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과 마지막의 모습들(질문, 대답, 설명) 06/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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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06-20 12:17 조회1,789회 댓글0건본문
제13과 마지막의 모습들
(6월 28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57분)
연구 범위: 마 12:38-42; 욘 3:5-10; 계 18:4; 단 5:1-31; 계 16:12-19; 대하 36:22, 23
기억절: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욘 1:9).
이번 주는 마지막 때의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이다. 니느웨를 향한 요나의 사명, 바벨론의 멸망,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한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등장이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다.
앞서 살펴본 다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사적 기록들은 모든 세대를 위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 직전의 세대에게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기록에서 다양한 요소를 찾아내어 우리에게 주어진 “현대 진리”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동시에 마지막 날의 사건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모든 이야기에 관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이 광범위한 주제와 암시를 살펴볼 때 주의 해야 하며 예언적 억측을 만들 정도로 모든 세부사항을 분석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에서처럼 우리는 주요 요점과 원칙을 찾아야 한다. 숨겨진 진리를 찾기를 기대하며 모든 세부 사항을 억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대신 개요와 원칙을 살펴야 하며,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마지막 날과 관련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어떤 역사의 기록은 마지막 날 사건을 이해하게 돕지만 예언의 모든 세부사항을 억지로 꿰어 맞춰서는 안된다.
느끼기: 예언 속 나라는 세워지고 무너지지만 하나님의 예언과 통치의 뜻은 시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행하기: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장차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믿으며 충실하게 사명을 감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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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원의 질문에 대한 요나의 대답은 마지막 날의 사건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욘 1:9)
*답: 첫째 천사 기별과 연결된다.
3. 인간의 반응은 조건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예언의 성취에 어떻게 반영됩니까?(욘 3:4)
*답: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인간의 반응과 관계 없이 성취된다. 조건적 예언은 인간의 반응에 따라 결정된다.
4. 주어진 진리를 알면서도 벨사살이 선택했던 악은 마지막 때에 있을 일을 어떻게 예견합니까?(단 5:22)
*답: 최후의 심판의 성질을 드러낸다.
5. 고레스의 기습과 바벨론 멸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사건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줍니까?(마 24:43)
*답: 생각지 못한 때에 재림하실 것을 암시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
6. 하나님은 왜 이방의 왕 고레스를 기름 부은 받은 자라고 부르셨습니까?(사 45:1)
*답: 하나님의 하실 일을 성취하는데 그것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있을 일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7. 어떤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은 예언이 가진 조건성을 어떻게 설명해 줍니까?(렘 18:7-10)
*답: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과 거절하는 것의 결과를 설명해 준다.
결론: 어떤 역사적 기록은 마지막 날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모든 세부사항을 꿰어 맞추어 예언적 억측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요나의 기록은 창조주 경배와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려준다. 요나의 예언은 조건적 예언이지만 어떤 예언은 인간의 반응과 관계없이 성취된다. 예언 속 나라들은 세워지고 무너지지만 하나님의 예언과 통치의 뜻은 각 시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기름 부은 받은 종 고레스의 행적과 예루살렘을 회복하게 한 일은 장차 있을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말한다.
6월 22일(일) 주저하는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욘 1-4장 참조)는 짧지만 큰 의미가 담겨 있다. 많은 신자들이 이 주저하는 선지자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이야기에는 또한 미래의 사건에 대한 놀라운 의미도 담겨 있다.
마태복음 12:38-42을 읽어 보라.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실 때 요나 이야기의 어떤 부분을 언급하셨는가? 그분의 말씀에서 심판에 대한 어떤 교훈을 찾을 수 있는가?
[마12:38~42]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답: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밤낮 사흘 있었던 것과 니느웨에 전도하여 그들이 회개한 사건을 언급하셨고 그것이 심판과 연관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요나보다 크다고 선언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을 알고 계셨음에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눅 19:10) 이 땅에 오셨다. 요나는 자기 죄 때문에 큰 물고기 속에서 사흘을 보냈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무덤에서 사흘을 지내셨다.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데 필요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요나를 니느웨로 가기를 거부하다 마지못해 사명을 수행한 선지자로 알고 있다. 아시리아가 자행했던 잔혹한 통치를 생각하면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아시리아의 벽화는 끔찍한 장면으로 가득하며 정복당한 민족들은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 당했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그들의 수도에 가서 회개의 기별을 전파하고 싶겠는가?
