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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 사랑과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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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9-13 21:53 조회3,9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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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9월 18일(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6분

제12과 <사랑과 율법(律法)>

<記憶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 <롬 12장(章)>

<요약(要約)―1>
Ⅰ. 자기 몸을 산제사(祭祀)로 드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으라. (롬 12:1-2)
Ⅱ.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지 말고 받는 받은 은사에 따라서 지체처럼 서로 협력하라. (롬 12:3-8)
Ⅲ.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 형제에게나 원수에게도 두루 화평케 하라. (롬 12:9-21)

<요약(要約)―2>
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그분을 기쁘시게 해야 함.(1)
⑵. 아무도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것 이상을 생각하지 말고,(3)
⑶. 각자가 자신이 부름을 입은 위치에서 섬겨야 함.(6)
⑷. 사랑과 더불어 많은 의무가 우리에게 요구함.(9)
⑸. 복수(復讐)를 특별히 금함.(19)

▣ <롬 13장(章)>

<요약(要約)―1>
Ⅰ. 정부(政府)에 대해서는, 자발적으로 굴복하라.
그 권세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또 그 힘이 기본적으로 세성의 악을 막고 선을 보호하는데 쓰이기 때문이다. (롬 13:1-7)
Ⅱ. 이웃 사람들에 대하여는,
사랑하여 선을 행하고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이런 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롬 13:8-10)
Ⅲ. 이 시대에 대하여는, 자다가 깰 때인 것을 알고 그리스도를 옷 입어 단정히 행하라.

<요약(要約)―2>
⑴. 권세자(權勢者) 들에게 굴복(屈服)하는 것과 지켜야할 여러 의무. (1)
⑵. 사랑은 율법의 완성임.(8)
⑶. 방탕함과 술 취함, 어둠의 일은 복음시대에 적합하지 않음.(11)

<要點>
다른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며, 섬기는 것은 영적인 예배 행위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다른 이들 에게 확장시키고, 그럼으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한다.

日 (9월 12일)
<산제사(祭祀)>

▣ 인생은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하는 제물(祭物)인 것입니다.
평생 자신만을 위해 산다하더라도 그것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일정기간 땅위에서 잠시 관리하다가 주인이 잠시 쉬라하면 잠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舊約時代)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대신에 제물을 드렸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시는 분께서 그 마음이 알 때까지 대치 물로 대신하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시적으로 양, 송아지, 고운가루, 기름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완전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임시로 드린 것입니다.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기 자신을 드림으로
다시는 대치 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 안에서 존재 자체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최고의 복은 내가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로는 하나님께 드려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존재를 보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부끄러운 것을 끝내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인 새사람의 출발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 전체가 그리스도로 대치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며
겸손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라는 자세입니다.
산제사(祭祀)는 “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산 제물(祭物)이 되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여기는 삶인 것입니다.

▣ 믿음으로 의(義)롭게 된 사람의 먼저 할 일은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격식과 시설을 갖춘 유형적 예배 이전의 정신, 몸, 생활 자체가 예배같이 경건하여 제사(예배)가 되게
하라는 말로, 이런 “산제사로 드리”는 “영적예배”는 예배시간 자체의 경건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생활 자체가 경건해야 예배도 영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자세(姿勢)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행하는 것이다.(롬 12:2)
온 생활이 산제사가 되는 영적생활은 첫째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이다.
“이 세대”를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조류나, 사회의 분위기, 혹은 눈앞에 밀려오는 세상적 유혹들이라고
볼 때 ,이것을 본받지 말고, 지금까지 배운 인신득의(因信得義)를 통해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야 하는 것이다.
예부터 “성인(聖人)도 시속(時俗)을 따른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도덕과 수양이 높다 해도 인간은 시대의 조류(潮流)나 사람들의 취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고백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시속(時俗)을 따르지 말라고 권고 한다. 엄청난 권고(勸告)이다.
국민의 안녕을 책임지는 정치는 포풀리즘(populism)에 떠내려가고, 삶의 질을 높인다는 문화는
쾌락의 노예가 되어 있고, 사람의 위신을 지켜주는 도덕은 상업주의의 노예가 되어있는 세상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권고는 큰 도전이다. 더욱이 교회 안에 밀려오는 세상적 조류들을 보라.
말씀대로 살아보려 해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세상적 욕망들을 생각해보라.
이것은 거절하라는 권고를 따르는 것은 엄청난 홍수를 거슬러 올라가라는 명령처럼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르려면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홍수가 아무리 심해도 살아있는 물고기는 그 홍수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이적이다. 오직 죽은 고기만이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갈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산 고기가 되어야 한다.

