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내부의 적(질문, 대답, 설명) 11/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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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10-31 15:28 조회849회 댓글0건본문
제6과 내부의 적
(11월 8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27분)
연구 범위: 벧전 1:4, 수 7:, 시 139:1–16, 에 10:11, 눅 12:15, 수 8:1–29
기억절: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10).
여호수아 7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언약의 깊은 의미와 그것이 미치는 광범위한 결과를 처음으로 경험한 사례의 기록이다. 언약의 조항에 순종하는 동안에는 승리를 얻었지만, 언약의 조건을 무시했을 때는 패배했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성공은 그들의 숫자, 전술, 또는 전략의 뛰어남에 달려 있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거룩한 용사가 함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가장 위험한 적은 진영 밖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에 있다는 뼈저린 교훈을 배워야 했다. 그들 앞에 놓인 가장 큰 도전은 가나안 도성의 견고한 성벽이나 그들의 월등한 군사력이 아니라, 주님의 지시를 저버리는 진영 내부 일부 개인의 완고한 의지였다.
하늘의 유업을 기다리는(벧전 1:4, 골. 3:24) 우리도 비슷한 도전을 경험한다. 약속의 땅의 경계에 서 있는 지금, 우리의 충성심은 시험받고 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순복함으로써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 백성이 승리하는 비결은 언약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것을 저버릴 때는 패배했다.
느끼기: 주님은 큰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도 기회를 주시며 너무 늦기 전에 잘못에서 돌이키기 원하신다.
행하기: 우리의 충성심은 시험 받고 있으며 오직 예수께 순복할 때 승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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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범죄한 것은 아간 한 사람인데 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까?(수 7:1)
*답: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한 지체가 고장나면 온 몸이 아프게 되어 있다.
3. 이스라엘에 큰 고통을 준 아간에게 여호수아는 어떤 모습을 보였습니까?(수 7:19)
*답: 내 아들이라고 불러서 사랑을 육친의 나타내었다. 그래도 하나님의 명성을 먼저 생각했다.
4. 아간은 탐욕의 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며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창 3:6)
*답: 태초 여자가 뱀에게 유혹단 경험을 상기시킨다.
5. 여호수아는 절망적인 실패 가운데서 다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어디에 있다고 말합니까?(수 8:7)
*답: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뎄다고 선언했다.
6. 여호수아는 아이성의 패배에 대해서 무엇을 염려했으며 거기에는 어떤 쟁점이 담겨 있습니까?(수 7:9)
*답: 하나님의 명성을 훼손할까 염려했다. 신자는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된다.
7. 아간의 범죄에 대한 자백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수 7:20)
*답: 완전히 궁지에 몰리기 전까지 고백하지 않았다. 그런 고백은 회개라고 할 수 없다.
결론: 가장 큰 위협은 가나안의 견고한 성벽과 군사력이 아니라 언약을 저버리는 개인의 완고한 의지였다. 이스라엘의 언약은 공동체를 포함하며 한 사람의 잘못은 가족과 공동체에 고통을 준다. 자비하신 주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만 아간의 마음은 여전히 완고했고 결국 자신과 가족을 멸망하게 만들었다. 주님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돌이킨 그들을 다시 세우시고 승리하게 도우셨다. 오늘 우리의 충성심도 시험받고 있으며, 오직 예수께 순복할 때 승리할 수 있다.
11월 2일(일) 언약 위반
여호수아 7장을 읽어 보라. 이스라엘이 아이 사람들에게 패한 두 가지 주요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수7:1~25] 각각 읽어보라.
*답: 아간의 죄와 이스라엘 백성의 자만심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이유와 범죄자의 이름을 처음부터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따라서 아간의 범죄를 밝혀내는 이야기의 긴장감은 독자의 관점과 여호수아 및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 사이에서 오는 긴장감에서 비롯된다. 구약의 다른 많은 장과 마찬가지로 여호수아 7장은 교차대구법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심이자 절정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왜 처음 시도에서 아이성을 정복하지 못했는지를 설명한다.
이스라엘이 아이 사람들에게 패배한 이유는 아간의 죄,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힘을 과신했던 두 가지 때문이었다. 후자는 아이성을 공격하기 전에 주님의 뜻을 묻지 않고 적의 세력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다.
