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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전조 (질문,대답,설명) 06/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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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06-13 11:51 조회1,5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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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전조
(6월 2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56분)

연구 범위: 단 2:31-45; 단 3:1-12, 17, 18; 계 13:11-17; 롬 1:18-25; 행 12:1-17; 마 12:9-14
 
기억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이번 주에는 마지막 날의 사건을 놀랍도록 자세하게 예고하는 두 개의 성경 이야기를 더 살펴볼 것이다.
먼저 요한계시록 13장에 묘사된 쟁점을 분명히 암시하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를 살펴볼 것이다. 그다음 지금과 다가올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초기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약성경으로 가볼 것이다.
두 이야기는 모두 놀라운 용기를 강조하고, 가장 힘든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찾는 방법을 알려준다.
예수님은 거듭거듭 “두려워하지 말라,” “왜 너의 마음에 근심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예언의 초점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며, 지구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는 장면들에서도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때의 사건들은 어렵고 힘든 일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결국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소망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구약시대와 초기교회의 경험은 누구를 예배할 지를 묻는 시험이 주어질 것을 말한다.
느끼기: 예언은 하나님이 미래를 아시며 궁극적으로 미래를 책임지심을 알려준다.
행하기: 믿음의 조상들처럼 창조주를 경배하며 믿음을 지키고 소망으로 승리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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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주의적 해석은 다니엘 2장의 예언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입니까?
*답: 역사적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예언했고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적 사건으로 이 땅에 건설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3. 우상 숭배 명령에 대한 세 친구의 반응은 믿음이 어떤 것임을 말해줍니까?(단 3:16-18)
*답: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복하는 것을 나타낸다.
4. 느부갓네살의 우상 숭배의 명령은 대쟁투의 어떤 쟁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단 3:15)
*답: 신앙생활은 우상과의 투쟁이며 항상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5.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마지막 때의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까?(요 21:18, 19)
*답: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제재를 받으며 순교로 끌고 간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6.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경배의 시험은 어떤 문제로 귀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마 12:9-14)
*답: 죽이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7. 주께 충성하는 소수의 사람 덕에 많은 사람이 평안을 누린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답: 아직도 세상이 유지되는 것은 충성하는 소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로 나오도록 증거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 지구의 마지막을 말하는 예언에서도 초점은 그리스도이다. 예언은 하나님이 미래를 아시며 궁극적으로 미래를 책임지심을 알려준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우상 숭배의 명령을 통해 누구를 예배할지 선택해야 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충성의 대상을 묻는 시험이 주어질 것이다. 구약시대와 초기교회의 경험은 이러한 경험을 미리 알려주는 전조이며 논쟁의 쟁점이 안식일로 귀결되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 때 사건이 힘들게 보일 수 있지만 믿음의 조상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두려움이 아닌 소망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아야
 
6월 15일(일) 다니엘 2장과 예언에 대한 역사주의적 접근
 
성경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예언 중 하나는 다니엘 2장이다.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무려 500년 전 시대의 선지자는 자신의 때인 바벨론 시대부터 메데-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를 거쳐 로마가 분열되고 오늘날과 같은 현대 유럽 국가에까지 이르는 세계 역사를 예언한다.
실제로 이 예언은 이러한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서로 섞일 것이나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단 2:43)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이 예언은 놀랍게 성취되어 왔다. 예언대로 이 나라의 사람들은 왕족으로부터 평민까지 서로 온갖 종류의 통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열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영국 왕실은 “윈저”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불리지만 이 이름은 사실 비교적 최근인 1917년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그 이전에는 독일식 이름이 확실한 “작센코부르크-고타”로 불렀는데 이는 영국 왕족 중 상당수가 '다른 민족'과의 통혼을 통해 독일과 혈연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혈연관계로도 전쟁을 막을 수 없었고, 1차 세계대전 중에 적국과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 그들의 이름을 윈저 왕조로 바꾸었다.
 
