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박해받으나 버림받지 않음(질문, 대답, 설명) 0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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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12-26 12:49 조회39회 댓글1건본문
제1과 박해받으나 버림받지 않음
(1월 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26분)
연구 범위: 엡 3:1; 고후 4:7-12; 행 9:16; 빌레몬 15, 16; 골 4:9; 빌 1:1-3; 골 1:1, 2
기억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한 재림교회 목사가 거짓 혐의를 쓰고 수감되어 거의 2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처음에는 크게 당황했지만, 그는 감옥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선교지임을 깨달았다. 동료 수감자들이 그가 목사임을 알게 되자 설교를 요청했다. 그는 설교했고 서적도 나눠주었다. 심지어 수감자들에게 침례를 베풀고 성만찬도 집례했다.
‘감옥에서 사역한다는 것이 때때로 힘들었지만, 기쁨도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도가 응답되고 삶이 변화되는 것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라고 그는 고백했다.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서와 골로새서를 썼다(빌 1:7, 골 4:3 참조). 실제로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는 부당하게 고발당했고, 간수는 그들의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으며(행 16:24), 한밤중에 그들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행 16:25) 들었다. 진실로 그들은 “항상 기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번 주 우리는 바울이 겪었던 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배후에 더 큰 목적이 있음을 보았다. 우리도 불가피하게 시련을 겪게 될 때, 바울을 통해 이 사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핍박과 투옥을 겪으면서도 바울은 주님을 생각하며 그 교회를 위해 전략적으로 일했다.
느끼기: 고난 너머에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으며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
행하기: 어려움 중에도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주님을 기억하고 더 큰 계획을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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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살든 죽든 주를 위한다는 바울의 고백은 그의 상황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줍니까?(빌 1:20)
*답: 어떤 환경에서라도 바울은 주님의 뜻을 수행한다는 말이다.
3. 어려운 환경 속에도 바울이 스스로 낙담하지 않았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습니까?(고후 6:7)
*답: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병기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4. 바울이 네압볼리에 도착하였지만,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행 16:12)
*답: 복음 센터를 지역의 중심지인 빌립보에 세우기 위하여.
5. 바울은 어떻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골로새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까?(행 19:10)
*답: 복음 중신 센터에서 전할 때 골로새 사람이 와서 듣고 세웠다.
6.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나타냈습니까?(빌 1:8)
*답: 예수님의 심장으로 그들을 사모한다고 했다.
7. 복음을 위해서 마다하지 않고 수고한 일의 가치는 무엇에 의해 평가될 수 있겠습니까?
*답: 그 열매들과 또 훗날 주님께서 평가하실 것이다.
결론: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생명까지 위협을 받았다. 그런 중에도 바울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낙담하지 않고 주께서 하신 일을 기억했다. 그 일을 통해 주님은 그것이 아니면 닿을 수 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그는 복음을 전략적으로 전했으며 그 일을 통해 가보지 않았던 골로새까지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다. 그의 우선순위는 교회의 성도와 새신자를 훈련하고 돌보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복음 전파와 교회의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
12월 28일(일)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 바울
빌립보서와 골로새서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썼기 때문에 '옥중서신'이라고 불린다(나머지 옥중서신은 에베소서, 빌레몬서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편지가 바울이 로마에 갇혀 있던 서기 60-62년경에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행 28:16 참조).
에베소서 3:1과 빌레몬서 1장을 읽어보라. 바울이 감옥에 갇힌 자신을 묘사한 방식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는가?
[엡3: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몬1: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답: 바울은 예수님의 일로 이방인을 위하여 갇혔다고 말한다. 그는 감옥에 갇힌 것도 예수님의 일을 하는 일부라고 해석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데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분을 섬기다가 감옥에 갇힌다 해도 그는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울은 자신을 “쇠사슬에 매인 사신”(엡 6:20)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선교 여행을 하며 교회를 세우고 주님을 위한 일꾼들을 훈련했다. 그는 ‘이 쇠사슬이 없다면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고 스스로 물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 목회서신으로 불리는 디모데후서를 쓸 때도 그는 감옥에 있었다. 따라서 신약성경 중 적어도 다섯 권의 책은 감옥에서 기록된 것이다.
