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그릇 교과묵상] 제 11과 폭풍 속에서 (12월 9일 교과묵상/일~금 매일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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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작성일16-12-04 07:54 조회2,605회 댓글0건첨부파일
- 11과통합-20161209.hwp (31.5K) 157회 다운로드 DATE : 2016-12-09 08: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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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금) 11과 “폭풍 속에서” 전체요약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욥 2:6)는 말씀을 끝으로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입을 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압도적인 말씀 앞에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토론과 논쟁을 지속하던 인간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율법을 선포하시는 장면(출 19:16~17)과,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왕하 2:1), 그리고 에스겔에게 하늘 보좌가 계시되었을 때(겔 1:4) 나타났던 그것과 유사한 강한 바람과 함께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 강한 바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을 때 강한 바람 후에 찾아온 “세미한 소리”(왕상 19:11~13)로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랜 시간 응답을 기다리던 욥을 향해서는 ‘똑똑히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더욱 분명하고 큰 소리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그냥 내버려 두시는 우리와 동떨어진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후사의 희망이 끊어진 아브라함에게(창 15:1~6), 죄의 두려움과 고통으로 씨름하던 야곱에게(창 32:24~32) 나타나셨고, 인류의 죄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심으로(요 1:29) 소망의 선물을 주신 분은 분명 우리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실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특별한 질문들을 던지십니다. 범죄한 인류를 찾아오셔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창 3:11)고 물으심으로 범죄의 결과를 알리려 하셨고,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고 물으셔서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우셨으며, 이세벨을 피해 도망하던 엘리야에게도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9)는 질문으로 신앙의 야성(野性)을 깨우셨습니다.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여 그리스도의 원수가 된 사울에게 하신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라는 질문은 한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를 바꿔놓은 질문이었으며, 제자들에게 하신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라는 질문은 자신이 메시야 되심을 분명히 알리셨을 뿐만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던지신 질문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 38:2~3) 또한 하나님에 대한 참 깨달음으로 욥을 이끄는 귀한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과 그의 한계, 무지를 대비시키는 웅변적인 질문의 소나기를 내리셨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 지니라”(욥 38:4)는 말씀을 시작으로 날씨와 별들을 포함한 창조 세계의 기이함과 신비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들, 그리고 야생동물의 삶에 이르기까지 어지러울 정도로 시선을 옮기시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욥을 향해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일을 이루었느냐?”, “네가 이것을 아느냐?” 이처럼 집요하게 계속되는 질문들 앞에서 욥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조 세계에 대해서도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논해왔던 욥은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욥 42:3)들에 대해 이야기해 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 앞선 지식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여전히 창조 세계와 그 기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제한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표현대로 인간에게 ‘나타난 일’이 적지 않지만, 여전히 ‘감추어진 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신 29:29). ‘나타난 일’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계속하여 늘어나고 있으나, 창조 사업은 하나님께서 결코 사람에게 나타내지 않으신 ‘감추어진 일’입니다, 그것은 현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인간의 과학 너머에 존재하게 될 ‘지존자의 오묘’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이 어리석게 여기는 방법으로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한 깊이를 측량하기 어려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고전 1:18~27). 누가 이 사랑과 이 귀한 진리를 세상의 약한 자들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섭리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사실에 압도된 욥은 손으로 그의 입을 가리우고(욥 40:4), 하나님께서 그의 앞에 나타나시자마자 지적하신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욥 38:2)가 자기 자신이었음을 고백합니다(욥 42:3). 더 나아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는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분명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사 6:5)와 베드로(눅 5:8)의 예에서 보듯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을 엿본 사람들은 예외 없이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고 움츠러드렀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한 자로 하나님의 칭찬을 들었던 그였지만, 그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역시 타락하고 죄로 인해 손상을 입은 존재로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본성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선한 생애를 살았던 욥과 성경의 인물들에게도 구주이신 예수님이 필요했다면,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더욱 간절히 주님이 필요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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