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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논쟁(질문, 대답, 설명) 0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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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7-11 20:41 조회3,0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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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논쟁

(7월 20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50분)

 

연구 범위: 막 2:1~3:6, 미 6:6~8, 삼상 21:1~6, 막 3:20~35, 눅 12:53, 14:26.

 

기억절: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눅 2:27~28).

 

마가복음 2:1~3:6에는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대조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여주는 다섯 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들은 각각의 연속적인 이야기가 주제의 유사성을 통해 이전 이야기와 연결되는 특정한 유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 이야기는 순환하여 첫 번째 이야기와 다시 연결된다. 

마가복음 2:10, 17, 20, 28의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각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면면을 보여준다.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에는 이 이야기들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살펴볼 것이다.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마가복음 3:20~35을 공부하면서 복음서 기자가 사용하는 "샌드위치 구조의 이야기"라 부르는 기법을 볼 수 있다. 이런 서술 방식은 마가복음에서 적어도 여섯 번 사용된다. 각각은 예수님의 본성과 메시아로서의 역할 또는 제자도의 본질과 같은 중요한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번 주에는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읽고 거기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은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시며 하나님 계명의 뜻도 그와 같다. 

느끼기: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다. 

행하기: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참 하늘 가족이 된다. 

 

TMI 위로

2. 친구 넷의 행동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믿음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막 2:4, 5)

*답: 협력과 사랑과 행동하는 믿음을 말한다. 행동으로 믿음이 보여진다.

3.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어떤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까?(막 2:21)

*답: 예수님은 사람을 중요시하셨고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 문자에 매여 있었다.

4.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막 2:28)

*답: 그분이 창조주요 안식을 제정하신 분이라는 의미이다. 

5. 용서할 수 없는 죄란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 속죄의 능력이 부족할 수 있습니까?(막 3:29)

*답: 십자가의 속죄를 믿지 않게 하는 죄다.

6. 예수님은 가족을 어떻게 정의하셨습니까?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느낍니까?(막 3:35)

*답: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가족이다. 

7. 논쟁들 가운데 드러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사 13:12)

*답: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결론: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자를 찾아가시고 종교 지도자들이 왜곡한 진리의 바른 의미를 드러내 보이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시며 그의 계명도 동일하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자기 생각과 편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용서하실 수 없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뜻을 행하는 자가 진정한 가족이라고 가족의 의미를 재정의하신다.

 

7월 14일(일) 중풍병자를 고치심

 

마가복음 2:1~12을 읽어 보라.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바란 것은 무엇이며, 그가 받은 것은 무엇인가?

[막2:1~12]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답: 병이 낫기를 바랐다. 그런데 죄 사함도 받았다.

 

그 사람은 중풍에 걸려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네 명이 그를 예수님께 데려가야 했다. 지붕을 뜯고 그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을 때, 마가복음 2:5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기록한다. 어떻게 믿음을 볼 수 있는가? 친구들의 믿음과 끈기가 행동으로 보이게 드러난 것처럼 사랑도, 믿음도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

이 남자는 무엇보다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 앞에 왔을 때 그분이 먼저 하신 말씀은 죄 용서에 관한 것이었다. 그 장면 내내 이 남자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마음 속으로 반대한 이들은 종교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 모독이며,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에게만 속한 특권을 취한 것으로 여긴다. 

예수님은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랍비들의 논증 방식을 사용하여 반대자들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설명했다. 실제로 마비된 사람을 걷게 하는 것과 사람의 죄가 사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할 수 있다면 그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주장 또한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미가 6:6~8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예수님과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미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답: 지도자들은 법률 조문에 매여 살았고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셨다. 

 

