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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 내 이웃을 향한 선교-(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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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3-11-13 15:58 조회1,4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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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내 이웃을 향(向)한 선교(宣敎)

                           (11월 18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20분)


<記憶節>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脈>

선교(宣敎)는 내가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긍정적(肯定的)으로 변화(變化)된 삶을 이웃에게 전(傳)하는 것인데 이는 마음(영(靈))과 목숨(육(肉))과 힘(력(力)과 뜻(意)을 다하여 이웃에게 사랑으로 다가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실천(實踐)하는 것이 진정(眞正)한 선교라 할 것이다.


(11월 12일) (日)  <가장 중요(重要)한 질문(質問)>


(Q)~율법사(律法司) 가장 중요한 질문(質問)과 율법사(律法司)를 통한 교훈(敎訓)은? (눅10:25~37절, 마태복음 26:56, 사도행전 17:11, 고린도전서 15:3, 디모데후서 3:16)


(A)~우문현답(愚問賢答)=('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答)을 함)이라는 말이 있다. 불순(不純)한 의도(意圖)의 율법사(律法司)를 대(對)하는 예수님의 자세(姿勢)는 어떤 교훈(敎訓)을 줍니까? (눅 10:25) 

<중요한 질문>

⑴.나는 누구인가?=

⑵.나는 왜 여기 있는가?=

⑶.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⑷.나의 궁극적(窮極的)인 종말(終末)은 어떤 것인가?=

⑸.무엇을 하여야 영생(永生)을 얻는가?

⑹.어떤 종교적인 예식(禮式)이나 관습(慣習)을 답습(踏襲)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⑺.지금 내가 하고 있는 신앙(信仰)과 율법사의 질문에 차이점(差異點)은 무엇인가?

⑻.나는 종교인(宗敎人)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⑼.율법사의 질문(質問)에 무엇이 문제인가?

⑽.동기(動機)가 진실하지 않고 불순(不純)한 사람과의 만남도 무시(無視)하거나 무례(無禮)하지 않게 선교의 기회로 삼아라


(11월 13일) (月)  <예수님의 응답(應答)과 방법(方法)>


(Q)~율법사(律法司)의 질문(質問)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應答)과 방법? (눅10:25~37)


(A)~<성경연구와 신앙생활에서의 바른 방법을 제시(提示)하여주심>

⑴.예수님께선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성경에서 찾게 하심.

⑵.우리가 가진 질문(質問)도 성경에서 그 해답(解答)을 찾고 확인이 필요함. 

⑶.율법(律法)의 기록 목적도 사람을 위한 것임.

⑷.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등불이고 길이다.

⑸.다른(他) 종교가 기독교(基督敎)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것들도(목적은 영생(永生)이다.

⑹.영생의 길과 방향과 방법도 결국은 생명의 시여자(施與者)로 집결(集結)된다.

⑺.잘못된 배움과 행위는 사람의 마음속에 공허(空虛)와 갈망(渴望)을 나타낼 뿐이다. 

⑻.율법 준수(律法遵守)에 따른 외적(外的) 내적(內的)의 차이점(差異點)을 보여주신다.

⑼.영생을 얻는 비결(祕訣)을 분명히 제시(提示)해 주신다.

⑽.율법사(律法司)의 잘못된 신앙관(信仰觀)을 거울삼으라.


(11월 14일) (火)  <영생(永生)을 얻으려면>


(Q)~영생(永生)을 얻는 비결(祕訣)은? (누가복음 10:27~28절)


(A)~<배우고 아는 것의 진리(眞理)에 순종(실천)함으로 영생을 얻는다>

⑴.율법사는 그 이론(理論)을 정확히 알고 있다. (눅10:27)

⑵.예수님께서도 그 율법사(律法司)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셨다. (눅10:28)

⑶.마음을 다하여 순종(順從)하라.

⑷.영생(永生)을 얻기 위해선 아는 것을 실천(實踐)하라.

⑸.그분(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⑹.말씀의 실천(實踐)을 위해서 기도(祈禱)하라.