이 이야기에는 마지막 때의 남은 무리의 운동을 예고하는 듯한 중요한 장면이 있다. 너는 누구냐는 선원의 질문에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대답한다. 이는 첫째 천사의 기별(욘 1:9; 계 14:7)과 매우 비슷한 표현이다. 실제로 요나가 주님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분으로 강조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가리키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그분을 경배해야 하는 이유의 기초이며, 예배는 마지막 날 사건의 핵심이다.
동시에 우리도 역시 영적 바벨론에 인기 없는 기별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계 18:4, 흠정역)오라는 말은 세상에게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기별은 아무리 친절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거의 항상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복음을 전할 때 부정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반응을 받아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은 복음 사역에 항상 따르는 반응이다.
<교훈> 요나가 주님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분이라고 한 것은 그가 창조주이심을 말한다. 이것이 그분을 경배해야 하는 이유이며, 예배는 마지막 날 사건의 핵심이다.
<부가설명> 요나는 뜻이 비둘기다. 성령께서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에 생명의 기별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으로 세 천사 기별의 실상을 미리 보게 해주셨다. 또한 요나의 경험으로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표했다. 구약 선지자들 중에서 모세가 예수님의 표상이 되는 것은 신명기 예언으로 확실하다(신18:15). 여기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할 때 ‘나’가 모세다. 그래서 침례 요한에게 사람들이 나와서 ‘그 선지자냐’라고 물었을 때 이 말씀을 물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호수아의 이름과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간 것으로 그가 예수님을 표상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직접 예수님의 하실 일을 표상하는 선지자 이름을 말한 것은 요나뿐이다. 그는 함께 배를 탄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했고 요나를 바다에 던진 후에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고 서원했다. 서원한 내용은 없지만 여호와를 경배하겠다고 서원하지 않았을까? 탈굼역(Targum)은 본 절을 ‘그들은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희생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고 번역한다. 또한 미드라쉬(Midrash)는 그들이 욥바로 귀환하여 개종자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본 절의 내용만 가지고는 그들이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한 설명들이다. 요나의 외침을 니느웨가 죄에서 나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둘째 천사 기별을 확대한 계18:1~4과 같은 성질이다. 그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셋째 천사의 기별을 받고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심판날에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기별에 회개한 것을 기억하실 것이라는 암시를 예수께서 친히 하신 것이 아닌가? 저자를 통하여 요나서가 세 천사의 기별을 드러내는 예언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기쁨을 주는 은혜가 아닌가!
6월 23일(월) 회개의 사역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매우 분명한 기별을 전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욘 3:4). 멸망은 분명해 보였다. 무엇보다 주님의 선지자가 직접 전한 말씀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니느웨는 어떻게 되었는가?
요나 3:5-10을 읽어 보라. 이 예언은 왜 성취되지 않았는가?
[욘3:5~10]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답: 요나의 기별을 듣고 성 전체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켰고 그 성은 멸망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도성 전체가 회개했고 적어도 한동안은 예언된 파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해진 운명을 피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방 나라 각처에서 높임과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의 율법은 존귀히 여김을 받았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니느웨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거만함으로 인하여 인근 민족의 희생물이 되었다"(선지자와 왕, 271).
우리도 마지막 때에 타락한 세상을 향한 마지막 기별을 통해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즉, 전 세계적으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는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에 굳게 서서 짐승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계 14:12, 개역한글)킬 것이다. 이 사람들은 니느웨의 사람들처럼 잃어버린 자에게 내리는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는 하나님의 선언과 같은 어떤 예언은 조건적이다. 사람들이 악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니느웨는 멸망할 것이다(렘 18:7-10 참조). 하지만 그런 조건이 달려 있지 않은 예언들도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반응과 상관없이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메시아 예언, 짐승의 표, 재앙의 부어짐, 마지막 때의 박해와 같은 예언은 조건적이지 않으며, 인간이 무엇을 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대신에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최후의 사건이 전개될 때 그들이 어느 편에 설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교훈> 세상의 회개를 촉구하는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은 조건적이지 않으며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 때도 인간의 선택은 어느 편에 설지를 결정하게 한다.
