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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복음을 듣지 못한 이를 향한 선교 ~2(질문, 대답, 설명) 12/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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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12-08 05:17 조회3,2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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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복음을 듣지 못한 이를 향한 선교 ~2

(12월 16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15분)

 

연구 범위: 왕상 11:1~6, 마 4:23~25, 마 15:22~28, 막 7:24~30, 행 10:34, 35, 마 8:10, 13

 

기억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사랑의 하나님은 태초부터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아오셨고(창 3:9) 오늘날도 동일한 사랑의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계신다(계 14:6~12). 그중 많은 이들은 도시에 살고 있다. 

2018년 유엔은 세계 인구의 55%가 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속된다면 2050년에는 이 수치가 68%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도시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현실이다. 

그러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도시에 증거하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요나처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그 일을 피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요나의 이야기 역시 오늘날 거대한 도시 앞에서 주저하는 우리를 위해 기록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이스라엘 안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방 지역, 즉 유대인과 선택된 백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봉사하셨다. 

이번 주에는 두로와 시돈에서 있었던 그리스도의 선교에 관하여 공부하면서 오늘날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아보자.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은 거대한 도시와 이방 지역에도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신다. 

느끼기: 이방인이라 불렸던 이들 가운데도 크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행하기: 편견과 자만심을 버리고 도시와 이방 지역으로 가서 믿음을 나눈다. 

 

TMI 위로

2. 예수께서 제자들을 두로와 시돈으로 데려가신 것은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습니까?(마 15:21)

*답: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편견을 없애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 전함을 알리려고.

3.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오늘날 도시선교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눅 19:41)  

*답: 예수님과 같은 연민으로 도시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4. 이방인 여인에 대한 마가의 기록은 다른 기록과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까?(막 7:26) 

*답:이 방인의 족속과 신분을 밝혔다.

5. 예수의 초림 소식이 두로 같은 도시에 널리 전해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답: 유대인의 편견 때문이었다.

6. 예수께서 대도시와 오늘날 세상 가운데서 보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눅 18:8)

*답: 믿음을 나누어주는 믿음 보기를 원하신다. 

 

결론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던 사람 중에 유대인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 없이 대하셨으며 모든 이들을 위해 구원의 은혜를 주신다. 주님은 거대 도시와 이교로 가득한 땅에 오늘날의 우리가 주님이 하신 것처럼 복음을 들고 나가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가로막는 편견과 자만심 등을 극복할 때에 우리는 이방 땅이라 여겨지던 곳에서도 참된 믿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2월 10일(일) 지경을 넘는 선교

 

예수님은 제자들을 게네사렛(마 14:34)에서 데리고 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마 15:21)셨다. 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이방 지역으로 데려가셨을까? 주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이방 지역으로 현장 학습을 떠나서 갈릴리에서 쉽게 배울 수 없었던 것을 현장에서 배우게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도시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교훈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이다.

 

사사기 3:1~6, 열왕기상 5:1~12, 11:1~6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이 도시들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삿3:1~6]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3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왕상5:1~12]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 2 이에 솔로몬이 히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3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4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5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6 당신은 명령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내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 할 것이요 또 내가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드리리이다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 7 히람이 솔로몬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르되 오늘 여호와를 찬양할지로다 그가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사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도다 하고 8 이에 솔로몬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이 사람을 보내어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거니와 내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에 대하여는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할지라 9 내 종이 레바논에서 바다로 운반하겠고 내가 그것을 바다에서 뗏목으로 엮어 당신이 지정하는 곳으로 보내고 거기서 그것을 풀리니 당신은 받으시고 내 원을 이루어 나의 궁정을 위하여 음식물을 주소서 하고 10 솔로몬의 모든 원대로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을 주매 11 솔로몬이 히람에게 그의 궁정의 음식물로 밀 이만 고르와 맑은 기름 이십 고르를 주고 해마다 그와 같이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고로 히람과 솔로몬이 친목하여 두 사람이 함께 약조를 맺었더라.