이 종교 지도자들은 정말 중요한 것, 즉 정의, 자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 견해를 옹호하는 데 집착한 나머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했다.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증거이며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 앞에서 중풍병자를 바로 고쳐주심으로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음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교훈>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충분한 증거와 그분이 더 큰 일도 할 수 있으심을 보여주셨지만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부가설명> 교과 저자는 “실제로 마비된 사람을 걷게 하는 것과 사람의 죄가 사해졌다고 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이라고 했으나 실제로 죄 사하는 것과 병을 고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 마음을 읽으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9절)라고 물으셨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네 죄 사람을 받았다’는 말이 쉽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카톨릭에서는 고해성사할 때 신부가 이 말을 한다. 그러나 고백한 사람의 죄가 사해졌는지 스스로 믿는 것 외에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일어나 상을 가지고 가라’는 말은 사람들 눈에 그 말의 성취 여부가 당장 드러난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환자가 꼼짝도 못 하면 그의 말은 거짓인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어렵다. 예수께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증명이 바로 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되는 것으로 증명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셨다(고전4:20).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처럼 병자들엑 나아라고 말해서 낫게 하는 능력이 없다하더라도 생활로 하늘 모습을 보여주면 능력이 있는 삶이 아니겠는가? 주위에서 우리의 말이 아니라 생활의 능력을 보고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삶을 살도록 은혜 주시기 기도한다.

 

7월 15일(월) 레위를 부르심, 그리고 금식 문제

 

마가복음 2:13~22을 읽어 보라.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막2:13~22]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답: 레위는 세리였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의 세리는 지방 정부나 로마 정부의 공무원이었다. 그들은 종종 필요 이상의 세금을 징수하고 동족을 이용해서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다. 종교법에 대한 유대교 주석서 미쉬나 중 정결과 부정에 관한 토호롯(Tohoroth)은 "세리가 집에 들어오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부정해진다"고 한다. 

서기관들이 못마땅한 태도로 예수에 대해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묻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는가? 그분은 비난을 거부하지 않으셨다. 대신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그 질문을 그들에게 되돌리신다. 예수님은 죄로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영적 의사로 불리기를 자청하셨다. 의사가 병든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마가복음 2:18~22에는 새로운 주제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다섯 개의 논쟁 이야기 중에서 중심 이야기이다. 레위가 준비한 잔치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 이 이야기는 금식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침례 요한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이 주된 내용이다. 예수님은 예와 비유로 자신의 임재를 혼인 잔치에 비교하시며 대답하신다. 결혼식의 하객들이 모두 금식한다면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을 예언하셨는데, 이는 십자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충분히 금식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당신의 가르침과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의 차이를 강조하는 두 가지 비유, 즉 낡은 옷에 덧댄 생베 조각과 낡은 가죽 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 이야기로 설명을 이어간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대조하는 얼마나 흥미로운 방법인가. 그것은 지도자들의 가르침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 준다. 누구든지 주의하지 않는다면 참된 종교조차 어둠으로 만들 수 있다.

 

<교훈>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처럼 죄인에게 은혜가 필요함을 분명히 밝히셨다. 그분은 모두가 기피하는 레위와 함께하시고 그를 제자로 삼으셨다. 

 

<부가설명> 레위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동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시대의 소망에는 “바리새인들은 마태를 그의 직업에 따라 판단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마음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열려 있는 것을 아셨다. 마태는 구주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자각시키는 하나님의 영이 그의 죄됨을 드러냈을 때에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도움을 구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랍비들의 배척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이 크신 교사께서 자기를 주목해 보시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DA 272.2)라고 소개하였다. 레위 마태의 마음에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충만했던 것을 예수께서는 아시고 그를 부르신 것이다. 그는 세리도 용납하시는 예수님고 그분의 제자들을 자기 집에 초청했고 연회를 열었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주님은 만고의 은혜로운 대답을 하셨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신 것이다. 스스로 의인된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는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용서와 이김이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의 새부대를 깊이 기억하자.

 

7월 16일(화)

안식일의 주인

 

마가복음 2:23, 24에서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비난한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39가지 형태의 노동이 금지되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한 일도 이것에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마가복음 2:23~28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비난에 어떻게 대응하시는가?

[막2:23~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답: 다윗의 예를 들어서 대답하시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날이며 이 날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다윗이 거룩한 진설병을 먹은 이야기(삼상 21:1~6)로 대답하신다. 진설병은 안식일에 물려낸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안식일에 급하게 도망갔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진설병을 먹은 것이 괜찮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곡식을 따서 먹은 것도 문제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의 유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는 것이 아니며, 그 주장의 근거로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점을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3:1~6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예수님의 주장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막3:1~6]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답: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셔서 보는 사람이 깨닫도록 설명하셨다.

 

다시 안식일 준수의 문제로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마주한다(결코 안식일 자체에 대한 논쟁이 아님을 기억하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면 그분을 고발할 작정이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선을 행하는 것과 해를 끼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을 대조하며 물으신다. 