<부가설명> 회개의 기별은 창세기부터 주어졌다. 이 기별 자체가 심판을 선포하는 것가 같다. 아담 부부는 가죽옷을 받아 입는 과정에서 회개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이 영생하도록 창조하셨다(요일2:25). 그런데 사탄의 속임에 빠져 이 약속을 저버렸다.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그들에게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 상하면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말씀하시고 이것을 받아들일 때 그들은 생명을 회복할 것을 선포하셨다. 아담은 그 아내 이름을 하와라고 짓는 것으로 회개를 나타냈고 하나님은 기꺼이 받으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우리는 종말 때 심판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닌지 깊이 살필 필요가 있다. 매일 심판받는다. “아침마다 내가 이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시101:8). 하나님께서는 아침마다 악인을 멸하신다. 심판자는 항상 문 앞에 계신다(약5:9). 아침마다 내 마음의 문 앞에 서서 심판하신다.“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여기 심판대는 베마다. 베마는 운동경기할 때 심판관이 서 있는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 문 앞에 서 계시는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날마다 회개하고 밤에는 용서의 평안으로 잠들어야 할 것이다. 이 경험으로 사는 사람은 종말에 있는 심판을 복음으로 깨달을 것이다. 그 심판은 베마 심판에서 회개한 사실을 인정하는 신원이 되기 때문이다. 아멘.
6월 24일(화) 벨사살의 잔치
느부갓네살의 아버지가 이끈 바벨론과 메디아의 연합군에 의해 니느웨가 함락된 후(B.C 612), 바벨론은 위대한 입법자 함무라비의 시대 이후로 경험할 수 없었던 부흥을 맞이했다. 앗수르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난 느부갓네살의 통치하에 바벨론의 부와 영향력은 주변 국가들이 그 압도적 지배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커졌다. 바벨론은 세계의 여왕으로 군림했고, 번영을 원하는 국가들은 충성을 맹세했다.
한편,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하나님이 참으로 모든 나라의 합당한 통치자이심을 고백하면서 믿는 자로서 죽었다(단 4:34-37). 다니엘서가 제공하는 이후의 기록은 그의 후계자이며 공동 섭정인 벨사살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니엘 5:1-31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어떤 중요한 영적 기별을 발견할 수 있는가? 어떤 것이 벨사살을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지게 했는가?
[단5:1~31] 각자가 읽어보기 바란다. 분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쓴 글자로 바벨론을 심판하신 내용이고 그날 밤에 벨사살 왕이 죽임 당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슬프고 비극적인 부분은 아마도 다니엘서 5:22일 것이다. 다니엘은 왕에게 느부갓네살의 몰락과 회복에 대해 이야기한 후,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라고 말한다. 그는 진리를 알 기회가 있었고, 느부갓네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직접 목격하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자신의 선왕을 큰 어려움에 빠뜨렸던 동일한 길을 선택했다.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을 세웠던 것처럼 벨사살은 다니엘의 하나님이 예언한 것을 공개적으로 거역했다. 성전 그릇을 세속적인 용도로 사용함으로써 그는 바벨론이 유대인을 정복하고 지금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성전 기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바벨론이 그들의 멸망을 예언한 신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확실히, 벨사살은 모든 것을 잘 알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전히 거역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 그는 진실을 알 만큼 충분한 개념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의 마음이었다. 마지막 날에, 세상에 마지막 위기가 닥칠 때에도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벨사살처럼 그들은 지식이 아닌 마음을 따라 자기 길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교훈> 벨사살은 진리를 알고, 증거가 있음에도 완전히 거절했다. 마지막 위기의 때에도 사람들에게 진리가 주어질 것이지만 악인은 자신의 마음을 따를 것이다.