⑺.그분(하나님의) 계명(誡命)을 지켜라.

⑻.내가 배우고 가진 믿음을 실천(實踐)하라. (약 2:15~16).

⑼.일련의 신념을 체계적(體系的)으로 나열(羅列)한 집합(集合)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⑽.많은 사람은 구원(救援)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실천(實踐) 즉 행(行)하지 않는다. (약 2:17~22) 


(11월 15일) (水)  <네 이웃을 네 자신(自身)과 같이 사랑하라>


(Q)~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실천(實踐) 요강(要綱). (마태복음 22:37~40절)


(A)~<예수님은 성경의 이야기가 실제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셔 실천(實踐)하신 분이시다> 

⑴.하나님의 근본(根本)은 사랑이시다.

⑵.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정부(政府) 기초(基礎)는 사랑이시다. 

⑶.위대한 믿음과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준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다. (고전 13:1절)

⑷.사랑만이 시련(試鍊)을 견디며 극복(克服)할 수가 있다.

⑸.믿음이 믿음은 사상(思想)이 아니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 그것은 사랑이다.

⑹.믿음으로 산다는 추상적(抽象的)인 개념(槪念)은 보이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⑺.시련(試鍊)과 시험(試驗)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그것은 사랑이다.

⑻.바울, 마가, 요한의 기록한 믿음의 실제적인 행위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⑼.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사랑하는) 방식에서 확인된다..

⑽.선행(善行)과 구원(救援)의 관계(關係)는 사랑의 열매로 나타난다.


(11월 16일) (木)  <오늘날의 선(善)한 사마리아인>


(Q)~오늘날의 선(善)한 사마리아인(人)은 어떠한 사람인가? (누가복음 10:30~37)


(A)~<진리(眞理)를 실천(實踐)하지 않으면 죽음 진리가 되며 남을 해(害)하는 독(毒)이 된다.>

⑴.우리의 이웃은 도움이 필요로하는 모든 사람이다.

⑵.하나님의 소유(所有)인 모든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이다.

⑶.진리를 아는 것보다 그 진리(眞理)를 실천(實踐)하는 것이 더 중요(重要)하다.

⑷.진정한 나의 이웃은 동료(同僚)나 교우(敎友)나 동족(同族)이 아닌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의미(意味)한다.

⑸.주변(周邊)에서 타인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나의 이웃이다.

⑹.상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우리의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인 것이다.

⑺.우리의 이웃은 역경(逆境)으로 말미암아 매를 맞고 상(傷)함을 받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⑻.도움의 손길을 실천할 때 자신의 이름이나 마음으로 하지 말고 예수님의 심부름꾼으로 하라.

⑼.내 자신도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언제든지 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선(善)한 사마리아인의 교훈이 주님의 음성으로 들릴 것이다. 

⑽.내가 쓰고 남는 것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내가 필요한 것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말미부록(末尾附錄)>***************


(1)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웃의 개념을 따져 묻는 율법사의 현학적(衒學的)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너무도 단순 명료하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라는 예수의 권위 있는 명령은 율법사의 교만과 위선을 꺾어버리는 위엄있는 말씀이다. 율법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율법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영육 간에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당장 자비를 베푸는 사랑의 실천이다. (눅 10:37, 만나주석)


(2)

젊은 부자 관원처럼 그도 자기의 삶 속에 부족함이 있음을 분명하게 깨달았으며, 자기도 모르게 예수가 그것을 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니로데모(참조 요 3:2, 3 주석)처럼, 그는 심지어 자신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내적 자책감을 회피하려는 방편으로, 그는 동료 인간들을 실제로 사랑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했다. (시대의 소망, 498).

(3)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누가복음 10:25-37)>

본문에서 우리는 양심의 몇 가지 문제에 관해서 어떤 율법사와 대화하시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답변이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본래 이 질문이 선한 의도를 가지고 물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본문에서 답변이 주어진 것을 볼 수 있다.


