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심(질문, 대답, 설명) 0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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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02-27 07:22 조회6,070회 댓글0건본문
제10과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심
3월 6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30분
● 연구 범위 : 사 50:4~10, 52:13~53:12, 53:3~12
● 기억절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루 푸크라는 중국인 그리스도인은 아프리카 광산에 노예로 팔려가는 그의 동족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느끼고 그들에게 복음의 소망을 나누어주기를 원했으나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몰랐다. 한 가지 방법은 5년 동안 자신도 노예로 팔려가 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었다. 그는 데머레라로 옮겨졌고, 그곳의 광산에서 고생스럽게 일하면서 동료 노동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다.
루 푸크가 죽기까지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버리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자기희생의 모본인가!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 즉 자신을 낮추고 ‘종의 형체’(빌 2:7)를 가지심으로 죄의 깊은 수렁에 빠진 우리와 온 세상을 향해 다가오셨다.
이번 주에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기 수백 년 전에 예언되었던 믿기지 않는 이 사건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이사야가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바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느끼기 : 고난받는 종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향해 가지셨던 사랑을 경험한다.
행하기 : 예수님처럼 고통당하는 자들의 회복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➋ ‘고난받는 종의 시’가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사 52:13~53:12)
※ 예수께서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겪으실 삶을 보여준다.
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사 53:1)
※ 성경이 계시한 구원 사업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
➍ 예수님이 죄의 저주와 고통을 받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사 53:4)
※ 인류(우리)가 죄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를 해방하기 위한 사랑이다.
➎ 구약의 속건제사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희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레 5:14~6:7, 7:1~7)
※ 아는 허물이라도 주님이 값을 내시고 용서하셨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합니다.
결론 : 성경은 역사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가리킵니다. 성경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말해주는 이사야 52:13~53:12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소망과 기쁨을 인식함으로써 변화되어야 합니다.
2월 28일(일) 시험하는 진리 (사 50:4~10)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만일 이사야가 메시아에 관한 정보만을 전달하려 했다면, 한꺼번에 모든 세세한 내용을 제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자들을 가르치고 설득할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종을 만나게 하고자 교향곡 형식의 풍성한 짜임새를 갖춘 주제들을 반복적으로 전개한다. 그는 하나님의 기별을 단계별로 펼쳐 각 부분을 나머지 그림과의 관계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이사야는 독자들의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다.
1. 사 50:4~10을 읽어보라. 이 성경절들이 말하려는 것을 요약해보라. 여기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사50:4~10]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답: 그분은 곤고한 자를 위로하는 말을 하였으나 오히려 학대를 당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사 49:7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종은 멸시당하고 미움을 받으며, ‘관원들에게 종’이 되었으나, 결국 열방과 방백으로부터 경배를 받을 것이었다. 이사야 50장에 나오는 친절한 교사는 곤핍한 자를 말로 도와주려 하나 그들과의 간극이 너무 넓다(4절). 심지어 그들을 변호하려다가 육체적인 학대를 당한다(6절).
이러한 학대는 현대 서구 문화에서도 나쁘게 인식되지만 고대 근동지방의 문화에서 명예는 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생사의 문제였다. 만일 그대가 누군가를 이렇게 모욕하고 학대했다면 자신을 단단히 방어해야 할 것이다. 그 희생자나 동족들이 기회를 노리다가 반드시 보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 왕이 암몬 자손을 공격하여 정복한 것은(삼하 10:1~12), 암몬 왕이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 그들의 수염 절반을 깎고 그들의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삼하 10:4)냈기 때문이다. 이사야 50장에서도 사람들은 그 종의 뺨을 치고 수염을 아프게 뽑고 그에게 침을 뱉었다.
이 사건이 우주적인 사건이 된 이유는 그 희생자가 왕의 왕이신 분의 특사(特使)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에 관한 성경 구절을 사 9:6~7, 11:1~6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 종이 왕이시며, 전능한 구원자이심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능력과 영광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나도 이상하여 믿지를 못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눅 23:35).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부가설명> 인류의 구주는 아담이 끌어들인 사망을 처리해야 한다. 사망은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역사 이래로 모든 인류는 생명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단언하였다(요일5:12). 태초부터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분 안에서만 생명이 있었다. 그런데 아담이 그분 안에서 떠났다(엡4:18). 그렇기 때문에 아담의 자손으로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본질적으로 진노의 자식이고(엡2:3) 생명이 없는 사망의 존재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성경의 복음과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것을 모르고 사람이 생명이 있는데 잘못하기 때문에 죄인이고 그 죄의 대가가 사망이라는 의식(意識)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의식이다. 이것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한 사탄의 속임을 믿는 의식이다. 이 의식이 지상의 모든 사람들의 뇌에 박혀 있는 것 같다. 구주는 세상에 오셔서 이 의식을 깨닫도록 하시고 또 아담의 사망을 처리하셔야 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사망의 고통을 친히 당하셨다. 그가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사망하게 하신 것이다(히2:14). 그래서 사망이 폐하게 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구주께서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상태를 바르게 깨닫게 해 주려고 곤고한 자를 위로하려 하실 때 사망의 세력이 그분을 거절하고 학대하였다. 그러나 그분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50:7) 참으시고 마침내 부활하셔서 사망을 완전히 폐하시고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죽게 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셨다(딤후2:10). 그분 안에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그 생명을 찾게 되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실상이다.
