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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붙잡히시고 심문받으심(질문, 대답, 설명)09/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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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9-06 09:19 조회2,1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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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붙잡히시고 심문받으심 

(9월 14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41분)

 

연구 범위: 막 14:, 요 12:4~6, 롬 8:28, 출 24:8, 렘 31:31~34, 슥 13:7

 

기억절: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마가복음 14~16장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묘사하기 때문에 “수난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9과에서 공부한 것처럼 마가복음의 마지막 여섯 장은 단 1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있었던 사건을 다룬다. 마가복음 14~16장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은 수난 주간 목요일과 금요일에 일어난다. 예수의 죽음은 금요일에, 부활은 일요일에 일어난다. 

이번 주에 공부하는 마가복음 14장은 다섯 번째 샌드위치 구조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들은 예수님과 관련한 상반되는 두 가지 행동을 연결한다. 이후에는 마지막 만찬과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분투가 이어진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체포되어 심문 받기 위해 지도자들 앞에 끌려가신다. 이 심문 장면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장면과 연결되어 마가복음에 나오는 여섯 번째 마지막 샌드위치 구조의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번에도 두 가지 상반된 행동이 발생하지만 역설적 반전을 거쳐 이들은 같은 진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야기 전체에 걸쳐 두 개의 대조적인 음모의 이야기가 동시에 전개된다. 마가는 선명한 문체로 독자들 앞에 이 상반된 음모를 서술하면서 예수의 승리를 드러낸다.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시며 당신의 피로 세우실 새 언약을 준비하신다. 

느끼기: 주님은 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동안 인간의 악과 배신조차 그분의 선한 뜻을 이룬다. 

행하기: 기도함으로 깨어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악한 길에 서지 않음으로 그분의 편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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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여인은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귀한 향유를 부었습니까?(막 14:8)

*답: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 되었다.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다.

3. 제자들과 함께 한 유월절 만찬에 빠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막 14:24)

*답: 양을 잡는 것이 없다. 예수께서 유월절 양이시기 때문이다.

4. 고난의 잔을 거두시길 바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하셔야 했습니까?(막 14:36) 

*답: 거두지 않으시는 것이 응답이었다. 그래서 구속이 이루어졌다.

5. 하나님 뜻은 어떤 것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합니까? 이것은 무엇을 생각하게 합니까?(막 14:49) 

*답: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건으로도 이루어진다. 

6. 베드로는 관저 밖에서 거짓을 증거했지만 이것도 무엇을 증거하고 있습니까?(막 14:72) 

*답: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했다.

 

결론: 모든 사건은 마지막을 향한다. 그분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여시고 당신의 피로 세우실 새 언약을 주셨고 한 여인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 장례를 준비하였다. 예수는 홀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지만 제자들은 함께하지 못했다. 인간은 악을 행하고 제자들도 모두 떠나갔지만 주님은 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군중의 조롱과 제자의 배신도 그분의 사랑과 메시아이심을 보여준다. 

 

9월 8일(일) 기억해야 할 사랑 

 

마가복음 14:1~11을 읽어 보라. 여기에는 어떤 두 가지 이야기가 얽혀 있으며,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막14:1~1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답: 향유 부은 여인의 이야기와 가룟유다의 배반의 이야기가 대조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자의 이야기는 선한 일을 한 것이고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좋은 기회를 찾았다. 

 

마가복음 14:1은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 모임은 아마도 그 주의 화요일 밤이나 수요일에 있었을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벌써 계획과 시기를 정해 놓았다. 단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일어날 것이었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다섯 번째 샌드위치 구조의 이야기이다. 예수님에 대한 음모의 이야기는 그분의 머리에 귀한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상응하는 두 인물의 상반된 행동이 역설적인 대조를 이룬다.

마가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예수님께 드린 그녀의 놀라운 선물은 주님을 배신한 유다의 비열함과 대조를 이룬다. 여인은 이름이 없고,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녀가 드린 선물의 가치는 기록되지만, 유다의 대가는 돈을 받기로 한 약속뿐이다. 

그녀가 왜 이렇게 했는지 뚜렷한 이유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식사에 참석한 손님들은 1년 치 임금에 가까운 비용을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데 허비하였다며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서서 그녀를 변호하시며 복음이 전해지는 온 세계에서 그녀가 한 일이 기념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이 여인이 한 일은 잊혀질 수 없는 사랑의 행동이다. 실제로 어떤 형태로든 사복음서 모두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그녀의 행동을 기념하신 그분의 말씀 때문일 것이다. 

