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중심 주제: 사랑인가? 이기심인가? (질문, 대답, 설명) 04/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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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4-04 22:15 조회3,556회 댓글0건본문
제2과 중심 주제: 사랑인가? 이기심인가?
(4월 1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5분)
연구 범위: 눅 19:41~44; 마 23:37, 38; 히 11:35~38; 계 2:10; 행 2:44~47; 요 13:35.
기억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당신이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에서 양을 치는 양치기라고 생각해 보자. 저기서 목소리가 들린다. 이건 예수님의 음성이 분명하다. 석양이 성전을 비추며 눈처럼 하얗고 웅장한 대리석 벽에 반사될 때 그분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제자들이 혼란스러웠던 것처럼 당신도 어리둥절하다.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 말씀은 제자들이 질문한 세상의 끝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질 사건들을 그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사건들과 함께 능숙하게 엮어서 말씀하시는 것을 몰입하여 듣는다.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고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전략의 전조를 본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 그리고 그것과 같은 맥락으로 전개될 마지막 날 사건을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을 속이고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두 가지 전략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사탄은 박해를 통해 이루지 못한 것을 타협을 통해 이루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고 계신다
*학습 목표
깨닫기: 사탄은 이기심으로 속이고 압제하나 하나님은 사랑으로 승리하게 하신다.
느끼기: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본질은 그들이 보이는 사랑에서 나타남을 느낀다.
행하기: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고 돌보는 사랑을 실천한다.
TMI 위로
2. 예수님이 경고하시는 주제는 그것이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까?(요 5:40)
*답: 영생을 얻는 길이다.
3. 사탄의 공격으로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어떻게 보호하십니까?(계 2:10)*답: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하신다. 생명의 면류관이 보장되어 있다.
4. 사탄의 가장 심한 공격에도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행 9:31)
*답: 사랑을 삶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또 부활의 생명을 확실히 드러냈다.
5. 초기교회는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으며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행 2:44~47)
*답: 복음 전파와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6.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요 13:35)
*답: 예수께서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7. 악인의 손에 의인이 핍박받는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그 일로 일석양득을 보인다. 성도의 신앙을 굳게 하고 그것을 보고 불신자가 예수님을 찾아오게 하는 것이다.
결론 사탄은 박해와 타협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고 멸망시키려고 한다. 사탄의 공격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하나님은 섭리로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문제를 도와주신다.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통해 초기 교회는 어려운 시기 가운데도 성장했다. 그들이 보여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이다. 그들의 사랑은 핍박 가운데도 퍼져 나가고 더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4월 7일(일) 상한 마음의 구세주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에 앉아 계셨을 때 그분의 마음은 상심하셨다. 요한복음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요 1:11)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그들의 사랑하는 성 예루살렘의 멸망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셨다. 자기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마음에서 흘러나왔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하고 당신의 은혜와 자비로운 초대를 받아들이라고 사랑으로 거듭 호소하셨다.
누가복음 19:41~44, 마태복음 23:37, 38, 요한복음 5:40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백성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 그리고 은혜와 자비가 가득한 그분의 사랑의 초대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여기에 하나님의 성품은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마23:37,38]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요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답: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다. 백성들은 예수님께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예루살렘의 멸망과 같은 일은 이해하기 어렵다. 역사는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수만 명이 죽었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남자, 여자, 아이들이 학살당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답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나님의 마음은 깨어졌다.
그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분은 당신의 백성에게 손을 내미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인자하신 사랑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백성이 선택한 결과를 바꾸기 위해 항상 개입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그들의 반역에 따르는 결과가 그대로 나타나도록 두신다. 예루살렘의 멸망 가운데 무고한 어린이들의 학살을 초래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무고한 백성들의 비극적인 죽음은 사탄의 소행이다.