“이 세대(世代)”라고 일컬어지는 세상의 경향, 사회 풍조, 사람의 유행, 등등은 대부분 언제나 악(惡)이다.
(딤후 3:1-5 참조).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면, 거의 무조건 적으로 세상의 경향과 반대로 해야 할 정도이다. 진리는 거의 세상적 경향의 반대편에 있다.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약 4:4). 세상을 본 받지 않는 것이 죄를 버리는 대표적 태도이다.
바울도 이래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면이 큰 도전인 것을 알기 때문에 가볍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했다.
교회에서까지라도 대개는, 인간적인 힘이 행세를 하고, 세상 방법이 통하며, 부귀(富貴)를 최고의 축복으로 아는 세태 속에서 이 권면은 분명 큰 도전이다.
성령으로 자기를 부인(否認)한 사람만이 따를 수 있는 권고요, 종말적 승리를 바라는 사람만이 인정하는 가치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동력은 이 세상의 조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그리고 생활이 산제사가 되는 둘째 요소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는”것이다.
앞 문장이 환경을 분별하라는 말이었다면 이 둘째요소는 심령의 생각을 분별하라는 말이다.
주변 환경을 분별하여 세상적 조류를 거절 하였으면, 다음은 마음속의 오욕(五慾) 칠정(七情)을 분별하여 자기중심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의 생각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리고 다음의 셋째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라는 말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롬 12:2)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려 헌신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언제든지 예수님은 우리의 모본이시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
그래서 본 절(節)이 로마서의 전 내용을 축약(縮約)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말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알았으니 이 세대를 분별하고, 자기 심령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자기 삶 자체가 거룩한 산 제사가 되게 하라는 권면이다.

◯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께 드릴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거룩하고 흠 없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변화된 마음을 구하고,
세속을 따르는 대신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 (롬 12:1절)에서 바울은 구약(舊約)의 제사를 넌지시 언급(言及)한다.
이전에 동물들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진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되 그분을 섬기기 위한 산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제사에 바쳐질 제물들은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단 하나의 흠(欠)이라도 발견되면 그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제물에 어떤 흠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
비록 우리 가운데 흠이 없는 자가 없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능한 한 흠 없고 신실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의지함>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예수님께서는 이 의향과 노력을 인간의 최선의 봉사로 받아들이시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의 공로로써 그의 결함들을 메꾸어 주신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노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늘 아버지의 계명에 대하여 불충성하는 자들은 받지 않으실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82)

○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이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 제사(祭祀)로 드려야 한다.

月 (9월 13일)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함>

▣ <믿음의 분량(分量)>
문자그대로의 믿음의 많고 적음이아니라,
각자 주어진 직분과 은사(恩賜)의 한계(限界)와 특성(特性)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다. <고전 12:2-31 참조>

