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대가를 지불하는 사랑(질문, 대답, 설명) 03/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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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03-06 05:32 조회6,388회 댓글0건본문
제11과 대가를 지불하는 사랑
3월 13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37분
● 연구 범위 : 사 55:1~13, 58:1~14
● 기억절 :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사 58:10).
네브래스카 주 링컨 시에 사는 유대인 칸토(예배 인도자) 부부는 협박과 음란성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이 부부는 그 전화의 발신자가 ‘쿠 클럭스 클란(KKK)’이란 조직의 지도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협박자의 정체를 밝혀낸 그들은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었으나, 한층 참신한 방법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그 부부는 그 사람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 그의 증오심은 녹기 시작했다. 계속된 방문 결과 그들의 우정은 깊어졌고 심지어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사 58:6~7). 모순처럼 들리지만 링컨 시에 사는 부부는 그들의 음식을 굶주린 압제자와 나눔으로써 이와 같은 금식을 행하였고, 그것으로써 그 사람을 부당한 편견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해 주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설명한 이 중요한 원칙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해 보자.
※ 학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이 바라시는 참된 경건은 단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섬김과 사랑의 실천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느낀다.
행하기 :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➋ 이사야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사 55:1, 엡 2:8~9)
※ 모두 값없이 돈 없이 얻는 구원이라는 공통점이다.
➌ 신비한 구원의 경륜을 연구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는 무엇일까요?(사 55:8~9)
※ 하나님의 생각으로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➍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금식(경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사 58:6~7, 마 25:4, 약 1:27)
※ 자아 희생적인 봉사와 사랑의 원칙을 실천하는 것이다.
➎ 안식일을 정말 기쁜 날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사 58:13~14, 막 3:1~5, 요 5:1~17)
※ 죽은 자를 살리는 봉사이다. 즉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이 생명을 얻어서 살게 하는 것은 참된 기쁨이 아니겠는가!
➏ 안식일의 쉼과 사역을 잘 조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안식일에 영혼을 구원하는 기쁨을 누릴 때 조화가 된다. 다른 것도 있을 것이다. 모두 생각해보자.
결론 : 무엇이든지 참된 경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선물을 받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기를 기대하십니다. 이것은 책임 때문에 하는 행동이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언약의 관계를 나누기 위해 초청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이어야 합니다.
3월 7일(일) 돈 없이 사라? (사 55:1~7)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1. 위의 성경절에서 그대는 어떤 모순이 보이는가?
답: 돈 없이 물건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얻는 것이다. ‘돈 없이’라는 말과 ‘사라’는 말은 서로 모순이다.
그대가 음식을 가지고 큰 도시의 대로변에서 굶주린 사람들과 노숙자들에게 “돈 없는 사람도 와서 사 드세요!”라고 외친다고 가정해 보라. 돈이 없는데 어떻게 살 수 있는가? 물론 이사야가 한 것처럼 “돈 없이 값없이”(1절)라는 말을 추가한다면 요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사야는 사람들에게 값없는 용서를 받아들이라(7절)고 호소한다. 그러나 ‘사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공하시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거래(대가의 지불)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회복된 언약 관계의 틀 안에서 아낌없이 용서를 베푸신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분께서 거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분은 자신의 종이 흘린 끔찍한 피의 대가로 그것을 사셨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는 무료이지만 그분께는 엄청난 대가를 통해 이르러 온 결과였다.
2.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치른 값은 무엇이었는가?(벧전 1:18~19)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답: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다.
