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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놀라운 은혜(질문, 대답, 설명) 1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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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10-02 21:53 조회30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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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놀라운 은혜

(10월 1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00분)

  

연구 범위: 수 2:1–21, 민 14:1–12, 히 11:31, 출 12:13, 수 9:, 느 7:25

 

기억절: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 11:31).

 

“내가 또 왜 그랬을까?" 어쩌면 우리도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역사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인류는, 특히 우리 자신도 했던 잘못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두 번째 기회를 얻었고, 여호수아는 이 임무를 신중하게 이행한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자신들이 직면한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그 땅의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그들은 그 성의 방어 체계, 군사적 대비 상태, 물 공급, 이스라엘군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 등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들의 아무런 노력이 없이도 그 땅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확실히 도와주실 것이라고 해서 인간의 책임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국경에 두 번째 당도했다. 기대는 높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난번 도전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었다. 

이번 주에는 여호수아서의 가장 흥미로운 두 이야기를 살펴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믿음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놀라게 할,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우며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 

느끼기: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차별 없이 대하시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행하기: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동참한다.   

 

TMI 위로

2.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엡 2:8) 

*답: 은혜와 선물

3. 정탐꾼을 구한 라합의 거짓말은 합당한 것입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히 11:31) 

*답: 라합의 믿음이라고 했다.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4. 어린 양의 피를 문틀에 바르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실천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줍니가?(출 12:7) 

*답: 믿음으로 순종한 것이다.

5. 기브온 사람을 대했던 이스라엘인들의 근본적인 실수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대하 18:4)

*답: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이다.

6. 기브온 사람들이 예배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느 7:25)

*답: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있었다.

7. 라합과 기브온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고전 12:13) 

*답: 하나님의 구원은 인종과 종족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예수님 안에서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결론: 하나님은 실패한 이스라엘에게 다시 기회를 주셔서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신다. 은혜는 이와 같이 자격이 없는 이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우며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 주님은 라합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셨으며 그녀가 알지 못한 다윗의 혈통까지 들어가는 놀라운 특권을 주셨다.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은 모두에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진실하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은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것이다. 

 

10월 5일(일) 두 번째 기회

 

여호수아 2:1과 민수기 13:1, 2, 25–28, 33; 그리고 민수기 14:1–12을 읽어 보라. 여호수아는 왜 약속의 땅 정복의 임무를 정탐꾼을 파견하는 것으로 시작했는가? 

[수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민13:1,2,25~28,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25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26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민14:1~12]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12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답: 정복할 땅과 주민들의 현황을 잘 알아보기 위하여 정탐꾼을 보냈다.

 

두 정탐꾼이 잠입한 아카시아 숲은 히브리어로 싯딤(수 2:1)이라 불린다. 이곳은 이스라엘 역사의 두 가지 부정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는 정탐꾼의 파견, 적진 잠입, 정탐꾼의 귀환, 발견한 것의 보고, 그리고 보고에 따른 행동 결정과 같은 동일한 핵심 요소를 담고 있는 민수기 13장의 다른 정탐꾼 이야기이다. 

싯딤에서 있었던 또 다른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발람의 사주를 받아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르고 그들의 신을 숭배함으로(민 25:1–3, 민 31:16), 언약을 가장 크게 배반한 반역적인 우상 숭배의 사건이다. 이런 맥락에서 싯딤이라는 지명은 이야기 전체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특별한 긴장감을 준다. 이번에도 약속의 땅 입구에서 또다시 실패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오랫동안 기다린 약속의 성취로 이어질 것인가?

 

요한복음 18:16–18, 25–27, 요한복음 21:15–19을 읽어 보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와 베드로 개인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 사이에 어떤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요18:16~18, 25~27]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요21:15~19]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답: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처럼 베드로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 그 이상의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다. 기회를 선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 아니 그보다 더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두 번째 기회를 성경은 '은혜'라고 부른다. 은혜는 간단히 말해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받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은혜의 개념으로 가득하다(롬 5:2, 엡 2:8, 롬 11:6 참조).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은혜로 베풀어 주신다(딛 2:11–14). 이러한 은혜를 경험한 베드로는 교회에게 은혜 가운데 자라가라고 권면한다(벧후 3:18). 그보다 더 놀라운 소식은 우리가 두 번째 기회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회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겠는가? 