교훈 :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종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셨지만 보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희생하시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셨다.
3월 1일(월) 고난받는 종의 시 (사 52:13~53:12)
사 52:13~53:12은 ‘고난받는 종의 시(詩)’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시는 ‘구약의 복음서’를 기록한 선지자라는 이사야의 명성을 확증한다. 이 시는 복음의 심오한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며 다른 문학 작품 위에 우뚝 서 있다. 비록 숨가쁘게 짧지만 모든 문구는 심오한 의미들로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죄에 빠져 길을 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노력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것은 ‘불쑥’ 나온 주제가 아니다. 이사야는 초반부에서부터 메시아에 대한 주제를 발전시킴으로써 독자들을 준비시켰다. 메시아의 지상 생애의 전체 과정을 추적하면서, 선지자는 그분의 수태와 탄생(사 7:14)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 계보의 왕인 그분의 신분(사 9:6~7)을 소개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그분의 사역(사 11:1~16)과 불의와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그분의 조용한 사역(사 42:1~7)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 다음에 메시아의 웅장한 드라마 속에는 그가 높임을 받으시기 전에 겪을 비극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밝혔다(사 49:1~12, 50:6~10). 이제는 고난받는 종의 시에서 그 비극의 깊이를 드러낼 차례이다
1. 위에 열거된 성구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다시 읽어보라. 그것들은 이사야 52~53장에 나올 사건들에 대하여 우리를 어떻게 준비시켰는가? 아니면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저 충격적으로 제시할 뿐인가?
답: 임마누엘의 탄생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신 분이 어떻게 아들 아기로 우리에게 주신바 되는지를 필두로하여 52, 53장에서 절정을 이루는 메시아 사명 완수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사건을 설명했다.
이 시의 서론부(사 52:13~53:1)는 믿기 어렵겠지만 그 종이 형통하고 높임을 받을 것이나, 그의 모습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할 것이라는 놀라운 대조를 드러낸다. 사 53:2~3은 그 종의 태생과 평범한 모습에서 슬픔과 거절로의 고통스런 나락을 전개한다. 사 53:4~6은 잠시 멈추어 그분은 진실로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가 받을 형벌을 짊어지신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사 53:7~9은 다시 무덤까지 내려가는 무죄한 종의 모습을 묘사한다.
사 53:10~12을 보면 그 종은 사 52:13에서 예고했던 대로 높임을 받으며 여기에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희생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통찰까지 더해진다. 이 시와 빌 2:5~11을 비교해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셨지만 자기를 비우셔서 인간의 모양을 취하시고 모든 죽음 중에서 가장 비천한 죽음인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심히 높여서 만인으로 하여금 그를 주로 인정하게 하셨다(사 49:7 참고).
<부가설명>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겸손하게 굴복하고 성령의 지도를 받았으면 이사야서의 기록만으로도 구주의 탄생과 성장과 봉사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을 그들의 이기적 욕망에 일치되게 해석” 하였음으로 바르게 깨달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지식이 성경을 해석할 권위가 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모세가 광야에서 불붙어 타오르지만, 나무가 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을 자기의 지식과 경험으로 해석할 수 있었겠는가? 기이한 ‘큰 광경’이었을 뿐이다. 그것을 알려면 그는 신발을 벗어야 했다. 자기의 모든 것은 해로운 것을 깨닫고 배설물처럼 버려야 했다. 바울이 그렇게 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신을 벗을 줄 몰랐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들의 신발끈을 더욱 단단히 조여맸다. 벗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성경을 그들의 이기적 욕망에 일하게 해석하는 길만 모색하였다. 여호수아에게 군대 장관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에 여호수아의 모든 전략과 전술을 벗어던지고 오직 하늘의 군대 장관의 작전을 따르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칠 때 여호수아가 이 일에 실수한 것이다. 작은 성이지만 패배했다. 구원의 역사에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학위와 지위가 다 해롭다는 것을 깨달으면 얼마나 좋을까? 배설물로 내다버리고 오직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깨닫는 경험에 이르도록 굴복한다면 우리는 희망이 있다. 아멘.
