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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열방의 소망(질문, 대답, 설명) 0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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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03-13 04:07 조회5,5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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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열방의 소망

 

3월 20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44분

 

● 연구 범위 : 사 59장, 60:1~2, 61장

 

● 기억절 :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3).

 

“우리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 주님의 의가 아니면 어떤 것도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복을 누리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러한 복들을 얻기를 원하며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복으로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으므로 복을 받지 못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이 살아계신 구주이심을 믿으면서도 우리 자신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은혜와 공로가 우리를 구원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의 소망이다. 주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고 약속하신다. 우리는 꾸밈없는 약속들을 믿어야 하며 감정을 믿음이라고 잘못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주이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뢰할 때 우리는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믿음과 행함, 36).

이번 주에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통해 계시된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되었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 친히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준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행하기 :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본받아 간절한 마음으로 영혼 구원 사업에 동참한다.

 

➋ 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사 59:1~2)

※ 우리가 해결해야 할 죄가 그 사실을 가려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➌ 무엇이 죄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줍니까? 그리고 그 구원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롬 3:26, 갈 5:6, 약 2:26)

※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구원받은 생명의 역사로 믿음을 생활로 드러내게 된다.

➍ 열방이 시온의 빛으로 나아온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사 58:6~7)

※ 예수께서 오셔서 모든 나라들이 구원으로 나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➎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은 각각 언제, 누구에 의해 성취되며, 서로 어떻게 조화됩니까?(사 61:1~12)

※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다. 십자가와 부활로 은혜의 해가, 재림의 날에 보복의 날이 된다. 

 

결론 : 예수님은 2천여 년 전에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시간 속에 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삽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큰 날에 설 수 있는 그분의 백성이 됩시다.

 

 

3월 14일(일) 죄의 영향 (이사야 59장)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1~2).

 

사 58:3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했다. 반면 사 59:1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질문을 암시한다. ‘우리가 여호와께 간구하여도 그 손이 우리를 구하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그분께 부르짖어도 그 귀로 듣지 아니하심은 어찜인가?’ 이 질문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들으실 수도 있지만 그분이 그렇게 하지 못하시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대답한다.

 

1. 사 59:2을 읽어보라. 1절의 앞에 제기될 법한 질문에 대하여 2절은 어떤 대답을 제시하는가?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답: ‘우리가 여호와께 간구하여도 그 손이 우리를 구하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그분께 부르짖어도 그 귀로 듣지 아니하심은 어찜인가?’라는 가능한 질문에 대한 미리 대답하신 말씀이 2절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듣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분의 의지가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사 59:2)기 때문이다. 이것은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분명한 진술 중 하나이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를 영원한 파멸로 이끈다. 이는 죄가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몰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몰아냈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영향으로 이사야는 이 요점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 이사야 59장의 남은 부분을 할애한다.

 

2. 창 3:8을 읽어보라. 이 사례는 위의 문단에서 언급한 원칙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답: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셨으나 그들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 그들의 죄가 하나님과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죄란 원래 하나님에 대한 거절이며, 그분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죄의 행위는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할 뿐 아니라, 그분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데, 이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죄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한 접근을 거부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 전체는 죄인을 구원하려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부가설명> 아담 부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났다’(엡4:18).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것은 생명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1, 12).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거절하면 생명이 없다. 아담부부를 창조하여 생명을 주신 분이 말씀 하나님, 곧 예수님이다. 그분을 떠났으니 생명이 없어진 것이다. 그것은 죽은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어진 것이다. 결과는 하나님께는 그들이 없어진 것이 되었다. 서로에게 서로가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사망이 되었고 생명이신 분이 그들에게 다가갈 때 그들은 반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창조주께서 그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실 때 비로소 반응할 수 있는 생명의 존재가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아담이 생명을 잃었기 때문에 존재를 영원히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육체의 생명을 자비로 허락하시고 수명을 주셔서 수명이 있는 동안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할 수 있게 하셨다. 그것이 은혜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다(고후6:1,2).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창조주이신 말씀 하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고전15:45) 오셔서 아담의 죽음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누구든지 그분을 믿을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게 하셨다(요5:24). 이것이 복음이요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 아멘.

 

교훈 :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분이 인간을 싫어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분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접근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3월 15일(월) 누가 용서를 받았는가? (사 59:15~21)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사 59:11).

 

이사야 59장은 죄의 문제에 대한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다행히도 성경은 구속의 소망도 제시한다. 우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죄를 지었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죄 없음에 기초할 수 없고 용서에 기초해야 한다(렘 31:34). 바울도 여기에 동의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롬 3:9~20, 23).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차별도 없다(롬 3:22). 따라서 의인이 의롭다고 판결을 받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마련된 하나님의 의라는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 롬 3:21~24을 읽어보라. 이 성경절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는다고 말하는가? 이 말씀들은 심판의 때에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제시할 것인가?

