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창조주를 경배하라(질문, 대답, 설명) 05/13/23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7과 창조주를 경배하라(질문, 대답, 설명) 05/13/23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05-05 22:12 조회6,397회 댓글0건

본문

제7과 창조주를 경배하라

(5월 1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32분)

 

연구 범위: 계 1:9, 사 40:26, 고후 5:17, 골 1:17, 계 4:11, 요 19:16–30

 

기억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당연하게 여기는 것, 특별히 우리가 항상 알고 있거나 경험하는 일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가 쉽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짧은 생애 동안 알고 지낸 부모의 존재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우리 역시 태양, 하늘, 공기 또는 우리 발아래의 땅을 당연하게 여기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존재”라는 것 자체를 얼마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일상을 멈추고 저 유명한 철학적 질문인 왜 아무것도 없는 대신에 무언가가 존재하는지를 물어보았는가? 

애초에 우주 자체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장엄하고 놀라운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우주는 존재하는데 그 안에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커다란 논리적 모순이 일어날까? 최신 과학 이론(변하는 경향이 있음)에 따르면 우리 우주는 한때 존재하지 않았다. 즉, 우주 안의 우리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고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이다. 절대적인 무에서 우주가 발생했다거나, 일종의 수학 방정식에서 비롯되었다거나 하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하지만 우리 우주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존재한다.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는 구속주이시다. 

- 느끼기: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구원과 믿음의 모든 기초가 됨을 느낀다. 

- 행하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에게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TMI 위로

2.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특별히 어떤 자들을 자주 찾아오십니까? (계 1:9) 

*답: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과 환난을 당하며 곤곤한 상태에 있는 자들.

4. 거룩하고 존귀하신 하나님이 그대와 얼마나 가까이 계시다고 생각합니까? (요 17:23)

*답: 항상 함께 하신다. 

5.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또한 구속주라는 사실은 어떻게 연결됩니까? (골 1:13-17) 

*답: 구속은 재창조기 때문에 원리가 창조와 동일하다.

6. 첫째 천사가 마지막 시대에 창조주를 경배하라고 외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계 14:7)

*답: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세상이 창조주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 그 자체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답: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 공경은 효도라하고 창조주 경배는 신앙이라고 한다. 대상은 다르지만 사상은 동일하다. 

 

결론 하나님은 연약한 자와 함께하시고 어려운 가운데서 우리를 도우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는 거룩하고 존귀하신 분이시며 온 우주를 능력으로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사랑의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속하셨다. 진화론이 팽배한 시대에 세 천사의 기별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를 기억하고 그를 경배하라고 우리를 부른다. 

 

5월 7일(일)  고난에 동참하는 자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행 1:9) 예수님은 마지막 살아남은 사도, 요한을 찾아오셨다. 요한은 무자비한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요한계시록 1:9을 읽어 보라. 또 마태복음 13:21, 사도행전 14:22 그리고 요한복음 16:33을 참조하라. 여기에 나타난 이 세상에서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별은 무엇인가?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마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답: 환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게 견디고 예수님의 승리를 확보해야  한다.

 

가족, 친구, 기독교 공동체의 지지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진 요한은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환난과 근심을 홀로 감당하도록 버림받지 않았다. 그의 사역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증언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고귀한 방문자가 외로운 섬에 있는 요한을 찾아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온 소식을 직접 전했다. 예수님의 이 기별은 이후 세기에 걸쳐, 시간의 통로를 따라 울려 퍼질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세대를 위한 희망의 소식이지만, 특별히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위해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기별이었다. 그것은 마지막 때의(혹은 지금 겪고 있을 수도 있는) 모든 시련에 대한 심각한 경고인 동시에 격려의 기별이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환상과 함께 하늘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고 알려진 동굴에 가보면 그 입구에 요한계시록 전체를 요약한 다음 문구가 담긴 명판이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계 14:7).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는 예배이다. 우리는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우리모두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예배한다. 창조주를 경배하는 참된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바른 목적과 삶의 이유를 발견하게 해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목숨을 걸 만한 무언가를 줄 뿐만이 아니라, 더 의미심장한, 무엇을 위해 살며, 필요하다면 환난을 견뎌야 하는 이유를 준다. 

 그래서 실제로 마지막 위기가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고난받는 신자들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그와 함께 하신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을 위한 기별로 가득하다.