3. 신약이 말하는 구원과 비교해 볼 때, 구원에 대한 이사야의 접근 방식은 어떠한가?(엡 2:8~9)
[엡2:8,9]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답: 신약성경의 내용과 똑같다. 다 값없이 돈 없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사야가 요약한 구약의 복음은 신약의 복음과 동일하다. 행함으로 말미암는 ‘옛 언약’의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는 ‘새 언약’의 구원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구속자를 약속하신 이래(창 3:15), 구원의 길은 오직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뿐이었다(엡 2:8).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영생을 찾아 영웅적인 탐험을 벌인 고대의 길가메시(‘길가메시 서사시’로 알려져 있는 수메르·바벨론 문학작품의 주인공)로부터 환생을 믿는 현대의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러 구원의 길들을 시도했으나 다 헛수고였다.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완성해 놓으신 것들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가설명> 구원의 실상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바른 구원의 길을 알게 된다. 죄에서 원웝을 받는다고 했다(마1:21). 그러면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구원을 안다. 죄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그의 후손으로 출생한 사람이 자기 행동을 나쁜 짓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을 아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그것은 죄가 인간 각자의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행위를 고치면 된다. 저지른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행위의 대상이 된 상대에게 요구하는 값을 지불 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아무리 의롭고 선해도 면할 수 없다.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은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사형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출생하면서부터 사형수들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출생하면서부터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들이라는 말이다. 조상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사망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생명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아담의 모든 자손들이 출생하면서 생명이 없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사형수가 된 것이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닌가(요일5:11,12)? 이 사형을 면하게 되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을 성경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5:24)라고 계시한다. 이것은 이간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이룰 수 없다. 이미 출생하면서부터 사형수이기 때문에 자기 노력으로 사형을 면제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형을 사면(赦免)할 수 있는 것은 사형을 선고한 권력자에게 있다. 그분에 바로 창조주이시다. 그래도 무조건 사면할 수 없다. 창조주께서 사면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셔야 한다. 그것이 대속이다. 창조주이신 말씀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오셔서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의 사형을 대신 당하셔서 그들에게 사형을 사면하시고 그분이 부활하셔서 사형이 사면된 사람들에게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주실 때 가능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속자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신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을 믿을 때 사형에서 사면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은 사형수인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돈 없이 사는 것이 된다. 이사야는 이것을 기록하였고 신약도 이것을 기록하였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서 복음이다. 아멘.
교훈 : 우리에게 구원이 값없이 제공되는 까닭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헤아릴 수 없는 값을 이미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3월 8일(월) 높은 생각 높은 길 (사 55:6~13)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1. 하나님은 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그분의 생각과 길이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고 말씀하시는가?(사 55:8~9) 그대는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답: 창조주의 생각과 피조물인 사람, 그것도 죄인인 사람의 생각의 차이를 지적한 말씀이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생각을 전혀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작은 물질에 담긴 신비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너머에 있다. 그분의 탁월성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그분의 도움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이 조금 더 쉬워질 것이다(사 57:15 참고).
2. 사 55:6~9을 읽어보라. 하나님은 어떤 문맥에서 그분의 길과 생각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씀하시는가? 그분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사55:6~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답: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 용서의 은혜를 베푸실 것을 암시하시며 그것은 인간들의 마음이 감피 생각하지도 못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만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약속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주의 모든 신비 중 가장 위대한 신비는 우리가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구원의 계획’이다(엡 6:19 참고). 우주의 창조주께서 자신을 낮춰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수고와 고난의 삶을 사시며,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단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피조물들의 심령을 전율하게 할 진리이다.
“구속의 주제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갈망하는 주제로서, 영원한 시대를 통해 구원받은 자들의 과학과 노래가 될 것이다. 오늘날 그것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이 주제는 끝이 없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분의 속죄 희생과 중보 사역은 세월이 지속되는 한 근면한 연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며, 그는 무궁한 세월 동안 하늘을 바라보면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외칠 것이다”(엘렌 G. 화잇, My Life Today, 360).
