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권세자들을 향한 선교(질문, 대답, 설명) 12/02/23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11-23 14:13 조회3,226회 댓글0건본문
제9과 권세자들을 향한 선교
(12월 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14분)
연구 범위: 단 4:, 왕하 5:1~19, 요 3:1~12, 요 7:43~52, 마 19:16~22, 요 19:38~42
기억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여전히 오늘날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진리의 계시이다. 성경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진리를 말하고 있다. 1세기의 유대인이건, 오늘의 한국인이건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이다. 여기에는 부자와 권세자도 포함된다. 성경시대에나 지금이나 부자와 권세자들은 부와 명예, 권력을 추구하며 종종(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약자들을 희생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구원만큼이나 부자와 권세자의 구원에도 관심을 갖고 계신다. 성경에는 권세자이거나 부자이거나 혹은 둘 다였던 인물들의 흥미로운 예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셔서 열방에 복을 주신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브라함, 이삭, 욥, 솔로몬, 요셉 같은 사람들이 그 좋은 예이다.
이번 주에는 부자와 권세자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셨으며 오늘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을 어떻게 부르시고 준비시키셔서 그들을 향한 증인이 되게 하시는지 함께 살펴보자.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며 부자와 권세자도 구원하기 원하신다.
느끼기: 부와 권력보다 더 고귀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소망이다.
행하기: 부자와 권세자들에게 맞는 방법을 활용하여 한 걸음씩 주님께 인도하도록 기도하고 노력한다.
TMI 위로
2. 느부갓네살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진리를 나타내고 있습니까?(단 4:34-37)
*답: 국권을 잡은 권력자도 창조주를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3. 나아만에 대한 엘리사의 대답은 새신자를 대하는 어떤 지혜를 알려줍니까?(왕하 5:17-19)
*답: 급하게 높은 표준을 따르라고 밀어붙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4.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은 이에게 선교할 때 무엇을 기억해야 하겠습니까?(요 3:3-8)
*답: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깨우쳐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
5. 예수님이 부자 관원에게 재물을 다 팔라고 하신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마 19:21)
*답: 그가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인 것을 지적한 것이다.
6. 먼저 관계 맺기 힘든 권세자들은 어떻게 대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겠습니까?(마 27:57)
*답: 존경하는 태도로 삶의 모습을 보여줘서 그들이 접근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좋다.
결론: 예수님은 모두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부자와 권세자들에게도 구원이 필요하다. 인간의 본성은 같다. 부와 권력보다 더욱 고귀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소망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능히 낮추시고 마음에 감동을 주실 수 있다. 변화가 필요한 것을 아시는 주께서는 그들을 한 걸음씩 인도하시며 우리가 지혜와 노력을 다해 그들을 위해서도 일하기를 원하신다.
11월 26일(일) 느부갓네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보편 속죄"를 믿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일부 기독교인들과 달리 우리는 그 속죄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딤전 2:4)기에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요일 2:2)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셨다.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여부는 각 개인에게 달려 있지만 모든 사람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엡 1:4) 이미 선택받았다. 그렇기에 성경에서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다니엘 4장을 읽어 보라. 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이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세를 가졌던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답: 느부갓네살이 짐승과 같은 상태에 빠진 7년간의 사건 끝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세상나라를 친히 통치하신다는 진리를 깨닫고 굴복한 사건이 기록되었고, 깨닫고 굴복하면 다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를 나타낸다.
느부갓네살 왕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절대권력을 가진 불신자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예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하셨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에게 집행되었다(대하 32:25, 26, 왕상 14:21~31, 삼상 28: 참조). 제정신을 차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한 느부갓네살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약하고 궁핍한 사람만 아니라 부자와 권력자들도 돌보고 계심을 보여준다. 37절에서 이 땅의 최고 권력자는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단 4:37)고 선포했다. 세상 모든 부유하고 권세 있고 오만한 사람들이 이 진리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은 다니엘과 같은 충성된 신자들을 권세 있는 불신자들에게 다가가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권세 있는 불신자들을 향한 증언의 과정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부심과 오만으로 가득했던 느부가넷살을 겸손하게 만드셨다.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는 매우 극적이지만 부자와 권력자,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다른 방법도 많이 있다.