 

<묵상> 요한과 같은 충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과 핍박을 당했다면 우리 자신도 고난을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벧전 4:12~15 참조)

*답: 고단받는 이유는 사망이 다스리는 세상에 생명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살만한 환경에 살면 고난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살만하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면 고난은 필수적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의인이 된 사람이다. 의인이 죄의 소굴에 살면 죄가 계속 때를 묻히고 공격한다. 생활환경이 그렇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대기가 죄로 탁해졌고, 환경이 죄와 사망으로 변질되어 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리스도인도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죄와 상관없이 생활하려니까 예전에 살던 그것이 죄 아래로 끌고 가려고 한다. 새사람인 그리스도인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성령님을 강하게 의지하지만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 입고 있는 육신의 욕망과 쾌락과 안일로 끌고 가려고 하고 전에 익숙했기에 그 유혹이 강하다. 그래서 저항하는 새사람과 유혹하는 옛사람이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고통이 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그리스도인은 죄와 싸우는 고난에 동참하지만, 예수님의 승리 안에서 승리를 얻는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5월 8일(월) 창조주를 경배하라 

 

요한계시록 14:7을 읽어 보라. 첫째 천사의 기별은 어떻게 결론을 맺는가? 이 심판의 때의 기별은 어떤 최후의 호소를 하는가?(사 40:26, 요 1:1~3, 롬 1:20 참조)

[계14: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답: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호소한다. 

 

요한계시록 14:7은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분명한 요청으로 끝난다. 이 부름은 대부분의 과학계와 심지어 기독교계까지 성경과 기독교의 모든 것의 핵심을 타격하는 가르침인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오늘날 특별히 더 중요하다. 진화가 사실이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 문제가 얼마나 극명한지 말해준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호소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창조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배를 둘러싼 이 우주적 전쟁의 쟁점들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 구절은 모든 성경의 기초이다. 이 구절에서 "창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라(bara)로,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사용하는 동사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무한한지 조금이라도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 태양을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태양은 1초 동안에 인류가 태초로부터 석유, 가스, 석탄 또는 불로 생산한 모든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한다. 

태양의 직경은 약 139만 킬로미터이며 지구 크기의 행성 백만 개를 담을 수 있다. 그러나 태양은 우리 은하인 은하수에서 적어도 1000억 개가 되는 별 중 하나일 뿐이다. 피스톨별이라 불리는 별 하나는 태양이 만들어내는 힘의 천만 배나 되는 힘을 발산한다. 태양 크기의 별 백만 개가 피스톨별의 크기 안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창조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창조물은 놀라운 힘과 무한한 능력을 지닌 하나님을 나타낸다. 그분의 창조 능력은 하늘과 땅을 존재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여러 세기에 걸쳐 그분의 백성을 위해 역사하고 있다. 그분은 이 세상을 시작하신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에 항상 계시고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교훈> 첫째 천사의 기별은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분명한 기별을 준다. 그것은 전능하시고 무한하셔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요청이다. 

 

<적용> 광대한 세계 속에서 살면서 경험하는 창조 세계의 압도적인 위대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잘 이해하게 합니까? 

*답: 모든 필요를 다 마련하신 하나님의 배려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 사랑을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 

 

<부가설명> 땅은 사람이 살도록 창조하셨다(사45:18). 우주에도 지구의 사람과 같이 지성적인 존재를 창조하셔서 살게 하셨다(엡3:14,15, 히12:22,23, 욥1:6). 창세기에 의하면 지구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마지막 창조세계다(창2:1). 창조주께서는 우주의 만상을 창조하셨고 각각 그 이름을 다 부르신다(사40:26, 시147:4, 행17:14).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셨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19,20). 세상은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가 창조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사상은 진화론과 유물론이 세상을 휩쓸면서 더욱 확산되었다.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이 사상을 신봉한다. 오늘날 세상 문화는 이 조류다. 마귀가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해내는 상징적 계시는(계12:15) 문화와 사고조류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내려가게 하려고 한다. 오늘날 교회는 그렇게 떠내려가고 있다. 

 

5월 9일(화) 친밀하신 하나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그 놀라운 능력으로 지구를 창조하시고 생명으로 채우신 창조의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의 방랑길에서 인도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하시며 여리고 성을 무너트리시고 이스라엘의 대적을 무찌르신 하나님이시다. 우주를 창조하기 위해 무한한 능력을 나타내신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대항하여 싸우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그 무한한 능력을 베푸신다. 

