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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모든 민족과 바벨 - (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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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4-26 17:22 조회1,4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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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과 모든 민족(民族)과 바벨 

                                             (4월 30일(안) /(日沒):19시21분)


(04월24일 (日) <함에게 내려진 저주(詛呪)>


(Q)~(창세기 9:18~27)에 기록(記錄)된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重要)한 교훈(敎訓)은 무엇일까요?


(A)~1.당대(當代)에 완전한 자(者)로 하나님께 인정(認定)받았던 노아도 이처럼 잠깐의 방만(放漫)한 자세로(포도주(葡萄酒)로인(因)하여 취하여 알몸을 드러내는) 실수(失手)로 인해 시험(試驗)에 빠진 것은 우리 성도(聖徒)들이 한순간(瞬間)이라도 영적(靈的) 긴장(緊張)을 풀어서는 안됨을 교훈(敎訓)해 준다(마 26:41, 벧전 5:8).


☞. 노아의 부절제(不節制)는 존경(尊敬)받을 만한 노인(老人)에게 수치(羞恥)를 가져왔으며, 지혜(智慧)롭고 착하던 사람을 조롱(嘲弄)과 멸시(蔑視)에 빠뜨렸다.(창 9:18~27, 재림교주석)


2. ‘함’의 실수(失手)는 아비의 하체(下體)를 본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것을 보고 악의적(惡意的)으로 즐긴 데 있음을 시사(示唆)해 준다.


3.‘함’은 보다 더 적극적(積極的)이고 경박(輕薄)스런 함의 죄(罪)이다. 

정상적(正常的)인 부자간(父子間)이라면 아들이 아비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상례(常例)인데 함은 형제들까지도 아비의 수치(羞恥)를 목격(目擊)하고 쾌감(快感)을 느끼도록 충동(衝動)질한 것이다. 이처럼 범죄자(犯罪者)들은 남들도 자신의 범죄(犯罪)에 가담(加擔)토록 강요(强要)함으로써 동질(同質)감과 심리적(心理的) 안정감(安定感)을 얻으려는 경향(傾向)이 있다.(창 9:18~27, 만나주석)


☞.<‘함’의 부모에 대한 존경심(尊敬心) 결여(缺如)가 불 경건(不敬虔)하고 비루(鄙陋)함으로 인한 범죄(犯罪)가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불러왔다.(부조117)>


4.노아는 "농부(農夫)" 이었으며 히브리어로는 "땅의 사람" 인데, 이는 땅에 종사(從事)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흙을 지키고 소유(所有)하는 자(者)이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배울 바는 비록 노아가 위대(偉大)하고도 선(善)한 사람이었으며 늘고 부유(富裕)한 사람이었으며 하늘로부터 크게 은총(恩寵)을 입고 땅에서 크게 명예(名譽)를 차지한 사람이었지만, 나태(懶怠)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농부라는 직업(職業)을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지 아니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攝理)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잠시 동안 우리의 천직(天職)을 떠나게 하시지만, 그 때가 지나면 우리는 겸손(謙遜)한 마음과 근면(勤勉)으로써 다시금 그 일에 열중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또 우리들이 부르심을 받은 천직(天職)을 통해서 신실(信實)하게 "하나님과 함께 거(居)하여야" 됨을 기억(記憶)하자(고전 7:24).


5. 조심성(操心性)과 결심(決心)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말미암아 유혹(誘惑) 가운데서도 자신의 정결(淨潔)을 지켜나가던 자도, 때로는 유혹(誘惑)의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방심(放心)하고 부주의(不注意)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음으로써 불시(不時)에 죄악(罪惡)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전에는 주위 사람들이 취(醉)했을 때에도 술 취하지 않았던 노아가 이제는 주위 사람들은 취하지 않았는데도 홀로 취해 있는 것이다. "스스로 섰다고 생각(生覺)하는 자는 조심(操心)할지어다." (창 9:18~27, 매튜헨리)


<핵심(核心)>

당대(當代)의 의인(義人)인 하나님 사람 노아도 실수(失手)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섭리(攝理)로 구원(救援)의 끈을 가지시고 죄는 저주(詛呪) 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시며 예비(豫備)하시는 구원(救援)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축복(祝福)의 약속(約束)이 포함(包含)되어있음을 교훈(敎訓)하고 있다.