<교훈> 하나님은 높은 권세를 가진 자도 능히 낮추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주신다. 충성된 그리스도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부가설명>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정치적이나 경제적으로 권세를 가지지 못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도 창조주를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루시퍼와 같이 자신을 지극히 높으신 자와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므로 결국 자기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왕권을 가지지 못했으나 결국 자기 왕국을 가지고 자신도 스스로 존재한다는 주장은 창조주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탄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천사들이라도 피조물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존재하게 하신 분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반역이 없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주께서는 그들에게 창조를 취소하신다. 오래 참으셔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창조주께서 보시는 정당한 그때에는 그들의 창조를 취소하신다. 그것이 심판이요 결과는 창조되기 전 상태인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느부갓네살 같은 권력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느부갓네살과 같은 처지에 빠진다. 느부갓네살은 꿈이 이루어지는 경험으로 마침내 깨닫고 창조주께 굴복하였다. 누구든지 이렇게 굴복하면 그는 하나님의 창조를 영원히 유지할 수 있다.
11월 27일(월) 나아만
그리스도는 배경, 부, 인종,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상의 권세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를 끊임없이 자신에게로 이끄신다(사도행적, 416 참조).
열왕기하 5:1~19을 읽어 보라. 주님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왕하5:1~19]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15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16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17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8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19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
*답: 포로된 이스라엘 소녀가 나아만 가정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삶으로 보여주었고 결과 아람 군대장관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만났고 섬기게 되었다.
열왕기하 5:17~19에서 나아만은 두 가지 요청을 했다. 첫째,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노새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스라엘에서 수리아로 가져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왕하 5:17)노라고 선언했다. 나아만은 지금 분명히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의 첫 번째 요청은 이교도의 영향이 여전히 그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수리아 사령관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마치 토착 신들과 같이 그 땅과 함께 경배해야 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나라에 가면 이스라엘 땅 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했다.
나아만의 두 번째 요청은 그의 신앙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그는 오직 하늘의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심했지만 우상 숭배를 하는 자신의 나라에서 그런 결심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당시 수리아 왕은 림몬 신을 숭배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나아만은 여전히 왕의 호위관 역할을 할 것이었다. 나아만은 자기 나라 왕에 대한 의무를 저버릴 수 없었지만, 자신이 림몬을 경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나아만은 이방 신에게 절함으로써 여호와께 드린 마음을 우상 숭배에 굴복하거나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 엘리사에게 전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엘리사는 나아만의 간청에 "평안히 가라"(왕하 5:19)고 응답했다.
“이 말을 나아만이 작별하면서 한 요청을 승인하거나 거절하는 표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아만은 의심이나 쉼 없는 불확실성이 아닌 평안 중에 떠나야 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며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배 속에서 행복과 평안을 찾아야 했다. 나아만은 갓 회심한 신자로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새로 발견한 믿음에 매달린다면 그의 능력과 지혜가 자라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새 신자를 한 걸음씩 인도하며 어떤 문제에 개선이 필요한 적절한 시기를 아신다. 이것은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원칙이다"(SDA 성경주석, 4권, 495).
<교훈> 영혼 구원에 있어 하나님은 새 신자를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 온전치 못한 사소한 행태가 있을지라도 주님은 그의 믿음이 자라는 때를 기다리며 인도하신다.
<부가설명>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사는 것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도록 감동하셨다. 그가 세상에서 섬기는 왕이 그의 신을 섬기려고 신당에 들어갈 때 자기가 호위하여 함께 신당에 들어가는 것을 묵인하셨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의 본지를 점점 밝게 깨달으면 자기 삶을 깨닫는 대로 시행할 것을 아시고 기다리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는 구도자가 예수님을 믹었을 때 성급하게 성숙한 성도가 하는 것과 똑같이 생활하라고 압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흔히 초신자가 파트락에 교회에서 권장하지 않는 음식을 만들어 왔을 때 그들에게 반응하는 신자들이 범하는 허물에 관한 경고가 된다. 조용히 묵인하면서 지혜롭게 대하는 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엘리사의 대답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쇠뿔을 단김에 빼라고 하지만 오랜 신자 생활에도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하면서 초신자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 같은 인상은 아주 조심해야 한다. 전도는 참으로 온유와 겸손과 인내로 다가가야 하는 신앙 모습이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람들을(특히 비기독교 배경을 가진) 너무 성급하게 밀어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11월 28일(화)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기: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학식 있는 사람이었다. 성경은 그를 유대인의 지도자라 말한다(요 3:1). 예수는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불렀다(요 3:10). 그는 성경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주를 향한 영적 갈망이 있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모든 계명을 지켰고 유대인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그는 권세와 부를 가졌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신 표징으로 여겼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었다.
