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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아브라함의 뿌리 -(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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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5-04 09:58 조회1,4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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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과 아브라함의 뿌리                                                                    (2022년 5월7일 (안) / 일몰: 19시27분)     

 

(05월01일 (日) <아브람의 출발(出發)>

(Q)~(창세기12:1~9)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의 고향(故鄕)과 가족(家族)을 떠나라고 명령(命令)하신 이유(理由)는 무엇이며 아브람은 어떠한 반응(反應)과 행동(行動)하였습니까?

 

(A)~(핵심(核心)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狀況)에서 고향(故鄕), 친척(親戚) 아비 집을 떠나 오직 하나님의 명(命)을 받았을 때의 믿음으로 순종(順從)하여 고향(故鄕) 갈대아 우르를 떠났으며 하란에서 부친(父親)이 사망(死亡)하자 그곳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을 향(向)하였고 그때에도 형(兄) 나홀의 친척(親戚)을 떠난 행동(行動)으로 순종(順從)하였다.

 

○.<"너는 너희 본토(本土)를 떠나라" (창12:1절). 시험(試驗)해 보는 계율(戒律)이 있다.>

  1. 이 같은 계율(戒律)로써, 그가 자신의 본토(本土)와 절친한 벗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또는 하나님과 동행(同行)하기 위하여 그러한 온갖 것을 저버릴 수 있을 것인지를 시험(試驗)해 보신 것이다. 그의 본향(本鄕)은 우상숭배(偶像崇拜)로 변모(變貌)해 버린 지 오래며, 그의 친척들과 아버지의 집이 그에게는 끊임없는 유혹(誘惑)이었다. 또 그들에게 물들어버릴 위험(危險) 없이는 그들과 계속(繼續) 교제(交際)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너는 떠나라" (rlArl: Vade tibi), 급(急)히 "도망(逃亡)하여 생명을 보존(保存)하라, 돌아보지 말라" (19:17)고 하셨다. 죄 많은 상황(狀況) 속에 있는 자들은 가능(可能)한 한 급(急)히 서둘러서 그 곳을 벗어나도록 노력(努力)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銘心)하도록 해야겠다.(혹자(或者)는 이 구절(句節)을) "너희 스스로를 위하여 떠나라" 고 해석(解釋)하니, 이는 곧 너희 자신의 유익(有益)을 위(爲)하여라 는 뜻이다. 자신의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는 그 같은 변화(變化)로 인(因)하여 스스로 이루 형언(形言)할 수 없는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을 명시(明示)하라(잠 9:12).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이 같은 명령(命令)은 신실(信實)한 아브람의 모든 영적자손(靈的子孫)들을 하나님과의 계약(契約)으로 인도(引導)하는 복음(福音)과 매우 일치(一致)되는 것이다. 

 

  (1) 본능적(本能的)인 욕심(慾心)은 하나님의 은총(恩寵)에서 양보(讓步)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2) 죄와 죄악(罪惡)에 대한 온갖 기회(機會)는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3) 이 세상과 그 가운데서 누리는 온갖 우리들의 기쁨을 거룩한 냉정(冷靜)과 경멸(輕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계율(戒律)은 그가 지금 눈으로 보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信賴)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시험(試驗)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自身)의 본토(本土)를 떠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 줄 땅" 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내가 너에게 주고자 하는 땅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單純)히 "내가 네게 보여줄 땅" 이라고만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에게 그것이 어떠한 땅이라든가 또는 어떤 종류(種類)의 땅이라는 것도 말씀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絶對的)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대체(大體)로 하나님을 따르려고 자신의 본토(本土)를 떠나는 것으로 인해서 손해(損害)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특별한 보장(保障)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따랐던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交際)하는 자들은 신뢰(信賴)로써 행동(行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그리고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일을 위해서 보이는 것들을 버려야 하며, 현재의 고난(苦難)을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영광(榮光)의 소망(所望)가운데서 달게 받아야 마땅하다(롬 8:18). 이는 "우리가 장차(將次)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요 13:2). 더욱이 장차 나타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지시(指示)하고자 하신 땅으로 부르시어 그의 눈으로는 언제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에 따라 살도록 가르치시고자 하셨을 때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던 것 이상(以上)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크나큰 힘이 되는 약속(約束)이 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이것은 부유(富裕)하고도 굉장히 크고 귀한 약속의 복합체(複合體)라고 하겠다. 모든 하나님의 계율(戒律)이란 순종(順從)하는 자에 대해서는 약속(約束)을 수반(隨伴)하고 있음을 명심하자. 그가 친히 우리에게 명령자(命令者)로서 그 이름을 알리고자 하실 때에는 역시 상(賞)을 주시는 자로서의 이름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 명령을 복종(服從)하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 약속이 있다.

