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갈릴리 호수의 이적들(질문, 대답, 설명) 08/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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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7-25 22:38 조회2,755회 댓글0건본문
제5과 갈릴리 호수의 이적들
(8월 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38분)
연구 범위: 막 4:35~41, 시 104:1~9, 막 5:1~43, 민 27:17
기억절: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막 5:19).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갈릴리, 특히 갈릴리 바다라고도 불렸던 갈릴리 호수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갈릴리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수역(길이 약 21Km, 너비 13Km)으로 인근 주민들의 삶의 중심지이다.
마가복음 4장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이야기로 끝난다. 폭풍이 일어나지만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말씀으로 잠잠하게 하신다. 마가복음 6장 끝부분은 4장과 비슷한 듯 하지만 예수께서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물 위로 걸어가는 장면으로 마쳐진다. 호수에서 있었던 두 이야기 사이에는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과 제자들의 첫 번째 선교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이번 주 교과에서 살펴볼 내용이다.
이 극적인 이야기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독자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분은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그저 옷을 만지기만 했던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소녀를 살리신다. 또 고향에서 설교하시고,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파송하시며, 떡 몇 개와 물고기로 많은 이를 먹이시고, 물 위를 걷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심으로 제자들에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이끄신다.
*학습 목표
깨닫기: 갈릴리에서의 이적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느끼기: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지만 우리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일하신다.
행하기: 인생의 시험 중에도 인내하며 예수님을 믿고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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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수에 몰아치던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모습은 그분에 대해 무엇이라고 증거합니까?(막 4:41)
*답: 이분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게 하였다.
3. 거라사의 광인을 회복하신 이야기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막 5:8)
*답: 광인을 대하기 전에 이미 귀신에게 나가라고 명령하셨다.
4. 우리의 삶은 때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같지만 주님은 그 일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십니까?(막 5:34, 41)
*답: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여주신다.
5.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명은 침례 요한의 삶과 어떤 연관성을 보여줍니까?(막 6:14)
*답: 사탄이 침례요한을 잠잠하게 했으나 제자들은 여전히 그의 외침을 계속했다.
6. 왜 예수님은 무리를 가르치고 먹이신 후에 그들을 재촉하여 돌려보내셨습니까?(막 6:45)
*답: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결론: 그분은 우리의 간청을 들으시지만 기다림과 고통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분은 우리의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신다. 때로 시험도 있지만, 그분은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우리를 도우시기에 믿고 기다릴 때 놀라운 이적을 보게 될 것이다. 갈릴리에서 행하신 이적들은 그분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주며 그 사실은 숨겨질 수 없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를 찾도록 이끈다.
7월 28일(일) 폭풍을 잠잠하게 하심
마가복음 4:35~41을 읽어 보라. 무슨 일이 일어나며, 이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막4:35~41]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답: 바다에 광풍이 불어 배가 침몰할 것 같은 위험이 닥쳤고 예수님은 깨어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자 조용해졌다. 예수께서 창조주시며 천연계를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다.
마가복음 4장의 시작에서 예수님은 바닷가에 모인 군중을 가르치기 위해 배에 오르신다. 마가복음 4:10~12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배에서 내린 후 제자들과 개인적으로 대화하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온종일 가르치셨던 하루가 마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호수를 건넌다. 마가는 이 장면을 “계신 그대로”라는 표현으로 예수께서 매우 지치셨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배의 뒤편에서 배게를 베고 바로 잠이 드셨다. 제자들이 그분을 깨웠을 때 호수에 일어난 큰 폭풍으로 배는 가라앉을 위기에 처해 있다. 예수께서 바람과 파도가 그치도록 명하신다. 장엄한 정적이 호수 위에 내릴 때 제자들이 그분이 행하신 신성한 능력에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시편 104:1~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 나타난 여호와는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어떻게 비교되는가?
[시104:1~9]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2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5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6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7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8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9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답: 여기 계시된 여호와와 예수님은 같은 분이심을 드러낸다.
마가복음 4:35~41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하나님 또는 그분의 천사가 나타나는 모습을 묘사하는 유형과 일치한다. 이러한 사건에는 다섯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1) 신성한 능력이 나타남, (2) 인간의 두려움, (3)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 (4) 하나님 또는 천사가 전하는 계시의 말씀, (5)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이 이야기에는 다섯 가지 특징 중 네 가지가 나타난다.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것은 신성한 능력의 나타남이고, 제자들의 두려움은 인간의 두려움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는 질문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가 누구이기에"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인간의 반응이다.