 

고린도후서 5:17, 시편 139:15–18, 사도행전 17:27, 골로새서 1:17을 읽어 보라.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친밀함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시139:15~18]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행17: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골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답: 창조주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자세히 아시고 대하신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위에 저 높은 곳에 계신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떻게든 우리 세계 안에 존재하며 성경의 역사가 보여주듯 세세하게, 밀접하게 관여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주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시지만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이사야 57:15) 계신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분의 신실한 제자들과 대화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무엇도 이보다 더 친밀할 수는 없다. 

우리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소식은 그분의 위대함과 권능이 너무나 광대하여 우주를 건너 우리 각자의 삶에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다시 만들고 빚어내어 그분의 형상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키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 수십억 개의 은하계를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그 안에 ”살며 기동하며 존재”(행 17:28)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 그와 같은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

 

<교훈> 온 우주를 돌보시는 권능의 하나님이 지금 내 곁에 계시고, 기도를 친히 들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며 살고 움직이게 하신다.

 

 <묵상> 혹시 하나님이 당신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두렵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복음은 어떻게 당신에게 평안을 줄 수 있습니까?

*답: 그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면 사유의 은혜를 베푸시고 평안을 주신다.

 

<부가설명>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친다. 첫째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다음은 그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이 둘째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하시고 아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부모는 자녀가 많아도 다 개인적으로 알고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존재를 얻었다. 존재하게 한 부모는 자기에게서 존재한 자녀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관계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창조주 하나님도 피조물에 관하여 그렇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래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친히 창조한 우주의 천제들을 각각 그 이름을 아시고 부르신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40:26).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시147:4). 그분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이고 당연하고 합리적이다. 신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면(요1:12,13) 하나님은 참으로 아버지시고 아버지시기 때문에 각 신자를 개인적으로 아실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개인적으로 관심의 대상이다. 효도하지 않을 것인가?

 

5월 10일(수) 복음, 심판, 창조

 

영원한 복음, 심판의 시간, 창조주를 경배하라. 첫째 천사가 말한 이러한 개념들이 서로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 보라. 우리가 심판에서 창조주 앞에 설 때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오직 복음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롬 8:1, 흠정역). 지금 결코 정죄함이 없다. 또 심판의 때에도 확실히 그럴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기별은 현대 진리의 핵심이며, 특히 진화론이 기독교의 탈을 쓰고 기독교 신앙의 전체 기초를 파괴하려고 위협할 때 더욱 그러하다.

진화론의 맹공격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이름 자체가 진화론에 반대하는 증인이 되는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시오, 구속주라는 근본적인 진리를 선포할 사람들의 교회를 세우셨다.

 

에베소서 3:9, 골로새서 1:13–17, 요한계시록 4:11, 로마서 5:17–19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창조주시며 구속주이신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엡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골1:13~17]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계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롬5:17~19]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답: 예수님은 창조주시며 구원의 주님이시며 만물을 그 안에 존재 유지하게 하는 분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창조주이신 예수님과 구속주이신 예수님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라. 진화론의 필연적인 시도대로, 만약 그분의 창조주로서의 역할이 약화된다면 구속자로서의 그분의 역할 역시 불분명해질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과 고통과 폭력에서 구속하기 위해 오셨는데 과연 진화론자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죄, 죽음, 고통, 폭력이 생명을 발생하게 하는 필연적인 수단이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사용하신 중요한 그 과정들에서 우리를 구속하실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은 매우 위험한 거짓말이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진화론이 예수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라는 개념 자체를 조롱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바울(롬 5:17~19 참조)은 아담에 의해 시작된 죄와 예수의 죽음을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한다. 따라서 아담과 예수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진화론의 어떤 모델에서도 죄 없는 상태로 창조된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최초의 죽음을 가져온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수백만 년의 죽음)이 아담이 존재하는 데 필요한 힘이자 능력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그들은 오랜 기간의 진화를 믿기 때문에 아담이 죄의 기원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편역자주).

그러므로 진화는 처음부터 십자가의 성경적 기초를 파괴한다. 그와 반대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세상이 창조주를 경배하도록 부름으로써 이 오류에 대항하는 산 증인이 된다.

 

<교훈>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의 기초를 파괴하는 진화론의 영향력이 팽배한 시대에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기별은 더욱 중요하다. 

 

<적용> 진화론적 사고가 가득한 세상에서 자녀들과 친구들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험케 하고 증거하기 위해 그대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답: 성경에 기록한 많고 지루한 족보는 사람이 존재를 어떻게 유지하고 이어왔는지를 가르쳐주는 합리적인 문헌이다. 그래서 성경은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다. 