옥중서신 중 어느 것도 바울이 어디에 투옥되어 있는지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에베소나 가이사랴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에 투옥되었다는 증거는 성경에 없다. 가이사랴는 이보다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이 도시에서 바울의 생명이 위협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분명히 그런 위협이 있었다(빌 1:20, 빌 2:17 참조).
이 서신은 바울이 투옥 당시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한 몇 가지 단서들을 제공한다. 첫째, 편지는 관저(Praetorium)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했던 곳(마 27:27, 요 18:33)인 예루살렘의 관저나, 바울이 투옥되었던 가이사랴(행 23:35)와 같은 로마 속주 총독의 공식 관저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단어를 분명히 장소가 아닌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그는 “온 시위대”(Praetorium)(빌 1:13)에게 복음이 알려졌다고 말한다. 로마에는 황제를 보호하고 죄수들을 경비하던 약 14,000명의 정예 병사들이 있었다.
둘째, 바울은 “가이사의 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인사를 전한다(빌 4:22). 이는 바울이 로마에 수감되어 있었고 황실을 섬기는 이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교훈>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감옥에 갇히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은 바울은 그런 중에도 로마 친위대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의 집과도 연결되었다.
<부가설명> 바울은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다 예수님의 일을 하는 현장이나 과정으로 이해하고 충성했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하는 데 전념했다. 복음 전하는데 어려운 일이 없었다. 감옥에서도 복음 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그렇게 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빌리보 감옥에서 간수와 그 가족들에게 복음 전한 사실이 기록되었다. 빌리보서에도 가이사의 시위대 사람들과 가이사의 집 사람들에게 복음 전한 사실을 기록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는 장소나 사람들의 상태에 개의치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고백했듯이 바울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께서 바울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고전15:10 참고). 그는 자기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라고 고백했따(갈2:20). 그리스도인은 이런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했다. 죽은 자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큰 일도 보람된 일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해서 하나님께 황송하기 그지없다.
12월 29일(월) 사슬에 매인 바울
바울은 마게도냐에 있을 때 여러 차례 옥에 갇혔던 일을 언급한다(고후 6:5, 고후 11:23, 고후 7:5). 최초로 기록된 사례는 빌립보에서였다(행 16:16–24). 나중에 그는 예루살렘에서 잠시 투옥되었다가 가이사랴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결박 중에”(몬 10, 13, 흠정역)라고 언급한다. 로마에서는 가택 연금 상태였지만, 로마 정예 병사에 의해 사슬로 묶여 있었다. 그와 같이 결박당했던 2세기 초의 기독교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병사들에 대해 “잘 대할지라도 더 악랄해지기만 하는 … 야수들”이라고 묘사했다(마이클 W. 홈즈 편, Michael W. Holmes “사도 교부들”, 미시간: 2007, p231).
고린도후서 4:7-12을 읽어보라. 이 구절은 바울이 직면한 시련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의 삶의 초점은 무엇이었는가?
[고후4:7~12]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답: 예수님의 생명이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 삶의 초점이었다.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바울은 밝은 면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이 고통을 견딜 용기를 주었다. 사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퍼부었어도 바울은 자신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고린도후서 6:3-7을 읽어보라. 바울은 이러한 어려움을 감당하는 데 도움이 된 어떤 영적 자산을 가지고 있었는가?
[고후6:3~7]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답: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환경, 약점, 과거의 실패를 바라보며 스스로 낙담한다.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우리가 악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모든 놀라운 예비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서 배우고, 그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신 일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마음을 순결하게 만드신다. 성령을 통하여 신자는 하나님의 품성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유전적이고 후천적인 악의 성향을 이기게 하고 당신 자신의 품성을 당신의 교회에 새기는 거룩한 능력으로 당신의 성령을 주셨다”(시대의 소망, 671).
<교훈> 환경과 자신을 바라보며 낙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배우고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새길 수 있다.