전쟁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가장 악한 정욕을 북돋기 때문에 사탄은 전쟁을 좋아한다. 사람들을 기만하고 파괴한 뒤에 자신의 악행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게 하는 것이 인류 역사에 걸쳐 진행되어 온 사탄의 계획이다.
마태복음 24:15~2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어떤 지침을 주셨는가?
[마24:15~20]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답: 멸망의 징조를 보거든 예루살렘을 떠나서 피하라고 지침을 주셨다.
서기 70년 당시 예루살렘에 살았던 그리스도인 대다수는 유대인이었다. 사랑의 하나님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로마 군대가 다가오면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지시를 주셨다.
<교훈> 하나님은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셨다. 말씀을 따른 이는 구원을 얻었지만, 인자하신 사랑을 거역한 이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잃어버렸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것은 교과 저자의 말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의문을 보인다. 이 의문에 관하여 성경적으로 적절한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질문의 배후에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며?’라는 의식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의 처지에 대하여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자기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의식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나아가서는 부인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하나님은 아담에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의 내용 중에 아담 편이 이행해야 할 조건이다(호6:7).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했는데(요일2:25)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행하실 조건이다. 그런데 아담이 그의 조건을 어겼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없는 자리로 가버렸다. 그래서 아담과 그의 자손은 본질상 죽은 자가 되었다. 출생하면서 삶과 동시에 죽음이 시작된다. 사람은 자기의 이런 상태를 인식하지 못한다. 살아 있는 줄 착각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죽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이다. 그런데 사랑이시며 생명이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다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독생자를 대신 죽게 하시며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사랑을 깨닫지 못한닫.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한다. 하나님은 하실 일을 다 하시고 이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고대하신다.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신다. 그때 학살도 오고 비극적 죽음이 닥친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19)라고 하셨다.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은 사망이 갖다주는 것이다. 재림성도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4월 8일(월) 섭리로 보존된 그리스도인들
예루살렘 멸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은 하나님의 자비, 은혜, 섭리와 예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와 로마 군대가 도시를 포위했다. 로마군의 공격이 임박해 보였지만 뜻밖에도 그들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유대 군대는 도망하는 그들을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유대인들이 철수하는 로마인들을 추격할 때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요단강 건너의 베뢰아 땅 벨라로 피신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던 약속된 징조가 주어졌다. 구주의 경고를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때가 절호의 기회였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로마인을 막론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도망하는 일을 막을 수 없도록 사건들을 그렇게 주관하셨다"(각 시대의 대쟁투, 30).
시편 46:1과 이사야 41:10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돌보시는 섭리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시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답: 하나님만이 그의 백성의 가장 안전한 피난처시오 두렵고 놀라지 않도록 도우시는 분이심을 확인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시며 당신의 거룩한 뜻을 궁극적으로 성취하시기 위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에 따라 때때로 계획을 변경하기도 하시지만, 이 땅에 대한 그분의 궁극적인 계획은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과 핍박, 투옥과 죽음까지 경험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악랄한 공격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를 돌보시고 보호하신다.
히브리서 11:35~38, 요한계시록 2:10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악의 세력과 우리의 싸움의 실태를 어떻게 나타내는가? 이 구절들은 위 질문에서 살펴본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이해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스러운 시련과 심지어 순교자로 죽는 것까지 허락하신다는 개념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폭력으로 그리스도 교회를 멸하려던 사탄의 노력은 허지로 돌아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명을 바친 대쟁투는 그 충실한 기수(旗手)들이 자기의 담당 구역에서 싸우다 쓰러졌을 때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패배로 정복하였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죽임을 당했지만 그분의 사업은 꾸준히 전진했다"(각 시대의 대쟁투, 41).
<교훈>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시며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의 일들을 다스리신다. 사탄의 공격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그분은 교회를 돌보시고 보호하신다.
<부가설명> [히11:35~38]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계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답: 세상은 사망이 지배한다. 그리스도인도 이 지배 체제 안에 생활한다. 사망은 생명의 존재를 미워한다. 그래서 고통받는다.