여기 빠져 있는 것은 계시의 말씀이다. 이 부분은 마가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계시/비밀 주제로 등장하며, 이것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진리가 나타난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독자로 하여금 이 이야기에 빠져 있는 계시의 말씀, 즉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이시라는 답을 스스로 채우도록 이끈다.
<교훈>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현현과 유사하지만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독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스스로 찾게 한다.
<부가설명> 에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자신을 위하여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사람을 도우시는 일에 필요하면 이 능력을 나타내셨다. 이적들이 바로 인간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순절 후에 이런 능력을 행했다. 그러나 천연계를 지배하는 능력을 행한 기록이 없다. 바울이 로마로 호송될 때 광풍으로 배가 표류할 때도 그 바다를 잔잔하게 하는 능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천연계를 주장하는 것은 사람에게 위탁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람들은 천연계의 현상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의 돌보심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어떻게 하든지 천연계의 순환과 나타나는 현상들에 적응하고 순응해서 안전하려고 한다. 재난들이 일어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토네이도나 지진이나 해일이나 폭염 혹한 이런 현상들을 어떻게 조종하겠는가? 시편 19편은 천연계 규례와 하나님의 계명을 대조해서 계시한다. 천연계가 하나님의 법칙대로 운행하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의 천연적 원래 본성은 하나님의 계명이 생명의 도라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에게 천연계 규례와 같은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지혜다.
7월 29일(월) 거친 울부짖음에 숨겨진 간구를 들으시는가
마가복음 5:1~20을 읽어 보라. 이 놀라운 이야기에서 대쟁투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무엇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는가?
[막5:1~20]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답: 거라사 땅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 고친 사건이다. 사탄과 예수님 사이의 싸움의 현상을 목격하게 하는 사건이다. 사탄은 비록 2000마리가 웅크려도 창조주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완전히 굴복한 것을 볼 수 있다.
호수에서 보냈던 인상적인 밤만큼이나, 다음날 아침 거라사에 당도한 장면도 놀라웠다. 귀신 들린 사람이 살아온 가슴 아픈 삶이 독자의 눈 앞에 펼쳐진다. 그 무엇으로도 통제할 수 없었던 이 사람은 돌로 스스로를 해치며 무덤에 살았다. 그렇게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막 5:4)던 이가 예수님을 만났다.
그는 예수께 달려갔다. 제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들은 도망갔을 것이다. 예수님께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 "절하며"는 헬라어 동사 프로스키네오(proskyneō)를 번역한 것으로 보통 "경배하다"로 번역된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속에 있던 귀신들이 예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귀신들의 울부짖는 소리 너머에 속삭이는 그의 간구를 들을 수 있었다.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분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다. 약 2천 마리에 달하는 돼지 떼 전체가 제방 아래로 달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소유주에게는 막대한 손실이었다.
마귀도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 앞에서 자신들이 무력한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며 그 때문에 그들은 요청한 것을 이루어 달라고 두 번이나 "간청"(막 5:10, 12) 했다. 분명히 귀신들은 그들을 압도하는 예수님의 권능을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이 있다. 첫째, 이 이야기에는 구약 율법이 말하는 부정하거나 의식적으로 더러운 것들이 가득 차 있다. 무덤과 죽은 자는 부정했다(민 19:11, 16). 피를 흘리는 것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었고(레 15:) 돼지도 부정했다(레 11:7).
둘째, 더러운 것이 가득한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선과 악의 세력 사이에 오고 가는 싸움이다.
예수님은 귀신들을 쫓아내시고(예수님의 2득점, 역자주: 저자는 선과 악의 싸움을 농구 경기에 빗대어 점수를 세고 있다), 귀신들은 돼지를 죽인다(사탄의 2득점).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요청하지만(사탄의 2득점), 예수님은 고침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증인으로 보내신다(예수님의 3점 슛). 여러 면에서 이 사람은 전혀 선교사가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전하고 싶은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교훈> 예수님은 귀신들의 거친 소리에 숨겨진 그의 간청을 들을 수 있었다. 아무도 도울 수 없었던 그를 예수님이 도우셨고 하나님의 증인으로 변화시키셨다.