[롬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답: 율법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의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의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서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재판을 보며 생각하는 질문은 ‘누가 죄를 지었는가?’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것은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오히려 ‘누가 용서를 받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 3:26)고 하시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심판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은 ‘누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용서를 받았으며, 또한 계속적으로 용서를 받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행위로 심판받지만 그렇다고 행위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믿음은 소용이 없어진다(롬 4:14). 오히려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정말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드러낸다(약 2:18).

 

2. 지금이나 심판의 때나 우리는 왜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롬 3:20, 23)

[롬3:20,23]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답: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하하심을 받을 수가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선행이나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죄악 세상에서 율법의 목적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적하는 것이다.

대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 곧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부어주신 사랑은 그 사람에게 예수님을 신뢰하는 산 믿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약 2:26 참고). 행위는 구원을 받게 하는 믿음의 외적인 표현이자 인간적인 표명이다. 그래서 진실한 기독교 신앙 경험은 날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표현으로서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 심판 때에 믿음의 사상을 배우지 못한 자들에게는 행위가 증거가 된다. 그러나 회심한 자들에게는 오직 회심에 따른 행위만이 심판과 관련이 있다. 회심한 생애는 그리스도와 성령으로부터 능력을 받는다. 그리고 회심 이전에 있었던 죄의 생애는 어린 양의 보혈로 씻음을 받는다(롬 6장 참고).

 

<부가설명> 순종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생명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 생명력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행함이 나타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그 속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예수님의 삶을 사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게 되는 것이다. 행함에 관한 것을 설명할 때 야고보서를 잘 인용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옳은 말이다. 바울이 가르치는 믿음과 야고보가 주장한 행위는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보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과 결과에 관한 내용이다. 야고보는 행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인가 산 자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산 자, 곧 생명이 있는 자는 당연히 행위가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행위가 없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의 생명이 되어 있으면 행위는 그 생명이 하는 것일 뿐이다. 이 진리는 잘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도리를 바르게 알게 된다.

 

교훈 :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용서받은 자의 믿음은 율법에 순종하는 삶으로 증명된다.

 

 

3월 16일(화) 전 세계적인 호소 (사 60:1~2)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사 60:1~2).

 

1. 사 60:1~2에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그대는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난 어떤 원칙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소망을 제시하는가?

[사60:1,2]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답: 여호와의 구원이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니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하신다. 

 

사 60:1~2을 보면 하나님이 포로였던 백성을 구원하시는 장면이 제시되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창조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궁극적으로 완성하신다.

 

2. 열방과 열왕은 누구의 빛으로 나아오는가?(사 60:3)

[사60: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답: 네 빛, 곧 시온의 빛으로 나온다. 사59:20을 보면 네가 시온임을 알 수 있다. 

 

히브리어로 보면 이 사람은 한 여성이다(1~2절 참고). 그녀는 앞 장의 끝부분에서 언급한(사 59:20) ‘시온’을 가리킨다. 즉 어두움에 덮여있는 지상의 사람들은 시온으로 나아올 것이다. 그들은 시온 위로 떠오른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의해 이끌림을 받을 것이다(사 60:2). “시온은 그에게 주어진 빛으로 들어가서 동일한 빛으로 모여든 열방을 바라보고 그들에게 반응하라는 부름을 받는다.”—J. Alec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p. 494. 시온은 예루살렘을 가리키지만, 그 성읍 자체보다는 사람들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사야 60장의 나머지 부분은 1~3절에서 소개한 주제 곧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로 인해 복된 예루살렘으로 이끌린다는 주제를 발전시킨다.

 

3. 이 예언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과 어떻게 비교가 되는가?(창 12:2~3) 이 둘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창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답: 같은 사실을 말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택하실 때 그분에게는 우주적인 목적이 있었다. 아브라함을 통해 지상의 모든 인류가 복을 받을 것이었다(창 12:3, 18:18, 22:18).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궁극적으로 온 인류와 맺는 언약이 되도록 계획되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가 될 것이었다. 이사야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고유하고 우주적인 사명으로 되돌리고자 노력했다. 참하나님의 대표자들로서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하나님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으로 일컬어질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찾는 외국인들을 환영해야 했다(사 56:3~8 참고).