1과에서도 말한 사실인데, 고통은 사망에게 속한 성질들이다. 아담의 후손이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런 고통에서 그들을 행복으로 옮기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것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라고 계시했다. 한 가지 조건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대신 고통당하시고 사람들을 예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시 깨문이다(요5:24). 사랑의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조치를 해놓은 것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예수님 재림하실 때 이것이 현실이 된다. 그때까지 아직도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사망읭 손길을ㄹ 면할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과 아픔을 알고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자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실재를 기록할 수 있었다.
4월 9일(화) 박해 가운데 충성함
기독교 초기 역사 수 세기 동안 교회는 투옥, 고문, 박해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신실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했고, 개개인의 삶이 변화되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회심했다.
사도행전 2:41, 4:4, 31, 5:42, 8:1~8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신약 교회가 직면했던 도전과 그들이 그토록 빠르게 성장한 이유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행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4:4,31]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행8:1~8]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답: 죽음을 무릎쓰고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고 성령의 강림하신 능력을 몸소 받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위협(행 4:17), 투옥(행 5:17, 18), 박해(행 8:1) 그리고 죽음(행 7:59, 12:2)까지 직면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선포했고, 유대와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 전역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행 9:31).
음부의 뿌리가 흔들리고, 사탄의 족쇄가 깨어졌다. 이교의 미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 앞에 무너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련 속에서도 복음은 승리했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나와서 담대히 복음을 외쳤다. 물러가는 어둠처럼 두려움은 걷히고 제자들의 마음은 믿음으로 가득 찼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본 것만으로 제자들의 삶은 변화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이유를 주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상명령(막 16:15)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
복음이 땅의 가장 먼 곳까지 뻗어 나갔다(골 1:23). 마지막 제자 요한은 1세기 말에 죽었지만, 다른 제자들이 진리의 횃불을 받아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현대 튀르키예 북부 해안에 위치한 로마 속주 비티니아의 지방 총독 소(小) 플리니우스는 서기 110년경 당시 로마 황제였던 트라야누스에게 보고한 글에서 그리스도인을 찾아내 처형하기 위해 진행했던 공판에 대해 기록했다. 이 글은 십자가 이후 거의 80여년이 지난 시점의 기록이란 점에서 특히 의미가 있다.
"모든 연령과 계층, 남녀를 막론한 많은 사람이 고소를 당해 위험에 처해 있으며, 이런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 미신[기독교]의 전염성은 도시뿐만 아니라 마을과 시골 지역에도 퍼져 있습니다"(헨리 베튼슨, Henry Bettenson,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뉴욕 2011, 4),
마귀의 가장 사악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교훈>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부활을 믿고 지상명령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간 그들은 능력 있게 말씀을 선포하였고 수만 명이 회심했다.
<부가설명> 생명은 활동능력이다. 생명이 미약하거나 생명을 잃으면 당연히 활동이 멈추어진다. 사람을 활동하게 하는 것은 그의 생명, 생명력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이고 또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자라고 확언하셨다(요14:6, 10:10).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만나서 40일간 같이 생활하셨다. 그 기간에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확실히 가르치셨고 제자들은 깨달았다(행1:1,2). 그리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오순절에 성령께 강림하셔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그 생명의 능력을 활용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성경의 신앙은 예수 생명 활동 신앙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고 했다(요일5:11,12). 교회가 활동의 힘이 없는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 현상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두었다. 그리고 사람끼리 교회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니 말씀 생명의 능력은 없고 인간 노력의 행위로 일을 하려고 한다. 생명이 아주 미약한 상태다. 진정한 진리를 깨달으므로 생명력이 활성화 되지 않으면 생명력의 활동이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진정으로 예수 생명으로 생활하고 활동하는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4월 10일(수) 지역사회를 보살핌
초기 기독교 교회는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성장했다. 신자들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마 4:23)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모범으로 삼았다. 예수님은 깊은 관심으로 사람을 대하셨고, 초기 신약시대의 교회도 같은 연민을 나타냈다.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이타적인 사랑과 헌신이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과 함께하여 초기 기독교 교회는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도행전 2:44~47, 3:6~9, 6:1~7을 읽어 보라. 상황은 다양하지만, 이 구절에서 진정한 그리스도교에 관한 어떤 원칙을 배울 수 있는가?