(04월25일 (月) <창세기(創世記)의 족보(族譜)>


(Q)~(창세기 10장)에 기록(記錄)된 족보(族譜)의 목적(目的)은 무엇입니까?


(A)~⑴.특히 성경에는 족보(族譜)가 자주 등장(登場)한다. 어떤 면에서는 지루하고 어떤 부분은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더 좋게다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성령(聖靈)의 감동(感動)으로 기록(記錄)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족보의 궁극적(窮極的)인 지향점(指向點)은 구주(救主)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기록하고 있지만 일반 세속역사(世俗歷史)와는 구별(區別)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救援)의 역사’(the history of salvation)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전체내용(全體內容)은 인류의 구원자(救援者)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焦點)이 맞춰져 있으며, 족보(族譜) 또한 예외(例外)가 아닙니다.


 ⑵.(창세기 5:1)은 “아담의 계보(系譜)는 이러하니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셋, 에녹, 노아의 족보가 소개(紹介)됩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구절(句節)과 꼭 같은 형식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짜증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은 펴자마자 처음부터 지루한 족보가 나옵니다. 


⑶.아담은 장수(長壽)하면서 많은 자녀들을 낳았겠지만 그의 족보는 점차 영적(靈的)인 계열(系列)로 좁혀지다가 노아의 세 아들에 이르러 본격적(本格的)으로 전개(展開)됩니다. (창세기 9:19)에는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창세기10장)에는 이 세 아들의 족보(族譜)가 나옵니다. 이어서 바벨탑 사건(事件)으로 온 인류(人類)가 지면(紙面)에 흩어진 후, 셈의 후손(後孫)들의 족보가 다시 한 번 반복(反覆)됩니다. 셈의 족보는 일단 아브라함까지 이어지고 곧바로 (창세기 12장)으로 연결(連結)됩니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드디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는 내용(內容)입니다.


⑷.지금까지 기록된 족보는 결국 믿음의 조상(祖上)이요 구원사(救援史)에서 결정적(決定的)인 역할(役割)을 하게 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경륜(經綸)을 따라 셋의 후손(後孫)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구원(救援)의 역사를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족보를 다 언급(言及)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세 아들의 족보를 나열(羅列)한 후 아브라함의 조상이 되는 셋의 족보만 따로 떼어 반복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족보를 구원(救援)사에 초점(焦點)을 맞춰 점차(漸次)로 좁혀가는 소위 ‘narrow down’ 방식으로 기술(記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⑸.구원(救援)사에서 아브라함 다음으로 중요(重要)한 인물은 다윗입니다. 사사시대(士師時代)가 끝나고 사무엘 선지자(先知者)를 매개자(媒介者)로 하여 왕정시대(王政時代)로 넘어가는 전환(轉換) 지점에 룻기가 등장(登場)합니다. 룻기는 한 이방(異邦) 여인의 효행(孝行)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가정(家庭)의 달이 되면 많은 설교자(說敎者)들이 룻기를 본문(本文)으로 해서 효성(孝誠)스러운 자부(子婦) 룻을 언급(言及)합니다. 룻의 효행은 칭찬(稱讚)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룻기가 역사(歷史)서로 분류(分類)되는 사사기(士師記)와 사무엘서 중간(中間)에 마치 한 편의 삽화(揷畵)처럼 끼어든 것은 내용(內容)상의 연맥(緣脈)이나 중요(重要)도에 있어서 뭔가 부자연(不自然)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역사를 기술(記述)해가는 와중에 한 이방(異邦) 여인(女人)에 대한 기록이 불쑥 튀어나오는 게 뭔가 좀 어색해 보이는 게 솔직한 심정(心情)입니다. 그런데 룻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족보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⑹.(룻기 4:18-22) “베레스의 계보(系譜)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⑺.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구약성경(舊約聖經)과 신약성경(新約聖經)의 가교(架橋)역할(役割)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後孫)을 통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시리라고 하신 약속이 바로 그의 혈통(血統)상의 후손(後孫)인 예수님을 통해 성취(成就)되는 감격적(感激的)인 순간(瞬間)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태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혈통(血統)을 통해 오셨음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意圖)로 기록된 족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⑻.마태복음의 족보에서 특히 주목(注目)한 점은, 여기에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말은 대를 잇기 위해 기생(妓生)으로 변장(變裝)해 시아버지를 유혹한 패륜(悖倫)의 여인이요,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이었습니다. 룻은 모압 출신의 이방(異邦) 여인이었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도 윤리적(倫理的)으로 반듯한 여자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 한 여인 마리아를 제외(除外)하면 모두 혈통 상으로나 윤리적으로 흠결(欠缺)이 있는 여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족보를 결코 미화(美化)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저분하기까지 한 족보를 여과 없이 사실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 짐짓 이러한 여인들을 거명하는 데는 예수님의 구원(救援)의 대상에는 예외나 특례(特例)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意圖)가 역력해 보입니다.