요한복음 3:1~12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니고데모의 영적 필요와 예수께서 그 필요를 어떻게 속히 해결해 주셨는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요3:1~12]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답: 니고데모는 복음의 실상을 알지 못했고 예수님은 그것을 거듭나야 한다는 진리로 깨우쳐주셨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왔을 때 그는 겉모습, 즉 현상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배경이 어떠하든지 모든 부자와 권력자의 마음과 필요를 아신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못했지만 그날 밤 그는 완전히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확신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7:43~52과 요한복음 19:3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요7:43~52]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45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요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답: 공회가 예수님을 공격하고 정죄했을 때 예수님을 옹호했고, 제자들이 다 도망갔을 때 나타나 예수님을 장례했다.
여기서 우리는 니고데모가 분명히 예수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그분을 보호하려 했고 돌아가신 후에도 그분을 공경하려고 애썼다.
대단한 지식과 지혜의 소유자였던 니고데모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구세주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셨다.
<교훈> 외면상으로는 문제없는 이의 내면에 있는 필요를 예수님은 아셨다. 변화 없는 듯한 니고데모의 마음에 예수님은 이미 찾아오셔서 변화를 시작하셨다.
<부가설명>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고(요3:1~7)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고후5:17). 그러므로 구원을 위한 충분한 지식이 있고 심지어 세 천사의 기별까지 잘 안다 해도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에 동참하지 못한다. 성경이 구원의 보편성을 잘 계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출생과 관련하여 계시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구원이 보편적이듯이 사망도 보편적이다. 오늘날 교회는 믿음과 행함이라는 두 교리를 놓고 혼란을 겪는 것 같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의 계시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로마서의 진리를 바르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은 필자의 착각일까? 이 두 진리는 중생이라는 진리에 포함된 것이다. 이것은 출생과 생활이라는 것으로 계시한 것이다. 사람이 산 상태로 출생하면 생활하게 된다. 즉 행동하게 된다는 말이다. 야고보는 이것을 가르쳤다. 믿으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어 있고 그러면 그는 생명으로 출생하였다. 그러나 당연히 생명의 생활이 있게 된다. 이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행함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11월 29일(수) 부자를 향한 선교
마태복음 19:16~22을 읽어 보라. 니고데모와 달리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이 사람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마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답: 자신의 처지를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과 해결은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데만 있다는 것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영생을 잃는다는 것, 곧 부자가 구원의 초청을 받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과 젊은 부자 관원의 대화는 부가 얼마나 위험한 덫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물론 이 말씀은 부자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으면 재물은 정말로 구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종국에는 같은 결과, 즉 무덤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부자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돈으로 그 어떤 것도 살 수 있는 것 같지만 죽음을 면제케 할 수는 없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간구하는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예수님의 선물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
누가복음 19:1~10을 읽어 보라. 젊은 부자 관원에 관한 이야기와 삭개오의 이야기는 어떤 점이 다른가?
[눅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답: 삭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즐겁게 받아들여 구원받았다. 그는 재물을 영생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던 젊은 부자 관원과 달리 삭개오는 예수님의 부름을 따랐다. 예수님은 부자 관원에게 하신 것과 달리 삭개오에게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부자 관원이 얼마나 돈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아셨기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계실 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삭개오는 분명히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을 경험하였고, 자신의 삶에 변화가 필요하며, 특히 자신의 재산과 관련하여 더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교훈> 부자에게 재물보다 더 필요한 것은 구원의 소망이다. 예수께서 부자 관원에게 권면하신 것은 재물이 구원의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가설명> 세상에는 보물이 많다. 그러나 어떤 보물도 목숨보다 보물일 수는 없다. 천만금을 가졌어도 목숨을 잃으면 그것이 본인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런 것들은 목숨이 있은 후에 비로소 가치가 있다. 예수께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 이 사실을 명백하게 나타내셨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9~21). 비유 속의 이 부자처럼 오늘날 보물 되지 못할 보물을 취하려고 정말 보전해야 할 보물 목숨을 헛되게 버리는 자들이 많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는가. 전도는 이 보물을 공짜로 받으라고 가리치는 것이다. 이 보물을 가진 경험이 있어야 보물이라고 힘있게 전할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요3:16). 목숨과 바꿀 것은 결코 없다.