<부가설명> 무슨 일을 당할 때 우리들은 맨 먼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령님의 인도를 생각하는 것은 한참 후가 아닌가? 내 경험으로는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바울의 생애는 그렇지 않은 것을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우리도 바울처럼 맨 먼저 예수님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닐까? 바울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들은 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런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잘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그것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는데도 우리 의식에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요한 15:1~12에는 예수님 안에 있는 것과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은 그분의 말씀이 나를 전적으로 주장하는 것임을 나타냈다. 예수님은 그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다(요1:1, 계19:13). 그러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전적으로 주장한다면 그는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 이 말씀이 현실이 될 것이다.
12월 30일(화) 빌립보의 바울
바울의 두 번째 선교 여행 중, 디모데가 합류한 직후 성령은 그들이 소아시아를 지나서 계속 나아가는 것을 금하셨다(행 16:6). 그러던 중 밤에 환상을 통해 바울은 어떤 사람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간청하는 것을 보았다(행 16:9). 이에 그들은 즉시 마게도냐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로 향하여 드로아에서 에게해를 건너 유럽 대륙의 네압볼리로 항해하였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 디모데, 그리고 드로아에서 합류한 누가(행 16:11)는 그곳에서 전도하지 않고, 곧장 빌립보로 향했다.
복음 전도 활동에서 바울은 항상 전략적으로 생각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에서 첫째가는 도시”(행 16:12, 우리말)였다. 실제로 빌립보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도시 중 하나로, 도시에 부여되는 최고 지위인 ‘이우스 이탈리쿰’(Ius Italicum, 이탈리아의 친구)의 영예를 부여받았다. 빌립보 시민들은 토지세와 인두세가 면제되고,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자동으로 로마 시민이 되는 등 마치 이탈리아에 있는 도시와 같은 특권을 누렸다. 또 이곳은 로마와 동방을 연결하는 주요 육로인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의 중요 거점이기도 했다. 이곳에 중요한 기독교 거점을 구축함으로써 그들은 인근의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 인근 여러 도시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행 17:1, 10 참조).
흥미롭게도 1세기 빌립보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으며, 이는 라틴어 비문이 두드러지게 많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빌립보서 4:15에서 바울은 심지어 그들을 라틴어식 이름처럼 들리는 '필리페시오이(Philippēsioi, 빌립보인)'로 칭하며 그들의 특별한 로마 시민권을 인정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시장과 주변 마을 및 도시에서는 헬라어가 통용되었으며, 복음이 전파되는 수단도 헬라어였다. 누가는 바울 일행이 강가에서 기도하면서 만난 무리 중에 루디아와 그 가족이 회심한 사건을 기록한다(행 16:13-15).
루디아는 사업가(“자색 옷감 장사”)였기에 바울의 빌립보 사역의 중요한 재정 지원자였을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그곳의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또 다른 한 가족 - 간수의 가족 전체가 회심했다. 성령께서는 비록 박해가 있을지라도 빌립보가 유럽 전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이상적인 교두보가 될 것을 아셨다. 박해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아니었다면 닿지 못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교훈> 바울은 마게도냐의 거점도시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지만 그 일을 통해서도 그것이 아니면 닿지 못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다.
<부가설명> 바울의 봉사를 통하여 볼 때, 주님의 일과 관련하여 당하는 시련은 다 의미가 있다. 그런 시련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빌립보 감옥에서나 로마 감옥에서나 그곳에 준비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름으로 개인의 일을 도모하다가 닥치는 시련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관계없기 때문에 그 시련을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닥친 시련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곤난을 당하는 일이 있다. 언제나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그러나 말씀을 따라 순종하지 않음으로 닥치는 시련에 관하여서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데 아주 알맞은 세상이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으로 살아는 사람에게는 삶 자체가 시련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과 쉼없이 기도하는 마음과 항상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귀한 일이다. 바울은 자기가 받은 사명이 고통이 따를 것을 이미 알고 굳게 섰다. 빌립보를 전도 기지를 택했을 때 감옥 행은 이미 예견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능력의 결과를 얻었다.