⑼.이상(以上) 살펴본 대로 성경의 족보는 단순한 혈통의 계보(系譜) 이상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건대, 성경의 족보는 하나님의 구원(救援)사가 인간의 온갖 훼방(毁謗)과 불완전(不完全)함에도 불구(不久)하고 오랜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왔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핵심(核心)>

성경 즉 창세기의 족보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의 기능(機能)의 의미로 기록하고 있다.

(첫째).역사성을 강조(强調)하므로 사건의 실존(實存)성과 명확(明確)성과 관련이 연관(聯關)되어 있다는 것이며

(둘째).고대(古代)부터 기록(記錄) 저자(著者)의 연대(年代)까지 즉 과거(過去)부터 현재가지 연결로 연속(連續)됨으로 현재가지의 연결을 확고히 한다는 것이며

(셋째).이러한 모든 역사는 인간의 연약(軟弱)함과 죄로 인한 저주(詛呪)와 비극적(悲劇的)인 효과(效果)가 후세(後世)대에까지 끼친 치명적(致命的)인 결과들을 기억하게 해주는데 의미가 있다.


(04월26일 (火) <하나의 언어(言語)>


(Q)~(창세기 11:1~4)에서 바벨탑을 건설(建設)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참된 동기(動機)는 무엇이었습니까?


(A)~⑴.(언어(言語)가 하나요).직역(直譯)하면 ‘한 입술’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인류의 언어가 동일(同一)했음을 강조하는 환유(換喩)법적(法的) 표현이다. 이러한 언어의 통일성은 인류가 한 조상(祖上)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입증(立證)해 준다. 

(말이 하나였더라.)직역(直譯)하면 ‘한 낱말’ 이는 당시(當時) 언어(言語)의 형태나 단어(單語), 그리고 뜻이 인종(人種)이나 민족(民族), 지역(地域)간을 막론하고 같았음을 뜻한다. 이러한 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부여(附與)하신 특별한 의사소통(意思疏通) 기능(機能)인데 바벨탑 사건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혼잡(混雜)하게 된 채로 남아 있다.


⑵.(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내가 하늘에 올라 … 나의 보좌(寶座)를 높이리라’(사14:13)고 한 사탄의 자만(自慢)과도 같은 자만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陰府)에까지 낮아지리라’ (마 11:23)고 경고하신다.


⑶.(우리 이름을 내고.)

   직역(直譯)하면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새기고’이다. 이는 바벨탑을 건축한 일차적(一次的) 동기(動機)로 무신론적(無神論的)인 인본주의(人本主義)와 허망(虛妄)한 인간의 명예욕(名譽慾)을 드러내 준다. 유대인 철학자(哲學者) 필로(Philo)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각자 벽돌에다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바벨탑 건축자들의 이름은 흔적(痕迹)조차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냄 없이 주를 위해 겸허(謙虛)하게 살다간 주의 종들의 발자취는 길이 남아 빛나고 있다(히 11:4-40).