[행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3:6~9]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행6:1~7]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답: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생명이 되어 생활로 드러난 것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을 선한 일이라고 했다.
신약의 신자들은 베드로가 표현한 대로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는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랐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상에 있는 그분의 몸이었기에, 교회 역시 초기부터 상처받고 부서진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관심을 나타냈다. 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산 표본이었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대쟁투 가운데 마귀는 인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고자 한다. 복음의 사명은 인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회복에는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치유가 포함된다.
요한복음 10:10에서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주님은 우리의 육체가 건강하고, 마음이 깨어 있으며, 정서가 안정되고, 영적으로 온전하기를 원하신다.
이는 주님이 약속하신 재림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렇다. 이 세상은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언은 그분의 재림 전에 지구에 닥칠 재앙을 예고한다.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시는 은혜로 우리를 도와주실 때 우리도 그리스도의 손길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만져주어 그들도 온전해질 수 있기를 갈망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리를 무너진 세상에 보내신다. 초기 교회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공동체를 돌보는 사랑에서 잘 나타났다.
<교훈> 초기 교회는 복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성장했다. 교회는 상처받고 부서진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는 산 표본이었다.
<부가설명>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실체가 무엇인가? 교회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자고 열심히 가르친다. 그것을 성화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화라는 표현을 하면 이것은 도덕적 종교적 성질이 거룩하게 되도록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교회는 이 변화를 주장하시는 것은 자기의 노력이 아니고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도 그것은 막연하다. 그것이 흥분과 열심히 나타나는가?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은 성령께서 그에게 임할 때 그도 예언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울도 선지자인가’라는 속담을 만들 정도였다(산상10:10,11, 19:20~24). 그런데 그것은 지극히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그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성령께서 그에게 역사했어도 그의 근본이 변하지 않은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지 않은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영감이 강한 곳에 가면 사람들이 그 분위기 영향으로 그런 현상이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진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4:8,16). 그 사랑이 회복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 사랑이 어떻게 회복되는지 계시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때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이 신자의 생명이 되면 예수님의 사랑이 생활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4월 11일(목) 사랑의 유산
요한복음 13:35과 요한일서 4:21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대쟁투 가운데 사탄이 하나님의 정부에 대해 제기한 도전에 대해 무엇이라고 대답하는가?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일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답: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처음 몇 세기 동안 기독교 공동체의 규범은 사랑이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nanus)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고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사람들은 ‘이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를 보라’고 말한다"(테르툴리아누스, 변증 39장).
그리스도인이 나타낸 하나님의 사랑은 서기 160년과 260년경 두 차례의 참혹한 전염병이 닥쳤을 때 가장 강력하게 증거되었다. 그들은 앞장서서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았다. 이 전염병으로 수만 명이 사망하고 마을과 도시 전체에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때에 보여준 그리스도인들의 이타적이고 희생하는 모습, 사랑이 넘치는 봉사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천 명, 그러다가 수십만, 수백만 명의 로마 제국 사람들이 이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예수를 믿게 되었다. 사랑과 적극적인 관심, 병자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잘 준비된 이타적인 보살핌은 이 신자들과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기독교의 발흥”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새롭고 개선된 관점으로 묘사한 현대 역사서이다. 이 책에서 스타크는 전염병의 2차 대유행 당시 여전히 유대-기독교인 비중이 높았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어떻게 사실상 간호인 부대가 되어서 고통받는 지역사회가 살아남는 데 필요한 중요한 도움을 제공했는지 설명한다.