▣ <믿음의 분량(分量)대로>
(롬12: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 분량(分量) = 부피나 수효가 많고 적음과 크고 작은 정도를 말함.
모든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분량」이 다 같은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이 서로 다릅니다.
학생들도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있듯이,
기독교인들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청년’과 ‘장성한 사람’ 등이 있습니다.
나이가 60살이라도 교회에 처음 나온 초신 자는 영적으로 ‘어린아이’며,
나이가 20살이라도 말씀과 기도의 분량이 많고 신앙이 본이 되는 성도라면,
영적(靈的)으로 “장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믿음의 분량>
이것은 사람이 자신을 평가할 참된 표준이다.
쇄신 되지 않은 육신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표준, 부(富), 지위(地位), 학식(學識)등으로 자신을 평가한다.
그는 항상 실제보다 더 위대하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쓴다.
그러나 믿음이 들어오고 마음이 새로워지면,
신자(信者)는 자기 은사(恩賜)의 실제적 한계를 식별할 수 능력을 얻는다.
믿음은 능력의 성격과 분량을 정확하게 측정하여 자신을 너무 높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새로운 표준을 갖게 한다.
그는 자신의 믿음이 클수록 그의 영적(靈的)영향과 능력이 더 크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것은 교만(驕慢)의 기회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분량이 커질수록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겠다는 인식이 더욱 예민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본교 성경주석(한) 11권 751p>

(롬12:3~21) 우리는 겸손하게 남을 존중하고, 대접하기를 힘쓰며,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며, 이웃과 더블어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을 추구해야 한다.

○ <참된 성화(聖化)>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동료를 위하여 신성한 관심을 가지도록 요구하신다. 구원받은 모든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랑을 통해서 구원받을 것이다. 참된 회개란 이기심을 떠나 하나님과 인간 동료를 위한 성화된 애정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바야흐로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이 철저한 개혁 운동을 일으켜 문둥병과 같은 이기심을 버리고 저들의 죄로 얼룩진 영혼을 정결케 할 것인가?”(가려 뽑은 기별 1권, 115)

○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반석(磐石)이신 그분 위에 깨지는 경험을 갖도록 끊임없이 우리 심령에 역사하신다.

火 (9월 14일)
<정부(政府)와의 관계>

▣ 사도 바울은 롬 13:1-2절에서 하나님이 정부의 행위를 항상 인정한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또한 정부(政府)에 항상 복종(僕從)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義務)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정부의 요구가 때로는 하나님의 계명(誡命)에 반대 될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 그리스도인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 하”(사도행전 4:19; 행 5:29)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요지는,
정부의 다스리는 권세가 인간의 복리를 위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그분에 의해 인간에게 위임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권세를 지속하거나 물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기존의 국가권위(國家權威)를 지지할 것이다.
그는 “모든 권세”를 대항하거나 폐(廢)하는 일이 그의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지 말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바울시대에 특히 필요했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격(擊)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미 로마제국 여러 곳에서 반란(反亂)을 일으켰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불복종의 정신을 나타낸다면,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돌려지기 시작한 동일한 노염을 샀을 것이다.
그 결과 바울이 자신의 경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참조 행 22:24-30).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되었던 로마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며,
게다가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의 형제사랑과 평화의 기별에 대한 비난을 유발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자들에게
⑴. 권세(權勢)잡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딤전 2:1-2)
⑵. 그들에게 순종하라고 (딛 3:1) 강력히 권한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벧전 2:13-17) 명한다. <본교 성경주석(한) 11권 763p>

▣ (롬 13:1-7절)은 시민(市民)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국가(國家)또는 사회의 권력에 대하여 가져야할
자세에 대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 바울의 교훈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태 22:21)는
예수님의 교훈을 잘 반영한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에 불만을 가졌으며,
일부 열성 당원들은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 식민지하에서 그들의 정부에 대하여 자주 반란을 일으켰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할 당시에도 로마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서 글라우디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 했었는데 이때 그리스도인들도 유대교의 한 파당으로 간주되었고 자연히 혼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한편 당시에는 유대인들과 성도들에게 깊게 작용하던 종말론적 사상으로 인해
곧 소멸해 버릴 세상의 권력과 제도들을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농후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어떤 정부 또는 권위 아래 있는 성도는 교회의 질서 못지않게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힘써야 함을 강조했다.
왜냐 하면 본질적으로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의 통치구조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삶의 실제적인 전 영역에서 권위에 원칙적으로 복종해야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라는 조직속의 시민 생활에서 법률과 정부에 대한 원리적인 측면에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함을 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전체적으로 개인으로서의 성도가 국가의 권위와 법에 순응하여 질서를 세우듯이 국가권력도 성경에 분명히 언급된 하나님의 법에 마땅한 처리를 해야 할 전제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 성도의 순복은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합당할 때에 라는 조건이 붙는 것이다. (사도행전 4:19)

