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사랑과 공의: 가장 큰 두 계명(질문, 대답, 설명) 03/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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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03-14 11:07 조회2,239회 댓글0건본문
제12과 사랑과 공의: 가장 큰 두 계명
(3월 2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45분)
연구 범위: 마 22:34-40, 슥 7:9-12, 시 82, 미 6:8, 마 23:23-30, 눅 10:25-37
기억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하나님께서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여전히 중요하다. 우주적 대쟁투의 수칙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근절하지 않으시는 불의와 악이 많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고통과 악을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완화하는 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그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사랑과 공의는 함께 가며,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정의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주변 사람들의 안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난, 억압 또는 어떠한 불의로 고통받을 때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이 억압받고 있을 때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 대신, 우리가 살고 있는 상처투성이의 세상에 주님의 완전한 의와 사랑의 성품을 비추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확장하기 위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주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느끼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정의를 사랑하고 주변 사람의 안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행하기: 다른 이가 고통받고 어려울 때 외면하지 말고 관심을 보이며 그들을 사랑한다.
TMI 위로
2.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살기를 원하십니까?(마 22:37-40)
*답: 가장 큰 두 계명,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3. 우리가 놓치기 쉬운 가장 흔한 잘못은 어떤 것입니까?(신 6:5, 요일 4:20, 21)
*답: 형제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 된다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정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미 6:8)
*답: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5.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짖는 것은 무엇을 요청하는 것입니까?(사 1:17)
*답: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6. 하나님은 정의에 대한 관심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눅 4:18)
*답: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결론: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정의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의 안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고통받고 어려울 때 외면하지 말고 그 일에 관심을 가지며 사랑을 보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더 귀하게 여길 위험에서 건지고 성품을 완성하기 위해 사랑으로 주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3월 16일(일) 가장 큰 두 계명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마태복음 22:34-4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는가?
[마22:34~40]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답: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고 주님은 첫째: 하나님 사랑, 둘째: 이웃 사랑.
예수님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계명은 갑작스런 주장이 아니며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마 22:37-40)라고 하셨다. 실제로 이 말씀 자체가 구약성경에서 인용된 것이다.
마태복음 19:16-23을 읽어 보라. 젊은 부자 관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마태복음 22장에 기록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그분의 대답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마19:16~23]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답: 이 청년은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으나 두 계명을 다 지키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 증거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난 것으로 드러내었다.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예수님은 왜 이 사람에게 그렇게 대답하셨는가? 그리고 이러한 만남은 우리의 지위나 처지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그 관원으로 하여금 그가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완성시킬 수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을 말씀하셨다. 예수의 말씀은 엄격하고 가혹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지혜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만이 관원에게 있어서 유일한 구원의 희망이었다. 그의 높은 지위와 재산은 그의 성품을 악으로 인도하는 교묘한 감화를 끼치고 있었다. 그것을 계속 간직한다면 그것들은 하나님 대신 그의 사랑을 차지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물러가는 것은 도덕적인 능력과 효능들을 감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 세상 사물을 귀중히 여기게 되면, 그것들이 아무리 불확실하고 사소할지라도 결국에는 마음을 모두 빼앗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520).
<교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 사물을 더 귀하게 여길 위험에서 건지고 성품을 완성키 위해 사랑으로 말씀하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모든 것을 팔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으면 가장 큰 두 가지 계명이 생활 되지 않기 때문에 두 계명이 생활이 되는 길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따르면 이 두 큰 계명이 인격과 생활이 되는데, 이것이 생활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르게 따르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는 것을 뜻한다. 새사람은 새 생명을 받고 새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게 한다. 이것이 구원 받았다는 진정한 의미다. 그런데 옛 세상에서 새사람이 되어 새 생활을 하는데는 옛 세상의 제도와 풍습과 학문과 전통이 대단히 괴롭힌다. 거기에 우리 몸은 사망의 몸이고(롬7:24) 죄의 몸이다(롬6:6). 이 몸이 완전히 새 몸으로 변하는 것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철째 부활할 때다. 그래서 성도들의 삶이 힘들고 괴롭다. 그러나 날마다 호흡마다 주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있어서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고후8:12) 주님께서 우리가 두 계명을 지킨 것으로 여겨주신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달라고 요구하신 것이다(잠23:26). 감사합니다.
3월 17일(월) 가장 큰 죄 두 가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두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다. 이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희생이 따르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의 실체이다.
그런데 가장 큰 두 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면 가장 큰 두 가지 죄는 어떤 것인가?
시편 135:13-1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성경 전반에서 강조하는 흔한 죄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시135:13~19]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15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16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17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18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19 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답: 우상숭배 죄이다.
구약은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계속해서 강조한다(신 6:5 참조).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반대인 우상숭배라는 큰 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스가랴 7:9-12를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비난하신다고 말하는가? 이것과 우상숭배의 죄는 두 개의 큰 계명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슥7:9~1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11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답: 이웃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큰 진노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진노하시는 일은 우상숭배만 아니라 그것이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당신의 백성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불의에 분노하신다.