유다의 배신 역시 잊혀지지 않는다. 마가복음은 그의 동기가 탐욕이었음을 암시하고, 요한복음은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요 12:4~6).

마가는 이 이야기에서 두 가지 다른 동기 혹은 음모가 작용하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선/좋은'이라는 단어의 언어유희를 사용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4:6에서 여인의 행동을 "좋은"일이라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언제라도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하신다(막 14:7, 흠정역). 예수님은 14:9에서 이 여인의 행위가 "좋은 소식/복음"에 포함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4:11에서 유다는 예수를 배반할 "좋은 기회"(쉬운말성경)를 엿본다. 이러한 언어유희는 메시아를 죽이려는 인간의 음모조차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때문에 실제로 복음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교훈> 예수님께 드린 여인의 선물은 주님을 배신한 유다의 비열함과 대조를 이룬다.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은 기억될 것이며 유다의 잘못도 후세가 기억할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님께 향유 부은 일은 헌신의 모범이 되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몸이 깨어질 때 생명의 향기가 온 우주에 퍼졌다. 우리고 그 향기를 맡고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었다. 이 여자는 요한복음 12장에 의하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임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7장에서는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표현했다(눅7:36~50). 공관복음에서눈 이 여자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밝혔다. 그는 소문난 죄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순복하는 여자가 되었다. 시대의 소망을 읽어보면 이 여자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 여자는 요한 8장에 기록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는 아니다. 많은 재리교인들이 이것을 혼동하는 것 같다. 예수님 생애롤 시간별로 분석한 복음 조화(본교주석 5권 부록에 있다.)를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요한 8장 사건 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섬기는 여자(눅8:1~3) 중에 그 이름이 있다. 요8장은 눅8장보다 거의 1년 후의 사건이다. 아무튼,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성도들은 이 여자의 믿음을 어떤 면으로든지 본받으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도 헌신으로 향기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고후2:14~16).

 

9월 9일(월) 마지막 만찬

 

마가복음 14:22~31과 출애굽기 24:8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막14:22~31]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출24:8]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답: 마지막 만찬을 잡수시고 예식을 제정해주시며 옛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으로 새언약을 세우셨다. 

 

마가복음 14:12은 이날이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무교절의 첫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목요일 저녁에 이루어진 이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기념 예식을 세우신다. 이는 유대인의 유월절 예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출애굽기 24:8에서 모세는 언약을 체결할 때 백성에게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라고 말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주의 만찬에는 유월절 식사의 어린 양이 없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기 때문이다(요 1:29). 주의 만찬의 떡은 그분의 몸을 상징한다. 새 언약(렘 31:31~34)은 예수님의 피로 인치심을 받았고, 만찬의 잔은 이것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만찬 도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두 당신을 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그는 스가랴 13:7을 인용하여 칼이 목자를 치고 양들이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목자시고 제자들은 양이다. 적나라하고 우울한 말씀이지만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예언을 다시 나누시며 소망의 말씀을 더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 예언은 마가복음 16:7에서 예수님의 무덤에 있던 청년에 의해 언급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 둘 부분이다. 

이 모든 것은 제자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힘든 일이며 특별히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엄중한 어투를 이어가시며 베드로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당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심문과 베드로의 부인 장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기에 여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훈> 성만찬은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던 것처럼 예식을 통해 어린 양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피로 새로 세우신 언약을 의미한다. 

 

<부가설명> 이 마지막 만찬은 새언약을 세우신 의미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을 더욱 확실하게 믿고 기대하게 하는 예식으로 주셨다(소망 659,660). 예수께서 유월절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먹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을 버려 죽으신다는 것을 뜻하고 잔을 나누신 것은 피를 흘려 죽으시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성소 봉사에서 희생 양을 잡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리게 한 것의 실제적 성취를 나타낸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후에는 이 지상 성전에서 속죄 봉사를 하지 않는다.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이 세상의 성전은 속죄 봉사에 더는 필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는 아론 계통의 제사장의 필요는 끝났고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시고 하늘 성소에게 봉사하실 것을 선포한 것이다. 휘장이 찢어진 것이 성소 봉사 자체가 없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분명히 계시한 기록이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하늘에서 봉사하신다는 말은 세상 성소에서 봉사하던 대제사장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표상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하늘 성소 봉사를 수행할 제사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히8:4). 예수님은 당신의 피로 새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확인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인을 치셨다. 