 

<교훈>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갈 두 번째 기회를 받았다. 성경은 이같이 자격이 없음에도 다시 기회를 주시는 은혜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부가설명> 사람이 호흡이 끝나기 전에 은혜의 시기가 끝나기 전에는 모든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 있다. 두 번째 기회라는 표현은 두 번뿐인 기회라는 말보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첫 번 기회 외의 기회들을 대표하는 표현일 뿐이다. 아담이 언약을 어기지 않았으면 두 번째 기회는 필요 없었다. 아담이 언약을 어겨서 생명이 사망이 되었을 때 마지막 아담을 보내셔서 한 번 더 생명 얻을 기회를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고전15:45)이시며 둘째 사람이다(고전15:47). 우리는 다 첫째 사람인 첫 아담의 씨로 출생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첫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그의 후손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도록 구속을 이루셨다. 그리고 이 두 번째 기회는 모든 인류에게 제공되었다. 호흡이 있을 동안, 정신이 맑을 동안 이 기회를 이요해야 한다. 이 기회를 헛되게 보내면 사망이 그를 멸절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들을 사망과 함께 영원히 멸망해서 존재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두 번째 기회 얼마나 송중한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10월 6일(월)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한 보석

 

여호수아 2:2–11, 히브리서 11:31, 야고보서 2:25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라합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수2:2~11]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6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 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8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약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답: 라합은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증언한다.

 

라합 이야기의 중심에는 정탐꾼을 보호하기 위해 한 그녀의 거짓말이 있다. 그녀의 거짓말을 생각할 때, 그녀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심판하기로 결정하게 만들었던(창 15:16, 신 9:5, 레 18:25–28) 극도로 죄악된 사회에 속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약이 라합의 믿음을 칭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행동에 대한 언급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녀의 모든 것을 인정하거나, 그녀의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것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1:31은 부패한 문화에 안주하지 않고 정탐꾼들과 운명을 함께하기로 선택한 라합의 믿음을 확증한다. 야고보서 2:25은 그녀가 두 정탐꾼에게 잘 곳을 제공한 것과 안전한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안내한 것을 칭찬한다. 타락하고 부패한 문화와 라합의 죄악된 생활 방식 속에서도, 은혜의 하나님은 그녀를 구원할 믿음의 불꽃을 보셨다.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믿음과 당신의 백성에 속하기로 한 선택을 보여주는 라합에게 있는 선한 것을 사용하셨지만, 그녀의 모든 행동을 칭찬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은 라합의 탁월한 용기, 담대한 믿음, 구원의 도구로서의 역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선택한 것을 높이 평가하셨다. 

하나님의 역사를 본 후 그녀는 이렇게 선언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가나안 여인에게서, 특히 이교 신앙에서 주로 천상의 신들에게 기도하는 장소인 지붕에서 라합이 야훼가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을 듣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와 같은 라합의 표현은 성경에서 오직 하나님만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맥락에서만 사용되는 표현이다(출 20:4, 신 4:39, 신 5:8). 그녀의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참된 신이심을 인정하는 의도적이고 양심적인 선택을 보여준다. 

그녀의 고백은 하나님의 주권과 여리고가 멸망 당할 운명에 처한 심판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그녀가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라합의 도덕적 선택은 야훼의 심판 앞에 있는 두 개의 가능성, 즉 그분에게 계속해서 반항하다가 멸망하거나, 믿음으로 맡기기로 선택하는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라합은 여리고의 거민 누구라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했을 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었다.

 

<교훈> 하나님은 라합의 모든 행동을 칭찬하지는 않으셨지만 탁월한 용기, 담대한 믿음, 구원의 도구로서의 역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선택한 것을 높이 평가하셨다. 

