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속을 드러내 보이심(질문, 대답, 설명) 08/10/24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8-01 21:06 조회2,857회 댓글0건본문
제6과 속을 드러내 보이심
(8월 10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30분)
연구 범위: 막 7:, 사 29:13, 출 20:12, 막 8:11~21
기억절: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막 7:15, 16).
이번 주는 마가복음 7장과 8장 전반부를 공부할 것이다. 마가복음 7장은 당시 유대교의 전통을 거부하심으로 논란에 휩싸인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분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의 삶과 깊은 관련 있는 진리를 강력하게 지지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의 문을 여는 질문을 던지신다.
그 후 두로와 시돈으로 가신 예수님은 복음서를 통틀어 유일하게 그분과의 논쟁에서 이긴 한 여인을 만나신다. 이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이례적이었고, 그 일이 이루어진 이면에는 여인이 파악한 몇 가지 감추어진 소통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 때문에 예수님은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셨다.
마가복음 7장은 또 다른 치유의 이야기를 통해 아무리 놀라운 이적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에 마음을 열게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준다. 예수님을 거부하기로 작정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아무리 놀라운 이적인들 결국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마가복음 8장에서는 가르침과 전통의 상징으로서 떡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종교 생활의 의미와 실천에 대한 탁월한 교훈이 담겨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은 사람의 불신과 굳은 마음을 안타까워 하시며 마음을 열고 진리를 보기 원하셨다.
느끼기: 예수님은 깊은 탄식 가운데 우리가 마음을 열어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행하기: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잘못된 전통이 아닌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따른다.
TMI 위로
2. 예수께서 당시의 종교적 전통을 공격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막 7:7~8)
*답: 하나님의 계명 대신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3.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은 음식물 법을 폐지하는 것입니까?(막 7:15)
*답: 아니다. 이것은 음식에 관한 교훈이 아니다. 마음의 상태에 관한 교훈이다.
4. 그 여인은 어떻게 개라는 심한 표현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그분에게 간구할 수 있었습니까?(막 7:27)
*답: 예수께서 사용하신 단어에 충분한 암시가 있었다. 여인은 이것을 알았다.
5. 귀먹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예수님의 탄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막 7:34)
*답: 진리를 바르게 듣지 못하고 전하지 못하는 신자에 대한 탄식이다.
6. 예수님의 탄식이 이어지는 것은 어떤 일들이 이어지기 때문입니까?(막 8:18)
*답: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7.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요일 2:6)
*답: 그릇된 교훈이고 예수님 안에 거할 때만 제거된다.
결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면서도 마음은 멀리 떠나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과 논쟁하신 것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어려워 보여도 여인은 예수님을 신뢰하여 도움을 받았고 증거가 충분한 가운데서도 지도자들은 예수를 배척했다. 예수님은 이러한 깊은 불신과 굳은 마음에 대하여 거듭 탄식하시며 제자들이 눈과 귀를 열고 그분의 가르침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8월 4일(일) 하나님의 계명인가, 사람의 전통인가
마가복음 7:1~13을 읽어 보라. 여기에는 오늘날에도 요긴한 어떤 진리가 나타나 있는가?
[막7:1~13]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답: 믿음은 성경 진리에 세워야 하는 것이지 교회 전통 위에 세우면 안 된다.
이 성경 구절을 공부한 뒤 아이가 엄마에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어떻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분명 보건 위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은 의식적 정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의식적 정결을 위해 손을 씻어야 한다는 생각은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에게만 적용되던 규칙이었다(출 30:17~21). 이것이 신구약 중간기에는 일반인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이 문제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는 대신 두 가지 방식으로 제자들을 변호하신다. 먼저 그분은 말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먼 백성을 꾸짖는 이사야의 강력한 말씀을 인용한다(사 29:13). 이사야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의 자리에 사람의 전통을 두는 것에 대한 정죄로 이어진다.
예수님 대답의 두 번째 부분은 앞선 권면의 연장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출 20:12), 즉 노년기의 부모를 돌보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이를 무언가를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고는(고르반) 자신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부모에게는 드리지 않는 종교 전통과 대조하신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도와드리고 싶지만 제 돈을 성전에 드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예수님이 여지없이 공격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형태의 위선이다. 그들은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높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지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손을 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신, 그분은 사람의 전통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을 강력하게 지지하셨다(막 1:44; 막 7:10~13; 막 10:3~8; 막 12:26, 29~31).
