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그릇 교과묵상] 제 8과 무죄한 피(11월 18일 교과묵상/일~금 매일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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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작성일16-11-13 11:11 조회2,743회 댓글0건첨부파일
- 8과 통합-20161118.hwp (33.0K) 159회 다운로드 DATE : 2016-11-18 09: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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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8일(금) 8과 “무죄한 피” 전체요약
욥의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선함 때문이었고, 욥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이 사실은 욥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왜 선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적당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시했던 ‘회개’가 그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지구 역사에서 반복된 ‘무죄한 피’가 흘려졌던 사례들처럼 그는 자신 또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끊임없이 고라와 다단, 아비람에게 행하셨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도 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미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사람이었으므로(욥 1:8) 이러한 주장은 욥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억울한 마음을 키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입술로 범죄’(욥 2:10)치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억울한 고통에 대해 항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해 괴로워했던 그의 모습과는 별개로, 그가 자신의 고통의 원인, ‘자신이 너무 신실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은 오히려 그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인과응보’의 원칙대로라면 상을 받아야 할 자신에게 오히려 고난이 임했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다면 그 억울함이 얼마나 더 커졌겠습니까? 하지만 욥에게도, 비슷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괴로움을 겪는 우리들에게도 희망은 있습니다. 이러한 원통한 인간의 모든 사연을 듣고 계시며, 필요한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의 희망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계속되어 온 억울한 고통과 죽음을 설명하는데 있어, 이 ‘무죄한 피’라는 개념만큼 잘 어울리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무죄함’을 주장할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고’(왕상 8:46), 모든 인류는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으며’(시 51:5), 스스로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고 할 자는 아무도 없고’(잠 20:9),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므로(사 53:6),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 3:10)고 분명한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욥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자녀들이 결코 무죄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러한 극심한 고통을 당할 정도의 흉악한 죄를 저질렀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입을 연 엘리바스는 모든 인류는 물을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죄를 짓는 존재라고 말하며, 이러한 보편적인 인류의 죄성에서 욥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논리로 욥을 훈계합니다. 인류의 모든 고통이 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죄지은 인간이 고통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백성들을 고난의 풀무로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또한 ‘인간의 고난’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모든 고난의 이유를 쉽게 ‘죄’라는 공식에 대입하거나, 유익한 것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전히 고통의 이유는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에 대해 우리가 너무나 쉽고 단순한 결론을 내려 할 때마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과 동일한 잘못에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선한 이들의 갑작스러운 고난이나 억울한 죽음에 대한 기록들은 이 세상의 냉혹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거들은 이 세상의 삶이 공평하고 의로우며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면 고통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분명 ‘신실함’은 큰 보상으로 이어질 것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고통을 막는 장벽’이 될 것이라는 보증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먹고 입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필요에 대해 염려치 말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매일의 삶에 존재하는 괴로움을 시인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괴로움에 대해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은 이 고통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악의 대쟁투’라는 틀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능케 해 줍니다. 분명 사탄이 존재하며, 그의 존재 자체와 그가 인류에게 가져온 죄가 수많은 고통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더 넓은 시야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탁월한 틀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한 자들이 당하는 고통과, 하나님을 위해 신실하게 살아가던 이들의 불행과 갑작스러운 죽음과 같은 일들은 때로 우리의 말문을 닫아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야말로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때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인 믿음을 활용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때인 것입니다. 믿음의 증거는 받았으나 이 세상에서는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믿음을 지켜냈던 믿음의 조상들이야말로, ‘무죄한 피’에 대해 하나님께 항변했던 욥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대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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