 

<부가설명> 성경은 라합을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계시한다. 그가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참 신인 것을 믿는 믿음을 나타내었다. 그것은 라합의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야고보는 라합이 한 일을 믿음으로 행한 것이라고 증거했다. 라합의 마음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그가 정탐꾼에게 한 고백에서 어떻게 그런 믿음을 얻게 되었는지 잘 드러낸다. 출애굽 과정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통하여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얻은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달았을 때 자기를 그 하나님께 맡기기로 마음을 바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라합의 믿음으로 보시고 그와 그이 가족들을 다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는 살몬과 결혼했고 유다지파에 편입되었고 메시아의 조상 중에 그 이름이 들어가는 영예를 얻었다. 그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를 이처럼 기막히게 활용한 예가 된다. 여리고의 다른 이들은 왜 라합처럼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그 대답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바울이 예수님을 그처럼 핍박했다가 믿었는데, 다른 사람은 그런 바울을 죽이려고 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10월 7일(화) 새로운 충성 

 

여호수아 2:12–21과 출애굽기 12:13, 22, 23을 읽어 보라. 출애굽기의 말씀은 정탐꾼들과 라합 사이의 합의를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수2:12~21]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14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출12:13,22,2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22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답: 출12장은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서 표가 되게 한 것이다. 정탐꾼이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붉은 줄을 창에 매라고 말했을 것이다.

 

라합의 약속은 매우 명확하다. 생명에는 생명을, 친절에는 친절을 원하는 것이다. 히브리어 헤세드(cḥesed, 수 2:12)는 인애를 의미하며, 다른 언어로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울만큼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주로 언약적 충성을 의미하지만, 신실함, 자비, 선행, 그리고 친절이라는 개념도 포함한다. 

라합의 말은 신명기 7:12을 떠올리게 하는데, 여기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헤세드를 지키시겠다고 맹세하셨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cḥesed)를 베푸실 것이라”(신 7:12). 

눈여겨 볼 점은 같은 7장에서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진멸(cḥerem, 헤렘)을 명하셨다는 점이다. 라합은 헤렘의 대상인 가나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갓 움튼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약속을 주장하고 있다. 그 결과 그녀는 구원을 받았다. 

정탐꾼들과 라합의 대화와 관련해 가장 먼저 연상되는 장면은 출애굽 당시 유월절이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보호받기 위해 집 안에 머물면서 집 문틀 기둥과 위쪽에 희생양의 피를 발라야 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출 12:22, 23 참조). 

“백성들은 순종으로 그들의 믿음을 증거해야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 얻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범죄의 형벌에서 구속하실 수 있으며 우리는 죄에서 순종으로 돌이켜야 한다. 사람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부조와 선지자, 278).  

그 유월절에, 피는 하나님의 멸망시키는 사자로부터 그들을 구원하는 표징이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마지막 재앙이 닥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살리셨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에 멸망이 임할 때 라합과 그녀의 가족을 구해야 했다.  

 

<교훈> 믿음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을 주장하는 라합에게 하나님은 인애를 베푸셨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지만 그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부가설명> 성경은 라합을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했다. 야고보서에도 있고 히브리서에도 있다. 또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라합이 보아스의 어머니로 소개하였다. 야고보서는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된다고 기록했다.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믿음은 추상명사라서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믿음은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 행함은 보이는 믿음이다. 그러나 행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야고보는 생명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이 말을 뒤집어 이해하면 살아있는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생명이 있으면 활동이 있고 활동이 없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뜻이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것이다. 그 생명은 활동한다. 활동하지 않는 생명은 중병환자이거나 죽은 것이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거듭난 생명이 있다면 그것은 활동할 수밖에 없다. 내가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는 성경의 말씀이 생활이 되는지 아닌지 여부를 살피면 스스로 검증될 것이다. 라합의 믿음은 생명이 있는 행동으로 드러났다.

 

10월 8일(수) 충돌하는 가치들 

 

여호수아 9:1-20을 읽어 보라. 라합의 이야기와 기브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가? 그것은 왜 중요한가? 

[수9:1~20] 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2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 3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4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5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6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 7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위 사람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는 듯하니 우리가 어떻게 너희와 조약을 맺을 수 있으랴 하나 8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묻되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9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 나라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소문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10 또 그가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들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11 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주민이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들이니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라 하였나이다 12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아직도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가지고 왔으나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가 났으며 13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 것이었으나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매우 길었으므로 낡아졌나이다 한지라 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16 그들과 조약을 맺은 후 사흘이 지나서야 그들이 이웃에서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들이라 함을 들으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행군하여 셋째 날에 그들의 여러 성읍들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성읍들은 기브온과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이라 18 그러나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 19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20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으로 말미암아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

*답: 기브온 사람들도 라합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통하여 그분에게 굴복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속임수로 이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여호수아 9장은 작은 도시 국가를 통치하는 가나안 왕들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결성하기로 했음을 알리며 시작한다. 반면 기브온 주민들은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기로 결정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속여 자신들과 조약을 맺게 하기 위해 먼 나라에서 온 사절단으로 위장하는 계략을 사용하기로 했다. 신명기 20:10-18에서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과 약속의 땅 밖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차이를 두셨다. 