<교훈> 종교 지도자들은 전통을 말씀보다 높임으로 죄를 지었다. 예수님은 말로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그들의 위선을 공격하시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라고 하신다.
<부가설명> 개역에는 유전이라고 번역한 것을 개정에는 전통이라고 번역했다. 헬라어로 ‘파라도시스’인데 전해내려온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전통은 계시의 말씀이 아니다. 소위 종교 지도자들이 계시의 말씀을 자신들의 이익과 편리를 위하여 표나지 않게 변경해서 가르친 것이다. 제사장들이 제사 집전을 하기 전에 반드시 씻어야 한다는 규율을 백성들의 일상생활로 확장하여 종교적인 삶을 살도록 옭아맨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고르반이었던 것 같다. 이 외에도 안식일에 할 것 하지 말것에 관한 까다로운 규칙들이 있다.
오늘날 교회도 기록된 말씀이 아닌 교회의 전통이 교리가 되어 그것을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하여 제칠일 안식일을 밀어낸 것이다. 또 침례를 세례로 간소화한 것도 있다. 또한 영혼불별설도 있다. 성경에는 전혀 기록이 없는 직책들도 있다. 이런 것들은 교회가 세상 사회의 영향을 받아 수입한 것들이다. 절기도 있다. 크리스마스 부활절 같은 것도 성경 계시와 상관없는 전통이다. 교회가 진리의 말씀을 떠나게 하는 가장 강력한 공격이 문화공격이고 인간의 편의를 말씀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인본주의 사상이다. 세속 음악이 교회로 침투하고 예배 복장이 일상에서 일할 때 편의를 따라 입던 대로 입는 것이고 설교자들도 정장하지 않는다. 복장에 대하여 계시의 원칙을 실천하라고 하면 참석자들이 불편하게 느껴서 예배 참석하기를 꺼린다는 이유다. 예배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데? 설교도 듣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재림교회도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회개할 일이다.
8월 5일(월) 깨끗한 손인가, 깨끗한 마음인가
마가복음 7:14~19을 읽어 보라. 마가복음 7:15, 16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막7:14~19]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답: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고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더럽게 한다고 가르쳐서 음식이 아니라 마음의 더러운 생각으로 사람이 더럽혀지게 된다고 가르친다.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의 말씀을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관한 레위기 11장의 가르침과 연결지어 이해하려고 시도하다가 난제에 부딪혔다. 예수님은 음식물 구별을 폐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인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성도들에게 정결한 식물을 먹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첫째, 마가복음 7:6~13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전통에 반대하여 모세의 가르침을 지지하던 예수께서 이어지는 7:14~19에서 별안간 모세의 가르침을 반대한다면 이상할 것이다. 둘째, 바리새인들이 장려하는 그 전통은 구약성경의 근거가 없지만, 그에 반해 음식법은 분명한 근거가 있다. 셋째, 마가복음 7:19에서 예수님이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 하시는 말씀은 음식에 관한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만든 접촉을 통해서 부정해진다고 생각하는 전통이 무효라는 의미이다. 예를 들자면 이방인과의 접촉으로 부정해질 수 있다면 그들이 만진 음식을 접촉하는 것으로도 부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전통을 말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7:20~23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막7: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답: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 등등이다. 한 마디로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한다.
마가복음 7:19에서 예수님은 음식은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로 들어간 다음 뒤로 나간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마가복음 7:21~23에서 그분은 악은 사람의 중심,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시며 악한 생각에서 시작하여 악한 행동으로 드러나는 악의 목록을 제시하신다.
마가복음 7:10이 다섯 번째 계명의 위반을 악의 목록에 포함하였기에 십계명의 둘째 돌판의 모든 계명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예수님은 마가복음 7:7에서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의 핵심을 어기는 헛된 예배에 대해 경고하신다. 예수님은 이 본문 전체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옹호하고 계신다.
