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소망의 암시(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1/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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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11-26 08:19 조회6,605회 댓글0건본문
11월 26일 안식일
일몰 : 오후 5시 15분
기억절 :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욥 13:16).
연구 범위 : 잠 17:28, 욥 13:1~15, 약 2:20~22, 고전 15:11~20, 벧전 1:18~20, 창 22:8
영국의 수필가 윌리엄 해즐릿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웃고 우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 짓눌리는 유일한 동물이다.”
현실은 분명 이상과 다르다. 그러나 재림의 약속을 가지고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는 미래의 세계에 대한 큰 소망이 있다(벧후 3:13). 그 세계는 죄로 어두워진 지금의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매우 훌륭할 것이다. 이것은 세속에 젖은 우리 마음이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소망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계속해서 욥기에 나타난 고통의 문제를 탐구할 것이다. 그리고 부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불행 중에서도 여전히 희망의 언어를 말하는 욥을 볼 것이다.
그것은 어떤 희망이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초로 욥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를 찾는다.
➋ 느끼기 : 절망적인 고통 중에서도 믿음과 소망의 관계를 인식한다.
➌ 행하기 : 고통 중에 있는 자들과 대화할 때 절망이 아닌 희망의 언어를 선택한다.
A.
❷ 욥은 최악의 상황이 올지라도 어떻게 믿음을 지키기로 결심했습니까?
※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실지라도 그를 신뢰한다고 고백했다.
❸ 욥이 그러한 믿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 부활의 소망.
❹ 성경이 제시하는 소망의 기별들은 우리의 믿음을 얼마나 더 강화시킵니까?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다.(롬8:24)
B.
❷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 부활의 하나님을 믿고 그 소망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굳게 붙잡을 것이다.
❸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다는 사실은 어떤 확신을 불러일으킵니까?
※ 그 약속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위하여서도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을 준다.
결론 :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친구들의 암담한 연설과 욥의 비관적인 답변 사이에 갑자기 희망의 섬광이 번쩍였습니다. 그 섬광은 부활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소망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날(일) 11월 20일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 17:28).
우리는 욥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할 수 있지만, 그가 슬픔 중에 앉아 그저 친구들이 내던지는 말을 조용히 들으려 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욥기의 상당 부분은 진리와 오류가 뒤섞여 있는 주장과 그에 맞선 욥의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서 보았듯이 욥의 친구들은 그다지 배려와 동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욥에게 일어나는 일을 정당화시키면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한다고 주장했다. 즉 기본적으로 욥이 응분의 벌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사람으로도 충분히 상처를 받을 수 있었는데 세 사람(나중에 한 명이 추가됨) 모두가 욥에게 너무 많은 말을 퍼부었고, 욥은 그들의 말에 반박해야 했다.
1. 욥 13:1~14을 읽어 보라. 욥은 자신을 공격하는 말에 대꾸하기 위해서 어떤 접근법을 사용하는가?
[욥13:1~14]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5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6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보라 7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어 궤휼을 말하려느냐 8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 9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10 만일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 그가 정녕 너희를 책망하시리니 11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 12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13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 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14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답: 욥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변명하려고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결과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욥기 2장을 보면 욥의 친구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처음 7일 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들을 생각해 보면 그나마 이것이 최선의 접근법이었다. 욥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욥은 그들이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도 거짓을 말한다고 했다. 욥기의 마지막에 생길 일에 비춰본다면 매우 흥미로운 진술이다(욥 42:7). 틀린 것을 말하느니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그의 격한 불평에 맞서 그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을 방어한다고 생각했다. 욥은 왜 이 모든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어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친구들이 스스로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욥 13:4)가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부가설명> 욥의 친구들이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이 욥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변명하려고 하다가보니 하나님의 실상을 인간의 도덕적 표준으로 재어서 말한 것이다. 그들이 아는 하나님,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을 하나님의 참 상태인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우리도 많은 경우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잘못 나타내게 된다. 나는 때때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많아 봐주려고 애쓴다는 표현을 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잣대로 예수님을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욥이나 욥의 친구들의 생각이 별로 다르지 않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두고 욥이 죄를 짓지 않고는 이런 재난을 당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다보니 하나님이 신상필벌하시는 분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욥도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당하는 재난의 이유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 친구들처럼 곡해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욥의 생각인 것 같다. 생명과 존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도덕적 성품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우리도 욥이나 그 친구들과 같은 생각이 나오게 되어 있다. 조심해야 할 것이다.
교훈: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방어하기를 원했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실을 주장하다가 거짓말을 지어내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둘째 날(월) 11월 21일 그분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비록 그분이 날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믿고…”(욥 13:15, 쉬운성경).
우리는 이번 기 교과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욥기의 결말부터 보았다. 거기서 우리는 마침내 욥의 삶이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보았다. 욥은 참혹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진정으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욥기의 결말과 성경의 교훈을 알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욥이 상상할 수 있는 소망보다 더 큰 몫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음을 안다.