다니엘 2:31-45을 읽어 보라. 느부갓네살의 꿈은 무엇이었으며 다니엘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단2:31~45]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34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36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아뢰리이다 37 왕이여 왕은 여러 왕들 중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38 사람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막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넘기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39 왕을 뒤이어 왕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40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41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쇠 같은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42 그 발가락이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서질 만할 것이며 43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서로 섞일 것이나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이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44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
*답: 바벨론부터 세계 역사의 흥망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해석했고 또 통일 제국 끝에는 분열된 나라들이 일어나고 서로 합하지 못할 것이라고 해석했다. 종국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역사의 끝에 역사적 사건으로 이 땅에 건설된다고 해석했다.
 
다니엘서의 종말 예언은 모두 다니엘 2장에 제시된 기초를 따른다. 나머지 예언들도 다니엘 2장과 마찬가지의 순서로 하나님께서 영원한 왕국을 세우실 때까지 한 제국에서 다른 제국으로 이어진다(단 2:44; 단 7:13, 14 참조).
다시 말해 예언은 고대에서 시작하여 미래, 심지어 우리 시대까지 차례대로 끊임없이 등장하는 제국의 모습으로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것이 예언을 해석하는 역사주의적 접근 방식이며, 본문이 의도하는 바이다. 이러한 역사주의적 접근을 사용하는 것은 특히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마지막 날의 사건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교훈> 역사주의적 접근은 다니엘서의 예언이 고대에서 시작해 우리 시대와 하나님 나라까지 이어지는 제국의 모습으로 역사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이해한다.
 
<부가설명> 성경은 아담 후손으로 충만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므로 먹는 날에 죽는다고 하셨으니 그날 당장 존재 자체를 상실하여 흙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러면 창조하실 때 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이 성취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날 영생의 생명으로는 죽었어도 육체의 생명으로 종신할 때까지 생존하게 하셔서 세상 끝 날까지 아담의 후손들이 지구에 생육하고 번성해서 역사를 이어가게 하시고 그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이루어지도록 하셨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을 예언하셔서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역사 진행에서 시대에 따라 믿음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셨다. 그러므로 예언을 연구할 때 역사주의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제시한 예언 연구 방법이다. 이류는 역사적 현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2장은 예언을 역사주의적 방법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계시 자체로 가르쳐주신 내용인 것을 깨닫게 하셔서 감사하다.
 
6월 16일(월) 우상 숭배

다니엘이 한 일에 감명을 받은 느부갓네살이 처음에는 다니엘과 그의 하나님께 크게 충성했지만(2:46-48절 참조), 그것은 지속되지 않았다.
 
다니엘 3:1-12을 읽어 보라. 신상이 전부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왕이 신상을 숭배하도록 명령한 것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단3:1~12]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2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 3 이에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4 선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이르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5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6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7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니라 8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9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10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모든 사람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려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11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2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답: 사람이 자기 권력을 영속시키려는 욕망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대적하는 것이 세상 역사의 현실인 것을 잘 드러낸다.

왕은 순금으로 신상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노골적으로 거역했다. 그 신상은 바벨론이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느부갓네살이 영원히 왕으로 다스릴 것을 의미했다. 누구든 이에 감히 도전하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대쟁투가 얼마나 확실하게 전개될지에 관한 진실조차 쉽게 외면하게 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한다.
야심차고 자존심이 강하며 하나님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반항할 만큼 교만했던 느부갓네살은 어떤 면에서 루시퍼의 특징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느부갓네살은 결국 참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우리는 그가 그토록 강하게 거부하려 했던 하나님의 왕국에서 그를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 3:17, 18에서 왕에게 도전하는 세 히브리 소년의 말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믿음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며, 때로는 믿음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가?
[단3:17,18]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답: 믿음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때로는 내 의도와 다를 수 있어도 그것을 따라는 것이 믿음이다.
 