  ㉮."내가 너로 큰 민족(民族)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복(福)을 내리리라" 하셨다. 

  ㉰."네 이름을 창대(昌大)케 하리라" 

  ㉱."너는 복의 근원(根源)이 되리라."

  ㉲."너를 축복(祝福)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詛呪)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땅의 모든 족속(族屬)이 너를 인하여 복(福)을 얻을 것이다"  (창 12:1~9, 매튜헨리)

 

○.<우상숭배(偶像崇拜)하는 세대(世代) 가운데서 택(擇)함을 입은 아브라함>

홍수후(洪水後)에 다시 사람들이 땅에 번성(蕃盛)하기 시작하자 죄악도 따라서 성(成)하게 되었다. 우상숭배는 거의 세계적(世界的) 현상(現象)이었고 마침내 주께서는 악(惡)한 길을 따르는 목이 곧은 죄인(罪人)들을 떠나셨다. 그런 반면에 그분은 셈족의 아브라함을 택(擇)하사 장차(將次) 오는 세대를 위한 율법(律法)의 보관자(保管者)로 삼으셨다(원고 65, 1906).

 

○.<우상숭배(偶像崇拜)에 손을 대었던 아브라함의 가족(家族)들>

그 시대(時代)에 우상숭배가 신속(迅速)하게 스며들고 있었으며 참 하나님 경배(敬拜)와 충돌(衝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자가 아니었다. 비록 그의 아버지가 참된 예배(禮拜)와 거짓 예배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진리(眞理)와 함께 거짓된 이론(理論)과 우상숭배의 관습(慣習)을 아울러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아브라함은 이 같은 영향(影響)을 받지 않았다. 그는 그의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호와께 단(壇)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청년 지도자 1897. 3. 4).

 

○.<아브라함은 장차(將次) 오실 구주(救主)를 바라보았음(요 8:56; 갈 3:8)>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조상(祖上)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구주(救主)가 오실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장래(將來) 일에 대한 빛을 주셨다. 그는 구주(救主)가 이 세상에 오실 때 그의 신성(神性)이 인성(人性)으로 가리워질 것을 내다보았다. 믿음으로 그는 장차(將次) 오실 세상의 구주(救主)가 육체(肉體)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았다(원고 33, 1911).

 

○.<계명(誡命)을 지킴(엡 2:8)>

만약 아브라함과 맺어진 언약(言約)하의 인류(人類)가 하나님의 계명(誡命)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不可能)했다면 우리는 모두 다 잃어버린 바된 자들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은혜(恩惠)의 언약이었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救援)을 얻은 것이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迎接)지 아니하였으나 영접(迎接)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權勢)를 주셨으니”(요 1:11, 12). 불순종(不順從)하는 자녀들도 그의 자녀가 되는가? 아니다. 그분의 계명(誡命)을 모두 다 순종(順從)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자녀가 된다. 우리들이 계명(誡命)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不可能)하다면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증거(證據)가 왜 그의 계명(誡命)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겠는가?(편지 16, 1892).(창 12:1~9, 화잇주석)

  

(05월02일 (月) <애굽의 유혹(誘惑)>

 

(Q)~(창세기12:10~20)의 아브람이 약속(約束)의 땅을 떠나 기근(饑饉)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의 선택(選擇)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敎訓)은 무엇일까요?

 

(A)~○.약속(約束)의 땅을 통과(通過)하자마자 아브람은 극심(極甚)한 기근(饑饉)으로 말미암아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나안은 원래 비옥(肥沃)했지만 그 지방이 의존(依存)하고 있던 11월과 12월에, 비가 없거나 부족(不足)한 해에는(참조 창 26:1; 41:56; 왕상 17:1; 학 1:10, 11) 특히 가뭄에 시달렸다. 아브람이 그 땅으로 들어갔을 때에 바로 이 기근(饑饉)이 발생한 것은 그의 믿음에 추가적(追加的)인 시련(試鍊)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순복(順服), 믿음, 그리고 인내(忍耐)의 교훈(敎訓)들을 가르칠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甚至於) 약속(約束)의 땅에서도 음식(飮食)과 축복(祝福)은 여호와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창 12:10~20, 재림교주석)

