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생명의 근원 - (핵심Q&A)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9과-생명의 근원 - (핵심Q&A)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4-11-26 00:59 조회577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제9과 생명(生命)의 근원(根源)

              (11월 30일 (안) / 일몰: 오후 5시 14분)


<기억절(記憶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眞理요 生命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者가 없느니라” (요 14:6)


<초점(焦點)>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생명의 근원(根源)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원(願)한다면, 우리는 오직 그분께만 매달리고 다른 피조물(被造物)에게는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하든 타락(墮落)하든 천사(天使)조차도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명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타락한 천사(天使) 중 가장 위대(偉大)한 사탄은 생명의 시여자(施與者)와 정반대(正反對)입니다. 

사탄은 죽음의 교활(狡猾)한 상술(商術)로, 그의 집착(執着)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구원사명(救援使命)과 대조(對照)되는 사탄의 파괴적(破壞的)인 의도(意圖)를 폭로하시며,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滅亡)시키려고만 온다."고 선언(宣言)하셨다.

"내가 온 것은 그들이 생명(生命)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0:10).


(11월 24일) (일) <그 안에 생명(生命)이 있었으니> 


(Q)~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던 이유”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方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A)~<(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생명(生命)”에 해당하는 헬라어에는 '바이오스'와 '프쉬케', 그리고 '조에'(zoē, 헬라어)가 있다. 본 절에서 사용된 단어는 '조에' 이다. 이 말은 영원한'(eternal)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永生)이라 용어로 자주 나타난다. (요 3:15~16) 그렇지만 사도 요한은 단순히 “조에”라는 말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가 많다. (요일 5:12) 본 절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밝힘으로써 생명의 근원(根源)이 예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⑴.예수님 안에는 파생(派生)되지 않은 영원히 자존(自存) 하는 신성(神聖)한 생명이 있다. 그분은 창조시(創造時)에 생명을 주신 창조주(創造主)시며 잃어버린 바 된 세상에 영생(永生)을 주시는 구주(救主)이시다. 


⑵.예수님은 성부(聖父) 하나님께서 보내신 세상 죄(罪)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아들로(어린양) 스스로 계신 분(I AM)이시오. 창조자(創造者)이시며, 구세주(救世主)로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할 수 있다.


⑶.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빛은 정의(定義), 진리(眞理) 등을 상징(象徵)하는 보조개념(補助槪念)으로 자주 사용됐다. 


⑷.특히 히브리인들은 히 “쉐키나” 곧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臨在)(출 19:16~20)에 찬란한 빛이 수반(隨伴)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을 빛으로 묘사(描寫)한 경우가 많았다(시 27:1; 사 60:20). 


⑸.다윗은 하나님을 광명(光明)으로 노래한 동시에 생명의 원천(源泉)으로 찬양(讚揚)함으로써 하나님과 빛과 생명을 하나로 묶었다. (시 36:9), 


⑹.사도 요한의 표현은 이 같은 사상(思想)의 흐름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오(요 1:1절), 빛이시오(요 8:12), 생명이시라는 명제(命題)(요 14:6) 는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 반복(反復)된다.


⑺.그분(예수님)은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고 다시 취(取)할 수 있다. (요한복음 10:17).


⑻.그분(예수님)은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이 원(願)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 (요한복음 5:21, 요한복음 14:19과 비교).


⑼.이 생명(조에)이라는 개념(槪念)은 가장 자주 영원한 생명, 구원(救援)의 약속으로 표현된다. 

(요한복음 3:15~16, 36절: 요 4:14, 36절; 요 6:27, 40, 47, 54, 68절; 요 10:27~28절 참조)


⑽.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해 오셨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아버지의 품에 계신 독생자(獨生子)께서 그를 나타내셨느니라"(요한복음 1:18). 예수님의 성품(性稟)을 보면 아버지의 성품(性稟)을 볼 수 있다.


(11월 25일) (월) <영생(永生)의 말씀> 


(Q)~우리는 어떻게 영생(永生)을 얻을 수 있으며, 예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의미(意味)합니까? (요 3:15~16; 요 5:24; 요 6:40, 47; 요 8:31; 요 12:46; 요 20:31, 요 6:35).


(A)~<예수 그리스도는 유일(唯一)한 생명의 근원(根源)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원(願)한다면,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만 매달리고 다른 피조물(被造物)에게는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하든 타락(墮落)하든 천사(天使)조차도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⑴.예수님은 영생(永生)의 말씀이시며 영생은 곧 구원(救援)을 주고 지금의 우리 존재(存在)에 의미를 더하여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죽음이 없는 영생(永生)에 들어가게 하는 그분의 능력(能力)을 의미(意味)하는 것입니다.