Ⅰ.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현생에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질문은 어떤 율법사 혹은 서기관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던진 것이다(25절). 율법사가 "일어나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그리스도께서 어떤 특별한 규정을 내릴 것이 있다면, 그 율법사는 이 질문으로 그것을 끄집어내서, 걸어 넘어지려 했다. 그러나 할 말이 없다면, 그의 교훈은 무용한 것이라고 헐뜯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 없이도 이미 자기들은 행복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율법사는 몇몇 서기관들처럼 그렇게 예수께 대한 반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인들이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러 교회로 가듯, 그리스도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질문은 훌륭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그러나 그가 나쁜 의도와 혹은 비열한 의도를 가지고 질문했기 때문에 모든 좋은 점은 상실되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찾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올바른 관심을 가지고 말하고 찾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조심성 없이 단지 대화하기 위해서 특히 논쟁하기 위해서 영생과 그것을 얻는 방법에 관해서 말한다면, 본문에서 율법사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어 부르는 것이 된다. 좀 더 세밀히 살펴보자.


1. 예수께서는 그로 하여금 율법을 다시 생각게 했고, 그것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비록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알고 계셨으나, 그의 질문의 어리석은 점에 의해서 대답지 않으시고 지혜롭고 좋은 점에 따라서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질문으로 대답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 그는 그리스도를 시험하여 알아보려고 왔다. 그러나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를 시험하며 그 자신을 알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통한 율법사처럼 말씀하신다. 그의 직업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기에 그에게 지시하실 수 있었다. 그의 지식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는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이르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지금 보여주신 것처럼 성경 말씀을 의지하고 거기에 나타난 길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기록된 율법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며 더 멀리 전파하고 더 오래 간직해야 한다. 그것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읽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읽은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을 때 율법에 기록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율법에 호소해야 하며, 이것으로 잘못된 교리를 시험하여 논쟁을 끝내야 한다. 율법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 우리의 표준, 규칙, 지도가 되게 많이 해야 한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가? 우리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2. 우리가 영생 얻기 위해서 행할 율법의 중요한 명령을 그는 얼마나 행했나? 그는 바리새인처럼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선한 피륙장사처럼 율법의 우선적이고도 중요한 두 가지 명령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것을 반드시 행해야 하며 그것은 모든 율법을 포함한다고 생각했다(27절).


(1)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든 것 중 가장 온화하고 완전하며 뛰어난 최상의 존재로 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가장 큰 은혜를 입고 있는 자로 보고 감사와 관심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자신을 그와의 관계에 의해서 평가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그 말에서 기쁨을 얻어야 하며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진실해야 하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며 열성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최고의 사랑 즉 죽음보다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즉 근거와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어야 한다. 전 생명을 드려야 한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그를 섬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그 무엇도 사랑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2) 우리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면 쉽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한 사람에게도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해야 하며 어떤 악도 행해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해 주는 일을 우리 자신의 규범으로 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대답에 대해서 칭찬하셨다. 비록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하여 왔었지만, 그의 대답이 훌륭했기 때문에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칭찬하셨다(마 22:27). 이 점에 있어서 둘이 다 일치한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이런 사실에 만족할 것이며 바르게 말한 것을 지켜야 할 것이다. 대답은 옳게 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일이 남아 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즉 너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4. 그는 이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이것을 행하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시인하도록 유도하고 있음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과 취해야 할 관점을 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또한, 자기 힘으로는 장래를 위해서 "이것을 행할 수 없었다"라는 것을 시인하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변호하려" 했다. 그래서 사실상 그 예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게 되었다. 마치 다른 한 사람처럼(마 19:28)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는 식으로 말한 셈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육성"하기 위해서보다는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그릇된 점을 겸손히 알아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들의 선행을 교만스럽게 드러내기 위해서 훌륭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Ⅱ.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있다 두 번째로 큰 계명에 따라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율법사의 다른 또 하나의 질문이었는데, 그것은 전자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의 계명을 추구하여 "자기가 정죄 받는" 일이 없도록 꾀한 것이다. 이미 그는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그는 이미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의 "이웃"에 대해서라면, 자기는 어느 정도 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언제나 친절히 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 여기에서 율법사의 잘못된 생각은 무엇인가?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것에 대해서 율법사들 자신의 말을 인용한다. "너는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모든 이방인은 제외해라.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의 이웃은 우리 민족과 신앙을 가진 자이다." 그들은 이방인을 죽인 죄 때문에는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방인은 그들의 이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 시 외에는 이방인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죽음의 위험 상태에 있는 이방인을 보았다고 해도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도와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러한 악한 생각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별하여 선택했다고 하는 거룩한 계약으로부터 얻었다. 또한, 이것을 악용함으로 범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범죄를 똑바로 보시고 이방 세계로 계약의 은총을 돌려주셨다.