구약 전체에서 강조되는 두 가지 큰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두 가지 큰 계명을 저버리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하는 것이 가장 큰 두 가지 죄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킬 수 없다.
실제로 요한일서 4:20, 21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교훈> 구약이 강조하는 두 가지 큰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두 가지 큰 계명을 저버리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
<부가설명> 사랑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인간의 감성적인 사랑이 아니다. 감성 사랑 이전 상태를 계시한다. 그것은 참 생명이고 참 생활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었으므로 그 안에 참 생명이 없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생명의 본성인 사랑이 없다(요일3:14 참고). 이 생명을 얻어서 계속 지키고 그것이 활동하는대로 생활하면 사랑이 실천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계시하였고(요일4:8,16),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계시하였다(요일4:19).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으로 드러내셨다(롬5:12). 이런 사랑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롬8:2, 5:5).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 형제를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안에 생명이 없다(요일3:14).
3월 18일(화) 정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한다고 선언한다(시 33:5, 사 61:8 참조). 하나님은 불의에 대해 깊이 염려하시며 불의의 피해자인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의로운 분노를 일으키신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하나님은 짓밟히고 억압받는 자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아끼시며, 가해자와 압제자에 대한 의로운 분노를 표출하신다.
시편 82편을 읽어 보라. 이 시편은 이 세상의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시82:1~8]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2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3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4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5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7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8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답: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재판관들을 살피시고 정의를 실현하는 여부를 따라 심판하실 것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이 구절은 사회의 불의에 책임이 있는 이 땅의 통치자들을 향한 비난이면서 이 땅의 부패한 재판관과 통치자들 뒤에 있는(마귀의 세력) 세상의 주관자(신들)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통치자들에게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라는 질문이 주어진다(시 82:2).
나아가 그들에게는 이런 명령이 주어진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시 82:3, 4). 구약의 여러 곳에서 선지자들은 분명하게 정의를 호소한다. 이것은 성경의 부수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나타나는 선지자들의 기별이며,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하신 말씀의 핵심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순종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요구하시는지는 비밀이 아니며 성경에 매우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 명령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예수께서도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요일 4:8-16 비교).
<교훈> 정의는 성경의 부수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나타나는 선지자들의 기별이며,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하신 말씀의 핵심이다.
<부가설명> 이 교과에서 말하는 대로 정의는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대표된다. 사랑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요소다. 예수님은 사람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고 하셨다(요10:10). 예수님의 생명은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요소이며 능력이다. 상태를 온전히 알지 못할 때 하는 판단은 빗나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주님이 아시는 것처럼 온전하고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고전 13장 사랑 장에서 그날에는 주님이 나를 아시는 것 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온전히 알면 오해가 없다. 사랑은 오해가 없을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사랑을 실현하려면 예수님의 생명을 확실히 얻어야 한다. 그것은 거듭날 때 얻는다. 거듭나는 것은 아담 안에서 죽은 사망을 처리하고 예수님 부활로 드러낸 그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 생명이 우리에게 있으면 생명의 성질인 사랑이 실천되고 그것이 곧 정의가 된다. 정의가 없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증거요 그러니까 당연히 사랑이 없다.
3월 19일(수) 정의를 세우라고 부르심
성경의 선지자들은 사회의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성경은 주저함 없이 계속해서 불의와 압제의 문제를 강조한다. 사실, 하나님께 심판을 촉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정의를 세워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의 불의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 정의를 향한 그의 기별과 외침은 오늘날 우리의 귀에도 크고 분명하게 울려 퍼져야 한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 또한 그는 “불의한 법령을 만들”고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사 10:1, 2)는 자들에게 “화” 있을 것을 선포하며 경고한다.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의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사 10:3).
마찬가지로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기별을 선포한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2:13, 15, 16).
마태복음 23:23-30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시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중한 바”는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마23:23~30]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답: 더 중한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요 사랑이 나타는 형태이다.
불의에 대한 관심이 구약에 국한된다고 여기지 말 것은, 예수님 사역의 많은 부분에서 불의가 그리스도에게 최고의 관심사였음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누가복음의 평행하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눅 11:42)라고 탄식하신다.
<교훈> 구약의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정의에 대하여 부르짖으며 예수께서도 사역의 많은 부분에서 정의가 그리스도에게 최고의 관심사였음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 반대로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마7:26~20). 구약이나 신약이나 정의어ㅏ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은 좋은 나무가 되라는 강한 기별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5:22, 23에서 성령의 열매 이야기를 했다. 그 앞에 19~21에는 육체의 일을 기록했다. 이것을 대조하면 육체의 일은 육체의 열매고,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정의와 사랑을 강조하니까 지도자들은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드러나는 행동을 스스로 이루도록 격려하고 설교한다. 그것은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과 열매가 크고 곱고 달도록 하라고 말하면 사과 나무를 잘 가꾸어 그런 열매가 열리도록 하라는 말이지, 열매에게 노력해서 그코 곱고 달도록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농부가 있다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게 교회는 그렇게 강조한다. 그래서 바울은 문자는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고후3:6). 오늘날 강단과 교과도 죽이는 문자를 강조하고 있다. 이루는 거룩한 씨에 자란 거룩한 나무, 의의 나무가 되어야 한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정의와 사랑이 열매맺을 것이다. 아멘.