⑵.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奇蹟)에서 5,000명을 먹이신 영광(榮光)스러운 기적(奇蹟)에서 예수님은 떡을 먹은 모든 사람을 생명의 떡인 그분 자신에게로 인도(引導)하셨다. (요한복음 6:35).


⑶.예수님은 인간들이 일시적인 양식(糧食)을 주는 육체적(肉體的) 떡에 대한 갈증(渴症)을 넘어 영생을 위해 그분을 먹어야 할 필요성을 깨닫기를 원(願)하셨다.


⑷.배고픈 많은 사람을 먹이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能力) 안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신성(神聖)한 사명(使命)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왕국에서 영생(永生)과 시민권(市民權)을 제공(提供)하는 것이었다.


⑸.구원(救援)은 철학(哲學)이나 역사(歷史), 과학(科學)과 같은 인간의 학문(學問)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구원(救援)은 오직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성령(聖靈)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膳物)이 구원(救援)인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먼저 그분의 왕국(王國)을 구(求)하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이 제공(提供)될 것이다. (마태복음 6:33 참조)


⑹.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所有)해도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된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말씀을 먹는다면, 이 세상에서 원(願)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진정(眞正)한 승리자(勝利者)인 것이다.


⑺.시편기자(詩篇記者)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牧者)시니 내가 부족(不足)함이 없으리라".(시 23:1)'과 확신시켜 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님을 우선순위(優先順位)로 삼을 때, 그분은 우리의 필요(必要)를 채워 주십니다. 


⑻.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에서 무엇이 진정(眞正)으로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옳은 일을 하시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최우선순위(最優先順位)는 우리가 그분과 구원(救援)의 관계(關係)를 맺는 것입니다.


⑼.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그분을 개인적(個人的)인 구세주(救世主)로 영접(迎接)하는 것입니다. 음식이 몸에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영혼(靈魂)에 미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음식은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고, 그것이 우리 존재(存在)의 일부가 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유익(有益)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개인적(個人的)인 구세주로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價値)가 없는 것입니다. (소망 389)


⑽.우리는 마음으로 그분(예수님)을 먹고, 그분을 영접(迎接)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됩니다.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은혜(恩惠)가 우리에게 동화(同化)되어야 합니다. (소망 389) 그러므로 “구원(救援)에 이르는 믿음은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인정(認定)하는 것만이 아니고 오직 참믿음은 그리스도를 개인(個人)의 구주(救主)로 받아들여야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11월 26일) (화) <믿음과 새롭게 태어남> 


(Q)~하나님의 자녀(子女)가 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며, 새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믿음은 어떤 역할(役割)을 합니까? (참조 요 1:13; 롬 6:3~6; 고후 5:17 주석; 엡 4:22~24; 골 3:9~11, 요 20:3).



(A)~1. <‘거듭’으로 번역(飜譯)된 헬라어 ‘아노덴’은 ①.‘처음부터’, ‘완전히’, ‘철저히’의 뜻과 ②.‘다시’, ‘두 번째’의 뜻 그리고 ③.‘위에서부터’ 곧 ‘하나님께로부터’의 뜻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기도(祈禱), 제사(祭祀), 침례(浸禮)로써 유대교에 개종(改宗)하면 그를 중생(重生)한 자(者)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선택(選擇)받은 백성인 유대인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능력(能力)에 의혜서, 어느 한 부분만이 개선(改善)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성(本性)이 새롭게 되는 사건(事件)(Calvin)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2. 회심(悔心)과 출생(出生)은 새로운 삶의 시작(始作)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참조 요 1:13; 롬 6:3~6; 고후 5:17 주석; 엡 4:22~24; 골 3:9~11).


⑴.믿음으로 행해야 하고, 그분을 영접(迎接)하고, 빛에 열려 있어야 하지만 마음을 거듭나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 얻는 하나님의 선물(膳物)이다. 


⑵.믿음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排除)하고 일부 선택된 사람들이 쌓아두는 상품이 아닙니다. 믿음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보편적인 선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존재 믿음은 창조주께서 우리 마음에 심어 주신 믿음으로 시작하며, 믿음은 그것을 주신 분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써 세워져야 합니다.


⑶.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삶을 온전히 통제(統制)해 달라고 구(求)함으로써 강화(强化)됩니다. 

요한은 "그러나 그를 영접(迎接)한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한복음 1:12 NKJV)라고 말함으로써 이 사실을 확증합니다.


⑷.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온 순수한 선물(膳物)입니다. (롬 4:1~8)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선물(膳物)은 우리를 그분과 연결하는 신성(神聖)한 고리이다. 이 믿음의 고리는 우리가 그분께 속해 있음을 상기(想起)시켜 주며, 우리의 존재 전체에 의미를 부여(附與)합니다.