세 친구가 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쉽게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라. 결국, 그저 절 한번 하면 되는 일인데 산 채로 불태워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광신도나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저 신발을 고쳐 신는 척 숙이면서 마음으로 자신의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정말 목숨까지 걸어야 했었던 일인가? 그들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의 대답은 자신들이 목숨을 건질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교훈> 사탄은 자존심이 강하며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거역한 느부갓네살을 통해 믿음을 시험했지만 세 친구는 생명을 걸고서라도 믿음에 굳게 설 것을 보여주었다.
 
<부가설명>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 안에 영생하는 생명, 곧 죽여도 죽일 수 없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 기초가 있다. 죽여도 죽지 않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의 계시를 따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초석이다. 이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7~19).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을 믿을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말씀이 아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죽어도 살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확신하기 때문이다(요11:25,26). 현재를 모면하기 위하여 합리적인 방법을 모색한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예수님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을 확고하게 해주소서.
 
6월 17일(화) 우상 숭배의 재현

성경학자들은 오랜 기간 다니엘 3장과 요한계시록이 가르치는 마지막 날의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아 왔다. 그것도 그런 것이 다니엘 3장에서 보았던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단 3:15)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이 요한계시록에서도 다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죽이라는 명령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
 
요한계시록 13:11-17, 요한계시록 14:9, 11, 12, 요한계시록 16:2; 요한계시록 19:20; 요한계시록 20:4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인간의 계명과 하나님의 계명 사이의 어떤 차이가 나타나는가?
[계13:11~17]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14:9,11,12]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6:2]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계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답: 하나님의 계명은 우주와 그 가운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것이고 이간의 계명은 인간이 제정한 우상을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이는 짐승과 그 우상이 아닌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것이다. 비슷한 위협에 직면했던 세 히브리 소년 역시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어떤 존재도 경배하기를 거절했다. 따라서 고대 두라 평원에서 있었던 사건과, 장차 전 세계적으로 펼쳐질 창조주가 아닌 우상을 숭배하라는 명령은 상황은 다를지라도 그 원칙은 동일하다.
 
로마서 1:18-25을 읽고 로마서 1:18과 요한계시록 14:9, 10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의 연관성을 주목해 보라. 어떤 면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문제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충성을 바칠 것인가라는 동일한 쟁점이 다르게 나타난 것뿐인가?
[롬1:18~25]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답: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우상숭배다.
 
예배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이 예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궁극적인 충성의 대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생각해 보라.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통해 우리의 구속주가 되심을 생각해보면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받으셔야 한다. 그 외 다른 모든 것은 우상숭배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마 12:30)라고 하셨던 말씀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 사건들은 단지 이 진리를 극명하게 드러내게 될 뿐이다.
 
<교훈>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험이 마지막 때에도 반복될 것이다. 창조주시며 구속주이신 예수님 외에 무엇이든 궁극적인 충성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우상이다.
 
<부가설명> 우상은 사람이 창조주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 외에 무엇이든지 자기의 사상과 정성을 쏟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우상숭배를 버리지 못했다. 유다도 똑같았다. 북방 이스라엘이 망하고 아수르의 정책을 따라 이스라엘 따에 이주시킨 이방인들은 거기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어울려 혼혈이 되면서 사마리아인이라는 혼혈족이 생겼다. 그들은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 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17:33). 스바냐 선지자는 이런 신자들은 다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5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6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습1:5,6). 오늘날 우리도 성경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면서 또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을 따라 생활한다면 스바냐 선지자가 예언한 이런 신자들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6월 18일(수) 초기 교회가 당한 박해
 