<부가설명> 이 기적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예수님이 왜 사람들에게 그런 엄청난 손해를 끼치도록 하셨는가라고 묻는다.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지 않고도 귀신을 쫓아내실 것인데 굳이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납득하도록 합리적인 대답이 쉽지 않은 사건이다. 이것은 파도와 바람을 잔잔하게 하신 사건과 유사한 성격이다. 천연계를 주장하시는 분은 사탄의 세력도 무력화하시는 분이신 것을 드러낸다. 책 저자가 2넘 슛, 3점 슛하고 점수를 매기며 재미있게 묘사했는데, 사탄도 피조물이며 창조주의 권능에 능력으로 저항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구함으로 동네에 머물지 못하게 해서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는 전력을 썼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엄청난 손해를 보이는 악한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키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이 왜 그런 사탄의 계략을 허락하셨을까? 사람들은 사탄이나 마귀의 실체를 의심했을 수 있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노골적으로 그런 영의 세력들을 인정하지 않았다(행23:8). 군중에는 사두개인들이 파견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귀신 쫓아낸 이적을 여러번 하셨어도 귀신의 실체를 사람들이 알아보도록 한 일은 이 기록 외에는 없다. 그래서 그것이 귀신 소행인지 정신병인지 사람들이 수군거렸을 것이다. 그래서 귀신의 실체를 보여줄 기회를 잡으신 것이다. 그리고 사탄의 부하들인 악한 천사들의 실체를 사람들이 부인할 수 없도록 하셨고 치료된 사람을 동네에 보내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4000명을 먹이실 때 군중은 이 이방인들이었다. 예수님의 3점 슛이었다.
7월 30일(화) 예수님과 함께 탄 롤러코스터
마가복음 5:21~24을 읽어 보라. 야이로의 어떤 특징이 두드러지는가?
[막5:21~24]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답: 딸을 사랑하는 것과 딸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아주 낮추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야이로와 같은 종교 지도자는 예수님을 찾아올 만큼 관계가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막 1:22, 막 3:2, 6, 눅 13:14). 따라서 그의 상황이 매우 절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간절함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죽어가는 딸을 위해 간청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부모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이 도와주실 수 있음을 믿고 있다. 예수님은 두말없이 간절한 아버지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신다.
마가복음 5:25~34을 읽어 보라. 어떤 일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는가?
[막5:25~34]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답: 열 두해 혈루증 않는 여인이 병낫는 일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가 구원받았다고 선포하셨다.
이야기는 갑자기 다른 장면으로 넘어간다. 12년 동안 끔찍한 병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의 이야기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야이로와 이 여인의 이야기는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두 번째 샌드위치 구조의 이야기다. 대조적인 인물인 야이로와 여인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러 나온다.
여인은 예수님 뒤로 다가가서 그분의 옷을 만지고 즉시 온전해진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던 길을 멈추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렇게 아팠던 여인이 한순간에 건강해졌지만 그녀는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예수께서 화를 내실까 두려웠다. 여인의 감정은 격렬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하지만 예수께서 원하셨던 것은 그 여인의 몸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다시 야이로에게로 돌아간다(막 5:35~43). 회당장 야이로의 감정도 격렬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외에는 아무도 함께 회당장의 집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며 모든 조문객을 내보내고 죽은 소녀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신다.
그분은 소녀의 손을 잡고 ‘탈리타쿰’ 하고 말씀하신다. 마가는 이 말을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번역했지만 탈리타는 사실 "어린 양"이라는 뜻으로 가정에서 어린아이를 부르는 애칭이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을 관통하는 계시/비밀 주제인 “이것을 알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은 도리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궁극적으로 그분은 숨겨질 수 없음을 알리고 있다.
<교훈> 야이로와 한 여인은 대조적인 인물이지만 믿음으로 놀라운 이적을 경험했다. 이 일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말해주며 그 사실은 숨겨질 수 없음을 가리킨다.