여호수아 7:1, 11–13을 보면, 금령을 어긴 반역 행위는 아간 개인의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전체가 그의 죄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지고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11절에서 부사 gam(또한, 심지어, 히브리어)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아간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점진적으로 드러내신다. 먼저 일반적인 죄를 가리키는 “kḥata”(하타)가 사용된다. 범법 행위는 부사 gam(감)으로 시작되는 다섯 개의 구체적인 죄인 (1) 거기에 언약을 어기고, 'abar(아바르, 넘다, 범하다), (2) 또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laqakḥ(라카흐, 취하다, 헤렘[kḥerem]에서 가져가는 것) (3) 심지어 훔치고, ganab(가나브, 도둑질하다), (4) 속이기까지 하며, kakḥash(카하쉬, 속이다), (5) 진멸하기로 한 물건을 숨겨두는 것으로, sim(심, 두다, 배치하다) 점차 범죄의 심각성이 강조된다.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개인과 공동체 차원의 백성을 모두 포함한다. 언약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으로서 분리될 수 없는 연합체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 구성원 중 한 사람 혹은 몇몇의 죄라 하더라도 언약 공동체 전체가 죄책을 함께 감당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수 7:11)다.
<교훈> 이스라엘의 언약은 개인과 공동체 차원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구성원 중 한 명이나 일부의 죄는 언약 공동체 전체의 유죄로 간주되었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바라신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교회라고 하셨는데, 내 교회라고(마16:18) 하셨다. 백성은 하나하나가 다 교회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지체가 건강해야 온몸이 건강하다. 지체가 아프면 몸 전제가 아픈 것이다. 아간이 잘못한 것은 이스라엘의 몸을 아프게 한 것이다. 그 아픔이 언약의 공동체를 덮친 것이다. 결과는 참당했다. 그들 중에 있는 종기를 도려내고 치료하지 않으면 온 몸의 통증을 멈출 수 없다. 거기다가 여리고를 점령한 승리감이 그들 스스로 승리한 것처럼 여기는 오만함이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탄은 모든 일에 틈을 찾는다. 이들은 사단에게 틈을 제공했다. 성경은 마귀가 틈타지 못하게 하라고 경고했다(엡4:27). 광야의 이스라엘은 마귀에게 많은 틈을 드러냈다. 오늘날 광야 같은 교회생활에서 마귀가 틈탈 구실을 만들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주님께 굴복해야 할 것이다.
11월 3일(월) 아간의 죄
여호수아 7:16-19을 읽어 보라.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 그리고 아간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수7:16~19]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17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18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19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
*답: 하나님은 아간과 그 가족이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셨다. 그리고 무고한 자들이 다치지 않도록 세밀한 배려를 하셨다. 이 모든 과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드러내셨다.
하나님께서는 범법자의 정체를 밝히는 대신, 당신의 공의와 은혜를 모두 나타내는 절차를 마련하셨다. 이스라엘의 패한 이유를 설명하고 백성의 성결을 요구하신 후(수 7:13), 하나님은 절차의 공표와 그것의 실행 사이에 시간을 주셨다. 이 시간은 아간에게도 생각하고 회개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할 기회가 되었으며 그것은 아간의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들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았다면 사건을 은폐하는 데 가담할 것인지 아니면 고라의 아들들처럼 공범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아버지 편에 서기를 거절하여 파멸을 피한 것인지 결정할 기회가 주어졌다(민 16:23–33, 민 26:11 참조).
이 곤경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괴로움에 빠지게 한 것과 역순으로 진행된다. 공동체의 죄는 이스라엘 전체에서 한 지파로, 한 지파에서 족속으로, 한 족속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개인으로 좁혀진다. 조사 과정은 범인을 드러내는 동시에 무고한 자들의 무죄를 밝힌다. 보이지 않는 아간의 범죄 행위를 하나님께서 증인으로 직접 증거 하시는 치밀한 법적 절차만큼 이 과정 또한 중요한 부분이었다.
독자는 하나님께서 아간으로 대상을 좁혀가는 과정의 긴장감을 마치 직접 보는 듯하다. 끝까지 발각되지 않고 지나갈 것이라고 기대하는 아간의 완고함은 얼마나 놀라운가? 사람의 마음속에 감추어 놓은 것을 아시는(삼상 16:7, 렘 17:10, 잠 5:21) 주님의 꿰뚫어 보시는 눈앞에는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시 139:1–16, 대하 16:9).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감추어진 것까지 다 아시기 때문이다(삼상 16:7, 렘 17:10, 잠 5:21).