2. 예수께서는 어떻게 이 비인간적인 생각을 고쳐 주셨는가? 예수께서는, 우리가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할 사람들과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모든 사람을 우리의 이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친절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비록 민족과 종교가 달라도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한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하자.


(1)이 비유는 곤경에 처한 유대인이 선한 사마리아인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을 보여 준다.


[1] 어떻게 그가 강도를 만나게 되었는가? 이 정직한 사람은 평화롭게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었다(30절). 이런 장소의 언급은 이 이야기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도 이 사건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사건은 많은 교훈을 준다. 만일 그것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꾸며진 비유 이상으로 많은 감동을 준다. 이 사람은 강도들을 만났다. 이 강도들이 약탈해서 먹고사는 아랍인 강도들이거나 이스라엘인 중 악한이거나, 엄격한 군대의 훈련에도 불구하고 이런 악한 일을 하는 로마 군인들이었든지 간에 그들은 매우 야만적이었다. 그들은 그가 가진 돈뿐만 아니라 옷도 벗겨갔다. 그리고 쫓아오지 못하도록 하고 또한 그들의 잔악한 성격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그렇지 않으면 피를 흘려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 그들은 그를 때렸고 상처 때문에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우리는 본문에서 노상강도들에 대한 울분을 하게 된다. 모든 인간성이 소멸하고 야수와 같은 자들은 말살되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악하고 이성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러진 그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져야 하며 우리의 능력이 미칠 때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곤경과 강도의 손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


[2] 그는 친구이었어야 할 자들에게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들은 자기의 민족이며 같은 종교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은 제사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레위인이었다. 그들은 공직을 가진 자였으며 거룩한 직업을 가진 자로서 직무로 보아 온정과 동정을 베풀었어야 했다(히 5:2). 그들은 이 같은 경우에 당연히 구해 줄 의무가 있다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 자들이었다. 이 의무는 죽음의 곤경에 빠진 자들을 구해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이 의무를 이행치 않았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제사장들은 대부분의 생활을 여리고에서 했었기에 거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었으며 그들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올라갔다가 그리고 되돌아올 때는 많은 제사장이 그곳을 지나갔으며 레위인들은 그들의 수행원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그 길로 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았다. 그들은 그의 앓는 소리를 들었고 만일 그를 도와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될 것을 알았을 것이다.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았으나 피하여 지나갔다. 그들이 그의 곤경을 보았을 때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그로부터 멀리 피하여 지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알지 못했다"라고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잔악한 일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자비로 다른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어주어야 할 사람들이 베풀어주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3] 그는 어떤 낯선 사람 즉 유대인이 가장 싫어하고 멸시하며 같이 행동도 하지 않는 민족인 사마리아인에 의해서 구출 받았다. 이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33절). 제사장은 자기의 백성인 그 사람에 대해서 마음을 닫았으나 사마리아인은 다른 민족인 그에 대해서 마음을 열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그가 어느 나라 백성인지 생각지도 않았다. 비록 그가 유대인이었지만 그도 역시 한 인간이었고 특히 곤경에 처한 사람이었다. 그 사마리아인은 모든 사람을 존경하라고 배워왔다. 그는 언제 이 사람의 처지가 자기의 처지가 될지 몰랐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곤경의 경우에 그도 역시 동정받고 싶어 하듯, 그는 그를 불쌍히 여겼다. 사마리아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위대한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모라 사람과 가나안 여인을 칭찬했던 위대한 신앙과 같이 놀라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선은 인간의 역사이지만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사마리아인의 동정은 값싼 동정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고침. 받아라. 도움받아라"(약 2:16). 오히려 그는 그때 이 주린 자에게 그의 심정을 동하여 식물을 나누어주었다(사 58:7, 10; 잠 31:20).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얼마나 친절했는가?