 

<부가설명> 성경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성경이 도덕적인 삶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것은 열매라고 표현한다. ‘성령의 열매’(갈5:22,23) 이 열매는 그 사람이 완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맺히는 열매다. ‘빛의 열매’(엡5:9)는 그 사람이 빛이 될 때 맺는 열매다. ‘의의 열매’(빌1:11)는 그 사람이 의가 될 때 맺히는 열매다. 이런 것은 자기 노력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의가 되고 세상의 빛이 되면 이런 열매들이 맺히게 된다. 이런 상태로 거듭나는 것을 재창조, 곧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다. 이것은 죄인이 심판을 받고 회개하여 거듭날 때 이루어지는 결과다. 이렇게 재창조 받게 되는 도리를 복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복음과 심판과 창조는 한묶음의 진리이다. 

 

5월 11일(목) 십자가에 달리신 창조주

 

우리가 아무리 많이 주님을 창조주로서 깊이 경탄하고 경배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다시 살펴 볼 가치가 있는 중요한 개념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고 소리치신 분이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경배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

타락한 인간인 우리가 이처럼 놀라운 진리에 어떻게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겠는가? 이 사실에 부응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첫째 천사는 우리에게 그 대답을 준다.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요한복음 19:16~30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기록을 읽어 보라. 읽으면서 창조주이신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살펴보았던 성경 구절을 생각해 보라.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답: 믿고 넘치는 감사와 충성하는 반응으로 생활할 것이다.

 

창조주를 경배하라는 첫째 천사의 기별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전해졌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의 근원을 만드신” 바로 그 분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오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빌 2:7, 8)신 동일한 분이신 것이 우주 거민들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알려진 후에 선포된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그분을 알았던 존재들에게는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을까? 하늘의 존재들도 그를 경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분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그를 경배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교훈> 창조주이신 분께서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시라는 놀라운 사실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경배하는 것이다. 

 

<묵상>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에 무엇인가를 더할 수 있다는 생각이 왜 그토록 이단적인 생각입니까?

*답: 그것은 구원받는데 자기의 노력을 더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어떤 목사님이 “하나님이 사람 되셨다고 함은 사람이 버러지 된 것보다도 더 어렵고 기이한 일”이라는 가사로 복음성가를 썼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은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언어는 일반적인 논리로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크라르라부의 베르나르는 “주 예수 넓은 사랑을 그 누가 알리요 주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겠네”(찬미 455장 4절)라고 썼다.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말을 이해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대화를 멀쩡한 정신으로 들으면 유치하고 정말 닭살 돋을 말들을 주고받아도 그들 사이에는 이해되고 사랑이 더욱 깊어진다. 하나님이 사람 되셔서 사망의 존재들의 사망을 대신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 구원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닫는 사람들만이 이해하는 사랑의 사건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 말씀이 세상적인 논리나 멀쩡한 정신으로 이해하겠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이런 사랑에 빠진다는 뜻이다. 

 

5월 1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성경의 중심이며 인류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항상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구약 전체에 걸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거나 이교도들의 예배 방식을 사용하여 주님을 예배하는 것을 질책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다른 신을 예배하는 것 사이의 갈등은 우주적 대쟁투의 핵심이며 여기에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갈등이 수반되었다. 

“예배는 살아있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의 임재 앞에 나올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과 관계있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주님을 경배할 수 있다. 죽은 자는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없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우리의 삶을 당신께 드림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돌려 받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예배는 우리 존재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우리를 이기심에서 해방하기 위해 우리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중심을 두어야 할 필요에 의해 주어졌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잃는 것이다. 그것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상태로 죽어가는 것이며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멸망으로 향하는 것이다.”(앙헬 마누엘 로드리게스, 4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라. 우리에게는 왜 구원의 약속도 필요한가?

*답: 타락해서 영생의 생명을 잃어버려서 영멸이 되었기 때문이다. 

2. 당신의 삶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경험한 일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나서 이분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묵상하라! 바로 그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돌보실 만큼 충분히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 사실이 왜 그대에게 위안을 줄 뿐 아니라 당신을 겸손하게 만드는가?

*답: 창조주의 창조와 구속이 없었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은 전적으로 창조주의 사랑과 은혜이다.

3. 진화가 사실이라면 우리를 창조하기 위해 수십억 년 동안 죽음, 폭력, 파괴, 고통, 대량 멸종을 사용해 온 창조자를 과연 경배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 

*답: 그것을 믿는 자는 결코 창조주를 경배하지 않는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