⑷.(그네들의 건축(建築)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혹자(或者)는 생각하기를, 또 다른 홍수(洪水)에 대비(對備)하기 위하여 자위(自衛)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실로 이르시기를, "다시는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그가 지시(指示)하시는 방주(方舟)를 믿기보다는 자기들 자신이 세운 탑을 믿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그들의 안중(眼中)에 두었다면, 그들은 평지보다는 산 위에 탑을 세우기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탑의 건축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을 모독(冒瀆)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탑을 세우려 했으니, 이는 하나님께 또한 도전(挑戰)을 나타내는 것이며 적어도 그에 대한 적대적(敵對的)인 태도를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극히 높은 신(神)과 같다" 되고자 했든가, 그 신성(神性)함의 정도에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높이에 있어서라도 가능하면 그에게 가깝게 되고자 해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忘却)했고, 땅 위에서 기는 것을 경멸(輕蔑)했고, 문이나 사다리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하늘에 기어 올라가려고 결심한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자 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입에 오르내리거니와, 그 후손(後孫)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는 자기들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려고 이 일을 꾸몄을 것이다. 후대(後代)에 아무런 기록도 못 남긴 채 죽기보다는 오히려 이 같은 교만(驕慢)과 야심(野心)과 우둔(愚鈍)의 유적이라도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그들의 분산(分散)을 막기 위하여 했다.)

   "온 지면(地面)에 흩어짐을 막자" 했다. 요세푸스(Josephus)의 말과 같이, "그것은 '땅에 충만 하라'(9:1)는 명령을 거역(拒逆)하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흩어지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아니오,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살고 함께 죽으리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들이 상호간에 이 거대(巨大)한 일을 시작했다.


㉱.(하나님께 대한 대담(大膽)한 거역(拒逆)이다.)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너희를 흩으리로다." 고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흩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대답한다. 이같이 창조주께 대항(對抗)하는 자는 화(禍)있으리라!

㉲.(하나님과의 거만(倨慢)한 경쟁(競爭)이다.)

   세계적 군주국(君主國)이 되게 하시는 일은 만유의 주님이시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특권이다. 이것을 목표로 의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寶座)를 침범(侵犯)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그 영광(榮光)을 다른 자에게 양도(讓渡)하시지 아니할 것이다.


<핵심(核心)>

  바벨탑 건설(建設)의 의도(意圖)는 하늘에 닿아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그들의 노력이 곧 바벨론의 정신(精神)이며 특징으로 .이는 오래전 하늘에서 사탄이 품었던 마음이었다. 


(04월27일 (水) <“우리가 내려가자”>


(Q)~(창세기 11:5~7)과 그리고 (시편139:7~12)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직접(直接) 이 땅으로 내려오시기로 한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⑴.<여호와께서 … 내려오셨더라(창11:5).>

   가견적 형태(可見的 形態)의 현현(顯現)(출 19:20, 민 12:5)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행위를 간섭(干涉)하시고 중재(仲裁)하시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을 뜻하는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神人同形同性論的表現)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간섭(干涉)은 자신에 대해 반역(叛逆)하는 교만(驕慢)한 인간들을 징계(懲戒)하고 심판(審判)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7, 8절) 이를 가리켜 한 유대 랍비는 ‘하나님이 자비(慈悲)의 보좌(寶座)에서 심판(審判)의 보좌(寶座)로 내려오셨다고 평하였다.


⑵.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도성(都城)과 탑을 보시려고 강림(降臨)하셨다" (창11:5절). 

진행 중에 있는 그 계획(計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위의 말은 인간적 표현 방식을 따른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들이 어떤 장소에 가보고 나서 아는 것만큼 그것을 이미 분명(分明)하고 완전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⑶.(여호와께서…강림(降臨)하셨더라.)

  이 강림(降臨)은 여호와가 가시적(可視的)인 상징(象徵)으로 그분의 임재(臨在)를 드러낸(참조 출 19:20; 34:5; 민 11:25 등) 시내 산에서의 강림(降臨)과는 다르다. 이것은 단순하게 인간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숨겨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描寫)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늘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만들고 자신을 높일 때, 하나님은 그들의 경건(敬虔)치 못한 계획(計劃)들을 살펴보기 위하여 강림(降臨)하시며 그것들을 무너뜨리신다.