여호수아가 아간을 “내 아들아”라고 부르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단순히 여호수아의 나이와 지도자로서의 역할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 위대한 용사가 정의를 집행할 때 가졌던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범죄자를 심판하라는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의 마음은 아간을 향한 자비로 가득했다. 여호수아는 이런 태도를 통해 다시 한번 예수님의 세심함, 친절, 사랑을 예표하였다. “예수께서는 결코 무례하거나 불필요하게 가혹한 말씀을 하거나 민감한 자에게 공연한 고통을 주신 일이 전혀 없었다. …그는 위선과 불신, 죄악을 두려움 없이 책망하셨지만 그분의 통렬한 책망의 음성은 언제나 눈물로 적셔져 있었다”(시대의 소망, 353).
<교훈> 주님은 아간과 가족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아간은 여전히 완고했지만 그 심판을 집행하는 지도자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었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사람을 형벌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을 때 찾으신다. 그가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그의 허물을 고백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그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 얼굴을 숨기시고 자비의 손길을 멈추시는 것일 뿐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신31:16,17).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이 없어지면 사탄의 사망이 그들을 삼키게 된다. 그것이 재앙이다. 아간과 그 가족의 경우가 그렇다. 고라가 반역해도 그 자녀들은 그 반역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그 자녀들은 이스라엘 중에 거했을 뿐만 아니라 고라 족속은 그핫의 자손으로서 그핫 가족에게 맡겨진 성소의 기구를 메는 영광까지 받았다. 아간 가족도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도 함께 아감의 죄에 동참했으므로 다 망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성질에 대하여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하시며 살륙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애3:42,43). “혹 저희가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호9:12).
11월 4일(화) 운명의 선택
여호수아 7:19-21을 읽어 보라.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이러한 요청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아간의 고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수7:19~21]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 20 아간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참으로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이러이러하게 행하였나이다 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
*답: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가 한 일을 숨김없이 고백하라고 지시했다. 죄를 자복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된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두 가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높이고, 또 자신이 한 일을 숨기지 않고 자백할 것을 요구한다. 아간은 자신이 한 일을 자복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토다(todah)는 감사(시 26:7, 사 51:3, 렘 17:26)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죄의 고백(에 10:11)을 뜻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본문은 아간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어떤 단서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끝까지 들키지 않기를 바랬다. 그의 완고한 태도는 고의적인 범죄자로 간주되기에 충분했고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러한 자에게 속죄의 길은 없었다(민 15:27–31 비교).
여호수아 7:21에 기록된 아간의 말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생각하게 한다. 하와는 그 나무를 보고(ra'ah, 라아) 탐스럽게(kḥamad, 하마드)여겨 마침내 그 열매를 먹었다(laqakḥ, 라카흐, 창 3:6). 아간은 전리품 중에서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 은 200세겔, 금덩이를 보았다고(ra'ah) 고백한다. 그는 그것을 탐내며(kḥamad) 취했다(laqakḥ). 아담과 하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간의 선택은 탐욕의 죄가 곧 불신의 죄인 것을 보여준다. 이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최고의 것을 주지 않고, 오직 당신의 영역에 속한 특별한 즐거움을 그들에게서 숨기셨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본문은 태초의 인류의 타락에 대한 암시 외에도, 라합(수 2:1–13 비교)과 아간의 태도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대조한다. 한 사람은 정탐꾼들을 지붕으로 데려가 병사들에게서 숨겼고, 다른 사람은 금지된 물건을 가져가 여호수아에게서 숨겼다.
한 사람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승리를 거두게 도왔고, 다른 사람은 탐욕으로 이스라엘에 재앙을 초래하고 패배를 안겨주었다. 한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었고, 다른 사람은 여호와와의 언약을 깨뜨렸다. 라합은 자신과 가족을 구원했고, 그들은 이스라엘의 명예로운 한 백성이 되었다. 아간은 자신과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수치의 본보기가 되었다.
<교훈> 라합의 선택은 자신과 가족을 구원했고,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한 백성이 되었다. 아간은 자신과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수치의 본보기가 되었다.
