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원인 모를 저주?(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1/05/16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6과 원인 모를 저주?(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1/05/16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10-28 21:46 조회7,181회 댓글0건

본문

11월 5일 안식일

일몰 : 오후 5시 30분

 

기억절 :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욥 4:17).

 

연구 범위 : 시 119:65~72, 욥 2:11~13, 욥 4:1~21, 롬 3:19~20, 고전 3:19, 히 12:5, 마 7:1

 

지난 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 자신을 욥의 처지에 둘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비슷한 처지에 놓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모두는 때로 영문을 알 수 없고 정당하지 않은 고통에 빠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남은 교과에서 이러한 관점을 유지하면서 또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 곧 욥과 함께 울며 슬퍼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의 관점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 또한 그렇게 어렵지 않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 아픔과 상실 가운데 있는 이를 위로하려고 애써본 적이 없는 사람도 없다. 우리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 슬픔을 겪는 이들에게 해줄 적당한 말을 찾으려고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욥기의 대부분은 욥과 친구들의 대화가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사랑이 넘치고 전능하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이 세상에 고통과 비극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욥의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의 역할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엘리바스가 욥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을 때 욥이 느꼈을 좌절과 상처를 이해한다.

➌ 행하기 : 성경의 권고를 간과하지 않고 동시에 남을 쉽게 판단하는 것을 삼간다.

 

A. 

❷ 욥을 위로하기 위해 온 친구들의 첫 행동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 경우를 가려서 위로를 해야 한다.

❸ 엘리바스가 꺼낸 말들은 신학적으로 대부분 옳지만 어떤 면에서 아쉬움이 있습니까?

※ 경우에 합당한 말이 아니었다. 신학적으로도 옳다고 할 수도 없다. 그 기초가 도덕론이기 때문이다. 

❹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할 때에 조심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 경우에 합당하게 말하도록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B.

❷ 엘리바스의 어떤 말들이 욥에게 고통을 더했을까요?

※ 죄 없이 재앙을 받는 일이 없다는 표현들이다. 

❸ 엘리바스의 접근 방식에 어떤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❹ 우리는 어떻게 바른 말을 할 때와 필요한 말을 할 때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 예수님의 지혜와 마음으로 대할 때 구분하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결론 : 친구들의 방문은 욥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학을 바탕으로 욥을 무자비하게 정죄하였습니다. 물론 그러한 신학이 완전히 그른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손쉬운 대답과 신학적인 일반화는 절대 고통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 될 수 없습니다.

 

 

첫째 날(일) 10월 30일 중요한 질문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욥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첫 두 장에서 나온다. 하늘과 땅 사이의 베일이 거두어진다. 그리고 그렇지 않았다면 감춰졌을 실상이 엿보인다. 천체망원경이 아무리 먼 우주까지 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수천 년 전에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근처의 한 광야에서 기록된 책으로부터 우리에게 계시된 공간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욥기는 또한 하나님과 천사의 영역과 천연계 곧 지구와 그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영역 사이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처음 두 장 이후에 욥기는 마치 TV 토론쇼처럼 진행된다. 즉 그냥 대화뿐이다. 토론 참가자는 욥과 친구들이다. 그들은 신학, 고통, 철학, 신앙, 생명과 죽음 등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펼친다.

욥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고려한다면 당연하지 않은가? 매일 경제 활동을 하며 일상적인 삶을 살 때에는 무엇이 크고 중요한 문제인지 잊기 쉽다. 영적 무력감에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고 중대한 질문을 제기하도록 자극하는 데는 시련만한 것도 없다.

 

1. 시 119:65~72을 읽어 보라. 시편 기자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시119:65~72]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66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69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70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답: 고난당하는 것이 주님의 법도를 바르게 배우는 기회가 된다고 고백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을 괴롭히는 시련에서 얻을 유익을 볼 수 있었다. 때로 축복은 시련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온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거나 그분께로 우리를 인도한다. 삶이 위기의 순간을 맞을 때 하나님께 돌아갔다거나 처음으로 그분께 굴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이다. 때로 혹독하고 끔찍한 시련도 시간이 지나면 선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것들이 변덕스럽고 무의미하게 보인다.

 

<부가설명> 고난은 자기의 실수로 당하는 수도 있고 욥처럼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당하는 수도 있다. 그것을 맞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본인에게 복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고난을 복이 되는 기회로 반응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4:1) 고난은 사람을 너그럽게 단련하는 기회도 된다. 이렇게 반응하지 않으면 고난은 짜증나고 원망하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욥의 인내를 배울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해도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기억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하는 기회로 선용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우리는 시련을 겪으면서 삶에 대하여 중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에는 축복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둘째 날(월) 10월 31일 언제 무죄한 이들이 망했던가?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7).