 

○.<아브람이 애굽에…내려갔으니>

아브람은 가나안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양식(糧食)을 찾기 위해서 풍요(豊饒)의 땅인 애굽에 의지(依支)하는 것이 당연(當然)하다고 생각(生覺)했다. 비록 애굽도 나일 강이 범람(氾濫)하지 않아서 때때로 기근(饑饉)으로 고통(苦痛)받았지만, 그곳은 주변국가(周邊國家)들에게는 궁핍(窮乏)한 때 갈 수 있는 피난처(避難處)로 알려져 있었다. 고대(古代) 애굽의 기록(記錄)들은 아시아인들이 그들의 굶주리는 가축(家畜)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하여 애굽으로 들어왔다는 사실(事實)을 반복(反復)해서 언급(言及)하고 있다.(창 12:10~20, 재림교주석)

 

○.인간(人間)의 궁지(窮地)는 하나님의 기회(機會)이다. 

비록 아브람이 하나님을 실망(失望)시켰을지라도 하나님은 아브람을 위하여 개입(介入)했다. 이 재앙(災殃)의 성질(性質)이 무엇이었는지는 정(定)할 수 없으나 사래를 불명예(不名譽)로부터 보호(保護)하고 그녀를 아브람에게 복귀(復歸)시켜야한다고 바로를 납득(納得)시키기 위한 성격(性格)의 것이었음이 명백(明白)하다. 사래가 직접(直接) 자신의 실제적(實際的)인 결혼(結婚) 신분(身分)을 밝혔거나 아니면 후(後)에 아비멜렉에게 했듯이(참조 창 20:3) 하나님이 바로에게 직접(直接) 말했는지도 모른다.

 

○.이 경험(經驗)으로 아브람이 자기 자신의 교묘(巧妙)한 책략(策略)보다는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도록 가르쳤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잠시(暫時)후 같은 실수(失手)를 범(犯)하고 있는 것(참조 창20:2)을 발견(發見)하는 것은 이상(異常)하게 보이며, 그의 아들이삭이 같은 책략(策略)을 시도(試圖)하고 있는 것(참조 창26:7)을 발견(發見)하는 것은 더욱 더 이상(異常)하게 보인다.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그들 자신이 획책(劃策)했던 상황(狀況)으로부터 구출(救出)한 것은 그의 자비(慈悲)와 사랑의 증거(證據)이다. 비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告白)하는 자들이 때로는 부르심에 어울리지 않게 행동(行動)할지라도 하나님은 종종 그들의 대적자(對敵者)들이 그들을 존경(尊敬)하도록 가르친다. 여호와는 심지어(甚至於) 그 자녀들이 신실(信實)하지 못한 때에도 그들에게 여전히 신실하다(참조 딤후 2:13).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기 힘든 결과(結果)들로부터 구(求)할 것이라는 기대(期待)로 고의적(故意的)으로 행동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이와 같은 유혹(誘惑)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試驗)치 말라”(마 4:7)고 대답(對答)했다.

 

○.직접(直接) 재난(災難)을 당하기도 전에 미리 도덕적(道德的) 나약성(懦弱性)과 두려움을 보인 아브람의 태도(態度)는 하나님을 의뢰(依賴)치 아니하는 자가 드러내게 되는 비신앙적(非信仰的)인 면모(面貌)와 다를 바 없었다.

 

○. <교훈(敎訓)>

Ⅰ.<가나안 땅에는 기근(饑饉)이 있었다.>

그것은 "심한 기근" 이었다. 그 비옥(肥沃)하던 땅이 황무지(荒蕪地)로 변모(變貌)되어 버렸으니, 이는 거기에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의 부정(不淨)함을 벌(罰)하시기 위(爲)함이었을 뿐 아니라, 그 곳에 기류(寄留)하던 아브람의 믿음을 연단(鍊鍛)하기 위(爲)함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쓰라린 시련(試鍊)이었으며, 아브람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가를 시험(試驗)하는 것이었다.