⑷.우리가 가르침을 받는 것들에 대한 확실성(確實性)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有益)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왜 믿는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희망(希望)의 사유(事由)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모든 행위를 완전하게 아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핵심(核心)>

(창세기 11:1~4)의 바벨탑 사건(事件)에서 볼 때에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 하늘까지 올라가려 했으나,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이 땅 낮은 곳 사람들에게로 내려오셨다. 우리를 향(向)해 오시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사람을 구원(救援)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나타내는 것이며. 우리를 구원(救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이 복(福)있는 사람이며 복(福) 받는 사람인 것이다.

 

(04월28일 (木) <포로(捕虜) 된 자(者)를 구원(救援)하심>


(Q)~(창세기 11:8~9)에 악(惡)한 계획(計劃)을 가지고 연합(聯合)한 자(者)들을 흩으신 하나님의 목적(目的)은 무엇입니까?


(A)~⑴.(창11:8) (여호와께서 … 온 지면(地面)에 흩으셨으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主權的)인 역사는 단순히 인류(人類)를 징계(懲戒)하려는 데만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이 땅에 충만(充滿)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計劃)하시고 명령하신 축복(祝福)이며 따라서 인간의 역반응(逆反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이 이를 강권(强勸)적으로 성취(成就)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과 계획을 역사 속에 성취시키시는 신실하신 분인데 우리가 그분의 약속(約束)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굳게 믿을 수 있는 근거(根據)도 바로 여기에 있다(삼상 15:29). (창 11:8~9, 만나주석)


⑵.높은 탑들을 건축(建築)하고자 한 메소보다미아 사람들의 열정은 "하늘에 닿"는 탑을 쌓고자 시도하다가 첫 번 실패(失敗)로 그치지 않았다. 고대(古代)를 통하여 그들은 신전(神殿)고탑들 곧 지구랏들을 계속해서 건축했다. 그런 유적(遺蹟)들이 몇 곳에 아직도 서 있다. 가장 잘 보관된 것 중 하나가 아브라함의 초기 고향(故鄕)인 우르에 있다.


⑶.이러한 행위(行爲)는 악(惡)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간섭(干涉)으로 바벨탑의 건축이 실패(失敗)하게 되었습니다.

㉮.이 바벨 사건이 주는 교훈은 인간의 욕심은 반드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며, 하나님을 예배하러 모인 무리는 반드시 말씀으로 재무장하여 흩어져 복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대규모(大規模) 공사(工事)와 인본주의(人本主義)에 입각한 연합(聯合)은 헛수고요, 아무런 유익(有益)이나 소용이 없이 끝나는 것입니다.

㉰.또한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의지(意志)와 그것의 무상(無常)함에 대한 표상이지만, 인간의 악(惡)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류를 향하여 당신이 계획하시고 건설하실 한 나라와 민족을 선택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준비하셨습니다. 

㉱.당시(當時) 인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지배(支配)를 받기를 거부(拒否)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보좌(寶座)를 차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이면서도 교만(驕慢)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자신이 차지하려고 했던 사단의 행위(行爲)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피조물(被造物)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간섭(干涉)을 받지 아니하고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과 같이 행동하려는 교만(驕慢)은 지극(至極)히 마귀 사단적인 사고(思考)의 발상(發想)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교만(驕慢)한 생각과 계획은 하나님의 보좌(寶座)를 차지하고자 했던 사단이 도리어 파멸(破滅)에 이른 것과 같이 결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인 수고(受苦)와 노력(努力)은 실패(失敗) 할 뿐입니다.


<핵심(核心)>

  하나님 없는 모든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노력(努力)은 그것이 비록 일시적으로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실패(失敗)하고 그로 인해 씻기 어려운 고난(苦難)과 고통(苦痛)만을 안겨다 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연합(聯合)은 선(善)한 일이 아니라 그들의 교만(驕慢)과 자만(自慢)을 드러낼뿐이다. 그들의 사람이 하나님께 반항(反抗)하여 “이름을 내고자”한다면 그 계획은 반드시 실패(失敗)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지면(地面)에 흩트신 것은 세상과 인류를 구원(救援)하시기 위(爲)함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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