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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 그 날을 저주함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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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6-10-24 11:06 조회3,2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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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 그 날을 저주함

 

 

기억절 :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첫째 날(일) 그 날이 없었더라면

 

*도입질문: 욥이 일주일이 지나자마자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사단의 공격으로 인해 자녀들이 죽고, 재산을 다 잃고 자신도 몸에 악창이 나는 고통 속에서도 욥은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였습니다.(욥2:10) 욥을 위로하기 위해 세 명의 친구들이 왔지만 욥은 일주일 동안 아무런 불평이나 저주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 욥이 드디어 입을 열었는데 그 첫 마디가 바로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욥은 왜 일주일 동안은 아무런 불평의 말도 없이 묵묵히 지냈을까요? 또한 일주일 후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다는 것을 무슨 의미일까요?

 

욥은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하나님은 조건적인 사랑을 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서 복 주실 조건에 맞추는 삶을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식들이 죽고 재산이 없어지고 자신이 악창이 났을 때 그는 이제 어찌 된 일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납득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불만을 제기한다면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품성에 의하면 더 큰 벌이 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일주일을 꼬박 고민과 생각 속에 지낸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동안 아무리 자신과 자녀들을 생각해봐도 절대로 하나님의 벌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자녀들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것은 아니라는 확신 속에서 욥은 그래도 하나님께 대한 불만과 이해하지 못함에 대하여는 감히 이야기 하지는 못하고 자신의 생일을 저주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인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자신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셔서 이런 고통에 빠지게 하셨는가에 대한 간접적인 항의였습니다.

 

 

둘째 날(월) 무덤에서 쉼

 

*도입질문: 욥이 무덤에서 쉬기를 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무덤에 들어가면 더 이상의 생각이나 고민이 없어지기 때문에 욥은 무덤에서 쉬기를 원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의 이유를 일주일간 고민해도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엄청난 벌을 주실 만한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유는 전혀 모르겠는데 고통은 지속됨으로 욥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고민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야기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욥3:24)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의문과 고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만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께 직접 이야기하기를 원하십니다.(사1:18) 그런데 하나님께 나의 모든 문제(고민을 포함하여)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는 하나님은 절대로 나의 생각을 말한다 할지라도(그 생각이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라 할지라도) 벌주시거나 성내시는 분이 아니라고 믿을 때에 생깁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로 인해 자신이 가진 불만과 생각과 고민을 하나님께 말하지 못하고 있는 욥은 그러나 자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벌을 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벌을 받은 것과 같은 현실에 대하여 너무나 답답하여 차라리 무덤에서 쉬는 것이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셋째 날(화) 다른 사람의 고통

 

*도입질문: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동일하게 느낄 수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만 알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하여 우리는 직접적으로 동일하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에 대한 참된 위로는 그 개인을 개인적으로 알고 계신 하나님으로부터만 옵니다.

 

 

넷째 날(수) 베틀의 북

 

*도입질문: 베틀의 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베틀이란 명주 무명 모시 삼베 따위의 천을 짜는 틀입니다. 베틀의 북을 좌우로 빨리 움직이면서 천을 짭니다. 베틀의 좌우는 그리 넓지 않은데 왕복으로 왔다 갔다 하면 다음으로 넘어갈 때에 천이 짜집니다.

베틀의 북이란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합니다. 쏜 살 같은 세월도 같은 의미입니다.

 

세월의 속도에 대한 느낌은 모든 사람이 다 빠르게 느낍니다. 므두셀라처럼 인류 중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느끼는 삶의 속도 역시 80년을 사는 사람의 속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이 속도는 정확하게 흐르지만 사람들은 모두 빠르게 느낍니다.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될 때 내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고, 목적에 맞춘 삶을 살 때 가장 보람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들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새로운 영원한 시간이 허락됩니다.

 

 

다섯째 날(목) 마 에노쉬? (사람이 무엇인가?)

 

*도입질문: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욥의 바른 이해와 오해는 무엇이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욥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 7:17~18)라고 말하였습니다. 욥의 이 말은 바른 이해의 말도 있고 오해로 인한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라는 말씀은 바른 이해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사람은 큰 존재입니다. 큰 존재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보다도 더 귀한 존재입니다.(우리의 생명을 위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바칠 만큼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들 각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눈에는 마치 이 세상에 그 한 사람 밖에 없는 듯이 하나님의 마음을 채웁니다.

 

그러나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권징하지 않으시고 순간마다 단련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매일 하시는 일은 권징이 아니라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일입니다.(행17:25)

그리고 사단이 주는 시험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시험을 피할 지혜를 주셔서 사단이 주는 시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더욱 단단한 믿음을 갖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오해함으로 욥은 자신이 당한 고통을 사단이 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권징과 단련으로 생각하는 그릇된 해석을 한 것입니다. 아침마다 권징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차라리 무덤에서 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두려움만 가득하게 합니다. 두려움에 빠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종교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상관없는 사망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힘이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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