<부가설명> 탐욕은 사망의 독약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욕망(欲望)을 주셨다. 욕망(慾望)을 주신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 이 말씀에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어하는 정서와 좋은 것을 먹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신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에게 즐길 수 있는 정서를 주신 것이다. 그것을 욕망(欲望)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사탄은 이 욕망을 이용하여 욕망(慾望)이 되게 했다. 바울은 그것을 유혹의 욕심이라고 표현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이 욕심은 썩어져 가는 구습이 되었다.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옛사람이다. 아간이 이런 사람이었고 우리도 이 구습에 젖어있으면 옛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썩어져가는 사람이다. 나는 살아가는 사람인가? 썩어져가는 사람인가?
11월 5일(수) 소망의 문
여호수아 8:1-29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참담한 실패를 어떻게 기회로 바꾸실 수 있는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수8:1~29] 아이성을 점령하는 내용이다. 각각 읽어보기 바란다.
여호와의 전략은 이스라엘의 앞선 패배를 전술적 우위로 전환시켜 아골(고난, 히브리어)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꾼다(호 2:15 참조). 이스라엘에게 처음 얻은 승리로 자만심에 빠진 아이성 거민들은 패배한 척 후퇴하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전략을 반복한다. 아이 백성들이 유인되어 요새를 비우고 나오자,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배치되어 있던 3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수 8:4)은 빈 성을 불태우고 점령한다. 여호수아 8:7은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전략이 아니라, 승리를 허락하시고 아이성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시는 여호와께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여호수아서의 다른 어떤 장보다 군사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이 장에서도 본문은 승리가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근본적인 진실을 강조한다.
전투의 결정적인 순간은 아이 사람들이 성에서 나와 이스라엘을 추격하기 시작할 때 일어난다. 여호수아 8:2에서 전략을 주신 후 하나님은 두 번째로 말씀하시며, 전투를 지휘하시는 분이 당신이심을 나타낸다. 이때까지 전투의 결과를 알 수 없었지만 이후부터 이스라엘 군대의 승리가 분명해진다.
여호수아의 손에 들린 무기는 검이나 단창이 아닌 끝부분이 휘어진 낫 모양의 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여호수아 시대에 실제 무기로 사용되기보다는, 주권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공격 신호를 보내는 것 외에도, 아이성의 정복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했다.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이 칼을 펼쳐 드는 모습은 홍해를 건널 때(출 14:16)와 아말렉과의 전쟁(출 17:11–13)에서 손을 들었던 모세의 지도자의 자리를 여호수아가 완전히 이어받았음을 보여준다.
이 전투에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은 없지만, 아이성의 승리는 오래전 첫 세대가 겪었던 애굽에 대한 승리나 최근의 여리고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성공의 열쇠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여호수아의 믿음과 그의 흔들림 없는 순종에 있다. 이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원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그들이 어디에 살든, 어떤 도전에 직면하든 여전히 유효하다.
<교훈> 여호와의 전략은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꾼다. 성공의 열쇠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여호수아의 믿음과 그의 흔들림 없는 순종에 있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자손이 아비의 죄를 답습하지 않는 한 아비의 죄를 자손에게 묻지 않으신다(겔18장 참고). 고라 자손들의 사례가 그렇다. 자손이 함께 망하는 것은 아비의 죄에 가족이 동참했을 때 생긴다. 그렇게 아간과 그 가족들이 다 사라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이성을 공략하는 전략을 여호수아에게 지시했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면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단독으로 결정한 사건이 두 건이 있다. 하나는 아이성 공격이고 하나는 기브온 사람들이 항복하러 왔을 때다. 여호수아 5장에서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이 와서 여호수아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명했다. 가나안 땅 정복은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의 지휘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계시한 것이다. 그런데 두 번 실수했다. 실수의 후유증은 두 곳 다 있다. 믿음의 싸움은 신자의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사탄의 싸움이고 생명의 세력과 사망 세력의 싸움이다. 결과는 뻔하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는가? 그런데 이 세상은 사망이 주장하는 세상이라 생명이 사망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순간마다 호흡마다 주님께 굴복하는 믿음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전략 전술로 승리하는데 그것은 주님의 승리다. 이미 선언하셨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11월 6일(목) 하나님의 능력의 증인
하나님은 이방 민족에게 당신을 알고 악한 길에서 돌이킬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맞게 되었다.
