩함과 능력을 엿보기만 해도 욥은 자신의 죄와 미약함을 느끼고 움츠러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타락하고 죄로 인해 손상을 입은 존재로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본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아무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을 만큼 충분하게 선을 행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에게, 심지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과 같은 최고의 인물들에게도 은혜가 필요하고 구주가 필요하며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해 주실 분이 필요한 이유이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채워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다.
<부가설명> 신학자들은 심심찮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본성이 무엇인가? 사전은 ‘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성질. 천성(天性). 사물이나 현상에 본디부터 있는 고유한 특성.’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현재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은 죄성이고 악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라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아담 후손들의 본성이 되었다. 즉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진 존재들이 된 것이다. 이 병은 썩어져가는 증세를 나타낸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엡4:22)이라는 말이다. 이 썩어져가는 구습이 바로 도덕적으로 나타나는 죄들이다. 이기심, 욕심, 살인, 사기, 간음, 불효, 이 세상에 나타나는 온갖 도덕적 죄들이 죽음에 이르는 병자들의 썩어져가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이 썩는 것은 방지해보려고 모든 좋은 고안을 해서 치료를 해보는데 그것이 도덕적 교육과 수양과 종교가 하는 일이다. 그래도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료할 수 없고 결국 죽는다.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선을 행해도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료하는 효과가 없다. 다만 썩는 정도를 낮추고 속도를 줄이고 썩는 냄새를 없애고 나아가서 향수를 뿌려서 향내가 나게 하는 정도일 뿐이다. 결국 죽는다. 그러므로 이런 도덕적으로 지선한 자리에 이른다고 해도 그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끌지 못한다. 사람의 이런 죄의 본성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바르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본성은 사망성인 것이다. 도덕적으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도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료하지 못한다. 창조주께로 돌아와서 그의 재창조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욥은 도덕적 상태에서 재창조에 상태에 이른 것이다. 욥의 회개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교훈 : 욥의 깨달음은 단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했던 말로만 표현될 수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이다.
여섯째 날(금) 12월 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과학과 예술 양방면을 통해 빛의 홍수가 지상에 쏟아지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나 소위 과학적인 사람들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들을 다룰 때에는 분명히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의 이론들이 성경에서 발견되는 사실들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내신 바를 넘어서 추론하는 일은 해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그분의 창조 사업을 과학적 원리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해도(海圖)나 나침반 없이 미지의 대양에서 표류하고 있는 것과 같다. 가장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의 연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도받지 않으면, 과학과 계시와의 관계를 추적함에 있어서 갈피를 못 잡게 된다. 창조주와 그분께서 창조하신 만물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으므로 그들이 자연 법칙으로 창조주와 그분의 창조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 역사가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신구약 성경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하게 될 것이며, 그때에 그들은 닻을 잃어버렸으므로 불신의 암초에 부딪히게 된다”(부조와 선지자, 11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의 인용문을 읽어 보십시오. 엘렌 G. 화잇의 경고처럼 과학의 영역에서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과학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것들을 가르치는 사례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대표적인 것이 진화론이다.
➋ 20세기의 수학자이자 저술가였던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75년 전에 나는 캠브리지대학의 학생이었다. 나는 천재들에게서 과학과 수학을 배웠고 그 과목에 능통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는 동안 나는 두 학문의 기본 전제들이 모두 폐기되는 것을 보면서 살았다.… 그럼에도 새로운 가설의 발견자들은 ‘이제야 우리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고 선언한다.”—A. N. Whitehead, Dialogues of Alfred North Whitehead. 우리는 세상의 학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들을 수용할 때, 특별히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백히 모순될 때에 얼마나 주의해야 합니까?
※ 오직 말씀을 중심으로 그것들을 판단하고 수용할 것과 버릴 것을 선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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