[왕상11:1~6]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3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4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답: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 섬기는 것을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남겨둔 이방 풍습에 물들었다. 특히 솔로몬 시대에 이방 나라들을 가까이 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결과로 솔로몬을 비롯해서 이스라엘은 진리를 속히 떠났다.

 

사사기 3:1~6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고대 민족들을 사용해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시험하셨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은 적어도 이 경우에는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삿 3:6). 처음부터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걸림돌이었다.

열왕기상 5:1~11에서 우리는 시돈 사람들과 히브리인들의 밀접한 관계를 볼 수 있다. 경제적 유대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히브리인들이 교역 상대국의 이교와 우상 숭배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 영향력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는 열왕기상 11:1~6을 보면 알 수 있다. 솔로몬왕은 시돈의 공주들과 결혼하였고 그들로 인해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왕상 11:5).

그러나 이교와 우상 숭배의 역사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나라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곳으로 데려가셨다. 

예수께서는 타문화 도시 선교를 통해 제자들이 갖고 있던 편견과 편협함을 돌아보게 하시고 세상 모든 문화와 국적의 사람들을 향한 온전한 도시 선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보이셨다. 

재림교회 도시 선교사들은 건강과 환경 그 외에 생활비, 인종 차별, 편견, 민족주의, 종교의 자유와 표현에 대한 제약 등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에 직면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시를 위해 일해야 한다.

 

<교훈> 이교와 부정적인 영향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시돈으로 데려가셔서 편견을 깨시고 도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직접 모본을 보이셨다. 

 

<부가설명> 성경의 종교와 신앙은 세상을 떠나 수련하는 신앙이 아니다. 세상에서 천국 복음을 전하고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에 태어나도록 전하는 신앙이다. 전도법에서 흔히 하는 비유로서 바다와 배의 관계가 있다. 배는 물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그러나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와 차면 침몰하고 파선한다. 교회는 사망의 바다에 떠서 사망의 물결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명선(生命船)으로 건져 올려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을 하는 생명의 하나님 기관(機關)이다. 사망의 바다를 주장하는 루시퍼가 심한 파도를 일으키고 광풍을 불어 배를 엎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배는 예수께서 운전하시고 생명줄은 성령께서 던지신다. 교회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생명줄 노릇을 해야 한다. 줄이 약하거나 낡았으면 사람이 잡고 오려고 할 때 바람과 파도로 인해 끊어질 것이다. 성경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오늘날 사탄은 이 교회를 총공격하고 있다. 영혼불멸설과 일요 주일 성수 설로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있다(고후2:17, 4:4). 남은 자손으로서 재림교회는 이런 세상의 풍조가 교회에 스며드는 것을 지혜롭게 막아야 한다. 오늘날 재림교회는 세속이 세게 밀려들어올만큼 많은 구멍이 뚫린 배가 아닌가 걱정이 많다. 역청을 안팎에 단단히 칠해야 할 것이다(창6:14).

 

12월 11일(월) 대중을 찾아서

 

안팎으로 도전이 있지만 예수님은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은혜 가운데 우리를 부르신다. 

 

마태복음 9:35~38을 읽어 보라. 그들이 어디에 있는 것과 관계없이 이 말씀은 대중을 향한 선교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마9:35~38]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답: 대중에게 전도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할 사업인 것을 가르친다. 그 일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오늘날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처럼 그 당시의 도시에 모여 살던 무리에게 연민을 느끼셨다. 누가복음 19:41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심지어 도시에 사는 '얼굴 없는 군중'까지 기억하시는 그의 사랑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마태복음 9:38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동기와 마음이 당신과 같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4:23~25을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 봉사를 시작하실 때 사람들은 어느 지역에서 나왔는가?

[마4:23~25]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 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답:갈리리, 예루살렘, 유대, 요단겅 건너편 사람들,

 

마태복음 4:25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갈릴리와 동쪽으로는 데가볼리 열개의 도시, 예루살렘과 남방의 유대에서 왔다. 여기에 사마리아 외에 어떤 지역이 빠져 있는가? 그것은 지중해에 닿아 있는 갈릴리 북서쪽 페니키아 지방의 두로와 시돈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 지역에 가셨는지 이제 알게 되었다.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의 여행은 예수님의 타문화 선교 여행이었다.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이 있은 후에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 갈릴리 바다를 건너 다시 베니게 변경에 있는 언덕의 한 마을로 가셨다. 