3월 20일(목)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 큰 계명을 선포하신 직후에 한 율법사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했다(눅 10:29). 예수님은 오늘날에는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충격적이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이에 대답하신다.
누가복음 10:25-37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자비와 정의를 호소하며, 선지자들의 외침을 통해 인류 역사 동안 다양한 집단이 '타인'에게 가해온 여러 형태의 불의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눅10:25~37]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답: 성도 각 사람이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선한 이울은 정의와 사랑을 베푸는 성도이다.
예수님은 정의를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정의를 향한 예언적 외침과 갈망을 이루어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사 61:1, 2; 눅 4:16-21 참조). 그분은 모든 민족, 특별히 그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을 아는 만국 백성의 소망이시다.
권력을 움켜쥐며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는 원수와 정반대로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셔서 전혀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와 불의와 억압 아래 있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되셨다. 그분은 공의로우신 분이요, 믿는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분으로서 정의를 세우기 위해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원수를 물리치셨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더 중요한 문제라고 말씀하신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목숨까지 희생하시며 지키신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시편 9:8, 9은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라고 선포한다. 마찬가지로 시편 146:7-9도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신다고 말한다.
우리 주변에 도움이 필요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보다 더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교훈> 하나님의 말씀은 도움이 필요하고 상처받은 사람을 섬겨야 할 것을 명확하게 말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주신 것은 우리를 돕고 정의를 세우기 위함이다.
<부가설명>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은 그 자체가 정의와 사랑(생명)의 나무라고 비유할 수 있다. 그분들에게는 좋은 열매만 맺힌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한 사람도 그런 사랑이었다. 이것을 예수님은 좋은 씨를 심은 자는 인자라고 하셨다(마13:37). 그가 심은 대로 자랐으면 좋은 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원수가 가라지가 되도록 비틀었다. 그래서 아담과 그의 모든 자손을 다 나쁜 씨가 되어 나쁜 나무로 자랐다. 당연히 나쁜 열매가 열린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셨으나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고 나셨다. 그분의 탄생은 거듭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 실물 교훈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물과 성령으로 나면 좋은 씨로 나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열매가 열릴 수 없다. 예수께서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좋은 씨, 썩지 않는 씨는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벧전1:23, 눅8:11). 그래서 성도는 말씀을 읽고 먹고 그것이 자라는 말씀의 나무 말씀의 열매가 열려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네가 누구의 이웃이냐고 물으셨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지 말고 네가 좋은 이웃이 되라고 교훈하시는 것을 뒤집지 않아야 할 것이다.
3월 2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29장 “안식일”을 읽어 보라.
“정탐꾼들은 자신들이 난처한 처지에 휩쓸려 들어갈 것이 두려워 대중이 있는 곳에서는 그리스도께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유전을 범하기보다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도록 두면서도 지나친다면 소유주가 손실을 당한다는 이유로 짐승은 구출해 주었다. 이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보다 말 못하는 동물에게 더 큰 배려를 하였다. 이것은 모든 거짓 종교가 하는 일을 설명하여 준다. 이런 종교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을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타락시킨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종교마다 창조시에 가졌었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람에게 회복될 영광을 사람에게서 속여 빼앗는다. 모든 거짓 종교는 그 추종자들에게 인간의 필요, 고통, 권리에 대하여 무관심하라고 가르친다. 복음은 인류를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바 된 존재로 높이 평가하며, 사람의 필요와 고통과 권리에 자애로운 관심을 보이라고 가르친다. 주께서는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사 13:12) 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사악한 목적을 그들에게 직면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하시며 행복을 주시던 그 때에 그들은 심한 증오심을 가지고 그분의 생명을 노리고 있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행하신 바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는 것보다 그들이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나았는가? 하나님의 성일에 인자한 행실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것보다 마음에 살의를 품는 것이 더 의로웠는가?"(시대의 소망, 286).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모든 거짓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무관심하도록 가르친다는 말이 사실인가? 우리가 이러한 부주의를 피하려면 어떻게 유의해야 하겠는가?
*답: 인간의 도덕적 안목으로 보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시각으로 보면 그것들은 다 참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거짓이다.
2.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실질적인 면에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그 시대의 경계를 넘은 사마리아인을 본받게 하는가?
*답: 거듭나야 한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대로 성령으로 나면 성령 열매를 맺는다.
3. 하나님은 정의와 자비를 사랑하신다. 어떻게 하면 예수께서 “율법의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하신 것에 집중하며 그에 따라 행할 수 있겠는가?
*답: 진정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될 때 가능하다.
4. 예수님은 다른 이들, 특히 억압받고 짓밟힌 사람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사랑했는지를 심판과 연결해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는가?(마 25:31-46)
*답: 이 말씀도 참 생명을 가졌는지 묻는 것이다. 열매로 그들을 안다는 그 말씀을 물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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