 

○.<"굶어 죽게" 하려고 끌고 왔다는 불평(不平)하는 자손들과 마찬가지로(출 16:3)>

여기까지 자기를 이끌어내신 하나님께 대하여 아브람이 뭐라고 말할 것인가를 시험했다. 지극히 강한 믿음이 없이는 결코 그 같은 하나님의 처사(處事)에 대하여 좋은 생각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약속(約束)의 땅에 관한 생각을 시험(試驗)하기 위(爲)함이다>

즉 그 땅을 주시는 은사(恩賜)를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또는 여기에 나타나 있는 바대로 그 땅이 거기에 "거(居)하는 자들을 삼켜버리게" 된 그런 때에 버리고 온 자기의 본토(本土)가 오히려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나 않는지를 시험함이다. 또한 그는 자기를 가나안에까지 이끌어 오신 하나님께서 그를 그 곳에서 안보(安保)하시리라는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지, 또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할 때에도 하나님을 자기의 구원(救援)의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합 3:17, 18). 다음을 명심(銘心)하라.

  (1) 강(强)한 믿음은 여러 시험(試驗)으로 연단(鍊鍛)되어서, 그것이 "칭찬(稱讚)과 영광(榮光)과 존귀(尊貴)를 얻게 된다." 는 사실이다(벧전 1:6, 7).

  (2) 하나님은 때때로 아직 신앙이 작은 초심자(初心者)를 큰 어려움으로 시험(試驗)하신다.

  (3) 의무(義務)를 다하고 복된 길에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큰 역경(逆境)과 실망(失望)에 봉착(逢着)할 수 있다.

 

(05월03일 (火) <아브람과 롯>

 

(Q)~(창 13:1~18)에서 아브람과 조카 롯에게서 땅의 선택문제(選擇問題)에서 한 행동(行動)으로 볼 때 이는 이들의 평소(平素)의 믿음과 품성(稟性)의 어떤 교훈(敎訓)을 주고 있습니까?

 

(A)~○. (아브람)의 배려(配慮)

참된 신앙(信仰)에서 비롯된 아브람의 겸허(謙虛)하고 관대(寬待)한 인격(人格)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이러한 양보(讓步)는 세속적(世俗的) 처세술(處世術)(창12:10-13)을 완전히 초월(超越)한 여호와 신앙에서만 가능(可能)한 것이기 때문이다(빌 2:3, 4). 아무튼 아브람의 자기희생적(自己犧牲的) 대 양보(讓步)는 

  (1).둘 사이의 불화(不和)의 틈을 탄 원주민(原住民)들의 기습공격(奇襲攻擊) 가능성(可能性)을 막았으며 

  (2).롯과의 종교적(宗敎的) 화평(和平)을 유지(維持)며 이방사회(異邦社會)에서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가리우지 않았고 

  (3).아브람이 더욱더 하늘 분깃만을 의뢰(依賴)하게 됨으로 믿음의 조상(祖上)로서의 덕망(德望)을 쌓게 된 3중 효과(效果)를 거두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공동체(共同體)가 화평(和平)을 유지(維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자기희생(自己犧牲)이 필요(必要)하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 희생은 결국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는 교훈(敎訓)을 깨닫게 된다.

 

○. (롯)의 이기심(利己心)

(롯은)그는 선택권(選擇權)을 행사함에 있어서 아브람에게 양보(讓步)할 줄 몰랐고 세속적(世俗的) 이해관계(利害關係)에만 눈이 어두워 이기적(利己的) 선택(選擇)을 하였다. 그에게는 아직도 세속적이고 물질 중심적(物質中心的)인 애굽의 정신(精神)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이기적(利己的) 선택(選擇)은 미구(未久)에 닥쳐 올 모든 불행(不幸)을 자초(自招)하는 결과(結果)가 되었다.

○.<(창13:10) 부자(富者)로 들어갔다가 빈털털이로 나온 롯>

롯은 아름답고 큰 소득(所得)이 보장(保障)된 땅을 선택(選擇)하였지만 그 선택의 결과(結果)로 그는 부자(富者)로 그곳에 들어갔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나왔다.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위치(位置)를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差異)를 말해준다. 즉 올바른 감화(感化)를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에다 자신의 위치(位置)를 정(定)하느냐 아니면 현세적(現世的) 이득(利得)만을 택(擇)하느냐의 차이(差異)인 것이다. 소돔으로 가는 길은 많다. 하나님께로 인도(引導)하는 길을 식별(識別)할 수 있도록 우리는 모두 다 눈에 기름을 바를 필요가 있다. (편지 109, 1899).