<부가설명> 벨사살은 벨신이 왕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그런 이름을 가진 왕이 예루살렘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 사용하는 거룩한 용기(容器)들을 우상을 찬양하는 잔치에 사용한 것은 대놓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이런 정신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할 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재림 전 징조로서 노아 때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17:27,28)라고 하셔서 그들이 향락에 빠져 사는 모습을 지적하셨는데 벨사살이 바로 그런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메네메네데겔우바르신’이라는 심판 선고가 주어졌는데, 메네와 데겔은 화폐 단위이고 우바르신의 우 접속사이고 바르신은 베레스의 복수다. 그래서 나누어진다는 뜻이다. 그 단위들의 뜻이 ‘세다, 달아보다, 나뉘다.’이다. 다니엘이 해석한 대로 그날 밤에 나라가 망했고 벨사살은 죽임을 당했다. 신판이 그렇게 신속히 닥칠 줄 몰랐을 것이다. 그날 심판이 이르렀다. 마지막 날 심판도 신속히 임할 것이다. 날마다 심판에 사유의 은혜로 저녁마다 우리 주님의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혀주셔서 그날 심판 날에 온전히 정결하다는(레16:30) 선고를 받도록 굴복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6월 25일(수) 유프라테스 강물이 마름
바벨론의 강점 중 하나는 성벽 아래로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 덕분에 도성에 물을 제한 없이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약점으로도 나타났다. 고대 바벨론의 여왕 니토크리스(Nitocris)는 강을 따라 토목공사를 하여 도성으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여왕은 인부들이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강을 슾지로 바꾸었다. 고레스 역시 유프라테스 강의 물길을 막아서 성벽 아래로 군대를 편안하게 진군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벽 안으로 들어간 고레스는 강을 따라 도시를 둘러싼 방어벽이 무방비 상태임을 발견했고, 바벨론은 그날 밤 함락되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그 때 잔치가 진행 중이었고 모두가 춤을 추며 쾌락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의 중심부에 사는 사람들은 교외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기록했다(Herodotus, “The Histories”. 뉴욕, 2015), 이것이 다니엘서 5장에 묘사된 바로 그 잔치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있겠는가?
다니엘 5:18-31과 요한계시록 16:12-19을 읽어 보라. 요한계시록의 몇몇 재앙과 바벨론의 멸망 사이에 어떤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단5:18~31]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21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25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 30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계16:12~19]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17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18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답: 유프라테스 강이 말랐다. 동방에서 오는 왕의 길이 예비되었다. 고레스는 동방에서 오는 왕이었다.
예수님은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마 24:42, 43). 바벨론이 무너질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갑작스러운 출현은 현대 바벨론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가 많은 구체적인 예언을 통해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이라는 풍성한 증거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도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것을 몰랐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놀라게 될 것이다.
<교훈> 고레스의 때처럼 요한계시록은 강이 마르고 왕이 올 것을 말한다. 예수의 재림도 현대 바벨론을 놀라게 하겠지만 몰라서가 아니라 믿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바벨론 멸망에 관하여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다.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사44:27,28). 깊음에 대하여 마르라고 한 말은 유프라테스 강이 마를 것을 예언하고 그 마른 곳으로 고레스가 진입하고 승리해서 예루살렘 중건을 명할 것이며 성전이 세움을 입을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때는 고레스가 출생하기 거의 200년 전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분명히 기록했다. 45:4을 읽으면 고레스는 알지 못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예언했다. 너무 명백해서 고레스가 바벨론 멸망시킨 후에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왕상13:2에는 요시야가 여로보암의 단을 헐고 제사장의 해골을 불사를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 예언 후 300년 뒤에 요시야가 유다 왕이 되어 예언한 대로 시행했다(왕하23:15,16). 종말을 처음부터 아시는 하나님께서 고레스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일어나 할 일을 당연히 아셨으므로 예언한 것이고 그것은 벨사살 때 그대로 성취되었다. 재림성도들은 예언의 확실성을 어느 교단보다 확신하는 신도들이다. 마지막 심판에 관한 기별도 확신한다. 그러면ㄴ 날마다 심판에서 정결함을 경험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 주님이 준비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날마다 입고 있어야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6월 26일(목) 기름 부음 받은 종 고레스
고레스가 바벨론 성을 정복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의 포로기는 끝났고 페르시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고레스 치하에서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학자 톰 홀랜드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영토의 집합체”(도미니언, Dominion, 뉴욕, 2019, p25)라고 부른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이 되었다.
페르시아인의 관습은 고레스를 “대왕” 또는 “왕들의 왕”이라고 불렸다.