예수께서 서쪽을 바라보시니 거기에 이교의 신전과 장대한 궁전과 상업 시장과 선박으로 가득 차 있는 항구들이 늘어선 두로와 시돈의 고대 도성이 눈 아래 평지에 펼쳐져 있었다"(시대의 소망, 399).

 

<교훈> 예수님이 시돈까지 무리를 찾아 가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한 타문화 선교 여행이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얼굴 없는 군중까지 다 생각하고 계신다.  

 

<부가설명> 도시는 복잡하지만 또 생활의 편의점도 많다. 삶에 필요한 것들이 밀집해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밀집하니까 집이나 가게, 회사, 관공서 등등이 즐비하게 들어선다. 많은 사람이 생존경쟁을 하니 말그대로 생활 전선이 된다. 복잡하고 여유가 없다. 거기는 오락과 환락도 넘친다. 그러므로 생명의 도가 절실히 필요한 지역이다. 대형교회도 많다. 그런데 환경에 편승해서 진정한 복음은 별로 없고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순서들과 설교가 넘친다. 사람들은 교회 가는 것을 마치 극장 가는 것 같이 생활의 한 분야로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교인처럼, 나오면 신앙과 별로 상관없는 언행으로 생활하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이널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이 복음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 삶을 얽어매는 사상으로 생각하기 쉽지 않을까? 예수님은 그들의 현실적 필요를 채워주시면서 복음을 보여주셨다. 오늘날 남은 자손들은 어떻게 그들의 현실적 필요를 채울 수 있을까?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은 성령님 지혜를 간구해야 할 것 같다.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가족, 잘 사귄 이웃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편 대상,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복음을 생활로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2월 12일(화) 두로와 시돈에서

 

성경학자들은 마태복음은 주로 유대인 청중을 위해서, 마가복음은 이방인 청중을 대상으로 쓰여졌다고 믿는다. 복음서를 공부할 때 이러한 구분을 염두에 두는 것은 도움이 된다.

 

마태복음 15:22~28과 마가복음 7:24~30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에서 여인이 묘사된 방식은 어떤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가?

[마15:22~28]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막7:24~30]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답: 마태는 여자의 소속과 신분을 자세히 밝히지 않았고 마가는 자세히 기록했다.

 

마태가 이 어머니를 가나안 여인이라고만 기록한 것을 주목하라. 이와 달리 마가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 여인을 "헬라인" 또는 "이방인"이라고 하면서 성경에서 유일하게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 페니키아의 수리아인) 족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여인에 대한 독특한 추가 정보를 제공한다. 

마태복음 15장에 기록된 이 이야기가 그 독자들의 배경과 세계관을 통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마태의 독자들은 이 여인을 멸시받는 이방인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는 독자들에게 가나안 족속이 우상을 숭배하는 무리로서 그들의 악한 생활 방식과 관습이 오랫동안 유대 민족의 걸림돌이 되어 왔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조차도 이 여인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가복음의 이방인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 대해 마태복음의 청중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가나안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방인들은 이 여인을 그저 페니키아에서 태어난 수리아 혈통의 헬라인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이방인 중 한 사람을 고쳐 주신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이 여인은 자신의 민족적, 국가적 배경과 상관없이 딸의 생명을 염려하여 주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한 사람의 어머니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인의 요구에 즉시로 응답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으레 그렇게 하였으리라고 생각되는 태도로 이 멸시받는 민족을 대표하는 자를 응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이 이러한 경우에 나타내었을 법한 냉정하고 무정한 태도를 생각하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후에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심으로 그 여인을 받아들이시고 동정하는 태도를 보이시고 이를 통해 고통당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제자들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이 일을 계획하셨다”(시대의 소망, 400).

 

<교훈> 제자들조차 이 여인을 믿음과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여인의 배경과 관계없이 고통당하는 자를 구원하시고 간청을 들어주셨다. 