교훈 :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 찬양과 높임을 받으시는 메시아는 원래 하나님이셨지만 먼저 인간으로 오셔서 비천한 죽음을 당하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3월 2일(화) 누가 믿었느냐? (사 52:13~53:12)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
사 52:13에서 하나님의 종은 높이 들린다. 그러나 그다음 절에서 그는 예고도 없이 인자(人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상한다. 신약은 예수님의 모습이 상한 원인을 그분이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며, 십자가에 달리고, 무엇보다도 인류의 죄를 지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는 결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그래서 죄를 짊어지신 ‘인자’의 모습은 인간의 형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이것을 커다란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졌다가 졸지에 비참한 상태로 전락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었던 욥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라(욥 1~2장). 욥의 모습은 너무나도 크게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친구들조차도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욥 2:12). 왜 욥은 고통을 당했는가? 왜 메시아는 고통을 당해야 했는가? 그들은 다 무구하여 고난당할 이유가 없었는데, 왜 고난을 겪어야 했는가?
1. 사 52:13~53:12에서 무죄한 자가 죄 있는 자를 대신하여 고통당한다는 사상이 나타나 있는 곳을 찾아보라. 여기에 우리를 위한 어떤 핵심적인 기별이 있는가?
[사52:13~53:12]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14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15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부가설명> 구주께서 이런 대접을 받고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기별을 그당시 믿은 사람들이 심히 적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그분의 이런 대우가 우리가 받을 대우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우리 대신 이런 대우를 받으시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계시한다.
사 53:1에 있는 두 질문을 보라. 이 질문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하는 도전에 대해 말하며(요 12:37~41 참고), 우리에게 잠잠히 남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그런데 이 질문들은 호소를 포함하기도 한다. 문맥 속에서 이 두 질문의 유사점은 여호와의 능력 있는 구원의 팔이 “전한 것”(53:1)을 믿는 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암시한다(사 52:10 참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 “전한 것”을 믿으라.
<부가설명> 우리에게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냐? 라는 질문은 아담의 모든 후손이 구주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예견한 질문이고 동시에 이것을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는 것을 나타낸다. 구주의 고난은 전적으로 우리의 고난이다. 구주께서 사망의 고난을 당하셨지만, 아직도 육체의 생명을 가진 우리는 그분을 믿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상태에서도 육체를 가지고 있으므로 고난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이 육체를 벗고 신령한 몸을 입을 때까지 육체의 생명이 있는 동안 사망의 세력은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죄 아래로 끌고 가려고 하고 우리의 신령한 생명인 거듭난 생명은 이것을 거절하기 때문에 두 사이의 전쟁이 계속된다.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라고 가르쳤다. 다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라고 하였다. 재림성도로서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성령의 소용으로 이겨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망하셔서 사망의 세력을 멸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육체에 있어 행하지만 육체대로 살지 않는 능력을 받은 것이다. 이 능력이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는 은혜이다. 부디 이 은혜로 날마다 승리하는 이스라엘이 되도록 성령께서 주장해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교훈 : 하나님의 종은 인간이 당할 죄의 짐을 짊어져서 그 모습이 극도로 일그러졌지만, 그는 참으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메시아였다.
3월 3일(수) 구제할 수 없는 자들은 바로 우리 (사 53:3~9)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연약한 순 같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서 멸시를 받는 사람, 이것이 우리에게 제시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었다(사 53:2~3). 이사야는 그의 순진한 성장기를 지나쳐 곧바로 수렁의 끝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우리는 어느 정도 그 배경을 알고 있지만 아직 그 종의 최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너무하지 않은가! 이사야는 평강의 왕으로 태어난 그 아기를 소중히 여기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왔다. 다른 이들은 그분을 멸시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이 정말 누구신지를 알기 때문이다.
“원수가 누군가 봤더니 바로 우리였다”는 말이 있다. 그 종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도망했을 때 다윗 왕(삼하 15:30)도 그 같은 멸시와 거절과 고초의 경험을 겪었다. 그러나 그 종이 짊어진 고난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자기가 지은 죄의 결과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어떤 개인만을 위해 그것을 짊어진 것도 아니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사 53:6)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곧 시험하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도록 선택되었다. 하지만 왜인가? 이사야는 상상하기 어려운 진리의 완성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는 구제할 수 없는 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 그런데 그 구제할 수 없는 자들이 바로 우리였다!
이런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종이 “하나님께 맞으며”(사 53:4)라는 구절에 주목한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고통받는 원인이 그에게 있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라고 여쭈었던 것처럼,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본 자들은 더 끔찍한 것을 추측한다.