 

(05월04일 (水) <바벨의 연합군(聯合軍)>

 

(Q)~(창 14:1~17)에서 조카 롯이 바벨의 연합군(聯合軍)에 사로 잡혀간 소식(消息)을 접(接)한 아브람의 행동(行動)과 마음의 동기(動機)는 무엇이었습니까?

 

(A)~○.성경(聖經)에 기록(記錄)된 첫 번째 전쟁(戰爭)으로 “아브람”은 잘 훈련(訓練) 된 종들과 함께 용감(勇敢)하게 나아가 주의 섭리(攝理)로 롯을 구(求)해 냈으며 그 일을 통해 사람들은 그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알게 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아브람은 자기의 적(敵)을 무찌르고 친구들을 구조(救助)하였는데, 그가 어떤 손실(損失)을 입었다는 기사(記事)는 없다. 선(善)한 마음을 가지고 선(善)한 동기(動機)로써 대담(大膽)하게 나가는 자는 인자(仁慈)하신 하나님의 특별(特別)하신 보호(保護)가 있으며, 당연(當然)히 좋은 결과(結果)가 뒤따른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다시 말하거니와 그 모든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니, "곧 사람의 많고 적고 간에 구원(救援)은" 여호와와 함께 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삼상 14:16).

 

○.<아브람 그는 자기혈족(自己血族)을 구출(救出)했다>

여기서는 두 번이나 "조카 롯" 이라고 불린다. 본성적(本性的)으로 은혜(恩惠)로서나 그들 상호간(相互間)은 친족관계(親族關係)임을 기억(記憶)함으로써 아브람을 전에 있었던 그들 사이의 사소(些少)한 다툼을 잊었다. 그 다툼을 하는 동안 롯은 아브람에게 결코 좋은 행동(行動)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자기와 다투고 떠나간 롯을 아브람은 당연히 견책(譴責)하거나, 이미 자기는 잘해 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또 과연 롯이 유복(裕福)하게 지낸 것은 어느 때였던가를 알려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믿음이 굳은 아브람의 관대(寬待)한 마음은 모든 것을 용서(容恕)하고 있었다. 이 기회(機會)를 포착(捕捉)하여 오히려 자기의 성실(誠實)한 화해(和解)의 산 증거(證據)를 삼았다.

 

(1) 우리에게 능력(能力)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곤경(困境)에 처한 자들을 기꺼이 구제(救濟)하고 위로(慰勞)해 주어야 한다. 특히 우리의 친척(親戚)들과 친구들에게 그리해야 함을 기억(記憶)하자. "형제(兄弟)는 위급(危急)한 때를 인(因)하여 났느니라." (잠 17:7). 곤경(困境) 속의 친구(親舊)야말로 진정(眞正)한 친구이다.

 

(2) 비록 남들이 우리에게 의무(義務)를 다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우리의 임무(任務)를 부인(否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목(注目)하라.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친구보다는 적(敵)들을 더욱 쉽사리 용서(容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怨讐)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和睦)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기업(基業)의 남은 자의 허물을 용서(容恕)하신다" (미 7:18)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적(敵)이나 친구를 모두 용서(容恕)해 주어야 함을 알게 되리라. 

 

○.기회(機會)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친절(親切)과 공손(恭遜)으로 대하여 저들도 우리에게 쾌(快)히 친절(親切)을 베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智慧)요 임무(任務)라는 사실이다.

 

○.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依支)하는 자라도 어려운 처지(處地)에 놓인 때에는, 섭리(攝理)를 따라 인간의 조력(助力)을 애용(愛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試驗)하는 일이 될 것이다.(창 14:1~17, 매튜헨리)

 

(05월05일(木) <멜기세덱에게 바친 십일조(十一條)>

 

(Q)~(창세기14:18~24)과 (히브리서7:1~10)의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祭司長)은 누구이며 왜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멜기세덱에게 십일조(十一條)를 드린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십일조(十一條)는 모든 것의 주인(主人)이 되시는 창조주(創造主) 하나님께 대한 감사(感謝)의 표현(表現)이다. 즉 십일조는 예배자(禮拜者)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禮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배자(禮拜者)들에게 주시는 선물(膳物)(축복)이다. 이를 깨달은 아브람은 모든 것의 주인(主人)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感謝)의 마음을 표현(表現)하기 위해 당시(當時)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표(代表)하는 제사장(祭司長)이었던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멜기세덱>