마지막 사건의 전조는 구약성경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며 신약성경에도 나타나 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매우 가혹했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을 모세의 신앙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던 많은 동류 신앙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들은 이교 로마 제국의 분노 또한 직면해야 했다. “세상과 음부의 권세는 전력을 다하여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함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다. 이교는 만일 복음이 승리를 얻는다면 그들의 신전과 제단은 일소(一掃)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였다. 그러므로 이교는 그리스도교를 박멸하고자 전력을 기울였다. 박해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각 시대의 대쟁투, 39).
사도행전에는 요한계시록 13장에 기록된 예언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일을 겪을 수 있는지를 매우 강렬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사도행전 12:1-17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의 어떤 요소가 마지막 날 사건을 예고하는 것 같은가?
[행12:1~17]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 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답: 야고보는 순교했으나 베드로는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최선의 길로 이끄신 것이다. 종말에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진실로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의 부족은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형이 선고되고 있었다. 야고보는 참수당했고 다음 차례는 베드로가 될 것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측면은 아마도 인생 최악의 밤이 되었어야 할 그 밤에, 베드로는 천사가 그를 쳐서 깨워야 할 정도로 편히 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풀려났고 모여 있던 신자들의 집회 장소를 향했다. 신자들은 베드로를 구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었으면서도 그가 정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성경에 그들이 깜짝 놀랐다고 기록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담력을 거의 갖지 못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떤 신자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죽임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던 베드로도 결국에는 신앙을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다. 예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어떻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8, 19).
 
<교훈> 초기교회에 박해가 닥쳤을 때 많은 이들이 결국에는 신앙을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다. 신약성경의 이러한 기록들은 마지막 때 사건의 전조로 기록된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삶이 세상의 평안을 누리며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래도 오늘날 미국이나 한국이나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환난 핍박이 없어보인다. 이런 나라에서 예수 믿고 사는 사람들은 믿기 때문에 핍박과 환난을 받는 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북한이나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핍박이 있다. 이런 곳의 환나과 핍박은 물리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는 나라들에서는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권력자들에 의한 핍박은 없어도 소위 현대 문명이 사람의 삶과 정신을 지배하면서 진정한 성경 신앙은 엄청난 핍박을 받지 않는가? 지금은 소위 온라인 예배라는 것으로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신 말씀은 멀리 쫓아버렸다. 사람들은 자기들 입으로 ‘가나안’ 교인라고 한다. 나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몰랐다. 좀 생각해 보니 ‘안나가’ 교인이라는 말이다. 말씀이 핍박받는 모습이다. 우리는 물리적 상황이 아니라고 핍박받지 않는다는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6월 19일(목) 짐승의 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형 명령이나 짐승의 표의 강요와 같은 마지막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자, 일부 사람들은 안식일과 일요일이 어떻게 최후의 대쟁투의 중심이 될 수 있는지를 비롯한 마지막 사건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대해 의심하거나, 심지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창조주 아니면 짐승과 그 우상 중 하나를 경배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제칠일 안식일은 에덴동산(창 2:1-3 참조) 때부터 주어진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적인 표징이기에, 창조주를 경배하는 문제에서 안식일이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짐승의 권세가 안식일 계명을 성경의 제칠일 안식일에서 성경의 근거가 없는 일요일로 바꾼 바로 그 세력인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보면 안식일과 일요일이 창조주를 경배하는지(계 14:6, 7 참조), 아니면 짐승을 숭배하는지의 예배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생각은 납득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안식일과 사람의 계명 사이의 문제에 대한 전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태복음 12:9-14과 요한복음 5:1-16을 읽어 보라.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문제 때문에 예수를 죽이려고 했는가?
[마12:9~14]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요5:1~16]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답: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것에 대해(마 12:9-13) 종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마 12:14). 안식일 때문에 살인을 의논하다니? 요한복음 5:1-16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또 한 번의 기적적인 치유를 행하신 후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이려고 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며 죽이고자 하니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에 이 일들을 행하셨기 때문이라”(요 5:16, 흠정역). 사람의 전통 때문에 죽을 것인가? 아니면 제칠일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성경 어디에도 안식일에 치유를 금지한 내용이 없는 것처럼, 안식일을 일요일로 대체한 것 역시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예수님과 관련된 이 구체적인 문제는 최후의 사건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유사성을 보인다. 사람의 법인가 하나님의 율법인가가 문제이며 이 두 경우 모두 논쟁의 초점은 성경의 안식일이다.
 