<브가설명> 12년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치료와 야이로의 딸 살리신 사실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12년 하혈하며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재산도 다 허비한 여인의 체력이나 기력은 홀로 걷기도 힘드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옷 가를 만진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증언에는 “그 여자는 허약하고 괴로운 중에도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해변에 나와서 군중을 뚫고 들어가려고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그 여자는 다시 레위 마태의 집에서 예수를 따랐으나 여전히 예수께 가까이 나갈 수 없었다. 그 여자가 거의 절망하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무리를 헤치고 나가시면서 그 여자가 있는 곳에 가까이 오셨다.”(소망 343). 그렇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로 다가가신 것이다. 그 여자가 옷 가를 만질 수 있는 거리까지 가시고 그가 만질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소원을 잘 아셨다. 간절히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면 예수께서는 반드시 찾아가신다. 예수님은 또한 야이로의 믿음을 북돋우시면서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셨다. 중간에서 지체할 때 야이로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게다가 아이가 이미 숨을 거두었다는 기별도 받지 않았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믿기만 하라’라고 격려하셔 그의 믿음을 붙들어 주셨다. 지금도 예수님을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붙들고 북돋우신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아멘.
7월 31일(수) 배척과 영접
마가복음 6:1~6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배척했는가?
[막6:1~6]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답: 예수님을 육체대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다. 랍비교육도 안 받으셨다. 그러니 볼만한 것이 없었다.
보통 작은 마을의 사람이 유명해지면 고향 사람도 함께 영예를 나눈다. 나사렛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교사이자 치유자로서 성공하신 것에 대해 불쾌해하고 당황해했다. 노동자라고 여겼던 그분이 선생이 되신 것을 그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듯하다. 또 대부분의 기적을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것에 대한 반감도 있었을 것이다(눅 4:23). 게다가 그는 자기 가족들과도 섭섭한 일이 있었지 않은가(막 3:31~35).
마가복음 6:7~30을 읽어 보라. 열두 사도의 사명은 침례 요한의 참수와 어떻게 대조되는가?
[막6:7~30]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14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침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15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16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침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침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답: 광야의 소리로서 요한이 죽어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요한이 외친 기별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진리를 마을마다 전파하였다.
마가복음의 세 번째 샌드위치 구조의 이야기가 나타난다. 예수님의 기별을 온 세상에 전하는 열두 사도의 사명은 침례 요한의 투옥, 처형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간소한 여장으로 다니라는 지침을 받는다. 이 전략은 실제로 선교사들을 그들이 섬기는 사람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그들이 기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침례 요한은 헤롯과 그의 가족들과의 사이에서 그런 유대감을 만들 수 없었다. 헤롯의 양면성과 욕망을 이용한 헤로디아의 음모에 희생된 요한의 죽음은 충격적으로 자세히 묘사된다. 헤로디아의 딸은 침례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달라는 기괴한 요청으로 이 추악한 음모에 합세한다.
침례 요한의 광야의 소리와 같은 열두 사도의 회개하라는 선포가 울려 퍼질 때, 요한의 맑고 우렁찬 목소리는 사라지고 그는 참수당한다.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한다. 요한이 죽임당하고 장사된 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보고된(막 6:14~16, 29) 것은 예수께서 경험하실 일과 유사하다(막 15:, 16:). 이 평행구조의 이야기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다가올 위기를 가리킨다.
<교훈> 침례 요한이 처형되어 그의 목소리가 사라질 때 제자들이 큰 소리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뚜렷한 대조를 보이면서 그분의 부활과 평행을 이룬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성장한 마을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학교도 다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유명해진 것을 싫어한 것 같다. 오늘날 이 세상은 나사렛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교조(敎祖)라고 한다. 이것은 다 육체대로 예수님을 평가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사울일 때 그렇게 평가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사울이 바울이 된 후에 예수님을 육체대로 알지 않았다. 나사렛 사람들이 그렇게 대우했으나 침례요한을 통하여 전파된 예수님은 불치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으로 그가 육에 속한 분이 아니고 생명이신 것을 드러내셔서 나사렛 사람들의 인식과 대조를 이루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육체대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임을 암시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8월 1일(목) 대중의 기대와 다른 메시아
마가복음 6:34~52을 읽어 보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직면한 문제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막6:34~52]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답: 대중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이었고 떡 5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여 해결하였다. 대중은 예수님을 세상의 권세잡을 자로 기대했고 예수님은 죄의 권세에서 행방하시는 분으로 드러내셨다.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쉬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 동쪽 해안의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5,000명의 군중이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음을 보셨고 온종일 그들을 가르치셨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찾도록 무리를 보내라고 권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들을 먹이라고 하신다. 이어지는 대화(막 6:35~38)는 제자들이 인간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으로 많은 무리를 기적적으로 먹이시며 문제를 해결하신다.