<부가설명> 성경은 루시퍼의 타락의 동기와 상태를 자세히 계시하지 않았다. 그런 결과에 관한 기록을 간단하게 계시하였다. 그것도 세상의 군왕들을 비유로 계시하였다. 직설적으로 설명을 해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군왕들, 바벨론 왕, 두로 왕 등등을 예로 들어 단속적(斷續的)으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 동기와 진행을 사람이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피조물인 루시퍼가 창조주의 지위와 자리를 탐내어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기록한 몇 줄 안 되는 내용으로도 알 수 있다. 문제는 루시퍼가 지구를 사망의 감옥으로 만들었을 때 그를 처리하지 않고 오래 참으시며 심지어 창조주이신 말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서 아담의 사망을 대신 당하신 신비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다. 여기에는 설명할 수 있는 한계까지는 설명할 수 있는 말씀들이 성경에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므로 아담과 그 후손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다.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다. 사람의 생각과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높고 다른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원인을 알려고 하기본다는 그렇게 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원받아 영생의 생명을 얻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성령님의 역사로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구원의 때와 은혜받을 시기에 이것을 받는 것이 복된 일이다. 얼마나 감사하고 황송한 일인가!
교훈 : 우주의 수많은 신비 중에서 최고의 신비는 구속의 과학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너무 높아서 우리는 영원히 구속의 신비를 연구하며 감탄할 것이다.
3월 9일(화) 금식 친구들 (사 58:1~8)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3, 5~6).
1. 사 58:3에서 말하는 ‘금식’은 어떤 금식을 가리키는가?
[사58:3]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답: 유대 종교력 속죄일인 7월 10일의 금식을 뜻하는 것이라고 저자가 설명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유일한 금식인 속죄일의 금식이 분명하다(레 16:29, 31, 23:27~32). 이것은 사 58:3에 나오는 ‘마음을 괴롭게 하되’라는 유사한 표현에 의해 확인되는데, 이는 레위기의 용어를 따른 것이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은 금식을 포함하여 자아를 부정하는 다양한 형태를 가리킨다(시 35:13, 단 10:2~3, 12 참고).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높”(사 58:1)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속죄일의 맥락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속죄일 열흘 전에는 ‘쇼파르’라고 하는 양각(羊角)나팔을 불어서 그날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음을 상기시켜야 했다(레 23:24). 더구나 매 50년째 속죄일의 나팔 소리는 희년의 해방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었다(레 25:9~10; 사 27:13과 비교).
2. 사 58:3~7을 읽어보라.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탄식하셨는가? 그들의 ‘금식’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사58:3~7]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답: 그들은 속죄일의 금식을 하면서도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를 벗겨주지도 않고 자유하게 하지도 않았다. 다만 음식을 안 먹는 것으로 괴롭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경건’으로 인해 그들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것을 거꾸로 하고 있었다. 자아를 부정하는 속죄일의 관습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충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날에 대제사장은 성소를 정결하게 하고 이로써 이미 용서받은 죄로부터 그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다(레 16장; 레 4장 비교).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께 그들의 ‘경건’과 ‘헌신’을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판결의 날에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수행되어야 했다. 어쨌든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힌 것은 백성의 죄였다. 성소는 그들이 행한 일로 인해 흘려진 피로써 정결하게 되어야 했다.
<부가설명> 나팔을 부는 것은 유대종교력 7월 1일 나팔절의 행사이다. 나팔을 불어서 기념하는 이 날의 나팔 소리는 10일의 속죄일을 준비하라는 기별의 나팔소리기도 하였다. 이날부터 9일까지 야밈노라임이라고 하여 괴롭게 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에는 속죄일에 온전한 속죄를 얻기 위하여 사람 사이에 얽힌 것들을 푸는 날들이다. 금식하며 이 일을 해야 했다.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경험하기 전에 사람 사이에 피차 용서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행사이다. 그래서 서로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 시대에 속죄일이 다가와서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을 하며서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날 금식의 참된 사상이 무엇인지 이렇게 지적하신 것이다. 우리는 심판의 때에 살고 있다(계14:6,7). 정말 이사야 58장이 가르치는 금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이 아니라 서로 용서하고 맺힌 것을 풀어주며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진리의 말씀에 굴복하는 금식이다.