⑸.많은 사람들이 먼저 믿을 믿음과 하나님께 나아갈 회개(悔改)를 모두 갖기 위해 기다리는 실수(失手)를 저지르지만, 이 두 가지 선물(膳物)은 이미 거기에 있으며, 우리가 받아들이고 적용(適用)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⑹.하나님께서는 그[그리스도]를 오른편으로 높이셔서 임금과 구주(救主)로 삼으셨고, 이스라엘에게 회개(悔改)와 죄 사(赦)함을 주셨다. 그러므로 죄인(罪人)은 왜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분께서 주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회개(悔改)의 선물을 받아 오늘 그분의 삶을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⑺.요한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써 그분의 이름으로 영생(永生)을 얻을 수 있도록 복음(福音)을 기록하였다(요한복음 20:31).


⑻.새롭게 태어남에 대하여 (요한복음 1:12~13)에서 이 과정(過程)은 두 단계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그분을 영접(迎接)하고, 즉, 그분을 믿으면. (둘째),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權勢)나 능력(能力)을 주십니다. (요 1:13 절)에서 하나님께서 낳으신 것으로 묘사(描寫)되어 있다.


⑼.그리스도인이 되는 데는 인간적(人間的) 측면과 신적(神的)인 측면이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그분을 영접하고, 빛에 열려 있어야 하지만, 마음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⑽.믿음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는 하나님의 선물(膳物)이다. (롬 10:17). "그리스도에 대해 참되고 지속적(持續的)인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에서 표현된 대로 그분을 알아야 한다. 즉 사람이 그리스도를 개인(個人)의 구주(救主)로서 영접(迎接)할 때 구원(救援)이 그 영혼(靈魂)에게 이른다.


(11월 27일) (수) <생명(生命)의 근원(根源)을 거절(拒絶)함> 


(Q)~생명이 되신 구주(救主)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매 그 백성이 영접지 않은 즉 거절한 이유는 무엇이며 구주(救主)께서 거절당하신 일의 원인(原因)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요 1:5, 10~11)


(A)~<세상이 그(예수님)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0)-세상의 창조주(創造主)이자 타락(墮落)한 세상을 구원(救援)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無知)를 보여준다. 어둠에 잠긴 죄악(罪惡)된 인간의 관점(觀點)에서 볼 때 예수는 (1) 목수의 아들(마 13:55). (2) 귀신들린 자(마 12:24, 막 3:22)에 불과(不過)하였다. 더구나 예수를 따르던 군중(群衆)들도 예수를 기적행위자(奇蹟行爲者) 내지는 정치적(政治的) 메시아로 판단(判斷)했다는 사실을 연상(聯想)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세상의 무지(無知)함은 생수의 근원(根源)이신 예수님을 거절(拒絶)할 수밖에 없었다.>


⑴.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구주(救主)께서 거절(拒絶)당하셨다. 

   말씀을 의심(疑心)하는 것은 모든 죄(罪)의 시작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한다. 


⑵.왜 사람들은 진실의 빛보다 어둠에 더 관심이 있나요? 예수께서는 이 중요한 질문에 "이것이 정죄(定罪)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음이니 이는 그들의 행위(行爲)가 악(惡)하였음이니라"(요한복음 3:19)라고 말씀하시며 답(答)하십니다.


⑶.그들은 완고함과 교만(驕慢)함으로 자신을 낮추고 회개(悔改)하기를 거부(拒否)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유일한 빛을 거부(拒否)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회복(回復)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권능(權能)의 빛에 자신을 열지 않는 한 치유(治癒)는 없다.


⑷.무수한 사람들이 그분(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를 바라보고 그 효과(效果)를 체험(體驗)한 사실을 알면서도 믿음으로 바라보기를 거절(拒絶)한다. 그들은 의(義)의 태양이 빛을 발(發)하는 이유를 깨달을 때까지 그 빛 가운데서 행(行)하기를 거절한다. 이런 노선(路線)을 고집(固執)하는 자들은 아무도 진리(眞理)의 지식(知識)에 도달(到達)하지 못할 것이다. (PP 432)


⑸.성경에는 불신(不信)의 결과(結果)를 겪은 사람들의 수많은 예(例)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언(確言)하는 아버지의 말씀을 신뢰(信賴)함으로써 승리(勝利)하셨다.


⑹.사탄이 광야(廣野)에서 예수님을 유혹(誘惑)했을 때 도전(挑戰)한 것은 바로 이 관계(關係)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마태복음 4:3)고 말했다. 그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간단히 "기록(記錄)되었으되"(마태복음 4:4)라고 변호(辯護)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보여야 할 신뢰(信賴)의 본보기가 되셨다.


⑺.성경 전체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 중 일부는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느니라. 