<교훈> 예수님의 말씀은 음식물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전통이 무효라는 의미이다. 그분은 본문 전체에서 계명을 옹호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먹어야 살 수 있어서 먹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나가서 사람들은 먹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식도락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처음 창조된 사람은 먹지 않아도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을 것이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한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다(요일2:25).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죽을 때까지 먹어야 생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창3:18,19). 그리고 하나님께서 음식물로 지정하신 것만이 그들의 음식물이었다. 창1:29에는 사람의 음식물로 창조해준 것이 기록되었고 창9:1~3에는 홍수 후에 음식물로 허락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음식물은 이것뿐이다. 오늘날 사람이 먹는 것이 다 성경이 말하는 음식물이 아니다. 성경의 음식물을 말할 때는 성경이 음식물이라고 한 것을 말한다는 것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민족과 인종과 국가를 따라 음식물이 서로 다르다. 그처럼 성경이 음식물이라고 하는 것은 위에 말한 두 가지 외에 없다. 음식물에 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음식물로 주신 것을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손을 씻지 않고 먹었다고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의 생각은 항상 악하므로(창6:5)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사람을 더럽힌다. 그것이 나오지 않아도 사람은 이미 더럽다. 출생하면서 죄인이기 때문이다(시51:5). 그래서 회개와 중생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8월 6일(화) 개를 위한 부스러기
마가복음 7:24~30을 읽어 보라. 어떤 중요한 교훈을 이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는가?
[막7:24~30]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답: 예수께서는 자녀에게 먼저 먹게 한 후에 개도 먹을 수 있게 한다는 암시를 주는 단어로 대답하셔서 이방인도 구원의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셨다.
어제에 이어 어려운 질문이 이어진다. 예수님은 왜 이 여인에게 그토록 가혹하게 반응하시며 하필이면 그 여인을 많은 말 중에서 개라고 칭하셨는가?
예수께서 공개적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지만, 여인에 대한 반응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특징은 그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마가복음 7:27에서 예수님은 자녀들이 "먼저"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먼저"가 있다면 논리적으로 나중도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예수님이 길거리의 개와 달리 집 안에 들여놓을 수 있는 작은 형태의 개를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여인이 예수님께 했던 대답은 그녀가 이 두 가지 특징을 포착하였음을 나타낸다.
여인은 다소 단호하게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라고 대답한다.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께 이런 대답을 하게 되었는가? 딸에 대한 사랑이 그녀에게 용기를 내게 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께서도 "먼저"라고 말씀하심으로 "나중"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며 그녀를 격려하셨다. 게다가 예수님은 그녀가 집 안의 식탁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개라는 생각도 주셨다. 그녀는 마치 집 안의 개가 주인의 식탁 아래 있던 것처럼 예수님 발 앞에서 딸을 위해 애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인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에 대한 개의 권리를 주장했다.
여인의 반응은 그녀의 믿음을 나타낸다. 멀리 집에 있는 딸을 고쳐달라는 엄청난 기적을 '부스러기'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위대하신 것과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작은 문제라고 믿고 있음을 모두 나타낸다. 예수님은 감동하셨고 요청을 들어주셨다.
"그분은 그 여인을 대우하심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버림받은 자로 여겼던 그 여자가 더이상 외인이 아니요 하나님 집의 자녀가 됨을 보이셨다. 자녀로서 아버지의 선물을 받는 것은 그 여인의 특권이다"(시대의 소망, 401).
<교훈> 그 여인을 가혹하게 대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여인은 그분의 마음을 알고 믿음으로 간구하였다. 그녀는 이방인이지만 외인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받을 자녀이다.