답은 분명하다. 안식일에 행할 일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훨씬 더 적절하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주시고, 이에 분노한 반대자들은 즉시 그분을 죽이려고 계획한다. 이 이야기의 역설은 바로 안식일을 어긴다는 이유로 예수를 정죄하려는 사람들이 같은 날 그분의 죽음을 계획함으로써 스스로 안식일을 어기고 있다는 점이다. 

 

<교훈>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가운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말씀하시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으며,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날임을 밝히셨다. 

 

<부가설명> 예수님이 안식일에 관하여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살피면 안식일은 생명을 주시고 풍성하게 하시는 날인 것을 깨닫게 된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합당한지 물으셨다. 병을 고치는 것은 생명력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병은 생명력을 갉아먹는 것이다. 악은 죽이는 것이고 선은 살리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재림 성도들이 예수님 없어서 생명이 없는 사람들(요일5:11,12)을 예수님께 인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은 생명을 주는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도다.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은 작은 일이고 영생을 얻도록 고치는 것은 큰 일이다. 예수님은 이런 큰 일을 행하라고 부르셨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5:21).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을 살리는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다. 안식일뿐만 아니라 어느 때든지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를 행하는 것은 중요한 생명의 봉사이다. 

 

7월 17일(수) 샌드위치 구조 이야기–1

 

마가복음 3:20~35을 읽어 보라. 서로 얽혀 있는 두 이야기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막3:20~35]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답: 사탄을 제어하시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구절은 시작된 첫째 이야기가 둘째 이야기의 전개로 중단된 후 나중에 다시 첫째 이야기가 완성되는 마가복음의 첫 번째 "샌드위치 구조의 이야기"이다.

샌드위치의 겉장 이야기는 예수님이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돌보려고 나선 예수님의 친족들에 관한 것이다(막 3:21). 샌드위치의 속 이야기는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마귀와 결탁하였다고 고발하는 내용이다. 

오늘 살펴볼 속 이야기인 마가복음 3:22에서 서기관들은 그분의 치유 능력이 마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혐의를 제기한다. 예수님은 먼저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는 중심 질문으로 대답하신다. 사탄이 그 자신을 대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왕국, 집안, 마침내 사탄의 분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분열하는 대상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주님은 국면을 전환하여 누군가의 집을 약탈하려면 강한 자를 결박해야 가능하지 않겠냐고 지적하신다. 이 마지막 예화는 어둠의 주관자인 사탄을 결박하고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풀어주시는 예수님을 그리고 있다. 

 

마가복음 3:28~30을 읽어 보라.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어떤 것이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막3:28~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답: 성령을 모독하는 죄, 예수께서 마귀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요, 성령님의  역사를 마귀의 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3:28, 29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일하고 계심에도 서기관들이 그분에게 더러운 귀신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인 것을 마가복음 3:30을 통해 알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성령님의  역사를 마귀의 일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은 성령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성령님의  말씀을 듣는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귀의 인도를 따르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훈>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일하고 계심에도 서기관들이 그분에게 더러운 귀신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성령님을 모독(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유는 성령님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버리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실천한다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한 뱀의 말을 받아들인 것과 같다. 태초의 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이야기는 입 밖에 낸 일이 없다.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말라고 하시더냐? 라고 물었을 분이다. 여자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말하지 않았다. 동산 중앙에 있는 그 나무라고 했다. 우리 성경에는 ‘그’가 없다. 원문에는 ‘그’라는 정관사가 있다. 여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분명히 대답했다. 그런데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 성령님을 거역한 죄가 되었다. 태초에 그랬다면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고전4:6). 성경은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다(고전12:3). 그래서 성령님을 모독하는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7월 18일(목) 샌드위치 구조 이야기-2

 

마가복음 3:20, 21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가족은 어떤 일로 인해 그분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막3:20,21]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답: 예수님이 미쳤다는 말을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제정신인지 의심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의혹은 그 사람의 행동이 당사자의 안전을 해칠 수 있다고 여겨질 때 제기된다. 

예수님의 가족은 그분이 식사할 겨를도 없이 너무 바쁘게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느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말리기 위해 출발했고, 샌드위치의 겉장 이야기는 서기관들이 그분을 마귀와 공모한 것으로 비난하는 속 이야기에 의해 잠시 중단된다. 