첫째로 그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해 지나갔던 불쌍한 그에게로 가서 어떻게 해서 이런 무서운 일을 당했으며 그를 도와줄 일이 무엇인가를 두려움 없이 살펴보았다. 둘째로 그는 더 좋은 방법이 없어서 스스로 외과 의사가 하는 일을 했다. 그는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맸다." 포도주는 상처를 씻고 기름은 아픔을 없애 주고 상처를 아물게 해 준다. 그는 마치 자기가 강도를 만난 것처럼 생각하고 그의 상처의 고통을 없애 주고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셋째로, 그는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서 자기는 걸으면서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 여행 중 주막을 만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돈으로 음식과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있다. 만일 그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날 밤에 목적지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불쌍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는 곧 주막에 찾아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돕기 위해서 지체할 수 없었을 그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있는 성전 제사에 빨리 가서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사마리아인도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과 하나님께 대한 제사는 이와 같은 자비의 행동보다 우선 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넷째로 그는 주막에서 그를 돌보아 주고 침대에 눕히고 적당한 음식을 주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다섯째로 그는 마치 자기가 어렸을 때처럼 혹은 돌봄을 받을 때처럼 그가 다음 날 아침에 떠날 때 그를 위해 사용할 돈을 주인에게 주었고, 더 필요하면 갚겠다고 말하였다. 그때의 물건의 비율에 따르면 아주 많은 금액을 주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모든 요구에 넉넉할 정도로 만족할 한 징표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일은 친구나 형제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친절이며 관용이다. 그런데도 본문에선 낯선 이방인에 의해서 베풀어졌다.


이 비유는 본래의 의도와 다른 좋은 목적에도 적용된다. 즉 죄 있는 불쌍한 사람에 대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우리는 곤경에 빠진 이 불쌍한 여행자와 같다. 우리의 원수 사탄이 우리를 약탈하고 옷을 벗겨가고 상처를 입혔다. 이러한 일은 죄가 우리에게 저질러 놓은 결과이다. 우리는 본래 유혹과 죄로 거의 죽은, 즉 두 번 죽은 자들이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모세의 율법 즉 율법의 사역자들이 우리를 보았으나 도와줄 어떤 동정심도 능력도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동정해 주지도 않고 위로도 해 주지 않고 다른 길로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때 축복의 예수님 즉 선한 사마리아인(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서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했다)이 오셔서 우리를 동정해 주시고 피 흘리는 상처를 싸매 주셨다(시 147:3; 사 61:1). 그는 기름과 포도주가 아닌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자신의 피를 부어 주셨다. 그는 우리를 돌보신다. 우리에게 소용되는 모든 치료비는 그에게 부담시키라고 명하신다. 그는 우리보다 무한히 위에 계시지만, 친히 자신을 늦추사 그렇게 하시고도 기뻐하신다. 이것은 그의 사랑의 풍성함을 말해 주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라고 지시해 준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갚을 수 있는가?"


(2) 이 비유(譬喩)의 뜻을 새겨보자.