 

<부가설명> 구원받을 자가 개인적으로 예정되었다는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은 깔벵주의의 오대강령 중에 셋째 강령인 예수님의 속죄가 구원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제한된 속죄론(Limited atonement)을 주장한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사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들만 구원한다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이방인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온 세상 사람들은 예외 없이 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요3:16). 인종이나 신분이나 아무런 관계없다. 예수님은 유대 사상에 젖어있는 제자들의 이런 편견을 깨뜨리기 원하셨다. 그래서 말로 설명하기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 두로 시돈 지방으로 여행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주신 복은 그의 자손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미칠 복이었다(창12:1~3).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을 때 이스마엘과 이삭만 같이 받은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 집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다 하례받았다. 아들 둘 외에는 다 아브라함과 혈통적 관계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한 복(영생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12월 13일(수) 그녀를 쫓아내라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도시 지역에 희망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수님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두로와 시돈 같은 이방 도시에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전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민족주의, 자부심, 편견이 예언된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소망을 갈망하는 그들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오늘날 도시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재림의 "복된 소망"(딛 2:13)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많은 사람이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국적이나 인종에 상관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

 

사도행전 10:9~16, 28, 34, 35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성령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어떻게 요약하겠는가?

[행10:9~16]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행10:28,34,35]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답: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기지 말라.

 

점심때 즈음에 베드로는 부정한 동물과 새들로 가득 찬 식탁보가 내려오는 환상을 보았다. 그는 이 환상에서 일어나서 먹으라는 말을 세 번이나 들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 대한 베드로의 종교적 자부심과 편견을 깨트리기 위해 이 환상을 사용하셨다. 베드로는 결국 이 진리를 깨달았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 35).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두로와 시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교훈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과 그 여인과의 상호작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라. 제자들은 이 현장 학습에서 베드로의 환상과도 연결된 어떤 교훈을 얻었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의 삶과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때의 부르심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도시 사람들의 필요를 보지 못하게 하는 편견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도시를 향한 우리의 사명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우리의 편견과 민족주의, 영적 교만에 기꺼이 맞서도록 어떤 계기를 주셨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이 한 국가나 한 변방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임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치셨다. 성령은 우리가 도시선교를 완수할 수 있도록 우리의 편견과 성향을 극복하게 도와주실 수 있다.

 

<교훈> 두로 같은 이방 도시에 예수의 초림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편견, 교만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런 편견을 깨시고 제자들을 이방 도시로 보내셨다.

 

<부가설명> 우리는 다 편견을 가지고 있다. 편견이 절대로 없는 공평함은 사람에게는 찾을 수 없다. 재림교인들은 재림교인으로서의 편견을 가지고 있다. 절대로 편견없는 공평함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재림교회가 깨달은 말씀의 원칙을 따라 제칠일을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고 복을 주신 안식일은 제칠일이라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기독교 교단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킨다. 그들의 눈에 재림교회는 율법적 편견에 빠져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런 지적을 받아도 우리가 믿는 진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우리가 깨닫고 지키는 도리를 굳게 지키면서 우리와 같지 않은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성령의 지혜로 하는 것인지 기도로 그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 독선적인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행한 것처럼 상대가 믿는 사실을 존중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삶을 칭찬하는 예의가 필요할 것이다.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던 베드로의 태도에서 성장배경과 너무나 당연하게 익숙해진 무의식이 얼마나 강한 굴레인지 느끼게 된다. 주님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습관의 굴레에 매이지 않고 바울의 모습으로 전도에 임하는 것이 삶이 되게 해주소서.

 

12월 14일(목)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누가복음 18:8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렇게 물으신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예수께서 무엇을 보기 원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도 빛나는 믿음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8:10, 13, 9:2, 20:29~34, 마가복음 2:5, 10:46~52, 누가복음 18:35~43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는가?

[마8:10,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마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20:29~34]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막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10:46~52]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눅18:35~43]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답: 로마 군인 백부장,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 맹인 바디메오 등이다. 그들은 자기 처지와 사람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손을 벋은 사람들이다. 