그러나 자녀가 죽고, 재산과 건강을 잃었을 때에 그는 상황이 어떻게 회복될지 알 수 없었다. 오직 그는 삶이 갑자기 험악해졌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욥은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또는 어머니의 태 속에서 바로 음부로 내려갔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하면서도 여전히 소망을 표현했다. 이 소망은 욥이 자신을 부당하게 취급하신다고 생각했던 분, 곧 하나님께 있었다.
1. 욥 13:15을 읽어 보라. 이 말씀 안에는 어떤 소망이 제시되어 있는가? 욥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욥13: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답: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일지라도 그분에게 소망을 둔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확증인가!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겪고도 그에게 일어나지 않은 한 가지 일, 마지막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인 죽음이 오리라는 것을, 그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죽을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분의 사랑이 주는 교훈들을 귀히 간직하라. 욥과 같은 믿음을 가지라.… 하늘 아버지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그분이 이전에 그대와 그분의 종들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기억하라”(The 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 1910. 10. 20.).
순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욥은 희망을 가질 만한 어떤 근거도 없었다. 그러나 욥은 인간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가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놀라운 믿음과 소망을 고백했을 때에 그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다.
<부가설명> 개역성경이나, 개정성경도 의미는 같은데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고 번역한 이 구절은 원어의 단어를 어떤 의미로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두 가지로 된다. 언어 본문 서두에 있는 ‘헨’을 ‘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소망이 없노라”의 ‘없노라’라고 번역한 ‘라’를 ‘아니다’, ‘없음’이라는 뜻으로 번역하면 개역성경처럼 번역 된다. 그러나 ‘헨’을 양보를 나타내는 ‘...일지라도’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라’를 ‘그에게’라는 의미인 ‘로’ 읽으면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할(소망할)것이다.’가 된다. 이것이 교과에 인용한 쉬운 성경의 번역이다. 고대 역본들 중 시리아 역본, 탈굼역 등은 두 번째 번역을 지지한다. 16절 말씀을 보면 두 번째 번역이 타당하다는 것을 더욱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소망의 구절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과 욥의 고백(19:25,26)등의 사상과 일치한다. 욥의 이런 믿음은 풀무불 속에 들어갈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한 증언과 같다. 그들은 풀무 불에서 그들을 구원하지 않아도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기를 바라고 신뢰했다. 욥이 많은 의문을 제기했지만 결국 그가 믿는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그것이 최선의 길이다.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신 분이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살려주시려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교훈 :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실지도 모른다는 생각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을 표현하였다.
셋째 날(화) 11월 22일 소망의 암시들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욥 13:16).
위의 말씀은 어제 우리가 나눴던 말씀 바로 직후에 나온다. 이 말씀은 욥이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가졌으며, 그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더 분명하게 확증하는가?
위대한 고백 뒤에 또 다른 위대한 고백이 이어졌다. 욥은 비록 자신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설령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실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여전히 믿었다. 한편으로는 역설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이치에 맞는 말이다. 어쨌든 구원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최소한 의인들에게 죽음이란 결국 영생의 부활 전에 잠깐 쉬는 것이고, 일시적으로 잠드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영생으로의 부활이 수천 년 동안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품었던 소망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욥의 소망이기도 했다.
1. 고전 15:11~20을 읽어 보라. 여기에 어떤 소망이 우리에게 제시되었는가? 이러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에게 아무 소망도 없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전15:11~20]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답: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은 부활의 소망으로 쉬고 있는 것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구원의 강한 신념을 표현한 뒤에 욥은 ‘하네프’가 그분 앞에 이르지 못하리라고 했다. 이 말의 어근은 ‘속된’, ‘경건하지 않은’이라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욥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 안과 그분께 신실하게 순종하는 삶에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욥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구원의 확신을 표현했던 것 같다. 비록 욥이 속죄를 위해서 신실하게 동물의 희생을 바쳤지만, 그가 얼마나 그것의 중요성을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십자가 이전의 믿음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욥 역시 십자가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아는 만큼의 온전한 구원의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욥은 구원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 안에 있으며, 희생 제물들은 이러한 구원의 성취 과정을 설명하는 표현임을 잘 알고 있었다.
<부가설명> 욥은 부활의 소망을 확신하고 있었다. 욥19:25,26에도 같은 소망을 고백하고 있다. 욥은 자기가 이런 재난으로 죽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죽어도 생명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의 종교는 생명과 부활의 종교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분이 생명이요 부활인 것을 증명하셨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살아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하여 온전한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영생의 생명으로 산 자의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생활하는 것이다. 영혼불멸설은 에덴동산에서 뱀이 한 거짓말이다. 이것을 믿는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라고 믿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가장 불쌍한 자라고 바울은 설파했다.(고전15:19)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증거가 부활의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고 했다.(고전15:17) 십자가 자체에서 속죄가 완성된 것이 아니다. 부활하셨을 때 속죄가 완성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15:17,18)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고 분명히 계시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성경의 계시를 바르고 정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했을 때 비로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욥은 이런 이치를 온전히 깨달았을까? 우리는 진정으로 깨닫고 있는가?
교훈 : 욥은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그분 앞에 나아갈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표현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인 부활의 소망이다.