 

9월 10일(화) 겟세마네 

 

마가복음 14:32~42을 읽어 보라.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고, 그 기도는 어떻게 응답받았는가?

[막14:32~4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답: 예수께서 잔을 면해주시기를 기도했으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원했고, 아버지의 뜻대로 잡히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를 했던 예루살렘성을 떠나 기드론 계곡을 건너 감람산 기슭에 있는 동산으로 향한다. 겟세마네라는 이름은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으로 근처에 올리브유를 가공하는 압착기가 있었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서기 70년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 감람산의 모든 나무를 베어버렸기 때문에 이전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다.

예수님은 동산에 들어가시면서 제자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좀 더 들어가신다. 그러다가 이 세 사람도 남겨두고 예수님 혼자서 더 멀리 가신다. 이러한 공간의 분리는 예수께서 다가오는 고난을 마주하면서 점점 더 혼자가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제거해 주시기를 구하지만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신다(막 14:36). 예수님은 아람어 아바(Abba)를 사용하셨는데, 마가는 이를 "아버지"로 번역했다. 이 용어는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아빠"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녀가 아버지를 부르는 데 사용한 용어는 아비(abi)였다(레이몬드 브라운, Raymond E. Brown, The Death of the Messiah, Anchor Bible Reference Library, 뉴욕, 1권, 172). 그래도 아바, "아버지"라는 용어의 사용은 가까운 가족의 유대관계를 의미하므로 이것을 축소시켜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고난의 잔을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신다(마 6:10과 비교). 수난 이야기의 이후 부분에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아니오'인 것이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세상에 구원이 주어질 것이기에 고난의 잔을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

고난의 때에 지지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빌립보서 4:13에서 바울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울이 바로 그 다음 절에 어떻게 말하였는지 주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나의 고난을 함께 나누었으니 잘하였도다"(흠정역)라고 기록한 것을 보라. 이것이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위로를 바라며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오셨다. 세 번 내내 제자들은 잠자고 있었다. 결국에 그분은 제자들을 깨우시고 당신을 기다리는 시험을 대하러 함께 가자고 하셨다. 그분은 준비되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교훈> 그분은 고난의 잔을 거두어 주기를 기도했으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셨다. 겟세마네의 여정이 분리를 상징하듯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피땀을 흘리셨다. 그분의 고뇌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예수님은 왜 피땀까지 흘리셨을까? 십자가의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일까? 그분은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당하실 고난을 말씀하셨다. 죽임 당하실 것을 다 아셨다. 뿐만 아니라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도 다 아셨다. 그런데 겟세마네에서 이것을 잊어버리셨을까? 닥칠 고난에 압도되었을까? 성경에 설명이 없으므로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자리에 사탄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끝까지 괴롭혔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면 사탄은 자기 머리가 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죽으시는 것을 한사코 막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바로 하늘로 가시면 사탄은 승리한다. 그러니 겟세마네에서 사탄은 예수님을 죽지 않고 승천하도록 충동했을 것이다. 그러면 사탄의 승리다. 이것이 예수님이 피땀나도록 한 본질이 아니었을까? 사탄은 예수님께 ‘너는 네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과 동등한 존재인데 왜 아들 신분을 가지고 그분의 뜻대로 하려고 하는가? 그대로 하늘로 가서 아버지와 동등한 자리에 앉으라고 충동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것을 견디는 것이 피땀흘리도록 힘드는 일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마침내 아버지 뜻대로 응답하셔서 그가 그 극심한 시험을 이기셨다. 감사합니다.

 

9월 11일(수) 다 버리고 예수에게서 도망하니

 

마가복음 14:43~52을 읽어 보라. 구원의 계획에 매우 중요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막14:43~52]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답: 예수께서 제자의 고발로 앞잡이 노릇으로 잡혀가셨다.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동료 중 한 명이 그분을 배신하고 대적에게 넘겼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복음서는 유다의 동기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다는 본래 돈에 대하여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런 일을 할 만큼 항상 부패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악한 탐욕의 정신을 길러서 마침내 그것이 그의 생애의 동기를 지배하게 했다. 돈에 대한 애착이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을 능가했다. 그는 한 가지 죄의 노예가 됨으로 인해 자신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같이 깊은 죄에까지 빠지게 되었다"(시대의 소망, 716).