<교훈> 예수님의 경험은 최후의 사건의 전조를 보인다. 중요한 쟁점은 사람의 법인가 하나님의 율법인가이며 두 경우 모두 논쟁의 초점은 성경의 안식일이다.
 
<부가설명> 제칠일안식일은 태초에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일을 마치시고 친히 안식하신 사실에 근거하여 피조물에기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날이다. 안식은 사람이 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께서 일곱째 날 친히 안식하셔서 안식을 창조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심을 증거하는 인간에게 주신 생활 재료인 날짜에 새긴 창조주 하나님의 증명 인장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날짜를 떠나서 존속할 수 없다. 날짜를 떠나는 것은 생명과 존재를 잃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사람에게 불가능한 그 재료에 창조주를 기억하도록 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날은 창조주의 날이고 우리에게 창조주를 기억하도록 주신 날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 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 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출16:28,29). 안식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날을 거룩하게 하지 않는 것은 창조주께서 엿새동안 창조하신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교만이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엿새만에 천지 창조하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무신론과 진화론과 불가지론이 세상의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날 지키는 법을 성경을 떠나서 스스로 정하고 그들 방법대로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다고 죽이려고 했다. 오늘날 기독교도 같다. 성경을 떠나서 그들 방법대로 정한 그 날을 지키지 않는다고 안식일 지키는 자들을 핍박할 것이다. 정신 차리자.
 
6월 2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각 시대의 대쟁투 40장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읽어 보라.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천사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도우시고 구원하셨다. 천상의 존재들은 인간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개입했다. 그들은 번개와 같이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났는가 하면, 먼 길을 여행하는 행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천사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경건한 사람들에게 나타나기도 했다. 그들은 마치 피곤한 것처럼 정오에 상수리나무 아래서 쉬기도 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집에 영접되어 대접을 받기도 하였고 그들은 길 잃은 여행자의 안내자도 되었다. 그들은 직접 제단의 불을 붙이기도 하였으며, 감옥의 문을 열어 주의 종들을 놓아 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하늘의 갑옷을 입고 구주의 무덤에서 돌을 굴려 내기 위하여 내려온 일도 있다.
사람들의 모양을 한 천사들은 때때로 의인들의 집회에 참석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돔 성에 가서 그 주민들의 행위를 기록하여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 한계를 넘고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고자 했던 것처럼 악인들의 집회도 방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기를 즐겨 하신다. 그분께서는 또한 당신을 진심으로 섬기는 소수의 사람 때문에 재난을 억제하시고 많은 사람의 평안을 연장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은 자신의 생명이 그들이 조롱하고 핍박하는 충성된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지속된다는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각 시대의 대쟁투, 631),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디모데후서 1:7을 읽고 예언에서 당신을 가장 걱정하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해 보라. 어떻게 하면 우리는 믿음에 대한 핍박을 말하는 예언 가운데서 두려운 마음을 떨쳐내고 하나님의 소망의 기별을 찾을 수 있겠는가?
*답: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이 말씀을 굳게 믿는 믿음에 서 있자.
2. 안식일과 일요일이 어떻게 마지막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예상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이 진리는 우리의 믿음이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현재의 사건이 아닌, 오직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함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답: 처음부터 종말을 다 아시는(사46:10)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을 것이다.
3. 다니엘서 2장 그리고 7장을 생각해 보라. 모든 제국은 정확히 예언된 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우리가 오늘날 역사를 되돌아볼 때 그 제국들이 예언을 그대로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왕국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어떤 왕국이며, 그것이 실제로 예언대로 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돌 나라로 표상된 하나님의 나라다. 역사 예언이 역사적으로 다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적으로 이 따에 건설될 것을 확인하는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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