 

1. 욥 2:11~13을 읽어 보라. 욥의 친구들은 욥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욥2:11~13]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 칠 일, 칠 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답: 참혹한 현실로 인식하였다. 

 

욥에게 일어난 일들을 듣고 그들은 함께 약속하여 친구를 방문했다(욥 2:11).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것에 충격을 받고 그와 함께 애곡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앉아 침묵하였다. 욥과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욥이 입을 열어서 자신의 고충을 표현하자 친구들도 할 말이 많았다.

 

2. 욥 4:1~11을 읽어 보라.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의 요지는 무엇인가?

[욥4:1~1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3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4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6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답: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사상이다. 

 

만약 슬픔 치료에 관한 책 첫 장에 엘리바스가 등장한다면 그 장의 제목은 ‘슬픈 영혼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 좋을 것 같다. 물론 그가 욥을 동정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동정이 너무 멀리 갔다. 엘리바스에게는 신학적인 순수성이 단순한 위로보다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욥처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 상상이 가는가? “음, 당신이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은 당신 탓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악인만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설령 욥의 경우가 그렇다고 생각할지라도 그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속도위반으로 가족 모두를 잃은 운전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누가 그를 찾아가 곧바로 “당신이 속도를 위반한 죄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주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엘리바스의 발언의 문제점은 미심쩍은 신학이 아니었다. 욥 그리고 그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에 대한 엘리바스의 무감각이 더 큰 문제였다.

 

<부가설명> 엘리바스는 에서의 아들이다. 데만은 엘리바스의 아들로서 그의 이름으로 한 족속이 형성되었다. 빌닷이나 소발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엘리바스가 에서의 아들이니 에서의 야곱이 쌍둥이 형제이니까 아직 야곱에게서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 전의 사람이다. 당연히 욥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실은 고대 사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아는 것과 믿는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은 지역에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전적으로 도덕적 신앙이었다. 욥의 세 친구는 도덕적 종교와 신앙을 대표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고 욥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도덕적 종교는 상벌이 분명해야 한다. 교과 저자는 이것을 신학이라고 말했는데 성경 신학이 이렇게 정의된다면 성경의 종교와 신앙도 도덕적 범주에 갇혀버리고 만다. 엘리바스나 그의 친구들의 주장은 전적으로 인과응보 신상필벌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욥을 정죄하는 논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욥기는 이런 종교와 신앙 사상이 잘못된 것임을 욥과 그 친구들이 사건을 통하여 확실히 가르쳐주고 있다. 성경의 종교와 신앙은 도덕론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론과 생명론에 기초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자라는 뜻이고 그러니 당연히 생명자체이신 분이시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훈 : 욥을 찾아온 친구들은 처음에 아무 말 없이 그와 더불어 울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말로 시작된 그들의 위로는 오히려 욥에게 고통을 더했다.

 

 

셋째 날(화) 11월 1일 한 사람과 그의 창조주

 

정중하고 동정어린 서두의 발언으로 엘리바스는 아무 상도 받지 못하게 됐다. 기본적으로 그가 하려는 말은 만사가 형통했을 때는 욥이 다른 사람에게 빛과 위로가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행이 임하여 그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고통을 받지 말아야 했는가? 엘리바스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행이 임할 때는 응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1. 욥 4:12~21을 읽어 보라. 엘리바스는 욥에게 또 어떤 주장을 펼쳤는가?

[욥4:12~21]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 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16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17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18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20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21 장막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답: 엘리바스는 자기가 무슨 계시를 본 것같이 말하면서 계시 중에 음성이 사람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다고 말하고 창조자보다 성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창조주를 알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사람들이 천연계와 참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그 밖의 여러 흥미로운 주제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볼 수 있다. 욥기는 믿음의 선조들과 이스라엘 백성 이외의 백성들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음을 밝혀준다. 우리는 여기서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성품을 방어하려는 모습을 본다.