 

<부가설명> 구원의 복음은 태초에 아담부부에게 전한 복음이다. 창세기 3:15절의 예언은 아담의 모든 자손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셔서 구체적으로 확인 되었다.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을 때 그들을 통하여 구원이 빛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을 다시 세우시고 그들이 온 세상에 빛을 발하여 여호와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게 할 것이었다. 그 책임은 역사의 종말에 남은 자손에게 위탁된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일어나 빛을 발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오류가 진리인 것처럼 세상을 뒤덮고 있는 때에 세 천사의 기별 영원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세상을 덮고 있는 오류의 암흑은 제7일 안식일을 버리므로 엿새 동안 창조하신 창조주 여호와를 버린 것이고 영혼 불멸을 믿으므로 죽은 자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아도 되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부활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아쉬울 것이 없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강신술을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생명과 부활의 하나님을 떠나도 사람을 죽지 않는다는 사상, 결코 죽지 않는 존재라는 사상을 온 세상이 진리인양 믿게 만든 어둠의 교리이다. 이런 때에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하므로 빛을 사람들이 들어오게 해야 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교훈 : 하나님의 계획은 택하신 백성을 빛으로 삼아 어둠에 덮인 세상을 밝히시고, 그들을 은혜와 복의 통로로 삼아 만민을 복되게 하며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3월 17일(수) 여호와의 은혜의 해 (사 61:2)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2).

 

1. 사 61:1에서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사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답: 메시아이다. 곧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신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임한다. 이는 그가 메시아라는 뜻이다. 그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한다(사 61:1). 그는 누구와 같은가? 이와 비슷한 언어로 하나님의 종을 묘사한 사 42:1~7을 이 말씀과 비교해 보라.

사 61:2은 ‘여호와의 은혜의 해’에 대해 말한다. 다윗 계보의 왕이요 구원자인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아)가 자유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특별한 해(年)를 선언한다. 이것을 레 25:10과 비교해보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하나님이 제50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를 선포하셨다. 이는 곤궁한 시기에 생존을 위해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거나 노예가 된 사람들이 그들의 땅과 자유를 되찾는다는 의미이다(레 25:25~55). 희년은 속죄일에 나팔을 붊으로 시작된다(레 25:9). 이 부분은 이사야 58장과 연결하여 앞에서 다루었다.

물론 이사야 61:2에 나오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는 일종의 희년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레위기 25장의 준수가 아니다. 이 해는 왕이신 메시아께서 자유와 회복의 사역을 통해 당신을 나타내실 때에 친히 선포된다. 이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몇몇 왕들이 자신의 재임 초기에 빚을 탕감해 준다고 선언함으로써 사회적인 돌봄을 증진시킨 것과 비슷하다.

메시아의 사역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율법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분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실 뿐 아니라,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슬픈 자를 위로하고, 그들에게 회복을 가져다주신다(사 61:1~11). 게다가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함께 그분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사 61:2)을 전파하신다.

 

<부가설명> 율법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의 은혜의 해’는 희년이다.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에서 놓여 생명을 회복하는 구원을 상징하는 해이다. 인류가 사망의 존재가 된 이후 전 역사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과 뱀의 싸움으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사건이다. 이것은 그 예언이 선포된 날부터 효력이 있는 은혜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이 그 시작이다. 그 후로 인류는 은혜 받을 만한 때와 구원의 날에 살고 있다(고후6:1,2). 전 역사가 ‘여호와의 은혜의 해’라는 말이다. 이 기간에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야 한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은혜와 구원의 날들을 그냥 넘겨버린다. 인간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은혜와 구원의 날은 허락되었다. 아직도 호흡이 있는 사람들, 제 정신이 있는 사람들은 이 은혜의 날 안에 살고 있다. 먼저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아직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전도이다. 일어나 빛을 발하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며 이것을 거절할 때 여호와의 보복하시는 해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한 말로 선포하며 은혜를 받아들인 행복을 간증하고 고백하는 믿음으로 할 것이다. 

 

교훈 : 이스라엘 백성은 50년마다 속죄일에 희년을 선포해야 했지만 이사야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리라고 예언했다.

 

 

3월 18일(목)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사 61:2).

 

1. 메시아는 이사야 61장에 묘사된 것처럼 좋은 소식을 전하다가 왜 하나님의 복수를 선포하는가? 이 예언은 언제 성취되는가?

[사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답: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그 은혜의 날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는 여호와의 보복의 날이 된다.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을 읽으실 때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9)까지만 읽고 멈춘 다음에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같은 절에 나오는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사 61:2)이라는 구절을 읽지 않고 피하셨다(사 61:2). 물론 그분이 행하신 복음과 자유와 위로의 사역이 사탄에게 눌린 자들을 해방시키기 시작했지만 복수의 날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마태복음 24장(막 13장, 눅 21장 참고)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미래에 임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사실 이사야 6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보복의 날”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욜 2:31, 말 4:5)을 말한다. 그날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원수를 멸하시고 억압 받는 남은 자와 그분의 백성을 자유하게 하심으로써 지구를 불의로부터 해방시키실 것이다(계 19장, 단 2:44~45 참고). 즉 그리스도께서 “여호와의 은혜의 해”의 시작을 선포하셨지만 그 절정은 그분의 재림 때에 있을 것이다.

