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그릇 교과묵상] 제 7과 믿음에 이르는 길(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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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작성일17-08-06 09:52 조회2,951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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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금) 7과 “믿음에 이르는 길” 전체요약
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복음과 상호 모순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 둘을 분리시키려 하지만, 율법은 죄인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이미 복음 안에 거하는 자들이 믿음의 길에서 이탈할 때, 그들을 바른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예비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이 던지는 “율법이 약속과 모순되는가?”라는 질문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되는 분이 아니시므로, ‘약속’과 ‘율법’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각자 다른 역할과 기능을 맡고 있을 뿐 서로 충돌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율법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원천이며,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줄 것이라는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거하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언약 안에서 삶을 규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갈 3:22)다는 표현은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 누구도 영적으로 소생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었다고 말했습니다(갈 3:23). 교과의 저자는 이 말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우리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다’는 말이며, 이 표현에 사용된 ‘율법 아래’라는 말이 문맥에 따라 ‘율법의 권세아래’에 있다는 의미(갈 4:21)와 ‘율법의 정죄 아래’(롬 6:14~15)에 있다는 두 가지의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그의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모든 인류는 율법의 정죄 아래 갇혀 있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율법 아래”로 번역되지만, 문자적으로 ‘율법 안에서’라는 뜻을 가진 ‘엔노모스’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율법의 요구 안에서 살아가는(고전 9:21) 이상적인 율법과의 관계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며 그 정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바울은 이 율법이 일반적인 생각처럼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려 했습니다. 실제로 ‘매이다’(갈 3:23)라는 표현의 문자적인 의미는 ‘복종시키다’, ‘감시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보호하다’, ‘지켜주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어서 긍정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주어진 제사제도는 그 자체가 죄를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궁극적으로 죄를 해결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었으며, 십계명에 부가된 민법들 또한 타락한 이방의 감화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초등교사’에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어 ‘파이다고고스(paidagogos)’에서 온 말로 ‘훈육자’, ‘가정교사’, ‘후견인’등의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종의 노예였지만, 주인의 아들을 전반적으로 돌보면서, 그들을 훈육하는 역할까지도 맡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초등교사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율법 역시 인간을 보호하고 지켜주지만, 동시에 인간을 꾸짖고 죄인으로 정죄하여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역할 또한 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초등교사가 하고 있는 ‘돌봄’과 ‘훈육’이라는 두 가지의 일이 보여주듯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유익을 위해 함께 일하도록 설계된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갈 3:25)다는 바울의 설명을 율법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롬 8:3)는 뜻이지 율법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결코 인간에게 ‘죄 지을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 안에서 행함’이라는 표현으로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 이러한 변화된 삶을 묘사했습니다(갈 5:18). 이것은 율법을 우리의 심령에 기록하시며(히 8:10), 우리 안에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시는(롬 8:4),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율법에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새로운 율법과의 관계’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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