배신한다는 자체가 모든 사람에게, 심지어 배신자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도 개탄할 일이다(마 27:3~7). 그러나 유다의 행위는 우정을 가장하여 자신의 배신을 감추려 했기 때문에 특히 더 사악하다. 그는 폭도들에게 자신이 입맞춤한 사람을 체포하라고 알려준다. 유다는 자신의 배신을 예수와 다른 제자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것 같다.

무리가 예수를 붙잡자 소동이 일어난다. 누군가 칼을 뽑아(요한은 베드로라고 기록했다. 요 18:10, 11)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군중을 가르치실 때 공개적으로 행하기 두려워했던 일을 이제 이렇게 은밀하게 행한 것에 대해 꾸짖으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으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하시며 말씀을 마치신다. 이것은 수난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중의적 계획, 즉 메시아를 없애려는 인간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또 다른 장면이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모두 도망친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나타나 멀리서 예수를 따르다가 결국 곤경에 빠지게 된다. 

도중에 예수님을 따르는 한 청년의 이야기가 마가복음 14:51, 52에 나오는데, 이 이야기는 마가만 기록하고 정경 복음서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청년이 마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벗은 몸으로 도망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대신 이 청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에게서 도망친다. 

 

<교훈> 메시아를 없애려는 인간의 뜻을 통해서 수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 뜻이 성취되고 있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떠나갔다. 

 

<부가설명> 가룟유다는 어두운 밤에 예수님을 놓지지 못하게 하려고 예수님을 모르는 군병들에게 확실히 가르쳐줄 방법을 예수께 입맞추어 확인하게 했다. 어쩌면 그날 달이 밝았을 수도 있다. 유월절은 음력 14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수님을 본 일이 없는 군병들이 예수님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입맞추어 그가 예수라는 것을 확인해준 것이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왕이 되기를 극도로 기대했을 것이다. 제자들 중에 남방 유다 출신을 가룟유다뿐이다. 가룟이라는 말의 뜻을 칼을 가진자, 즉 자객이라고 해석해서 그가 살인하는 유다라고 풀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요6:71을 보면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라 했는데, 가룟이라는 말이 유다의 아버지 이름에 붙었다. 가룟유다가 배반하고 팔았으므로 가룟을 자객을 이해하여 유다가 자객이었다고 말한다면 이 구절을 잘못 쓴 것이 된다. 그러므로 가룟인이라는 말. 즉 가룟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가룟유다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예수님을 왕이 되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될 궁지로 몰아가서 자기가 살기 위하여 그 큰 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곳에 몰아넣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능력을 쓰지 않고 잡혀가 정죄되는 것을 보고 자기 계획이 잘못 된 것을 알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마27:4)고 휘회했으나 아무소용없는 후회가 된 것이다. 우리는 자기 유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이용한다면 또 하나의 가룟유다가 될 것이다. 

 

9월 12일(목) 너는 누구냐

 

마가복음 14:60~72을 읽어 보라. 베드로의 반응과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이 사건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비교해 보라. 그 차이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마14:60~72]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답: 예수님은 심문에서 진실을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을 세 번 거짓 증언을 했다.

 

마가복음 14:53~59은 예수께서 산헤드린으로 끌려가 심문받으시는 첫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계속된 심문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지만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예수를 정죄하려고 노력한다. 복음서 기자는 그 증언들이 거짓이고 증거들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마침내 대제사장이 직접 나서서 예수님을 심문한다. 그분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신다. 이에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게 하고(마 26:63), 그분이 메시아이신지 직접 질문한다. 예수님은 분명하고 공개적으로 자신이 메시아라고 인정하신 후 다니엘 7:13, 14을 인용하여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늘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대제사장은 이 말을 감당할 수 없어서 분노하여 자신의 옷을 찢고, 유죄를 선언하며 공회는 즉시 정죄를 내린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침을 뱉으며, 얼굴을 가리고, 때리면서 예언을 해보라고 놀리며 예수님을 모욕하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안에서 심문받으시며 진실하게 증언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밖에서 다른 이들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샌드위치 구조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평행하는 두 인물의 역설이 특별히 두드러진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진실하게 증언하고 베드로는 거짓을 증언한다. 베드로는 세 번 하인이나 구경꾼의 질문을 받고, 그때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심지어는 저주와 욕설까지 한다. 