교훈 : 이스라엘 백성이 속죄일에 금식함으로 스스로를 괴롭게 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분께 대한 감사와 충절의 표현이어야 했다.
3월 10일(수) 금식 투쟁 (사 58:1~12)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사 58:10).
자아부정을 통한 겸비함이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을 확증할 때 하나님은 속죄일에 그들의 왕으로 인정을 받으신다. 하지만 백성들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 지 열흘 후에 선지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나팔같이 울리면서 그들이 그분께 반역했다고 선언한다(사 58:1).
1. 사 58:6~12을 읽어보라. 하나님이 참된 자아 부정의 행위로 간주하시는 행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몇 끼 식사를 거르는 것과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의지할 데 없는 자들을 먹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이러한 행동들의 이면에는 어떤 원칙이 있는가? 이러한 행위들이 어떻게 진정한 신앙을 이루는가?
[사58:6~12]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답: 어렵고 고난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누구나 종교적일 수 있고, 누구나 종교적인 의식에 참가할 수 있다. 그것도 제때, 제대로 된 방식으로 행해지는 올바른 의식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라. 그분은 비록 당시의 종교적인 의식에 충실하셨으나, 복음서의 기자들은 의식에 대한 그분의 충성심보다는 그분이 베푸시는 자비와 치유와 먹이심과 용서의 행동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진리를 전파할 교회와 사람을 찾으신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기 위한 더 나은 방법은 무엇인가? 음식에 관한 규례를 엄격하게 고수하는 것인가? 아니면 배고픈 사람들을 돕고자 자원하는 마음인가? 엄격하게 안식일에 쉬는 것인가? 아니면 그대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여 절박한 상황에 있는 자들을 돕는 것인가?
<부가설명>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굳이 여기 적을 필요가 없다. 너무나 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희생과 봉사를 하므로 안식일에 예배하며 그날에 안식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대체한다는 착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이 구절로 의와 인과 신을 잘 지킨다면 십일조는 굳이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 오해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런 오해하지 않도록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예식적인 일도 하고 또 여기 기록한 대로 돕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3절 14절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적시(摘示)하였다. 하나님께서 열거하신 그런 봉사와 희생을 하면 안식일에 예식을 굳이 기록한 대로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차단하신 것이다. 이루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 신앙의 길을 올바르게 걸어야 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이 바라시는 참된 금식은 배고픈 자들을 먹이는 것이며, 그분께서 원하시는 참된 안식일 준수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돕는 것이다.
3월 11일(목) 우리 모두를 위한 시간 (사 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사 58:13~14).
1. 사 58:13~14에서 이사야는 왜 안식일에 관하여 논하는가? 이것은 앞에 나온 속죄일의 문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사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답: 앞에 지적한 사실들을 수행하는 것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에 포함된 것임을 강하게 인식하게 하는 기별이다.
매년 맞이하는 속죄일은 안식일이었다. 이 특별한 절기 안식일에도 매주 맞이하는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일이 금지되었다(레 23:27~32). 그래서 초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 인식했듯이, 일몰에서 일몰까지 지속된 속죄일 휴식의 원칙(레 23:32)은 제7일 안식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마찬가지로 사 58:13~14의 주요 맥락은 속죄일 안식일에 관한 것이지만 그 기별은 제7일 안식일에도 적용된다.
3. 사 58:13을 읽어보라. 안식일은 어떤 날이 되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여기에 묘사한 것 같은 안식일을 경험할 수 있을까? 안식일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 안식일이 왜 여기에 묘사된 그런 종류의 날이 되어야 하는가?
[사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답: 인간의 오락, 자기 길로 가지 않고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중심이 되는 하루를 지내야 한다.
이사야 58장은 세 가지 주요한 주제, 곧 자아부정, 사회적인 돌봄, 안식일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이 셋 사이에는 어떤 연결점이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이 아래 설명이다.)