  그 이름이 "의(義)의 왕(王)"이라는 뜻을 가진 멜기세덱은 살렘 (예루살렘)의 왕이었으며, 지극(至極)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祭司長) (창세기 14:18-20; 시편 110:4; 히브리서 5:6-11, 6:20-7:28)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멜기세덱의 갑작스러운 출현(出現)과 퇴장(退場)은 다소 신비(神秘)스럽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 Chedorlaomer 및 그와 동맹(同盟)한 세 왕을 패배(敗北)시킨 후 처음으로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그의 지친 종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며 우정(友情)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엘 엘룐 (El Elyo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고, 전쟁(戰爭)의 승리(勝利)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讚揚)했습니다 (창세기 14:18-20).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셨다. 멜기세덱이 그리스도는 아니었지만 그는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목소리였고 아버지 하나님의 대표자였다. 그리스도는 과거(過去)의 모든 세대 동안 말씀해 오셨고, 그의 백성을 인도(引導)해 오셨으며 세상의 빛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眞理)의 대표자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 그분은 그를 그의 나라와 친척(親戚)들이 있는 곳에서 데리고 나와서 그를 따로 떼어 놓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모형(模型)을 따라 그를 꼴 짓고자 하셨고, 자신의 계획(計劃)에 따라 그를 가르치시기를 원(願)하셨다(리뷰 1890.2.18.).  (창 14:18, 화잇주석)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히브리어로 엘-엘욘(’El-‘Elyon)인 하나님에 대한 이 명칭(名稱)은 오직 여기와 (창14:22절)에 나타난다. 엘로힘(’Elohim)과 동일(同一)한 어근(語根)에서 온, 이 단어(單語)의 첫 부분(部分)인 엘(’El)은 “강(强)한 자”를 의미(意味)한다. 그것은 엘-샷다이(’El-s∨addai), “전능(全能)의 하나님” 혹은 엘로에-이스라엘(’Eloe-Yisra’el),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경우(境遇)에서처럼 어떤 특성(特性) 없이 하나님에게 적용(適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구약성경(舊約聖經)에 자주 나오는(민 24:16; 신 32:8; 삼하 22:14 등), 두 번째 어휘(語彙)인 엘룐(‘Elyon)은 하나님을 “가장 높은 존재”, “고귀(高貴)한 존재(存在)”, “지존자(至尊者)”로 묘사(描寫)한다. 아브람 당시(當時)의 사악(邪惡)한 가나안 족속(族屬)과 아모리 족속들 중에 참 신(神)에게 충성(忠誠)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祭司長) 역량(力量)의 직무(職務)(참조 출 2:16)도 수행(遂行)한 지방(地方) 통치자(統治者)를 발견한다는 것은 진정(眞正) 놀라운 일이다. 

 

○.성경 주석(註釋)가들은 갑자기 성경의 기록에 나타났다가 다시 고대(古代) 역사(歷史)의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겸(兼)한 멜기세덱에 대하여 많은 추측(推測)을 했다. 그러한 추측은 전혀 가치(價値)가 없다. “멜기세덱은 그리스도가 아니었”(EGW, RH, Feb. 18, 1890)으나, 그의 사업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예표(豫表)하였다(시 110:4; 히 6:20~7:21; 시대의 소망, 578). 그의 예기치 않은 출현(出現)은 어떤 의미에서 그를 시간을 초월(超越)한 존재(存在)로 만들며 그의 제사장 직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표상(表象)으로 만든다.” (창 14:18, 재림교주석)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祭司長). 멜기세덱이 왕과 제사장이란 이중신분(二重身分)을 갖고 있었던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모세의 장인(丈人) 이드로도 미디안족의 통치자(統治者)이자 제사장이었다(출 2:16, 3:1). 그러나

(1) 유대인들의 제사제도(祭祀制度)에서는 용납(容納)되지 않는 왕과 제사장이란 이중직무(二重職務)

(2) 당시(當時)의 부패(腐敗)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며 의(義)와 평강(平康)으로 백성을 다스린 태도(態度), 

(3) 시작(始作)과 끝, 출생(出生)과 족보(族譜)가 없이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그의 신비적(神秘的) 출현(出現) 등은 아주 특이(特異)한 요소(要素)로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特性)과 유사(類似)한데 이에 히브리서 기자(記者)는 강한 영감(靈感)을 받아 그를 신약시대(新約時代) 예수를 대표(代表)하는 자로 언급(言及)하였다(히 7:11-17). (창 14:18, 만나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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