이때 수탉이 두 번째로 울었고 베드로는 그날 밤 자신이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문득 생각났다. 그는 무너지고 울었다. 여기에 놀라운 역설이 있다. 

심문이 끝날 무렵 예수님은 얼굴이 가리우고 매를 맞으며 예언해 보라는 말을 듣는다. 누가 때리는지 볼 수 없게 하고 그분을 조롱하려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베드로는 아래 뜰에서 주님을 부인하며 예수님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써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준다.

 

<교훈> 심문 앞에 그분은 진실하게 증언하셨다. 이에 군중이 예언해 보라고 조롱할 때, 베드로는 밖에서 거짓으로 증언하지만 그조차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보여준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가야바와 산헤드린 앞에서 그들이 예수께서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아직도 오시지 않았고 심문하던 그때 사람들은 다 죽었다. 그들이 예수님 재림을 보려면 불가불 부활해야 한다. 요한은 계1:7에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예수님을 찌른자들고 예수님을 볼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들은 다 죽었다. 그런데 어떻게 재림광경을 볼 것인가? 그래서 다니엘 12:1,2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계시하여 첫째 부활도 아니고 둘째 부활도 아닌 부활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부활한 사람 중에 영생 얻는 자도 수욕 받아 무궁히 수치 당할 자도 있다고 했다. 같이 부활하는데 한쪽은 영생 한쪽은 수치를 당한다. 이것을 특별 부활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부활의 유형은 첫째 부활, 특별 부활, 둘째 부활, 세 유형이 있는 것을 계시했다. 예수께서 심문받으실 때 하신 말씀, 예수님을 심문하고 정죄한 사람들이 예수님 재림을 볼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특별부활 해서 무궁히 수치당할 사람들이다. 계1:7에는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하여 예수님을 찌른 자들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볼 것이라고 했다.

 

9월 1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75장 “안나스와 가야바의 관저 앞에서,” 76장 “유다”를 읽어 보라.

“비열한 저주의 말이 베드로의 입술에서 발해지며 새벽 닭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아직도 그의 귀에 울리고 있을 그때에 구주께서는 얼굴을 찌푸린 재판관들로부터 얼굴을 돌려 그분의 가련한 제자를 유심히 바라보셨다. 동시에 베드로의 시선도 주님을 향했다. 그 부드러운 얼굴에서 그는 깊은 연민과 슬픔을 볼 수 있었을 뿐 분노는 전혀 없었다.

창백하고 고통에 차 있는 얼굴과 떨리는 입술과 동정과 용서의 정이 서린 그분의 모습은 화살처럼 그의 마음을 찔렀다. 양심은 일깨워졌다. 기억은 되살아났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옥에나 죽는 곳에라도 가겠다고 했던 불과 몇 시간 전의 자신의 약속을 회상했다. 구주께서 다락방에서 그날 밤에 그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신이 슬퍼하던 일을 기억하였다. 베드로는 방금 예수님을 모른다고 선언하였으나, 이제 그는 비통한 슬픔 속에, 주께서 그를 얼마나 잘 아시며, 자신도 알지 못하였던 거짓된 마음을 얼마나 정확하게 아셨는지를 깨달았다"(시대의 소망, 712).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마가복음 14:9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주어진 상황을 생각할 때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는 그분의 또 다른 예언이 어떻게 실제로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는가? 

*답: 나드를 부은 사건을 두고 하신 말씀은 지금도 그대로 성취된다. 가야바와 회원들에게 하신 말씀도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2.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하고 대조해 보라. 수난 이야기에서 그들의 행동은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또 무엇이 달랐는가?

*답: 배반한 사실은 비슷하고 회개하는 것에서는 전혀 달랐다.

3. 성만찬의 의미에 대해 토의해 보라.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에서 성만찬을 더 의미 있게 만들고 더 많은 신자들이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답: 각각 말해보자. 성만찬은 죽으심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재림을 확인해준다.

4. 겟세마네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거절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토의해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 거절은 다른 성취이다. 

5.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함으로 그분을 크게 실망시켰지만 예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이 사실에서 당신은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답: 우리도 회개하면 언제나 받으시고 일을 맡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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