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그릇 교과묵상] 제 6과 원인 모를 저주?(11월 4일 교과묵상/일~금 매일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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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작성일16-10-30 09:02 조회2,795회 댓글0건첨부파일
- 6과 통합-20161104.hwp (31.5K) 146회 다운로드 DATE : 2016-11-04 09:4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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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금) 6과 전체 요약
욥의 고통과 탄식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교과는 욥의 친구들의 등장으로 논쟁적인 분위기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실의에 빠진 욥을 위로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 그를 찾아온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과 함께 울었으나 결국 욥과 신학적인 토론을 벌이기 시작하고,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욥에게 고통을 더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욥기는 우주적인 대쟁투의 양상을 드러내는 처음 2개의 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욥과 친구들의 치열한 토론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깊이 있는 주제를 놓고 펼친 그들의 토론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욥에게 그를 괴롭히는 시련을 통해 하나님과의 더욱 깊은 관계 속에 들어가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분명 욥에게 닥친 시련은 사탄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시련을 역이용 하셔서 욥의 생애를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욥을 포함하여 시련을 겪은 이들이 갖게 되는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폭넓은 이해와 삶에 대한 성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돕기에 적합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 긍정적인 변화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시련이 ‘감춰진 축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보증일 것입니다.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는 욥의 고통 앞에서 ‘이러한 고통은 너의 악함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셔서 악인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욥 4:1~11)라는 말로 욥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냉정한 태도는 신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욥이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대한 무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장 욥에게 필요한 것은 ‘설교’가 아닌 ‘위로’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태도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과는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땅에 오셔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치유하셨던 예수님은 그의 삶에 감춰진 고통의 원인을 분명히 들여다보실 수 있는 분이셨음에도, 주님께서 먼저 하신 일은 그들과 함께 울고, 회복시켜 주심으로,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당하는 이들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마땅하겠습니까?
성급하게도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하고 있다고 단정해버린 엘리바스는 자신이 ‘밤에 본 ‘환상’을 근거로 이 땅을 살아가는 어떠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는 존재라는 주장을 이어갑니다. 그의 말은 맞는 이야기였지만, 문제는 그가 욥의 의중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욥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더 의롭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토로하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욥에 대해 너무나도 성급한 판단을 내렸고, 경우에 맞지 않는 말로 욥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말았습니다. 엘리바스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고, 그가 초자연적인 계시라고 여기는 신앙적 체험 또한 가지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방어하려는 열정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옳은 말’이었을지 모르나,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주장이 전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여러 부분이 범죄한 인류를 돌이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와 그 징계를 통해 돌이키는 자들에 대한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와 같은 기별들은 엘리바스의 논증이 대부분 성경에서 입증할 수 있는 신학을 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옳음’이 언제나 온전한 신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신학’이 ‘사랑’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흘러갈 때에만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론적 지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 십자가의 사랑이 더해질 때에만, 이 기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삶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적절치 못한 조언이나 위로를 건낼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이러한 실수가 생겨납니다. 엘리바스가 저지른 잘못이 바로 이러한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엘리바스의 주장은 사실 그 내용만 놓고 보면 대부분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의 충고는 그 내용의 사실성과는 별개로, 욥에게는 적절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주장과 같은 ‘경고’의 기별도 필요합니다. 성경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선지자들의 역할도 시대를 향한 분명한 경고의 목소리로 백성들을 깨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기별을 듣는 대상이 욥처럼 고통중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경고의 기별이 가장 먼저 전해져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진실’이라고 하여, 언제나 그 상황에 ‘적합’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별은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신중하게 선택되어 전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엘리바스의 경우처럼 듣는 사람의 상황을 오해하여 무분별하게 이러한 사실만을 강조한다면,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역효과만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최우선 되어야 할 것은 ‘위로’라는 사실은 엘리바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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