그러므로 국가 권력이 불의(不義)를 행할 때 성도는 야합(野合)하거나 굴종(屈從)할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를 걸쳐 공의의 회복에 앞장서서 불의(不義)의 세력을 개혁하여야 한다.
정당한 정의와 권위에 대한 순응이 성도의 덕목이듯 이 불의에 대한 비판과 개혁 또한 성도의 의무인 것이다.

▣ (롬 13:1~7)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권력에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한 나라의 정부를 선(善)과 악(惡)에 대하여 보응(報應)하는 대리자로 삼으셨다.
그러나 권력의 요구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를 때 우리는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

▣ “우리는 인간이 세운 정부를 하나님이 임명하신 규범으로 인정하고, 그 정당한 범위 안에서 거기에 순종하는 것을 거룩한 의무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그 요구가 하나님의 요구와 상치될 때에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의 법보다 높다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 우리는 권력자들을 무시하라고 하지 않는다. 말로나 글로 우리가 법과 질서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사려 깊고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불필요하게 우리의 길을 막는 그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하지 말아야 한다.”(사도행적, 69)

○ <공연한 비난을 삼감>
“위정자들이 하는 일에 대해 항상 흠을 잡는 일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개인이나 기관을 공격하는 것이 우리의 사업이 아니다. 우리는 권세들을 무시하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다.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옹호하기 때문에 반역자로 취급받을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적개심과 분란을 쓸데없이 조장하여 그때가 속히 오도록 하지 말 것이다.” (교회증언 9권, 230)

○ 미래의 국가가 하나님의 정부와 충돌을 일으키기 전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우리는 충성스럽고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水 (9월 15일)
<다른 이들과의 관계>

▣ <사랑의 빚>
사랑은 소극적으로 하지 말라,
하라는 규범(規範)을 넘어 적극적으로 남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열어 보이고 내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개별적 윤리, 법 조항을 넘어 그 윤리와 법의 강령을 완성하는 근원적 힘인 것이다.

▣ <사랑>
헬라어 “아가페(agapȇ).는 사랑 받는 사람이나 대상에게서 가치 있는 것을 감지하고 고상한 유형의 사랑이고,
감정이 아니라 원칙에 기초한 사랑이며, 사랑의 대상의 훌륭한 특성에 대한 존경심에서 자라나는 사랑임.
이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간에 드러난 사랑이고(참조 요한복음 15:10; 요 17:26).
잃어버린 인류를 위한 삼위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이며,
(참조 요한복음 15:9; 요일 3:1; 요일 4:9,절 16절)
그리스도인의 상호관계에서 실증되는 특별한 특성이고(참조 요한복음 13:34-35절; 요 15:12-14절).
하나님과 신자(信者)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참조 요일 2:5; 4:12절; 5:3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 분의 뜻에 일치함으로 입증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사라의 증거이다. (참조 요일 2:4-5절)
아가페 사랑을 때때로 소위 사랑이라는 것
곧 자아와 자아의 욕망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느낌과 감정으로 이뤄진 특성과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된다.
아가페는 다른 사람에 관한 관심과 염려가 중심을 이루며 거기에 적합한 행동으로 이끈다.
사람에게 사랑이 전혀 없으면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를 소유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입증 한다. <본교 성경주석(한) 12권296p>

□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두드러지고 매우 호감이 가는 신령한 재능인 예언과 지혜와 지식과 믿음의 은사를 소유할 가능성을 열거한 후에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훌륭하고 중요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력하다고 단순하게 말한다.
학식과 같은 후천적인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사단은 고도의 학식과 사람을 능가하는 지식을 갖고 있지만, 그로인해 고결해지지는 않는다. (참조 교회증언Ⅱ. 171; 교회증언Ⅴ.504 ; 부조와 선지자 36)