“간교하게” 또는 “교활하게”로 번역되는 오르마(ormah)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슬기와 지혜를 의미한다(잠 1:4; 잠 8:5, 12), 그러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범죄적 의도를 뜻한다(출 21:14, 삼상 23:22, 시 83:3). 기브온인들의 기만적인 행동의 뒤에는 파괴적인 의도보다는 자기 생존을 위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기브온 사람들의 말은 라합의 말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두 경우 모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의 성공이 단순히 인간의 업적이 아님을 고백한다. 다른 가나안 사람들과 달리,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시려는 여호와의 계획에 저항하지 않고, 주께서 친히 이 민족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몰아내시는 것을 인정한다. 애굽에서의 구출과 시혼과 옥에 대한 승리는 라합과 기브온 사람이 이스라엘과 약속을 맺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브온 사람들은 라합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하려는 의지를 나타내는 대신 속임수를 택했다. 

모세의 율법은 이러한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규정을 제시했다(민 27:18–23). 여호수아는 주님의 뜻을 물어야 했으며 기브온 사람들의 기만을 피했어야 했다. 

신정 정치의 지도자,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 지도자의 근본적인 의무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대상 28:9, 대하 15:2, 대하 18:4, 대하 20:4). 이 의무를 소흘히 하였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땅을 정복하는 데 필수적인 기본 조건을 어기거나, 주님의 이름으로 맺은 맹세를 깨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었다. 

 

<교훈> 기브온 사람이 찾아왔을 때 주님께 묻지 않음으로 이스라엘은 땅을 정복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어기거나, 주님의 이름으로 맺은 맹세를 어길 수밖에 없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실 때 그의 자손이 400년간 이방의 종살이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15:13~16). 이 400년은 아브라함 자손들이 하나님을 찾도록 하는 예비 기간이고 동시에 가나안 족속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스라엘은 준비가 안 되어서 40년 광야에서 더 준비해야 했고 가나안 족속들에게는 40년이 자비의 기간으로 더 주어졌다. 그러나 라합과 기브온 사람들 외에는 이 기회를 헛되게 보냈다(고후6:1,2 참고). 라합이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이 아는 만큼 하나님을 찾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자비로 받아 이스라엘 민족에 합류시켰다. 아직도 이 세상에 자비의 기간이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수명까지가 자비의 기간이다. 그것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이라고 하는 동안 우리는 늘 굴복하고 생명이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면서 활력있는 영적 생명으로 활동하는 믿음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10월 9일(목) 놀라운 은혜

   

여호수아 9:21-27을 읽어 보라. 여호수아의 해결책은 어떻게 정의와 은혜를 함께 나타냈는가?

[수9:21~27] 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라 하니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었더라 22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어찌하여 심히 먼 곳에서 왔다고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23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대를 이어 종이 되어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리라 하니 24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들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숨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25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26 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27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답: 그들을 살렸고 그들이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사역(使役)하는 자로 삼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브온 사람들을 공격하려 했더라도, 회중의 지도자들이 맹세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맹세가 악행이나 범죄적 의도를 담고 있지 않다면(삿 11:29–40), 개인적 손실이 있다하더라도 구속력 있는 것으로 여기는 원칙을 따랐다. 

맹세를 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맹세를 지키는 것은 구약에서 경건한 자들의 덕목으로 여겨졌다(시 15:4; 시 24:4; 전 5:2, 6). 이 맹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주님의 이름으로 맺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그것을 변경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맺은 엄숙한 맹세로, 이스라엘의 삶은 기브온 사람들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었다. 실제로 그들이 하나님의 집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로 지정됨으로써(수 9:23),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의 한 부분이 되었다. “온 회중을 위하여” 종노릇하라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판결(수 9:21)과 달리 여호수아의 결정은 기브온 사람들을 향한 저주를 축복의 가능성으로 바꾸었다(삼하 6:11 비교). 