여호수아 7:6-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그들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여호수아가 보였던 첫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특별히 여호수아 7:9을 주목해 보라. 그의 말에는 어떤 중요한 신학적 원리가 담겨 있는가?
[수7:6~9]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8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답: 극도의 후회와 슬픔의 표현이고 스스로 자괴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말을 하지만 9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 이름에 누를 끼치게 된 것을 탄식하고 회개하는 말이다.
여호수아의 말의 시작은 마치 애굽을 떠난 후 괴로운 중에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라고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말과 비슷한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수 7:7).
그러나 곧 그는 이 패배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과 명성이 손상될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낸다.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수 7:9).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목적의 중심 주제와 원리를 드러낸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순종하는 백성을 위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지를 주변 이방 민족들이 보기를 원하셨고, 그들도 라합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정복하는 능력을 통해 알게 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아이에서처럼 상황이 잘못된다면 이방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무력하고 영향력이 없다고 여길 것이고(민 14:16, 신 9:28), 이는 가나안 사람들의 저항을 더욱 부추길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히브리인들이 땅을 정복하는 상황 속에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것과 그분이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모두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중요한 쟁점과 원칙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훈> 주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것을 통해 당신에게 순종하는 백성을 위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지를 주변 이방 민족들이 보기를 원하셨다.
<부가설명> “5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를 세상에 알려야 했고 그래서 주위의 나라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이끌어야 했다. 하나님은 형벌하시는 분이 아니다. 지구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이미 사형이 선고된 아담의 후손들이다(고전15:22, 마8:21,22). 생명의 하나님은 이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려고 세상에 오셔서 그들의 사망을 대신 당하시고 부활하여 생명을 드러내셨다. 그래도 생명을 받을 의향이 전혀 없는 존재들은 사망에 버려두시고 얼굴을 숨기시는 것이다. 결과는 사망이 그들을 삼키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은 바로 이런 족속들이다.
11월 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부조와 선지자 45장 “여리고의 함락” 493–498을 읽어 보라.
“아간을 파멸시킨 무서운 죄는 모든 죄 중에 가장 흔하고 가장 가볍게 여겨지는 탐욕에서 시작했다. …아간은 자기의 죄를 인정했지만 그 고백이 자신을 돕기에는 이미 늦은 때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군대가 아이에서 패배하여 낙담하며 돌아오는 것을 보았음에도 그는 자진하여 죄를 자복하지 않았다. 그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슬픔으로 땅에 엎드리는 것을 보았다. 만일 그때에 자복하였더라면 그는 진심으로 회개한 증거를 나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간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아간은 큰 죄가 범하여졌다는 선언을 듣고 그 죄의 성질까지 분명히 진술된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후에 엄숙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그의 지파에서 시작하여 그의 족속, 가족이 지목당하는 것을 볼 때에 그의 마음은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킬 때까지 자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죄를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사실을 인정했다. 이와 같은 자백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는가! 다 알려진 후에야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자기 자신과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죄를 자복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간은 자신이 자백함으로써 범죄의 결과를 피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았다면 자기의 죄를 자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복은 다만 그에 대한 형벌이 공의로움을 나타내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그에게는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도, 깊은 뉘우침도, 의도의 변화도, 악을 미워하는 것도 없었다”(부조와 선지자, 496, 498).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광고와 소비주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열 번째 계명(출 20:17)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논의해 보라. 자의적 욕구와 실제적인 필요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그 구분은 왜 중요한가?
*답: 믿음으로 성경의 원칙을 따라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허영에 빠지지 않도록 자아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2. 다니엘 9:4–19에 기록된 다니엘의 기도를 읽어 보라. 다니엘 자신이 악을 행한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면서 “우리가” 이 모든 악한 일을 했다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가?
*답: 그것은 인간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는 사망의 존재로서 썩어지는 상태를 나타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인데 그중에 나는 자신이 포함된 것을 인정하는 기도이다.
3. 이스라엘이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한 것과 우리의 사명은 어떤 유사성이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규례와 법도”에 순종한 것이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데 왜 그렇게 중요했는가? 이 원리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실제로 따른다면 우리의 증거는 얼마나 더 효과적이겠는가?
*답: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요14:15 공동번역)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참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주장한다면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삶이 나타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보고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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