예수그리스도에게 굴복하지 않고 성령으로 움직여지지 않는 마음은
그 속에서 역사하여 자기의 욕망을 이루려는 사단의 지배아래 놓이게 된다. (교회증언Ⅴ.515)

따라서 하나님과 같은 사라의 특성에서 분리된 학식은 단지 그의 목적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뿐
사람들의 영적 유익을 증진시키는 데는 아무 기여도 못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요일 4:8절 참조)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해야할 관계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와 함께 이 세상의 풍부한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에 관한 체험적인 지식이 없다면 여전히 잃어버린바 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선(善)을 행하려는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그의 생애 목표가 되어야 할 것,
곧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참조 요일 4:7-8; 산상보훈 37p) <본교 성경주석(한) 12권297p>

▣ <그리스도인의 대인 관(對人 觀))> (롬 13:8-10절)
사회(社會)속에 어울려 사는 같지 않은 사람들과의 대인관(對人觀)에 대하여
(롬 13:8-10절)까지에서 말씀하고 있다.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되 부채(負債)를 갚듯이 의무(義務)처럼 하고,
그 외에는 아무 부채(負債)도 지지 말라고 한다.
다른 아무 것도 빚 져서는 안 되지만 사랑만은 빚을 져도 된다는 어법(語法)이다.
그런데 이 어법이 도리어 사라의 의무가 얼마나 큰가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의무는 한이 없어서 언제나 그것을 다 갚지 못하고 빚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의식 자체가 바로 믿음의 의(義)의 정신이다.

믿음의 의(義)는 한마디로, 얼마나 많이 변화되고 얼마나 죄를 덜 짓는가의 비율로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 빚진 자라는 인식전환(認識轉換)으로 얻는 것이다.
이런 인식 변화가 어떤 노력보다도 더 율법을 충실히 지키게 하기 때문이다.
(롬 13:8절)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이
이렇게 지고한 신아의 도리를 나타낸다.
언제든지 사랑이 그리스도 신아의 강령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롬 13:10절)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 <빚진 자>
빚진 자라는 말은 바울의 말투 중에 자주 나오고, 로마서에서도 다섯 번 (롬 1:14; 4:4; 13:8; 15:27절)나온다.
자주 쓰는 말은 그 사람의 사상을 짐작케 하는 근거가 되는데,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떤 정신을 가졌기에 이 말을 자주 썼을까?
“빚진 자”라는 말은 다른 사람의 돈이나 은혜를 받고도 갚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의무를 하지 않은 사람을 지적할 때 이 말을 쓴 것이 아니고,
남달리 헌신한 자신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을 사용 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異邦人)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모든 계층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인데
아직 그 사명을 다 수행하지 못해서 빚진 것처럼 남아 있다는 적극적인 선교정신(宣敎精神)의 표현인 것이다.

○ <사랑의 빚>
“아침에 환자가 좀 나은 것을 보고 사마리아인은 그의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주막 주인에게 그를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 그 비용을 지불하고 그를 위하여 돈을 맡겼다. 이것으로도 만족치 않아 그는 더 많이 비용이 들 경우를 대비해서 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아 주리라.”라고 약속하였다.”(시대의 소망, 503)

○ 계명(誡命)은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지 가르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으로 동기가 부여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준수할 수 있다.