이후의 기브온의 역사는 그들이 누렸던 높은 종교적 특권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충성을 증언한다. 이스라엘이 한 약속은 이후 세대에도 지켜졌고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기브온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데 동참했다(느 7:25). 그들의 행동은 영원토록 복이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지만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기브온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라합과 같이 자비를 요청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것만으로도 기브온 사람들이 멸망에서 면제될 수 있었으리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인들을 벌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당신의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다(겔 18:23, 겔 33:11 참조). 기브온 사람들의 속임수는 하나님의 자비, 그분의 인자하고 공의로운 성품을 향한 호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가나안 사람들의 멸망이 결정된 것은(창 15:16) 그들이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높으심을 인정하고, 반역 대신 평화를 원하며, 우상 숭배를 버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기브온 사람들의 의지를 존중하셨다.

 

<교훈> 기브온 사람들은 속임수로 평화를 구했지만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버리고 당신을 경배하려는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셨고 그들은 공동체의 한 부분이 되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하든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려고 하신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모든 종교와 심지어 기독교까지도 사람들이 생명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생명 없는 존재라고 단언했다. 즉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다(고전15:22). 이런 사망의 존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 구원이다.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사람을 이 사망 상태에 묶어두려고 한다. 그래서 선악 간의 싸움이다. 생명의 하나님의 소식을 듣고 그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나오면 하나님은 받으신다. 그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기브온 사람이나 라합이 그들이 방법대로 하나님을 찾았어도 하나님을 바로 만날 때는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섬길 때는 받지 않으신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10월 1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부조와 선지자 44장 “요단강을 건너감” 482-483을 읽어 보라. 

라합과 정탐꾼들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후, 구약은 그녀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의 족보에서 그녀가 등장한다. 그녀는 유다 지파의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고,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또 다른 위대한 여성 룻의 시어머니가 되었다(마 1:5; 룻 4:13, 21 비교). 완전한 멸망을 선고받았던. 여리고의 창녀였던 라합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다윗의 계보를 잇는 혈통의 주요 인물이 되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통해 이루실 수 있는 일이다. 그 믿음이 비록 겨자씨 한 알만큼 작더라도 말이다(마 17:20, 눅 17:6).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적 권위를 인정한 우상 숭배자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신 것은 라합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땅 가운데 기브온 사람들같이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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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님의 댓글

김명호 작성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적 권위를 인정한 우상 숭배자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신 것은 라합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땅 가운데 기브온 사람들같이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방 종교를 버리고 이스라엘과 연합하여 언약의 축복에 동참하였다.
하나님은 국적이나 인종, 계급에 따른 어떠한 차별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온 인류의 창조주이시다. 모든 사람은 창조에 의하여 한 가족이며, 구속을 통하여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분리의 장벽을 헐어 버리시고 성전 뜰의 모든 칸막이들을 열어 젖혀서 모든 영혼들이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넓고, 깊고, 충만하여 어디든지 뚫고 들어간다. 그 사랑은 사탄의 기만에 속아 온 자들을 그 영향력으로부터 건져내어 언약의 무지개로 둘러싸인 하나님의 보좌에 닿을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가 따로 없다”(선지자와 왕, 369).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두 번째 기회”나 그 이상의 기회에 대한 모든 질문을 논의해 보라. 우리는 이를 어떻게 적용하는지, 잘못 적용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라. 예컨대, 학대를 경험하는 이에게 은혜의 이름으로 그 관계로 계속 돌아가라고 조언하지만, 학대가 반복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어떻게 적절한 균형을 잡아야 하겠는가?
*답: 많은 경우 두 번째 기회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지 않는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굴복한다면 학대는 멈출 것이다.
2. 라합의 믿음을 본보기로 토의해 보라. 삶의 방식이 성경의 이상과 거리가 있더라도 그들이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수용해야 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그들의 어떤 관행은 용납하지 않으면서 그 믿음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답: 하나님께서는 깨닫는 만큼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지나쳐버리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3.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의 속임수와 자신의 부주의로 일어난 위기를 해결하면서 정의와 은혜를 실제적인 방식으로 결합했다. 당신의 실제 삶에서 둘 모두 필요할 때 이를 어떻게 균형 있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답: 기도하며 성령의 지혜를 구하고 최선을 다하면 주께서 합당한 길로 이끌어 주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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