<적용> 내게 하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해결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11월 30일(목) 권세자를 향한 선교
예수님은 권세자들과 친구가 되는 방법을 알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많은 권세자들로부터 칭송과 존경을 받는 동시에 그들에게 멸시를 받기도 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러 온 권세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많은 부자와 권세자들이 예수님을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찾아온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도 마찬가지였다.
마태복음 27:57~60을 읽어 보라(막 15:43~47, 눅 23:50~53, 요 19:38~42 참조). 이 구절들은 분명히 예수님에게 영향을 받은 부자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셨는지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마27:57~60]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답: 그들이 예언의 성취를 확인하고 예수님을 믿었고 필요할 때 합당하게 봉사했다.
성경은 이 장면 이전에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이 부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예언을 성취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을 위해 부자들을 사용하셨고 앞으로도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자들에게도 선교해야 한다.
힘 있는 사람들과 친교를 맺는 일은 아마 어디에서부터 시작할지가 가장 어려운 단계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 것이 좋다. 대신 그들이 당신에게 오게 하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그들은 예수님의 기별과 치유의 능력,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능의 증인이 되었다. 그들은 그분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막후에서 확신했다.
힘 있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가치 있는 사역에 함께하고자 한다.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선한 일에 그들도 동참하게 할 때 그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부자와 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진실한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이런 일은 그들 자신도 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 방법을 통해서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필요를 공개하지 않고도 그들이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은밀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도록 시간을 내어보라.
<교훈> 권세 있는 자들은 사람을 돕는 진실하고 의미 있는 사역에 함께하기를 원한다. 이 사역을 함께 하는 것은 그 마음에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는 기회가 된다.
<부가설명> 사람이 호흡이 멈추는 것과 함께 그의 재산은 그와 아무 상관이 없어진다. 재산이나 지위나 명예는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 유용할 수 있고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다.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을 찾아 가지면 그보다 부유할 수 없다. 진시황이나 한무제가 다 불사를 갈망했지만 이름만 남기고 다 흙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부를 누가 가져갔는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8~11).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39:6). 그러므로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 자가 최후 승리자이다.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삼일만에 부활하셨으니 다시 죽을 수 없는 생명으로 살아나시고 그분을 믿는 자들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전도는 이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12월 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치료봉사 209~216의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읽어 보라.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의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나 동일하다. 그분은 빈곤한 자만 아니라 왕자를 위해서도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고 경고하셨다. 이번 주에 우리는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도전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자신의 부가 '안정'을 준다는 믿음 때문에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 있지만 그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구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관하여 많이 논의되고 있다. 그렇다면 소외된 부자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부유층의 사람들을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본다… 수많은 부자들이 영혼의 필요에 대한 아무런 경고도 받지 못한 채 무덤으로 들어갔다. 외관상으로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부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혼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치료봉사, 210).
토의를 위한 질문
1. 예수께서는 지상사역 동안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실 때 사회적 지위와 그에 따른 장벽을 허무셨다. 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모든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빈부 격차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답: 예수님의 정신으로 대해야 할 것인데 사회분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다.
2.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재물의 유혹"이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부자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재물에 속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재물은 세상 사는 동안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많을수록 쾌락과 안락을 누릴 수 있기에 죽을 목숨의 안락을 위하여 그것을 따라가게 된다.
3. 교과 시간에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에 의해 구원받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라.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인가?
*답: 구원은 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다신 출생하는 것이다. 진리의 지식이 중생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아가 죽어야 된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4. 젊은 부자 관원은 예수님을 거절한 반면 삭개오는 예수님을 받아들인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는 관리였다. 그가 부를 흩어 가난한 자에게 구제한 것은 그가 하늘나라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