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그릇 교과묵상] 제 7과 응분의 벌(11월 11일 교과묵상/일~금 매일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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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작성일16-11-06 09:43 조회2,855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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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금) 7과 “응분의 벌” 전체요약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어떤 이들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만 치우쳐, 그를 위로하기 보다는 막연한 그의 죄를 찾아내어 뉘우치게 만들면 이 ‘고통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번과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들인 빌닷과 소발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빌닷은 잔인하고 거친 언사로 욥의 자녀들의 죽음이 ‘죄’ 때문이라고 단정 지으며 욥을 괴롭게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자녀들의 죄지을 가능성 까지도 염려하여 제사를 드렸던 욥의 모습과 대조되어 그가 얼마나 ‘가혹한 신앙인’인지, 어떠한 태도가 바른 신앙인의 모습인지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빌닷은 하나님의 성품 중 그가 바라보고 싶은 한 측면만을 주목하는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이러한 편협한 사고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드러내는 큰 잘못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면서도 동시에 자비로우신 분이시므로, 이처럼 한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태도는 결국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을 실족하게 만들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전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태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소발 역시 욥에게 감춰진 은밀한 죄가 있다고 단정 짓고, 그것을 밝혀내어 욥의 회개를 이끌어내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통은 그가 지은 죄에 비해 가벼운 것’이라는 그의 생각 또한 욥의 아픔을 돌아보기보다는 그의 죄를 지적하는데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소발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욥 11:7)는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욥이 당하는 고통이 그의 죄 때문이라는 성급한 결론으로 인해 빛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는 오만한 태도를 가진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도 없고,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도 없음은 소발의 ‘위대한 신앙고백’과 ‘욥을 향한 정죄’라는 ‘불협화음(不協和音)’이 우리에게 주는 의외의 선물일 것입니다.
사실 욥의 친구들이 계속하여 강조했던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며, 악인에게는 죄로 말미암아 징벌이 임하고 선인에게는 복이 임한다’는 주장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원칙 중의 하나입니다. 죄 지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 보내시고, 소수를 제외하고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노아 홍수 사건,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심판의 기록은 모두 죄를 끝내시기 위해 직접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록 이러한 심판의 기록 속에도 범죄한 인류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노아의 망치질 소리로 세상을 경고하셨으며, 의인 10명을 인해서라도 그 타락한 성읍에 대한 심판을 멈추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여전히 드러나고 있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삿 11:27)은 분명히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과 함께 ‘심판자 하나님’ 또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민 16장에 등장하는 반역한 고라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향한 심판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보응이었습니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삼상 12:15)는 경고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 심판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새 일을 행하사’(민 16:30)라는 말의 어근이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말과 동일한 어근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보응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분명히 순종한 이들에게 약속된 축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지만, 불순종한 이들에게 약속된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모습 또한 성경이 제시하는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변치 않으시며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복(福)’과 ‘화(禍)’라는 대조적인 두 가지 상황을 모두 가져오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바른 기초를 위한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아담의 후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첫째 사망’과는 전적으로 다른 ‘둘째 사망’이 있을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둘째 사망’의 날은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벌의 순간이며, ‘노아홍수’처럼 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한 심판과 멸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고라의 반역’, ‘둘째 사망’과 같은 성경의 증거들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고통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이 고통을 가져오기도 하고, 욥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이 고통의 이유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단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편에 서 계시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엔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의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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