이 샌드위치 이야기에는 겉장과 속 이야기 사이에 주목할만한 평행구조가 나타난다. 예수님의 가족은 서기관들과 유사한 관점으로 그분을 바라보는 것 같다. 가족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말하고 서기관들은 그분이 마귀와 한통속이라고 말한다.

 

마가복음 3:31~35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가족이 원한 것은 무엇이며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막3:31~35]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답: 가족은 예수께서 미친 짓을 그만 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가족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셨다. 

 

이 장면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어머니나 가족이 당신을 만나러 오면 그들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당시 예수님의 가족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은 이것을 아셨고 말씀을 통해 가족이 무엇을 뜻하는지 재정의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그분의 형제, 자매, 어머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사람이 그분의 가족이 된다. 

마가복음 3장의 샌드위치 구조의 두 이야기는 모두 깊은 역설을 담고 있다. 속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설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언뜻 보기에 겉장 이야기에서 예수님 당신의 집, 즉 그분의 가족이 스스로 분열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족에 대한 재정의를 통해 이 난제를 해결하신다. 그분의 진정한 가족은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다(눅 12:53, 14:26). 

역사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친족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일을 자주 경험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마가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도 같은 어려움을 겪으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분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아시며 견디기 어려운 고립을 경험하는 이들을 넉넉히 위로하실 수 있다.

 

<교훈> 가족과 갈등 속에서 예수님은 함께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가족이라고 재정의하셨다. 이것은 믿음 때문에 가족에게 고통받는 이들을 격려해 준다. 

 

<부가설명> 가정은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제도이다. 에덴동산에서 가정을 구성해주셨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셔서 가족이 가정을 이룰 것을 명령하셨다. 그런데 아담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겨서 마귀의 자식으로 가버렸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으로 구주가 오셔서 하나님의 참 가족을 재구성하는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1:12,13).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다. 가족은 혈연이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 역사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참 가족이 된다. 그들은 마귀 가족들이 볼 때 미친 자들이고 귀신들린 자이다. 그들이 사탄의 편에 서서 그것이 바르다고 믿기 때문에 진짜 바른 것을 귀신 들렸다고 공격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가정에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가족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다. 교인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다. 교회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아닌 교회가 너무 많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중생한 그 생명력으로 준행되어지는 경험으로 하나님의 가족된 것이 증명되는 생활을 이루도록 성령님 능력으로 주장해주소서.

 

7월 1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28장 “레위 마태,” 29장 “"안식일”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0~12)라고 대답하셨다.

정탐꾼들은 자신들이 난처한 처지에 휩쓸려 들어갈 것이 두려워 군중 앞에서는 그리스도께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유전을 범하기보다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도록 버려두는 한편, 버려둔다면 소유주가 손실을 당한다는 이유로 짐승은 구출해 줄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보다 말 못하는 동물에게 더 큰 배려를 하였다. 이것은 모든 거짓 종교가 하는 일을 설명하여 준다. 이런 종교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을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타락시킨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종교마다 창조시에 가졌었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될 영광을 사람에게서 속여 빼앗는다. 거짓 종교마다 그 신봉자들에게 인간의 필요, 고통, 권리에 대하여 무관심하라고 가르친다. 복음은 인류를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바 된 존재로 높이 평가하며, 사람의 필요와 고통에 자애로운 관심을 보이라고 가르친다. 주께서는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사 13:12)고 말씀하셨다"(시대의 소망, 286).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여러분과 지역교회는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와 같이 말없이 고통받는 사람을 더 잘 살피기 위해 어떤 것을 할 수 있겠는가?*답: 지역에서 예수님 마음으로 봉사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2. 예수님을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이 증오, 전통, 교리, 종교 활동에 얼마나 눈이 멀었기에 눈앞의 기적조차도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없었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떻게 조심해야 하겠는가?

*답: 예수님은 생명을 구하는 것을 우선순위 첫째로 두셨다. 

3. 신앙 때문에 직계 친족에게 거부당한 사람들에게 지역교회가 가족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토의해 보라. 

*답: 교회와 성도가 가족이 되어주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자.

4.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라. 교과 시간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지 토의해 보라. 

*답: 교과 공부를 하고 서로 의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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