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과 엘리후의 분노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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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6-11-28 14:34 조회3,120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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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과 엘리후의 분노
기억절: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첫째 날(일) 가엾은 위로자들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 겸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들이 창조되었으므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각자의 경험을 통해 나의 영역에서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경험의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전체를 말할 수 없을 만큼 크신 분이십니다.
욥과 3명의 친구들 그리고, 엘리후까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내용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과 성경의 지식의 단면 중 우리들에게 허락한 부분에서만 성령의 조명하에 진리를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신29:29)
드러나지 않았고, 내가 경험하지 못했고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있으며, 그런 것들이 채워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보다 초월해 계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겸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날(월) 엘리후의 등장
*도입질문: 욥과 세 명의 친구들의 논리에 대하여 엘리후는 그들의 잘 못을 지적하였지만 그 역시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엘리후는 욥과 세 명의 친구들이 이야기를 다 들었지만 흡족한 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름대로의 논리로 재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견해 역시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후 역시 인간이 가진 피조된 존재의 한계로 창조주와 영적 세계에 대한 일을 온전히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본질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겸손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본질은 티끌(먼지)입니다.(욥38:38) 흩어질 수밖에 없는 가련한 티끌이 사람의 본질이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 티끌로 흙덩이가 되게 하고 흙덩이가 서로 뭉쳐져서 사람의 형질을 이루도록 생명에너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붙어있게 함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존재하고 있고,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인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의존적 존재이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의 존재는 가치를 갖게 됩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사람들은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겸손해지며 동시에 자존감이 회복됩니다.
셋째 날(화) 엘리후가 하나님을 방어함
*도입질문: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방어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자신의 방어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견해를 주장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하고 배운 대로 양심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아무리 배운대로, 양심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할지라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은 사람들 스스로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생각대로의 하나님의 품성은 빗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하나님과 분리되어 태어나고, 그래서 하나님의 품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롬8:5-7)
하나님의 품성은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조명해주실 때에만 알 수 있습니다.(고전2:10-14)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깨닫고, 그 사랑에 감동될 때 그 사랑에 대하여 말할 것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나의 견해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 감동된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낼 때 사람들은 같은 감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넷째 날(수) 불의의 비합리성
*도입질문: 욥이 당했던 고난과 불행에 대하여 친구들의 해석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선과 악의 대논쟁에서 벌이진 일을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 배운 지식으로 해결하려고 함으로 하나님의 품성과는 반대되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가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면 언제나 바른 해석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엡6:12)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는 인간이나 피조물의 이해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계로 인한 것입니다. 피조물인 루스벨의 불의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의 품성을 이해하고자 함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피조물은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창조주의 창조와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조건에 의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피조물들은 자신들의 존재론적 상황에 근거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입장에서의 공의는 조건적일 때 공의가 됩니다.
그러나 창조주의 입장은 스스로의 생명으로 스스로 존재하시고, 창조주의 사랑을 주기 위해 창조하셨으므로 창조주는 피조물의 조건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생명을 주셔야만 피조물들이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품성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셔야 합니다.(행17:24)
그러므로 피조물의 한계인 조건적인 존재의 양식에서 창조주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해할 수도 없고, 공의롭지 못한 품성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것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조명하실 때 우리는 이해되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되고, 보게 되고, 감동됩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을 보게 될 때 우리 스스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느끼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다섯째 날(목) 믿음의 도전
*도입질문: 욥과 욥의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도전할 믿음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히11:1)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증거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조명하실 때 드디어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품성을 보게 되고 감동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품성에 대하여 감동될 때, 우리들의 현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생명적인 해석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흔들리지 않고 신뢰하게 됩니다.
보여지는 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감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이 시작되고, 점점 그 믿음은 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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