<부가설명> 유대인은 편견이 대단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상으로 꽉 차 있어서 자기 민족 외의 사람들은 다 이방인이라고 불렀다. 여기 이 여인도 이방인이다. 유대인의 관점으로는 집 안에서 기르는 개가 아니다. 그냥 들개 같은 존재로서 유대인의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할 이방인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같은 인식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사람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시기를 바라신 것이다.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욥33:6)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 평등이다. 죄가 귀천을 만들었다. 주님은 이 죄를 없애려고 오셨다. 그래서 이 여자에게 그를 도우시겠다는 암시를 하신 것이다. 이 여자의 간절함은 예수님의 암시를 즉각 알았고 믿음으로 그 약속에 매달렸다. 그는 곧 응답을 받았다. 그런데 그 여자는 자녀를 위하는 절실함이 어떻게 생각하면 암시보다는 모욕으로 느낄 수 있는 말을 희망으로 들을 수 있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사랑과 소망으로 듣는 귀가 열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유대인처럼 사랑의 말씀을 욕으로 들으면 안 된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렘6:10,11)
8월 7일(수) 굳은 혀
마가복음 7:31~37을 읽어 보라. 누가 예수님께 이끌려 왔고, 예수님은 그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막7:31~37]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답: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데리고 왔고 예수께서는 특이한 방법으로 그들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갈릴리로 돌아가실 때 빠른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두로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시돈을 거치고 내륙으로 내려가서 갈릴리 바다 북동쪽 지역을 지나 마침내 갈리리 근방에 도착하신 것 같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칠 시간을 내기 위해 택한 우회경로였을 것이다.
본문은 누가 그 남자를 예수께 데려왔는지 정확히 말하지 않지만, 문제는 분명했다. 그는 듣지 못하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청력이 없으면 주변 환경으로부터 고립되고, 심각한 청각 장애는 말하는 방법을 배우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이 사람은 오랫동안 이 문제로 고생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곤경을 이해하시고 그를 개인적으로 불러내신다. 주님께서 이 남자를 고치시는 방식은 특히 현대 독자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남자의 귀에 넣고 손에 침을 뱉은 후 그의 혀를 만지시며 탄식하신다. 예수께서 고쳐주실 남자의 환부를 만지시는데, 탄식은 왜 하시는가? 그는 "진리를 향하여 열지 아니하는 귀와 구주를 시인하기를 거절하는 혀를 생각하고 탄식하셨다"(시대의 소망, 404).
예수님은 기적으로 그 사람의 청력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가 또렷하게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분의 탄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류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요할 수 없는 한계를 보여준다. 그분은 사람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모든 인간은 생명의 왕과 어둠의 왕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누가 인도하도록 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주실 수 있는 분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인정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이 짧은 이야기는 또한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분을 따르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당신도 믿음을 나누고 싶지만 막막하여 탄식하고 혀가 굳은 것처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귀를 열어 다른 사람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시고 그들의 길을 격려해 줄 준비된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도우신다고 용기를 준다.
<교훈> 예수님은 진리에 귀를 닫고 구주를 시인하지 않는 굳은 혀를 생각하며 탄식하셨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시며 바르게 선택하기 원하신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환자를 고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냥 말씀만 하신 경우, 흙을 이겨 눈에 발라서 씻으라고 하신 경우, 만져서 고치신 경우, 그런데 여기는 손가락을 귀에 대호 손에 침을 발라서 혀를 만지시며 고치셨다. 이 사람은 요단 동쪽 지역의 이방인으로 추측한다. 예수께서 그를 군중에서 따라 데리고 가셔서 그에게 손을 대서 고치셨는데 잘 듣지 못하는 귀와 말을 잘 하지 못하는 혀에 손을 대셨다. 그 환자에게 치료의 확신을 주시려는 사랑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고침을 받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흉내내지 못하게 하려고 따로 데리고 가셔서 고치신 것 같다. 예수께서 그의 약점이 있는 곳에 손을 댄 것은 환자에게 확신을 주시려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에게 말씀만 하시면 그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청력을 가졌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동작으로 그의 병을 치료하시는 확신을 주신 것이다. 증언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다 귀먹고 벙어리 되어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증거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신 것이다. 우리는 바르게 듣고 깨닫고 바르게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8월 8일(목) 나쁜 떡을 주의하라
마가복음 8장 11~13을 읽어 보라. 바리새인들의 어떤 행동이 예수님을 깊이 실망시켰는가?
[막8:11~13]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답: 빈정(힐난)대며 표적을 구하는 것을 보시고 실망하셨다.