 

2.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과 복수를 약속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이 개념들은 서로 모순인가? 아니면 복수도 일종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이해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지 설명해 보라.

 

답: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세력을 멸하실 때 구원이 완결된다. 그러므로 사랑과 복수는 구원을 이루는 사업에서는 동시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누군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 5:39)고 말씀하시지만, 다른 곳에서는 매우 분명하게 공의와 징벌이 집행될 것이라고도 하셨다(마 8:12). 바울도 우리에게 “악으로 악을 갚지 말”(살전 5:15)라고 했지만, 또한 주께서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살후 1:8)라고 하였다.

물론 차이는 있다. 즉 무한히 지혜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은 완전히 공정한 방식으로 공의와 보복을 동시에 가져오실 수 있는 반면 인간의 공의와 보복은 오류와 결함, 모순투성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러한 제약 없이 이르러올 것이다.

 

<부가설명> 우리는 인간의 실상에 관하여 착각과 오해를 하지 않아야 한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고전15:22). 아담의 자손으로서 생명을 가진 자는 하나도 없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자이다(요일5:12). 그들의 모든 것은 다 ‘썩어져가는 구습’이고 옛사람이다(엡4:22). 이들이 옛사람대로 있으면 부패가 세상을 덮을 것이고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 생명을 잃어버리게 하는 독소가 된다. 그들이 은혜의 해와 구원의 날에 생명을 얻지 않으면 생명의 땅(시27:13)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은혜와 구원의 날이 지나가 버리면 옛사람 곧 썩는 존재들은 더는 생명 얻을 기회가 없다. 그들을 사망 처리해야 한다. 즉 장례 해야 한다. 그것이 보복이다. 지구의 아담의 자손들이 산 자라고 인식하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생명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이다. 보복은 그들을 살리려고 창조주이신 말씀 하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서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셔서 생명을 얻게 모든 조치를 하셨는데도 은혜의 해를 무시했기 때문에 이제는 살아날 기회가 없으니까 장사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표현이다. 내가 위에 표현한 식으로 설명하면 사람들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은 보복이라고 하고 멸절, 진멸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구원의 복음을 전체적으로 바르게 보면 그것은 생명을 끝까지 거절한 사망의 존재가 사망하도록 두는 것을 뜻하는 말씀임을 깨닫게 된다. 개역성경에는 ‘보복’을 ‘신원’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악인들이 멸절할 때 의인들의 억울함이 풀리고 생명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원문 ‘나캄’인데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같은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은혜와 구원의 날에 생명을 얻고 얻도록 도우는 사람 살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직무를 감당하자(요5:21).

 

교훈 : 하나님의 보복의 날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을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보복은 가장 완전하고 공정한 방법으로 집행될 것이다.

 

 

3월 1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께서는 자신에 관한 예언의 산 설명자로서 사람들 앞에 서셨다. 그는 자기가 읽은 말씀을 설명하시면서 메시아를 압박받는 자의 구원자요, 사로잡힌 자의 해방자요, 고통당하는 자의 치료자요,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키며 세상에 진리의 빛을 드러내는 자로서 말씀하셨다. 그의 인상적인 태도와 그 말씀의 놀라운 뜻은 그들이 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능력을 가지고 듣는 자들의 마음을 꿰뚫었다. 거룩한 감화의 물결이 모든 장벽을 허물었다. 모세처럼 그들은 보이지 않으시는 분을 보았다. 그들의 심령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자 그들은 열렬한 아멘으로 화답하고 주께 찬송했다”(시대의 소망, 237).

 

“하나님의 보복의 날, 맹렬한 그분의 진노의 날이 다가온다. 누가 주께서 오시는 날을 견딜 수 있으리요?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 그러나 그분의 분노의 화살은 신념의 화살이 뚫을 수 없었던 곳을 관통할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처벌하시기 위해 일어서실 날이 멀지 않았다. 그날에 그 거짓 목자가 범법자를 보호해줄 수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불순종의 길을 간 그가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인기나 숫자가 과연 사람을 무죄로 만들 수 있겠는가? 이것들은 부주의하고 무관심한 자들이 스스로 깊이 숙고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믿음과 행함, 3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어느 교회 목사가 그의 목회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소망과 복음을 세상에 전해서, 끝이 이르기 전에 사람들이 구원받을 기회를 얻게 할 수 있을까요?

※ 자기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진정으로 깨닫는 것이다. 구원받기 전의 자기의 상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이 충일(充溢)할 때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요약 : 하나님은 반역의 정신을 제거하고 죄에서 떠난 남은 자들을 회복시킴으로써 불의한 사회를 정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복으로 인해 열방의 백성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게 이끌리며 메시아에 의해 선포되고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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