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그릇 교과묵상] 제 5과 그 날을 저주함(10월 28일 교과묵상/일~금 매일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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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작성일16-10-23 06:43 조회2,995회 댓글0건첨부파일
- 5과 통합-20161028.hwp (31.0K) 177회 다운로드 DATE : 2016-10-28 10: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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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금) 5과 전체 요약
어떠한 질병보다도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위기에 빠뜨리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는 ‘낙심’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었던 욥을 생명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으로 몰고갔던 원인이었습니다. 이번 주 교과는 그의 슬픔의 노래와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이러한 고민을 가감 없이 드러낼 뿐만 아니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고난의 문제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특별한 ‘지적설계’에 의해 조성되었고, 현재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유지되고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삶의 고통에는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위로는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욥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 그는 결코 하나님께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은 길’이라고 말했던 실레노스의 주장처럼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저주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내가 누리는 생명이 더 이상 날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절절한 심경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과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맡기시며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던 하나님께, 여전히 우리의 ‘살아있음’이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욥은 이어지는 그의 애가를 통해 ‘왜 내가 태어나자마자 죽는 행운을 가지지 못 했던가!’라는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며 ‘죽음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태도는 고대의 철학자들이 가졌던 ‘더 높은 차원의 영혼의 세계’로의 이동을 꿈꿨던 것과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의 삶이 제공하는 하늘에서의 행복한 삶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특권이나, 영적 존재들과의 즐거운 교제로 인해 ‘죽음’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욥 3:13)는 상태로서의 죽음, 즉 성경이 말하는 어떤 지적 사고, 감정, 활동도 없는 상태의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죽음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마지막 때의 ‘강신술’의 위험과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하려는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줍니다. 차라리 ‘죽음’이 제공하는 쉼이 더 가치 있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두 번이나 ‘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는 일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이들의 주장과 같은 ‘인간고통총량불변의 법칙’, ‘전 인류가 당해야 할 고통의 총량은 정해져 있어서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그만큼 다른 사람은 적게 받아도 된다’는 가설은 이러한 생각이 주는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사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이의 고통을 실제로 대신 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한 봉사가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치유하고 경감시킬 수는 있을지라도, 한 개인의 고통은 스스로 져야 할 짐인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 ‘바다의 모든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고 말했던 욥의 고통 또한 한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인류의 고통의 짐을 대신 지신 유일한 존재이셨으며, 이 사실은 주님께서 고통당하는 자의 유일한 희망이 되실 수 있는 분명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삶이 너무나 힘들어 ‘죽음’이라는 쉼을 바라던 욥은, 동시에 인생이 ‘바람’(욥 7:7)처럼 신속하게 지나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가진 모순과도 같은 현실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장수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수고와 고통을 겪으며 잃어버린 시간들로 인해 삶에 대한 아쉬움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속하게 흘러가는 이 인생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생을 위해 품성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베틀의 북’처럼, ‘바람’처럼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에게는 낭비할 시간도, 이기적 오락을 위해 쓸 시간도, 죄에 방종할 여가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을 둘러싼 모든 상황은 ‘선악의 대쟁투’라는 큰 그림 속에서 이뤄지고 있었지만, 이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과녁으로 삼으셨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욥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욥 7:17~18)라는 질문으로 그가 가진 의아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왜 크고 광대한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이 작은 지구의 한 개인을 상대하시는가?’라는 질문은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온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미천한 우리 인생에 깊이 개입하고 계신다는 상황인식은 우리가 ‘우주적인 대쟁투’의 한 복판에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신중하게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실은 동일한 표현을 기록한 시편 기자의 찬양(시 8:4~6)처럼 우리의 삶을 깊은 감사로 가득 채웁니다. 독생자의 생명을 내놓으시면서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에 대해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질문만큼 마땅한 반응은 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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