고레스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해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을 예표한다. 그는 동방에서 오시는 왕으로(마 24:27), 바벨론과 전쟁을 벌이고, 결국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켜 마침내 바벨론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왕이다(계 19:11-16).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사 45:1)라고 부르신 이유는 이 유명한 페르시아 왕이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킨 것뿐만 아니라 그가 바벨론과 치른 전쟁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역대하 36:22, 23을 읽어 보라. 고레스의 이야기는 느부갓네살의 이야기와 어떤 면에서 유사한가?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가?
이 칙령은 왜 중요한가? 결국, 그것은 수 세기 후 예수님의 초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대하36:22,23]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3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답: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이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사야의 예언이 고레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둘 다 이방나라 왕이다. 둘 다 하나님을 인정했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파괴했다. 고레스는 중건하게 했다. 느부갓네살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고레스는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고레스의 해방 칙령으로 유대인들은 귀환했고 성전 재건했고 예수께서는 개선된 그 성전에 서셨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유프라테스가 마를 때 오신다.
오늘날 구약성경의 순서는 말라기로 끝나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고레스의 칙령으로 마쳐진다.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고레스의 원형인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시작하는 마태복음이다. 고레스는 지상 성전을 재건하게 하고, 예수께서 시작하시는 하늘 성소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물론 고레스가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나타낸 것은 아니며, 어떤 표상도 원형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작은 세부 사항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넓은 의미에서 “구세주”의 예표로서 기능한다.
<교훈> 하나님이 고레스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르신 것은 바벨론과 전쟁을 치르며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킨 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성경 예언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예정 예언, 예지 예언, 경고 예언이 그것이다. 예정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예지 예언은 예정 예언이 진행되는 동안 사탄이 방해하는 것을 미리 알려주시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하나님의 일을 공격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는지 가르쳐주시는 예언이다. 경고 예언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미리 알려주셔서 경고를 받아들이도록 권고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예언이다. 요나가 니느웨 멸망할 것이라고 하신 예언이 대표적인데, 사실은 예지 예언은 거의가 경고 예언에 해당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전사(戰士)들이다. 그들은 예언의 지도를 따라 싸워야 한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8,19). 예언을 모르면 이 싸움에서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이 싸움은 철저히 하나님의 전략 전술을 따를 때 승리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의 전략 전술이 예언으로 기록되었고 성경 말씀으로 주어졌다. 재림 성도들은 성경이 있고 증언의 말씀이 있다. 주님이 주신 승리를 지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진다면 예언과 말씀을 모르거나 무시하기 때문이다.
6월 2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선지자와 왕 43장 “눈에 보이지 않는 순찰자”를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는 무대 위에 등장한 모든 나라들이 이 땅에서 자기의 위치를 차지하도록 허락하셨다. 이는 높으신 순찰자이시며 거룩하신 분의 뜻을 성취할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예언은 세계의 대제국들 곧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로마의 발흥과 과정을 추적하였다. 이 모든 나라들과 군소 국가들에서도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각 나라마다 시험의 기간이 주어졌으나 그들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들의 영광은 사라지고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 열국은 하나님의 원칙을 거절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멸망을 초래하였으나 하나님의 통치의 목적은 각 시대를 통하여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었다."(선지자와 왕, 535).
예레미야 18장에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가 흙을 빚고 모양을 만들며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흙을 빚는 모습을 통해서 성경 예언의 조건성의 원리를 설명하신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렘 18:7-10). 주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확실하게 이해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진리에서 떠난 하나님의 백성들보다 니느웨의 심판이 더 가벼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라(마 12:39-42 참조). 하나님의 교회는 이 경고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답: 남은 자손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는 주신 말씀과 증언에 유의하고 순복해야 할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 이어지는 모든 제국에서 “역사는 반복되었다”는 엘렌 화잇을 말을 생각해 보라. 예언에 나타난 모든 제국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어떤 면에서 같은 예언된 길을 따랐는가? 오늘날의 세상은 어떻게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가?
*답: 일어남과 멸망함이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할 것이다.
3. 사람을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대개 생각이나 지성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답: 마음은 참 똑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생각과 감성이 연합해서 나타나는 인간 의식(意識)이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들의 감성을 존중하면서 그들의 의식에 진리를 전하는 방식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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