[1] 진리는 율법사 자신의 말에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남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6절) 제사장? 사마리아인? 이들 중에 누가 이웃의 일을 했느냐 ?"이 질문에 대해서 율법사는 "분명히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자비를 베푼 자니 이다. 그는 좋은 이웃이었으며 매우 친절했습니다. 곤경에 처한 정직한 유대인을 구해 주는 것은 선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이에 대한 결론적인 의무가 율법사의 양심에 압박해 왔다. "가서 너도 이처럼 하라." 인간관계의 의무는 상호 협조적이다. 친구, 형제, 이웃이란 말은 그로티우스의 말대로 tw/npro,jti─동등하게 양편을 구속한다. 만일 한 편이 묶여 있으면 다른 편도 풀어질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모든 계약과 마찬가지다. 만일 사마리아인이 곤경에 빠진 유대인을 도와주었는데도 곤경에 빠진 사마리아인을 유대인이 구해 주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Petimusque damusque vicissim ─ 즉 이러한 친절은 보답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가서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 너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어라. 그리고 그들이 비록 너의 민족, 너의 동업자가 아니고 너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신앙적으로 같은 교우가 아니라고 해도 기쁜 마음으로 관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그 일을 행하라. 비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큰 계명을 지킨 것을 자랑하기 전에 먼저 너의 사랑을 충분히 베풀어라." 이 율법사는 스스로 율법에 대한 학식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학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사마리아인에게로 보내어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다. "가서 그와 같이 행하라." 우리가 처한 장소에서 우리의 능력에 따라 곤경과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을 구해 주고 도와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며 특히 율법사의 의무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제사장과 레위인 된 것을 자랑하는 많은 사람보다 앞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눅 10:25~37, 매튜헨리)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참 종교는 제도나 신조나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최대의 선을 베풀고 진정한 선으로 사랑하는 행위를 이루는 데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


예수께서는 또다시 논쟁 가운데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순한 이야기로써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고 율법사로 하여금 진리를 고백하게 한 천래(天來)의 사랑이 넘쳐 흐르는 장면을 청중들에게 묘사하셨다.…


이렇게 하여 “누가 내 이웃이니까”라는 질문은 영원한 답을 얻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웃이 다만 우리가 속하고 있는 교회나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셨다. 인종이나 피부의 색깔이나 계급의 구별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도움이 요구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대적에게 상처받아 죽게 된 영혼은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다.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이다.…


우리가 형제들에게 나타내는 정신이 곧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정신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선언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을 때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솟아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20, 12) (소망 497-498, 503, 505).


<복음(福音)의 신앙(信仰)이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심령이성화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질을 사람 속에 부식(扶植)하는 것이다. 복음의 신앙은 곧 그리스도께서 그 생애 가운데 사시는 것이니 곧 살아서 활동하는 원칙을 말한다. 이 신앙은 품성 가운데 그리스도의 덕성이 드러나고 그것이 선한 행실을 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의 원칙들은 우리 실생활의 어떤 부문으로부터도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과 활동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대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경건(敬虔)의 기초(基礎)이다.> 

사람이 말로는 아무리 공언한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형제에 대하여 이기심 없는 사랑을 가지지 못하는 한 하나님께 대한 순진한 사랑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씀으로써 만도 결코 이런 정신을 갖게 될 수가 없다.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한다.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융화(融化)되는 때에는 사랑은 저절로 생겨난다. 그리스도인의 품성 완성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계속하여 일어나는 때(하늘의 햇빛이 마음에 충만하고 얼굴에 나타날 때)에 성취된다. (실물 402).


그리스도와 연결될 때 우리는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음―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마음에 사랑이 결핍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사랑하신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고는 신성과 접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주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결합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면 우리는 사랑의 사슬의 금고리로 말미암아 우리 동포들과 연결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긍휼과 동정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궁핍한 자들과 불행한 자들이 우리에게 이끌려 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동정하여 달라는 간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두루 다니시면서 선을 행하신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궁핍한 자와 고난 닥치는 자들을 봉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사랑과 동정의 충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다른 사람을 복 주고 향상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곳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령 역사가 나타난다.…


그의 사랑은 너무나 넓고, 너무나 깊고, 충만함으로 어디든지 뚫고 들어간다. 이러한 사랑은 사단의 세력의 범위에서 사단의 기만으로 미혹된 불쌍한 영혼들을 건져낸다. 이 사랑은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바 그 보좌는 허락의 무지개로 둘린 보좌이다. (실물 403-40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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