12월 31일(수) 바울과 골로새
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한 기록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은 오히려 그의 전도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다시 말해준다. 첫째, 골로새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골 1:7) 골로새 사람 에바브라(골 4:12)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회심하였을까? 가장 유력한 시기는 바울이 인근 에베소에 머물면서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행 19:10, 행 20:31 참조) 들었다고 한 서기 50년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지역에 복음이 얼마나 널리 전파되었는지 증언한다(계 1:4). 골로새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을 포함한 이러한 성공은 소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이자 거점 항구였던 에베소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처음 듣고 회심한 사람들의 사역의 결과라는 설명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에바브라는 에베소에서 바울의 전도를 듣고 그의 동역자가 되어 고향인 골로새에 복음을 전했다.
라오디게아에서 남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골로새는 최근에야 발굴이 진행 중이어서, 이 지역의 더 유명한 도성들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다만 “브루기아 지역에 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거주했다”(아서 G. 패치아, Arthur G. Patzia, 새 국제 성경 주석, 피바디, 1990, v10, p3)는 기록으로 미뤄 상당수의 유대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골로새에서 주조된 동전들은 다른 많은 로마 도시들처럼 그곳 사람들이 다양한 신을 숭배했음을 보여준다. 이교적 관습과 그것의 강한 문화적 영향은 분명 그곳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어려움을 주었다. 도시를 복음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복음의 순수한 믿음을 충실히 따르는 것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골로새에서 잘 알려진 또 다른 그리스도인은 빌레몬인데, 그는 에바브라와 거의 같은 시기에 회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빌레몬서 1:15, 16을 읽고 골로새서 4:9도 살펴보라.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하라고 부드럽게 권고했는가?
[몬1:15,16]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골4: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답: 사랑받는 형제로 두라고 했다.
로마법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바울은 동료 신자로서 빌레몬의 마음과 양심에 호소하며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형제로 대하라고 요청한다(빌 1:16).
<교훈> 골로새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에바브라였다. 그는 아마도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던 때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의 고향 골로새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것이다.
<부가설명>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은 누구든지 육체대로 알지 않았다. 그는 전에 예수님도 육체대로 알았다(고후5:15~17).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진정으로 거듭나면 그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영에 속한 사람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께서 주장하는 사람을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단언했다(롬8:9). 오네시모가 육체대로 알 때는 빌레몬의 종이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 오네시모를 영으로 볼 때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형제였다. 빌레몬에게도 형제였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영의 사람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듣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가족이다. 형제와 자매들이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오, 예수님은 맏형이시고 모든 성도는 형제 자매들이다(히2:11). 오늘날 재림성도들이 진정으로 이런 의미의 형제와 자매가 되어서 바울이 고통당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복음을 전한 것처럼 복음의 일꾼들이 된다면 재림을 촉진하는 능력들이 될 것이다.
1월 1일(목) 빌립보 교회와 골로새 교회
빌립보서 1:1-3과 골로새서 1:1, 2을 읽어보라. 빌립보와 골로새 교회는 어떻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빌1:1~3]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골1:1,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답: 다같이 성도들이라고 묘사하고 지도자들, 곧 신실한 형제들에 관해 말한다. 이것은 조직된 교회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바울은 각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라고 부른다. 이 전형적인 인사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통해(출 19:5, 6; 벧전 2:9, 10 참조) “거룩한 나라”로 구별된 것과 같이 그들도 침례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구별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두 서신의 인사말이 서로 유사한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감독들과 집사들”(빌 1:1)을,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골 1:2)을 언급하고 있다. 신약성경이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말할 때는 그들이 교회에서 특정한 사역을 맡고 있음을 의미한다(엡 6:21, 골 4:7, 벧전 5:12 참조). 따라서 바울은 이들 도성의 교회 구성원뿐만 아니라 지도자들에게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약의 다른 책에 교회의 직분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딤전 3:1-12, 딛 1:5-9)된 기록은 태동기부터 교회가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 중요성을 확증한다.