넷째 날(수) 11월 23일 세상이 시작하기 전의 소망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욥과 같은 고통을 겪어봤다면 그와 같이 소망의 확신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고백은 그가 살아온 믿음과 순종의 삶이 사실이라는 불후의 간증이 되었다.
욥은 소망의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소망이 있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창 3장)에서 바벨론의 멸망(계 14:8)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죄성을 다루는 모든 추악한 이야기 속에서도 성경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소망과 비전으로 가득하다.
“세상은 그리스도에게 위탁되었으며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타락한 인류에게 이르렀다. 그는 성육신 후에도 구속주이셨던 것처럼 그 전에도 그러하셨다. 죄가 생기자마자 구주가 계셨다”(시대의 소망, 210). 우리에게 위대한 소망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면 누가 구주란 말인가?
1. 다음의 성경절들은 위에서 엘렌 G. 화잇이 묘사한 놀라운 소망을 어떻게 확증하는가?(엡 1:4, 딛 1:2, 딤후 1:8~9, 벧전 1:18~20)
[엡1: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딛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딤후1:8,9]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벧전1:18~20]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답: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것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된 것이라고 계시한다. 화잇은 이 구절들의 의미를 시대의 소망에 썼을 뿐이다.
이 성경절들은 놀라운 진리를 가르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인류가 죄에 빠질 것을 예지하셨다. 딤후 1:원어로 보면 우리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이다.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인류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실 계획을 수립하셨다. 그 소망은 우리가 그 필요성을 느낀 뒤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있었고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할 때 바로 제공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바라고 의지할 것이 많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요 3:16) 우리를 속량하시며(딛 2:14)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마 6:6)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히 7:25)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히 13:5),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리라 약속하시며(사 26:19),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요 14:2~3)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안에 살고 있다.
<부가설명> 위의 성경구절은 신학적 설명으로 본의를 그릇되게 나타내는 구절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학적 설명은 마치 우리가 타락한 후에 구원해서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을 창세전에 예정한 것처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을 그런 시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고 그래서 구원은 개인적으로 예정되었다는 예정론이 힘을 얻게 된다. 과연 그런 말씀일까? 성경 전체의 사상이나 여기 인용한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것은 한결같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임을 나타낸다. 영생의 소망은 창세전에 약속한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영생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을 때 이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을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잃어버린 생명이 이 영생의 생명이다. 이것은 창세전에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회복하셔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여호와라는 이름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약속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여호와로 이 세상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셔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 생명을 회복하게 된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신 사실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6:17)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은 보증된 것이고 그러므로 부활도 보증된 것이다. 할렐루야.
교훈 :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계획과 소망은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영원 전부터 마련되어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들을 바라고 의지하며 살 수 있다.
다섯째 날(목) 11월 24일 소망의 기별들
1. 다음의 성경절을 읽어 보라. 각각 어떤 소망을 드러내는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창 22:8).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단 7:22).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단 12:1~2).
답: 속죄와 부활과 영생의 약속과 소망을 계시하였다.
<부가설명>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시고 영원하신 존재이시다. 여호와라는 그 이름 안에는 그분의 피조물들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감당하시는 은혜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념적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 이름의 의미와 그 위대하심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호세아는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고 간곡히 호소하였다. 우리는 힘써 여호와를 알려고 해야 한다. 이 이름에는 성경의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 부모라는 이름에는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과 같다. 사람 부모는 유한하고 능력도 제한되었기 때문에 사망과 질병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감당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인다. 사망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것을 인간의 한계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 세상은 황금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부모는 안타깝지만 돈이 많이 드는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모라는 이름에는 이런 것들을 감당하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처럼 여호와라는 이름에 그분의 피조물에게 발생하는 어떤 일이라도 감당하겠다는 능력과 성취의 약속이 들어 있고 우주에 일이 발생했을 때 즉시 그 일을 시작되었으며 말씀하나님여호와께서 친히 그 일을 감당하셔서 이루신 것이다. 우리는 그 이름을 믿고 굴복하면 영생은 얻은 것이고 부활의 아침에 현실이 될 것이다. 그때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욥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 있도록 주 안에서 충실하자.
교훈 : 성경은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종말을 가리키는 예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하다.
여섯째 날(금) 11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망을 주는 위대한 진술로 가득하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창 9:16).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요일 3:1).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소망의 말씀 중에 그대에게 특별히 중요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속죄로 생명을 확보해주시고 부활로 그것을 누리게 하시는 약속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고 그분에게 충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➋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교리 중 그대에게 특별한 소망을 주는 교리는 무엇입니까?
※ 영원한 속죄와 죽은 자의 생명의 부활이다.
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시련, 불행, 역경을 당할지라도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소망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많은 소망이 제시되었는데도 눈앞의 사건 때문에 낙담하기 쉬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러한 소망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 안에서 기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눈앞의 사건이 현실적으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믿음으로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한다.
➍ 주님이 주시는 소망 안에 머물기 위해 찬양의 생활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찬양은 우리의 소망을 북돋우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든든하게 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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