엘리바스가 “밤에 본 환상”(욥 4:13)에서 들은 내용은 여러 면에서 매우 건전한 신학처럼 보인다(시 103:14, 사 64:7, 롬 3:19~20 참고). 우리 인간은 티끌이며, 일시적이며, 하루살이처럼 쉽게 부서진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의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말은 진부하고 요점에서 벗어나 있었다. 욥이 안고 있는 문제는 그가 하나님보다 의로운지의 여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욥의 고충이 아니었다. 그는 주로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 상태인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 말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마치 욥의 말에서 이 모든 의중을 읽어 낸 것처럼 보인다. 즉,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불행은 악인에게 임하는 법이기 때문에 욥은 분명히 그가 겪고 있는 것을 당할 만한 일을 저질렀고 따라서 욥의 불만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방어하려는 열정이 넘친 나머지 엘리바스는 욥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에 대한 공통적인 지식뿐 아니라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만한 초자연적인 계시와 같은 특별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주장이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가설명> 엘리바스의 주장이 신학인지는 몰겠다. 그가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마음은 갸룩한 것 갔다. 그렇지만 엘리바스가 주장하는 것은 자기가 이해하는 하나님이다. 인간은 엘리바스는 그와 함께 온 두 친구들처럼 자기가 이해하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자기 이해의 논리 안에 하나님을 제한해 버린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지극히 도덕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도덕 속에 가둔다. 그렇게 갇힌 하나님은 권선징악 신상필벌을 하는 하나님이 된다. 그들은 사람이 당하는 불행을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지극히 도덕적인 하나님께서 그런 죄인에게 당연히 벌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며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은 정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형벌에서 벗어나려면 속히 도덕적으로 저지른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라고 권고한다. 그것이 그의 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의 주장은 욥을 괴롭게 하려는 의도가 없다. 욥이 속히 회개만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치유하는 처방으로 이런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말이 욥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한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바른 판단을 하고 있고 그것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도덕론적 종교와 신앙의 모습이다. 우리교회 의로운 성도들은 이런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이런 모습이 아닌가? 도덕적 종교와 신앙가들의 이런 모습은 사람들에게 성경의 하나님을 잘못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교훈 : 엘리바스는 하나님에 대한 고대인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신학을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넷째 날(수) 11월 2일 미련한 자들이 뿌리를 내림

 

욥기 5장에서 엘리바스는 그의 논증을 이어간다. 앞장에서 했던 말과 대부분 같다. ‘불행은 오직 악한 백성에게 임한다.’ 그러나 이 말은 합당치 않았다. 욥은 현재 자신이 불행을 당할 마땅한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듣는 욥의 감정은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엘리바스가 한 말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사상 중 많은 부분이 성경의 다른 곳에서 메아리친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은 욥기 5장의 정서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시 37:10).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잠 26: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눅 1:52).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고전 3:19).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시 33:19).

 

답: 위의 구절들은 엘리바스의 주장을 동의하는 구절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엘리바스의 주장이 상당히 성경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을 누구에게 주셨는지 생각하고 성경의 기록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살아있는데 도덕적으로 죄인 된 사람들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죽어서(고전15:22) 사망이 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받아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라고 주신 것이다.(요5:24)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을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주신 것으로 이해하면 모든 기사가 올바르게 풀어지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구절들이 살아 있는데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는 생명을 얻어서 살아날 것이고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망이 된 상태에서 존재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것을 사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수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지고 태어난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이라는 말이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이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사형이 면제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지만 이 말씀을 거절하면 사망이 기정사실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들인 것이다. 오늘날 모든 도덕적 악들은 사망이 되어 썩어져가는 구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인과응보도 아니고 신상필벌도 아니다. 그냥 죽어서 썩어져가는 상태일 뿐이다. 생명이신 하나님은 이런 상태에서 건져서 생명으로 옮기시려고 십자가의 고난을 친히 당하신 것이다.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이 설명이 어렵게 생각된다면 다시 한 번 숙고하기 바란다.

 

교훈 : 엘리바스의 논증은 대부분 성경에서 입증할 수 있는 신학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온전한 신앙은 신학적으로 옳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섯째 날(목) 11월 3일 성급한 결론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롬 2:1).

 

엘리바스가 욥에게 한 말은 대부분 옳다.(오직 도덕적 종교와 신앙관에서만 그렇다.-부가설명 한 사람의 말) 그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여러 가지 중요한 점을 짚었다. 그러나 욥에 대한 그의 반응에는 매우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 그의 말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가 말하는 문맥에 큰 문제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말한 진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않았다. (다음 주 교과를 참고하라.)

이 세계는 복잡한 곳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보고 거기에 적용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경구나 성경절을 내뱉는다. 그러나 어떤 때는 들어맞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다음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자초하는지에 대한 엘렌 G. 화잇의 언급이다. “성경은 명백히, 사람의 행위는 됨됨이의 결과임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일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사상과 행위의 열매이다”(교육, 146).