이 이야기의 특징은 예수님 당시의 메시아에 대한 대중의 생각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적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의와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외딴 곳에 모인 것은 모종의 군사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요한복음 6:14, 15, 사도행전 21:38).
이 개념은 자신의 뒤를 이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임명해 달라고 모세가 하나님께 간청하는 민수기 27:17을 일부 인용하며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보셨다는 언급을 통해 더 강화된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목자에 대한 이런 표현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며,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에 지도자나 왕이 없음을 의미한다(왕상 22:17, 대하 18:16, 겔 34:5, 6).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멀리 보내시고 무리를 해산시키신다. 그리고 로마에 대한 반란을 이끄시기보다는 산으로 물러나 기도하셨다. 그것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왕이라는 대중적인 메시아의 모습 대신, 예수님은 사람을 죄의 속박에서 해방하려고 오신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심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이 세상의 참 주인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분은 군림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오셨다(막 10:45).
<교훈> 그분은 로마에게서 해방시키시는 왕이 아닌 죄의 속박에서 건지시는 분이시다. 이적을 행하며 자연을 다스리시는 그분은 자신을 십자가에 주시기 위해 오셨다.
<부가설명> 사탄은 시험의 광야에서 맨 먼저 던진 시험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다. 즉 민생문제를 이적으로 해결하면 백성들이 따를 것이라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라고 대다하셨다. 그러나 인생은 떡이 필요했다. 말씀을 재미있게 맛있게 먹었으나 역시 주린 배를 채울 떡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그 떡을 말씀으로 불어나게 하셨다. 예수님은 먹고 입을 것보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5천명 먹이신 것으로 이 교훈을 실천해주셨다. 군중은 배고픈 것도 모르고 말씀에 도취해 있었다. 말씀이 끝났을 때 날이 저문 것과 시장한 것을 느겼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미 있는 떡과 생선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다. 말씀을 사모하여 먹는 것도 잊고 심취했을 때 예수님이 베푸신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셨다. 백성들은 흥분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 임금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그들을 급히 흩어보내신 것을 기록하고 예수님은 기도하려 산으로 가셨다고 했다. 육체대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신령한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 어렵다.
8월 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35장 “잠잠하라 고요하라,” 36장 “믿음으로 만짐”을 읽어보라.
"하나님의 훈련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서는 세상의 습관이나 행습을 따르지 않는 삶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얻는 일에 있어서 개인적인 경험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각자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마음에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모든 다른 소리가 조용해지고 우리가 조용한 가운데 그분 앞에서 기다릴 때 영혼의 침묵이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분명히 들리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명하신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참된 쉼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수고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효과적인 준비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군중과 인생의 격렬한 활동으로 인한 긴장 속에서 이와 같이 소생함을 받은 영혼은 빛과 화평의 분위기로 둘러싸일 것이다. 그 생애는 향기를 내뿜을 것이며 사람의 심령을 감동시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시대의 소망, 363).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 주장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것을 거절하신 사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였다. 사람들은 예수의 거절을 제멋대로 해석했다. 많은 사람은 예수 자신이 자기 사명의 신성한 성격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자기 주장을 감히 펼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이 그들은 저희 마음을 불신을 향해서 열었으며 사탄이 심은 씨는 오해와 부족함 가운데서 나쁜 열매를 맺었다"(시대의 소망, 385).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예수님이 당신을 무엇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까?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답: 각자 대답하자.
2. 왜 하나님께서 때때로 침례 요한 같은 선한 사람이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당하도록 허락하시는지 토의해 보라. 이런 어려운 일 가운데서도 우리는 어떤 위안이나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답: 세상은 영생하는 곳이 아니고 부활해야 영생하는데 부활은 육신이 죽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사명을 다하면 쉬게하시지 않겠는가?
3. 5,000명을 먹이신 일에는 자원이 거의 없는 교회와 회중을 위해 어떤 교훈이 담겨 있는가?
*답: 믿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4. 마가복음 5장과 6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날의 예수님에 대한 대중적인 견해와 비교해 보라. 예컨데, 정치 권력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답: 오늘날도 세상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과 교인들은 예수님을 육체대로만 알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육체대로 아는데서 벗어나야 한다(고후5:13~1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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