두 번째 대유행이 한창이던 서기 260년경,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다 목숨을 잃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영웅적인 간호 활동에 대한 장문의 찬사를 기록했다.
"우리 기독교인 형제들은 무한한 사랑과 충성심을 보여주었으며 한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방을 돌보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도맡아 그리스도를 힘입어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로부터 전염 되었지만 이웃의 아픔마저 기꺼이 끌어안고 기쁨으로 고통을 감내했습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좋은 씨앗, 129).
<교훈> 전염병이 창궐하는 동안 그리스도인이 보인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랑과 관심,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이타적인 보살핌은 그들이 전하는 사랑을 믿게 만들었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생명은 봉사의 생활로 사람들에게 드러났다. 그분에게 가는 사람은 먼저 육신의 생명력이 풍성하게 회복되었다. 결과는 당연히 건강이 회복되고 활동이 활발해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려면 봉사할 힘이 필요하다. 생명력이 탁월해야 한다. 등산하다가 사고 당한 사람을 데리고 내려오려면 그 사람은 능히 사고당한 사람을 데리고 내려올 힘이 있어야 한다. 요즘은 구조대에 연락하면 되겠으나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봉사할 수 있는 실력이 없으면 못한다. 그 실력의 첫째가 강한 생명력이다. 봉사 대상을 따라 실력이 다른다. 무식한 사람을 봉사할 사람은 유식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봉사하려면 봉사할 재물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얻은 영생하는 생명이다. 전염병에 감염이 되어서 같이 죽게 되어도 평안했던 것은 부활과 영생의 생명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로 확인하고 확신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과 하나님은 생명이시라는 말은 같은 뜻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와 정말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생활이 이루어지도록 생명의 성령께서(롬8:2) 역사해주시기를 기도하자.
4월 1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복음은 끊임없이 전파되었고, 믿는 자의 수효는 더욱더 증가되었다. 복음은 로마의 독수리 군기(eagles of Rome)조차도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박해를 멈추지 않는 이방인 통치자에게 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엄중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를 죽이고 고문하고 정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의롭지 못한 당신의 처사야말로 우리가 무죄하다는 증거이다. …당신들의 잔인함은 당신들을 이롭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박해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어 들이는 더욱 강한 초청이 될 뿐이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목 베임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의 수효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피는 씨다’”(각 시대의 대쟁투, 41).
“악인의 손에 의인이 핍박받는 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는 믿음이 연약한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가져다준 문제였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몹시 악한 자들은 번영케 하시면서 선하고 순결한 사람들은 괴로움을 당하게 하신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버리려고까지 한다. 공의롭고 자비하시고 무한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와 같은 불의와 압제를 묵인하실 수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조금도 염려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섭리의 역사를 깨달을 수 없다고 하여 그분의 자비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각 시대의 대쟁투, 47).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고난이 주는 가치는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때때로 당신의 백성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초기 교회의 경우처럼 어떤 경우는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때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은 이런 때 신앙을 유지하는 데 있어 왜 중요한가?
*답: 고난은 사망의 세상의 본성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이길 방패가 되신다.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방패의 손을 잠깐 떼신다는 뜻이다. 그것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 확신이 강해질 것을 아실 때 허락하시는 것이 아닌가?
2. "나는 지금 고통 속에 있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는 왜 이렇게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가?" 그대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답: 사망의 세상 자체가 고난의 골짜기라는(시23:4) 것을 깨달으면 하나님께서 방패를 잠깐 거두시는 뜻을 헤아려봐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늘 생명이 더 강해지도록 하는 수단이 되든지 고난에 삼켜버려서 자기의 실상이 어떤지 알게 될 것이다.
3.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돌보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가? 이번 주 교과를 적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을 토의해 보라.
*답: 달리 토의할 것이 있는가? 각 교회가 생각하고 답을 찾으면 된다. 답은 나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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