이는 심오하고 중요한 진리이다. 하지만 정말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성도라도 욥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가서 위의 엘렌 G. 화잇의 말을 어떻게 읽어줄 수 있겠는가? 이 증언의 말씀을 그냥 자신에게 적용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그분의 위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엄격하고 가혹하게 취급당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유혹의 압박을 받는다. 사탄은 그와 같은 영혼들로 더불어 싸우고 있다. 그러므로 거칠고 냉랭한 말은 그들을 낙담시키고, 그들을 유혹자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한다”(치료봉사, 163).

사실 현실에는 욥과 엘리바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일들이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대체로 옳은 것이었지만 엘리바스의 성급한 결론은 상황에 맞지 않은 잘못된 것이었다.

설령 엘리바스의 말이 옳고, 욥이 고난을 자처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말은 신중하지 못하고 시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욥은 모든 인류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대쟁투에 휘말려 있고 그 속에서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적절한 때에 잔소리가 아닌 사랑과 동정이 필요하다. 물론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삶의 기반을 잃고, 자녀들은 죽었으며,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잿더미에 앉아 있다면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다.

 

<부가설명> 기독교의 신학과 교리가 도덕론에 기초하여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며칠 전에 TV에서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보았다. 파우스트는 괴테의 불멸의 명작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이것을 각색해서 구노가 오페라로 작곡한 것이다. 그 작품은 영혼불멸설을 배경으로 쓰인 작품이다. 이것을 보면서 역사적으로 소위 명작들이 다 영혼불멸설을 바탕으로 쓰인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단테의 신곡이 그렇다. 밀턴의 실낙원도 그렇다. 헬라시대의 비극들, 그 유명한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도 그렇다. 사단은 이 세상을 영혼불멸설이 진리라고 굳게 믿도록 하는데 완전히 성공한 것 같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그렇다. 다만 성경을 전적으로 믿는 신앙에서만 그렇지 않다. 영혼불멸설이란 다른 말로 하면 영혼영생설이다. 영생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이기 때문에 감히 영혼영생설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같은 의미이다. 이 주장은 태초의 뱀의 주장이다. 곧 사단의 주장의 핵심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이 사상은 사람은 원천적으로 영생한다는 사상이다. 사망이 없다는 사상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100% 반대되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도덕적 삶을 강조한다.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지 않으면 지옥에서 영생하고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면 천국이나 극락에서 영생한다고 가르치는 사상이다. 사는 환경이 다를 뿐 영생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는가? 결코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적인 상태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을 도덕적 교훈으로 보고 권선징악, 인과응보, 신상필벌의 교훈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다른 세상의 도덕적 종교와 성경의 종교는 다를 것이 없다. 기독교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엘리바스나 그 친구들의 주장은 이런 도덕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욥도 그런 사상에 젖어 있다. 그래서 욥이 자기에게 임한 재앙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바르게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교훈 : 우리는 사탄과 씨름하고 있는 지친 영혼에게 가혹하고 냉정한 말을 퍼붓기보다 사랑과 동정의 말로 그들이 시험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여섯째 날(금) 11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엘리바스가 욥에 대해 동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성품을 변호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그의 동정심이 뒤로 밀렸을 뿐이다. 어쨌든 욥은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욥은 분명히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겪을 만한 일을 행한 것임에 틀림없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공의란 그런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욥은 불평해서는 안 되었다.

물론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것은 맞다. 그렇다고 이 타락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서 그분의 공의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공의와 심판의 때가 올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다(계 20:12).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지금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공의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가 엘리바스에게서 보았던 태도는 예수님을 대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신실하고 경건하기를 너무도 바랐던 나머지 주께서 안식일에 행하신 치유를 보고 그들이 느낀 분노는 병자들의 고통이 사라졌다는 행복감을 능가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질투한다면 다음의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사랑과 동정의 말을 해 줄 때와 잔소리나 책망을 해야 할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을 대할 때도 차라리 사랑과 동정의 편에 서는 쪽이 더 나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 그리스도인은 항상 상대에게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의 진수이다. 

 

➋ 욥기 4~5장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엘리바스의 말은 어느 경우에 더 적합할까요?

※ 고통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전체의 사상의 기초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➌ 욥과 같은 처지의 친구가 있다면 그대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대가 욥이라면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듣고 싶을까요?

※ 십자가의 사랑과 세상에 고통이 생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기회를 만들고 하나님의 살리시는 사랑을 전해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