木 (9월 16일)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짐>

▣ <처음 믿을 때>
헬라어에서 이 동사의 시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때를 가리킨다.
(참조 행 19:2; 고전 3:5절; 고전 15;2절)
주의 재림을 끊임없이 고대하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친히 반복한 경고를 통해 명한 마음 자세이다.
(참조 마태 24장)에 이 기다림은 처음부터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마태 24:36)라는 경고에 의해
타당성이 입증되었으며 바울도 이 경고에 유념했다. (참조 살전 5:1-2절; 살후 2:1-2절).
그렇지만 그 큰 날에 대한 그의 기대는 눈앞에 보듯 생생하다. (참조 살전 4:15절; 17절; 고전 15:51-52절)
다른 신약(新約)의 기자들도 동일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다.
(참조 : 벧전 4:7; 벧후 3장; 요일 2:18; 계 22:12절, 20절; 복음전도 695p; 사도행적 265p)
시간이 기대보다 많이 흘렀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말이 허지로 돌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전에 성취돼야 할 일이 있고 충족돼야 할 조건이 있다. (참조; 복음전도 694-697)
또한 시간의 절박함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함에 대한 신자(信者)개인의 지속적이고 생생한 분별력은 필요한 일을 성취하고 요구되는 조건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긴요한 동기가 된다.
미지근한 자아방종(自我放縱) 가운데 잠자는 자들에게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며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살전 5:3)는 것은 언제나 진리이다. <본교 성경주석(한)11권 766p>

▣ <그리스도인의 시대 관(時代 觀)>
(롬 13:11-14절)에서는
시대의 흐름과 사회 풍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환가시키는데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기를 개혁(改革)하고, 다음에 세상 타락에 물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조금은 생경(生梗)한 느낌을 받는다.
이미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까지 온 “구원(救援)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운”(롬 13:11절).
사람에게, 세상 적으로도 부도덕한 방탕함과 쟁투와 시기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은 세상 윤리로도 악독한 것이 아닌가.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에까지 이른 사람에게 이 같은 경고가 필요한 것일까?
그러나 거듭난 사람도 사단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사단에 사로잡히면 여지없이 타락 한다.
아무리 믿음이 깊어도 처음 믿을 때처럼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율법을 초월했다고 생각함으로 초보적인 유혹을 무시할 위험을 여기서 환기시킨다.
안팎으로 만연한 이 세상의 타락을 보라.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때인가.
로마서에서 의롭게 되는 과장을 계속 설명해 왔는데, 그 과정들이 꼭 단계별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도리어 여러 작용들이 섞이어 일어나면서 전체의 경향이 변하여 성화로 나간다고 볼 때, 초보적인 훈계도 항상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로마서 13장부터 끝까지는 앞의 모든 내용들을 종합해서 아우르는 마무리 기별이라 할 수 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14).
그리스도의 모본으로 몸을 감으며, 욕망을 채우려고 미리 생각하지 말라.
이것이 성령과 함께 사는 자세이다.

▣ (롬13:11~14) 바울은 2천 년 전에 재림이 가까웠음을 설교하면서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빛 가운데
행하며 단정하고 바르게 살라고 권면하였다.

○ <입혀 주시는 의를 입는 법>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실물교훈, 312)

○ 우리가 죽더라도 경험의 시간에 따르면 예수님의 재림은 정말 가깝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은 구원의 완성을 바라며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한다.

○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성경의 진리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말씀이다. 이런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자는 모든 의미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에게 새로운 지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지와 죄로 이해를 가렸던 어두움이 제거되는 것이다. “새 마음”을 주신다는 말씀은 “새로운 생각”을 주신다는 뜻이다. 심령의 변화는 항상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진리의 이해로부터 오는 것이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피는 자는 하나님께 의지함에 따라 지적으로 더 높은 차원에 이른 것처럼 명철한 이해력과 건전한 판단력을 얻게 될 것이다.”(엘렌 G. 화잇, 마이 라이프 투데이, 402)

○ “주님은 곧 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나타나심을 위하여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아, 그분을 대면하고 그분의 구속받은 자로 영접되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이 희미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영광중에 계신 왕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축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본향을 향하여!”라고 소리쳐야 할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구속받은 자들을 영원한 본향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시간에 접근하고 있다.”(교회증언 8권, 253)

<초점(焦點)>
1. 우리의 삶이 우리의 믿음의 척도(尺度)가 된다는 것과,
2. 우리는 섬기기 위하여 구원(救援)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봉사(奉仕)하도록 은사(恩賜)가 주어진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과 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룩되어야 한다.
4. 우리가 구원(救援)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맡기고 그의 사랑으로 채워지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진다.
(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5. 예수님께서는 죽은 제사가 아닌 “산 제사(祭祀)”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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