⑻.[빛]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를 통(通)하여 만들어졌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느니라.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은 그를 영접(迎接)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복음 1:5, 10~11)


⑼.구약 시대(舊約時代)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擇)함을 받고(창 18:19, 신 32:9) 이 세상의 죄악(罪惡)을 감당하고 사탄의 권세(權勢)와 싸울 제사장(祭司長) 나라가 되는 특권(特權)을 부여(附與) 받았다(출 19:6). 그러나 타락된 세상 속에 휘말려버린 이스라엘은 자신의 임무(役割)를 수행(遂行)하는 데 실패(失敗)하였다. 


⑽.따라서 이 세상의 구원(救援)을 위해서 성자(聖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래 그리스도의 소유(所有)인 선민(選民)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배척(排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악(極惡)하게도 십자가 처형(十字架處刑)을 자행(恣行)하였다.


(11월 28일) (목) <정죄(定罪)>


(Q)~사람들이 심판받는 이유는 무엇이며, (요한복음 3:18, 36; 요 5:24, 38; 요 8:24; 요 12:47),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廣野)의 시험(試驗) 앞에서 사탄의 속임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어떤 원칙(原則)을 사용하셨는가? (마태복음 4:1~4)


(A)~<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알지’(에그노)는 ‘알다’(기노스코)의 3인칭 단수로서>이 용어(用語)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이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도 ‘앎’이며,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도 역시 ‘앎’이다(10:14, 15).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요 1:4절, 5:26, 17:3). 이러한 ‘앎’은 사랑에 의해 평가되고, 사랑을 매개(媒介)로 하여 계속 유지된다(요일 4:7~12). 결국 ‘알지 못함’과 ‘앎’은 ‘미움, 다툼’과 ‘사랑’, 그리고 ‘영원(永遠)한 심판(審判)’과 ‘영생(永生)’으로 귀결(歸結)된다.>


⑴.예수그를 믿는 자는 심판(審判)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不信者)는 하나님 독생자(獨生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審判)을 받은 것이니라


⑵.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拒否)하는 것은 우리를 의심(疑心)과 마귀의 유혹(誘惑)에 빠지게 한다. 그것은 빛에서 어둠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⑶.사탄은 의심(疑心)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시험(試驗)하게 한다. 예수님은 합리화(合理化)하지 않고 말씀으로 응대(應對)하셨다. 그분(예수님)은 이 땅의 방식(方式)이 아닌 하늘의 기준(基準)으로 행동(行動)하셨다. 


⑷.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처럼,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믿음의 결핍 때문에 자동적으로 정죄를 받는다. 어떤 이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결코 아버지의 뜻이 아니며, 그렇게 하는 자들은 그로 말미암아 심판을 자초한다. 구원하는 믿음의 결핍이 정죄를 낳는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⑸.정죄(定罪)는 구주(救主)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 아니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분이 도래(到來)함으로 피치 못할 결과 중 하나가 되었다. 믿는 자들은 구원(救援)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은 잃어버림을 당하도록 하나님이 예정(豫定)하셨지만, 그분은 믿음의 여부(與否)를 각 사람의 선택(選擇)에 맡겼다. (요 3:18, 재림교주석)


⑹.각 신자(信者)나 불신자(不信者), 성도(聖徒)나 죄인(罪人)의 경우는 구원(救援)의 계획이 처음 세워졌을 때 정(定)해졌지만, 자기가 성도(聖徒)가 될 것인가 또는 죄인(罪人)이 될 것인가의 선택여부(選擇與否)는 각자에게 맡겨졌다. 이것이 성경(聖經)의 예정(豫定)이다. (요 3:18, 재림교주석)


⑺.최후(最後)의 심판(審判) 때에, 각 사람에게 판결(判決)이 선고(宣告)될 것인데, 그 판결(判決)은 오래전에 그들에게 집단적(集團的)으로 선고(宣告)된 것이다.


⑻.본 절(요 3:18)에서 심판(審判)을 받지 않는다는 말의 뜻은 심판대(審判臺) 앞에 서지 않는다는 의미(意味)가 아니라 정죄(定罪)를 받아 형벌(刑罰)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意味)로 보는 것이 합당(合當)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英語聖經)에서는 ‘condemn’(정죄하다, 유죄판결을 내리다)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KJV, NIV, ESV, NRSV).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定罪)함이 없”(롬 8:1)는 것이다.


⑼.헬라어 ‘케크리타이’는 완료시제(完了時制)이므로 심판은 이미 과거(過去)에 시작되었고, 그 판결(判決)은 지금까지도 유효(有效)한 것임을 나타낸다. 불신자(不信者)들은 장차(將次) 있을 종말론적(終末論的)인 대 심판(大審判)을 받기도 전(前)에 이미 죄인(罪人)으로서의 삶, 즉 정죄(定罪)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⑽.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拒否)하는 것은 우리를 의심(疑心)과 마귀의 유혹(誘惑)에 빠지게 한다. 그것은 빛에서 어둠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