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제4기 8과 무죄한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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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광진 작성일16-11-14 16:50 조회3,853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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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명심할 주요 사항>
질문, 핵심, 적용
<핵심>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중에서도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볼 때 승리할 수 있다.
*핵심어 : 보이지 않는 것
<토의 및 탐구를 위한 질문>
☆도입 : 당신이 기억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재장은?
⇒
일~화. 설명할 수 없는 재난
1. 욥 10:1과 같이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1-1. 욥이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2. “그대의 출생증명서는 그대의 유죄 증명서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3. 욥 15:14의 엘리바스의 말은 어떤 의미로 한 말인가?
3-1. 그러나 고통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보이고 너무나 부당하게 생각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보라.
수~목. 그럼에도 불구하고
4. 이해할 수 없는 재난이 언제 내게도 닥칠지 모르는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사는 것이 지혜로울까?
5. 실제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적용, 결심>
☆이번 과를 통해서 배운 교훈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겠는가?
<답을 위한 도움>
1.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불평에 대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고 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하나님께 불평을 계속 한다. 이는 모순된 행동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욥의 아내의 불평과 욥의 불평은 차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욥의 아내는 그의 가정에 임한 재앙을 보고 더 이상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싶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무지와 불신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고자 했다. 그러나 욥은 자기의 고통을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는 내가 당하는 시련이 너무 커서 견디기 힘들다며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붙잡고 애원하는 간절한 기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자의 모습이다.
힘들고 속상해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잠잠한 것이 의로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당신께 그대로 토로하기를 바라신다.
1-1.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신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당하는 상황을 더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힘들었다. 그는 사실 그렇게 무서운 재앙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2.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는 욥이라고 할지라도 죄와 무관한 사람은 없다. 「욥은 죄인이었다. 그는 무죄하지 않았다. 그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
욥은 그것을 인정했다. 욥은 단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자신의 죄에 비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3.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진리이다.
「또한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신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고난의 풀무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셨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순금에서 찌꺼기가 제거되는 것은 풀무의 열을 통해서이다”(부조와 선지자, 129).」
고난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여 더욱 겸손하고 참되고 신실하게 살도록 자극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3-1. 평소에 너무나 선한 사람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갑작스럽게 자연재해나 교통사고로 죽는 경우 등
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걱정을 앞당겨서 해봐야 도움이 안 된다. 내일 어떤 불행이 일어날지라도 미리 염려하여 오늘의 축복을 빼앗길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 때 가서 걱정할 것이요 내일 일은 주님께 맡겨버리는 것이 지혜요 믿음이다.
5.「그런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때이다. 아직 해답이 명확하지 않고, 우리 주변의 죄와 고통에서 아무 유익도 발견할 수 없을 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육신의 생각으로는 선악의 대쟁투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일을 이해하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영적인 눈이 필요하다.
평소에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에만 집착하고 사는 사람은 재난이 닥칠 때 쉽게 낙담하거나 믿음을 배반할 수 있다. 그 배후에 선악의 대쟁투가 개입되어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을 자주 보이지 않는 세계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아무리 어두운 먹구름 속에도 밝은 태양이 빛나고 있듯이, 어떤 답답한 상황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끌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을 때 원수들이 노략하는 때에도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다.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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