그분은 왜 신성한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빈정대는 자들을 설득하지 않으셨는가. 이 문제는 예수께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대해 말씀하신 마가복음 3장 끝부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면 또 다른 기적, 심지어 하늘의 표적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또다시 이적이 눈앞에서 주어질지라도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믿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마가복음 8:14~21을 읽어 보라. 제자들이 잊은 것은 무엇이며 이를 통해 예수님은 어떤 점을 가르치셨는가?
[막8:14~21]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답: 제자들은 떡 가져오는 것을 잊었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교훈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인상깊게 가르치셨다. 그들이 깨닫기를 원하시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기회를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막 8:15), 즉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경고하실 기회로 삼으셨다(마 16:12). 그러나 제자들은 말 그대로 예수님이 그들의 떡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한다. 제자들이 오해할 때 항상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그들에게 교훈을 주신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일련의 질문을 던지시는데, 처음 몇 개는 제자들이 당신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하는 수사학적인 것들이다. 주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4:10~12에서 깨닫지 못하는 외인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연상하게 한다. 주님의 강한 어조는 제자들을 영적 무기력함에서 깨우기 위한 것이다.
마가복음 8:19, 20에서 예수님은 5,000명(막 6:30~44)과 4,000명(막 8:1~10)을 먹이신 후 남은 조각을 거둔 바구니가 몇 개였는지 묻는 단순한 질문을 던지신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메시아에게 자원의 부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이해했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마가복음 8:21의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는 마지막 질문도 수사학적인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보고 경험한 모든 것을 살펴보면서 깨달았어야 했다.
<교훈> 믿지 않기로 한 사람에게는 어떤 이적이나 능력도 효과가 없었다. 제자들은 이미 깨달았어야 했지만 모든 것을 보면서도 그분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자기 인식에 확신을 가질 때 그것과 다른 사상은 들리지 않는다. 듣더라도 자기 인식으로 해석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분명한 성경 말씀도 자기 이해로 해석해서 바른 뜻에서 벗어난다. 이런 사람들 상태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경 해석을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창40:8). 이를 위하여 성령께서 오셔서 깨닫게 하신다(요16:13~15, 고전2:9~14). 우리는 겸손하게 기도하며 성령께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시는 것을 따라가도록 굴복해야 한다.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지식과 경험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우리는 성경 말씀 앞에 신발 벗고 겸손히 굴복하며 들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의 학문을 많이 배우면 성경을 바르게 깨닫는데 엄청난 방해가 된다. 성경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2:8)라고 경고하셨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귀는 열리고 혀는 풀려서 바르게 듣고 깨닫고 바르게 증거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성령님께 전적으로 굴복하자.
8월 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42장 “유전,” 43장 “장벽이 무너짐,” 44장 “참된 표적”을 읽어 보라.
"옛적에 그리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주를 따르는 자들 중에 이 교묘하고 기만적인 죄가 얼마나 편만해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와 우리 상호간의 교제가 자기를 높이려는 은밀한 욕망으로 인하여 얼마나 자주 손상을 받는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려 생각하고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하는가! 하나님의 계명을 인간의 이론과 유전으로 대체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 대신 더 쉬운 길을 갈망하는 것, 즉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 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종교는 바로 성실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성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동기이며, 성령님의 능력 있는 역사만이 이 동기를 주실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이기심과 위선을 몰아낼 수 있다. 이 변화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이다. 우리가 받아들인 믿음이 이기심과 가식을 깨트릴 때, 우리로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게 할 때, 그때 우리는 그것이 올바른 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8).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애의 주안점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우리 생애의 주안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의 행하시는 대로’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일 2:6, 3)다"(시대의 소망, 409).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2. 여러분의 지역사회에서 "부정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을 복음으로 이끌기 위해 여러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 친절하고 각근히 하는 친교가 필요하지 않을까?
3. 이웃과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은 어떤 것이 있는지 반원들과 함께 생각해 보라.
*답: 서로 의견을 나누어보자. 위의 대답은 이 대답도 되지 않을까?
4. 마가복음 8:1~10절의 4,000명을 먹이는 장면을 읽어 보라. 이 무리가 이방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가?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이것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그들은 치료받은 군대 귀신 들렸던 자의 간증을 들은 이방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3일이나 예수님을 따르면서 말씀을 들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
5. 어떻게 하면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타고난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
*답: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주님께 전적으로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