디모데와 에바브라 같은 동역자들을 훈련하고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일은 바울의 우선순위였으며, 이 일은 복음 전파를 위한 바울의 노력을 강화했다. 다시 말해, 그곳에는 선교와 새신자 정착 모두에 대한 전략적 자세가 있었던 것이다. 1850년대 ‘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해럴드’지의 수많은 기사가 보여주듯이,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은 신약성경의 교회 조직 모델을 따랐다. 제임스 화잇은 이렇게 말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거룩한 질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조직하기에 충분하다. 만약 더 필요한 것이 있었다면 영감으로 주어졌을 것이다”(애드벤트 리뷰 앤드 사바스 해럴드, 1853. 12. 6, 173). 바울이 이 교회들에 편지를 쓰기 훨씬 전에 사도들은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제직들을 세우기 시작했다(행 6:1-6, 11:30).
“예루살렘의 교회 조직은 진리의 사신들이 복음으로 개심자들을 얻게 될 다른 모든 지역의 교회 조직을 위한 본보기가 될 것이었다”(사도행적, 91).
바울이 편지를 작성할 때 가끔 대필자를 활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디모데 역시 다른 편지에서도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된다(고후 1:1, 몬 1 참조). 그러나 바울이 “우리” 대신 “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서신 역시 그의 권위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
<교훈> 빌립보, 골로새의 동역자를 훈련시키고 지도자들을 돌보는 일은 바울의 우선순위였다. 그곳에는 복음 전파와 교회의 보존에 대한 전략적 자세가 있었다.
<부가설명>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설명하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는 다메섹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런 사명을 직접 받았다. 오늘 우리는 바울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는 사건을 없었어도 예수님을 믿고 침례로 하나님과 서약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예수께서 형제라고 부르는 성도들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때를 얻는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증거하는 일을 해야 하는 사명자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려면 말씀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는 것이다(벧전1:23). 말씀으로 났으면 말씀의 사람이다. 말씀의 사람은 말씀을 먹지 않으면 말씀의 사람은 죽는다. 남는 것은 육의 사람일 뿐이다. 오늘날 재림교회에는 말씀의 기근이 심하다, 그러나보니 교회 안에 말씀이 가르치지 않는 가라지 씨앗이 많이 자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성령께서 이 교회에 강하게 역사하셔서 말씀의 사람들로 충만하도록 복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1월 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받도록 그대를 택하셨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다면 편견과 반대에 부딪힐 것이지만 부당하게 고난받을 때 분노하지 말라. 보복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의 양심을 굳게 지키라. 너희 얼굴을 부싯돌처럼 굳게 하늘을 향하라. 다른 사람들은 자기 말을 하고 자기 길을 가도록 버려두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계속 전진하라. 확고한 목적과 순수한 마음으로,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팔에 의지하여 너희의 일을 하라. 그대가 하는 일의 참되고 고귀한 본질을 그대는 결코 다 알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삶의 가치는 오직 그대를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생명을 통해서만 측정할 수 있다.”
“어둠의 세력들이 진보의 길을 막아서려고 결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라나는 모든 영혼에게는 본격적이고, 오래 지속되는 투쟁의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바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실패할 수 없다. 구주께서 약속하셨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청년 지도자, 1899. 11. 9).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바울은 여러 번 투옥되었는데, 매번 부당하게 감금되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런 때를 위한 어떤 성경의 약속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답: 예수님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경험이 있다. 마28:19,20이 답이다.
2. 초기 교회의 지도자였던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박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를 더 베면 벨수록, 우리는 더 많아집니다. 그리스도인의 피는 씨앗이기 때문입니다”(알렉산더 로버츠 편, Alexander Roberts, 니케아 이전 교부들, v3, 피바디, 1999, p55). 한편, 어떤 지역, 어떤 시대의 박해는 교회의 사역을 크게 방해했다. 우리는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답: 기도로 도우고 도울 수 있는 헌금도 있다.
3. 바울이 겪은 고난을 생각하며 이번 주 기억절을 되새겨 보라.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거나 죽고, 직장을 잃거나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을 때는 어떠한가? 아마도 이 문제를 이해하는 열쇠는 “무엇을 항상 기뻐할 것인가?”라고 묻는 질문에 달려 있을 것이다. 즉, 상황이 어떠하든, 우리는 무엇을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답: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주님의 구원을 기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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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용님의 댓글
이한용 작성일목사님 늘 건강 하시고 행복 하세요. 목사님 안동 천전에서 만났던 그 때가 어제 같은데 50년이 훌적지나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