 

이 목록에는 어두운 도시에서도 빛나는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을 보여준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몇몇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마태복음 8:10, 13에서는 회심한 이교도 백부장의 큰 믿음을 본다. 마태복음 9장에서는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오기 위해 지붕을 허물었던 믿음이 충만한 네 친구를 만난다(마 9:2, 막 2:5).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이전에 눈먼 자였으나 이제는 믿음의 빛으로 여리고를 밝게 비추는 바디매오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유대인들 가운데도 이런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조차 믿음이 부족하거나 심지어 노골적인 불신을 나타내는 행동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제한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 이스라엘에 대해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여러 번(마 6:30, 마 8:26, 마 14:31, 마 16:8)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17:17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시며 안타까움을 표현하셨다. 

우리가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한 가지 교훈은 믿음은 예상치 못한 곳, 즉 도시에서 외국인, 이교도,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예수님처럼 도시로 들어가 진리를 제시하면서 예수께 구원의 믿음으로 응답할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부르심에 순종해 나가보면 실제로 그들을 만날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 이방인 가운데서 큰 믿음을 발견하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믿음은 종종 예상치 못했던 대도시, 이교도,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발견된다. 

 

<부가설명> 사람들에게는 다 믿음이 있다. 성장하는 모든 과정은 믿음을 훈련받는(하는) 과정이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한 발자국도 떼어놓지 못한다. 믿음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무의식이 되어 작용한다. 우리가 딛고 사는 땅이 꺼지지 않을 것을 믿는다. 잠자리에 들 때 잠을 잘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않는다. 아침에 깨어날 것도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잠자지 못할 것이다. 자녀들은 자기를 기르는 사람이 아버지 어머니라는 것을 믿는다. 어린이가 부모를 지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냥 믿고 맡긴다. 그렇게 자라는 모든 과정은 믿음 훈련 과정이 된다. 창조주께서는 사람이 믿음을 훈련하도록 섭리하셨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믿음이 무의식으로 작용한다. 인간관계도 믿음의 관계이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이 창조주에게 향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창조주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확실히 소개하셨다. 그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실히 주장하셨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계신다(요일2:23).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전도다. 바울은 헬라 시인의 말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면 아버지라는 것을 설명했다(행17:28,29). 이 믿음을 우리는 칭찬하며 예수님을 소개하는 지혜를 구하자. 

 

12월 1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유대인들이 이교인이라고 칭하던 사람들 중에 메시아에 대한 성경상 예언을 이스라엘의 교사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던 자들이 있었다. 그분이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오실 것을 소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철학자들은 히브리 사람의 제도의 신비함을 깊이 연구하려고 힘썼다. 그러나 유대인의 완고함은 빛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했다"(시대의 소망, 33). 

"전능하신 구세주이신 주 예수께서 이 영혼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분은 무관심에서 그들을 일깨울 수 있고, 그들로 연민을 가지게 하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실 수 있고, 영혼에 진리의 아름다움과 권능을 드러내실 수 있다. 거장이신 하나님은 사람처럼 부족함이 전혀 없으시지만 그분은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전할 대리자로 사람들을 부르신다. 하나님은 모든 교회에 보석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므로 종교계 전반을 전면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그보다 겸손과 사랑으로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우리가 경건과 헌신을 보여주고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을 나타낸다면 사람들은 진리 가운데로 나올 것이다 … 그들은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높이고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이다"(엘렌 G. 화잇, 리뷰 앤 헤럴드, 1893. 1. 17.).

 

토의를 위한 질문

1. 당신이 사는 지역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당면한 필요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답: 사람들을 접촉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2.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엘렌 화잇의 권면을 살펴보라. "하나님은 모든 교회에 보석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므로 종교계 전반을 전면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사람들을 부당하게 폄하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가진 오류를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겠는가?

*답: 그들의 상태를 인정하면서 배우려는 정신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바울의 전도 모습을 잘 관찰할 필요가 있다.

3.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예수님의 이 수사학적 질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믿음과 신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올바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재림하실 때 믿음이 없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자신을 예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신념은 자기를 신뢰하는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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