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그릇 교과묵상] 제 10과 엘리후의 분노(12월 2일 교과묵상/일~금 매일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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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작성일16-11-27 07:46 조회3,050회 댓글0건첨부파일
- 10과 통합-20161202.hwp (31.5K) 157회 다운로드 DATE : 2016-12-02 08: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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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금) 10과 “엘리후의 분노” 전체 요약
엘리후의 등장은 정체되었던 인물들의 대화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욥과 그의 친구들을 꾸짖었던 엘리후의 말 또한 결국 이전의 논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욥과 친구들은 서로의 논리를 앞세우며 치열하게 대립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논쟁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들 중 아무도 욥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의 내막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인간이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에 대해 말할 때에는 자신이 전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는 계시되었고, 열심히 말씀을 연구하는 자들에게 더욱 많은 빛은 비춰집니다. 하지만 많은 진리를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를 적용하는 최선의 방법을 가지고 있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실 때에만, 이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기별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 이것만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긴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던 엘리후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그에게 욥은 자신을 하나님보다 의롭게 여기는 뻔뻔한 사람일 뿐이었고, 욥의 세 친구 또한 많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욥을 설득하지 못한 무능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는 욥과 세 친구들 모두에게 분노했고, 이어지는 6개의 장(32~37장) 동안 그들이 풀어내지 못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설명을 자신만만한 어조로 풀어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욥에 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관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논증 또한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대화일지라도 참고 듣고 계셨던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때때로 한 사람의 진심을 오해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부당한 대접을 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인간을 향한 ‘무언의 설교’일 것입니다.
엘리후의 발언을 분석한 교과의 저자는 그가 앞선 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불안’의 정서를 내비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하시며 공의와 능력의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그들의 불안감이 그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능력, 선하심을 강조하며 하나님을 변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의 고통의 원인에 대한 엘리후의 결론 또한 욥이 심은 대로 거두었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역시 고통당하는 욥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방어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족한 논리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대신하려는 모든 시도야 말로 하나님에 대한 결정적인 잘못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엘리후를 비롯한 욥의 친구들은 어떻게든 욥에게 임한 불행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보려 애를 썼지만, 결국 잘못된 입장을 취하고 말았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의의 시작은 그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으며,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엘렌 G. 화잇의 말과, 하나님께서 완전한 환경 가운데서 창조하신 완전한 피조물이었던 루스벨이 불의에 빠지게 된 사실은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접근이 불가능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의가 이해되거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계획에 적합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불의나 비극일 수 없을 것입니다. 합리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것을 악한 것(불의)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부터 불의(죄)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타난 ‘무단 침입자’였고, 여전히 그 이유는 오묘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욥에게 닥친 불행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 일의 대쟁투적 배경을 알지 못하는 욥기의 등장인물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욥의 자원(自願)도 동의도 없이 일어난, 그의 의로움이 오히려 그에게 고통을 가져온 이러한 불행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내놓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욥기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필수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욥이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의 이유를 알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실하게 그분 곁에 머물렀던 것처럼,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에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자들만이 진정 ‘믿음의 사람’이라 불릴 자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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