첫째, 이 셋은 모두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의 우선순위를 따르며 우리가 그분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기별을 포함한다. 둘째, 이 셋을 모두 실천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오셔서 자신을 낮추시고(빌 2:8), 자아희생적인 선행을 보이시며(요 3:16), 창조 주간이 끝나고 안식일에 쉬신(창 2:2~3, 출 20:11) 하나님을 모방함으로써 경건을 추구하게 된다(레 19:2 참고).
이사야 58장에서 설명하는 자기부인과 사회적인 선행 그리고 안식일이라는 주제 사이의 연관성을 다음의 다른 성경절에서도 찾아보라. 한 주의 노동에서 벗어나는 안식일의 자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숨을 돌릴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출 23:12, 막 2:27). 예수님은 선을 행하는 일이 안식일에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막 3:1~5, 요 5:1~17). 다른 이를 도우면 기쁜 것처럼(사 58:10~11), 참된 안식일 준수에는 기쁨이 따른다(사 58:14). 이와 같은 복을 경험하려면 그대의 삶에서 무엇이 변해야 할까?
<부가설명> 재림신자들은 제7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킨다. 그런데 지키는 것이 교회당에 가서 예배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재림교인들이 많은 것 같다. 안식일의 거룩함과 쉽은 예비일인 금요일 해지는 시간부터 토요일 해지는 시간까지다. 이 하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상만으로 지낼 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된다. 그러면 다른 엿새 동안은 하나님의 사상을 떠나서 생활해도 되는가? 아니다.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제7일 하루만 예배하며 지내는 것이 아니다. 넷째 계명은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하는 서도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실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엿새 동안 십계명이 나타내는 정신으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실이 포함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엿새 동안 내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진정하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한 주일 내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 포함 된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이 예배가 되는 경험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교훈 : 안식일은 ‘나’만을 위한 날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날이다. 하나님은 그날에 우리가 예배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기쁨을 경험하기를 바라신다.
3월 1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어떤 사람도 극기 없이 진정한 자선을 실천할 수 없다. 오직 단순, 극기, 엄격한 절약의 생활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표자들로서 우리에게 지정된 사업을 완수할 수 있다. 자만심과 세속적 야망은 우리의 마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사업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이타심의 원칙이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 집들의 벽과 그림과 가구들 위에서 우리는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라는 글귀를 읽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옷장에서 마치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인 것 같은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라는 글귀를 보아야 한다. 식당과 풍성한 음식이 놓여 있는 식탁에서 우리는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라고 쓰여진 것을 보아야 한다(사 58:7)”(치료봉사, 20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이사야가 당시의 백성에게 제기했던 질문을 보십시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 우리는 어떤 형태로 만족하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고 있을까요? 이러한 덫에 빠지기 쉬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 세상적인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것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아야 한다.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데 두고 일상적인 일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➋ 만일 자아부정, 사회적인 돌봄 그리고 안식일이 이사야 당시의 속죄일에 중요한 개념이었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 희년의 나팔이 울려 퍼지고 궁극적인 해방을 알리게 될 마지막 시대의 속죄일(단 8:14)에도 이러한 것들은 얼마나 중요할까요?(고전 15:52, 레 25:9~10 참고).
※ 성도들의 생활이 이렇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의 상태가 아니다. 성도들이 인격과 삶이 이렇게 되는 것은 새 생명의 본질이다.
➌ 안식일 준수에 관한 문제를 토의해 보십시오. 이사야가 안식일에 오락을 행하지 않으면서 그 날을 ‘즐거운’ 날이라(사 58:13)고 말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안식일은 우리의 존재와 구원의 생명에 관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의 날이다. 그것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서로 토의해보자.
요약 : 이사야 55장과 58장에서 선지자는 그의 백성에게 그들의 생각과 길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그들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이상은 그들 자신의 이상보다 훨씬 더 높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비롭게 용서하시며, 용서받은 자들에게 속죄일과 안식일의 정신이 조화를 이루도록 자비를 베풀라고 권유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의 선물을 받아들인다면 심령이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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