모세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신 21:23, 민 25:4)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사 53:10). 왜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갈 3:13)시기 위해서였다. 또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고후 5:21)기 위해서였다.
<부가설명>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전적으로 우리의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무엇 때문에 고난 당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분의 피조물이 창조주를 떠나면서 창조주께서 주신 생명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창조를 무효하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피조물이면서 지혜가 온전했던 루시퍼의 욕망이었다. 그는 자신이 창조주와 같이 되겠다는 외람된 사상을 싹틔운 것이다. 그것이 맺은 열매가 창조주와 관계를 끊는 것이고 결과는 존재와 생명을 잃는 것이었다. 이런 결과에 이른 것을 알고 그의 존재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구의 인류를 자기편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이것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분은 이 사탄이 된 루시퍼를 우주에 고발하고 우주가 그를 정좌하도록 하셔서 그가 우주 안에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는 자인 것을 시인하도록 기간을 주셨다. 그것이 지구가 당하는 고난의 긴 기간이다. 이 지구에 아담의 자손을 출생한 모든 사람들은 이 때가 올때까지 고난을 당하고 육체의 생명으로 허락된 기간만 생존한다. 그것이 각 사람의 수명이고 세상 끝은 이 죄의 지구 수명이 끝나는 때이다. 그때가 구주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마지막 심판 후에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을 불 못에 던져 그 존재를 영원히 없어지게 할 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소망이 이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신령한 몸과 영생하는 생명으로 생명이신 여호와 삼위와 함께 새 하늘 새 땅에서 행복한 중에 영생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구주께서는 그런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을 감당하시고 결과를 만족히 여기신다고 하셨다.
교훈 :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죄의 저주를 받고 고난을 당하도록 허락된 이유는 오직 구제 받을 가망이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3월 4일(목) 우리를 변화시키는 속건제물 (사 53:10~12)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사 53:10).
1. 그 종의 생명이 ‘속건 제물’이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사 53:10)
[사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답: 속건제는 ‘아샴’인데 알고 지은 죄를 사함 받는 제사이다. 우리가 알고 잘못한 것들, 또는 고의적으로 저지른 허물들을 사유해주시는 제사이다.
여기에 언급된 히브리어는 ‘속건 제물’(레 5:14~6:7, 7:1~7)을 가리키는데, 이로써 다른 사람에 대한 고의적인 허물이 속죄되었다(레 6:2~3). 이사야는 이러한 허물들을 열거하였다(사 1~3장, 10:1~2, 58장). 또한 죄인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서 용서를 받기 전에 반드시 피해를 입은 상대에게 얼마를 더하여 돌려주어야 했다(레 6:4~7, 마 5:23~24). 하지만 고의가 아닌 부주의로 하나님께 속한 성물에 대하여 범과하였을 때에는 그 범과를 하나님께 갚았다(레 5:16).
이제서야 우리는 사 40:2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때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간 그분의 백성에게 그들이 지은 모든 죄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지불했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위로하셨다. 그러나 배상 후에는 반드시 희생을 바쳐야 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하나님의 종이 각기 제 길로 간 백성(사 53:6)을 위해서 어린 양처럼 도수장으로 끌려간다(7절).
비록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사 53:8)지고, 희생 제물로 살라져서 우리를 위한 소망의 불꽃을 일으킬지라도, 그 종은 돌아올 수 없는 곳, 즉 죽음으로 나아갔다가 결국 높임을 받고, “그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었다(사 53:10~12).
2. 아래의 성경절들을 살펴보라. 각 성경절은 이사야 53장과 기본적으로 어떤 동일한 기별을 드러내는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갈 2:16).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빌 3:9).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답: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아는 죄를 사유하시는 것도 포함되었다. 우리 죄 사함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신 것을 잘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희생하셨다. 생명을 속전으로 지불하신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은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속량, 또는 대속이라는 말은 값을 주고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을 뜻한다. 그 죄의 값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속죄라는 말에도 그런 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때로 속죄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으로 성취되기도 한다(민35:30~33 참고). 그러나 대속, 또는 속량은 다른 사람이 죄의 값을 대신 갚아주고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이다. 민수기 35장에 기록한 대로 고의적인 살인은 대속할 수 없다. 고살자가 자기 목숨을 내어줘서 고살죄가 속죄되지만 그 속죄는 그가 죽는 것으로 끝이 나고 그가 고의적으로 피를 흘려 더럽혀진 땅이 정결하게 될 뿐이다. 예수님은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의 죄, 곧 아담 안에서 죽은 사망을 당신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여 갚아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죽지 않을 수 있게 하셨다. 조건은 예수께서 그렇게 갚으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다. 그리고 또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아는 죄를 사유하시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의 신앙생활 중에 저지르는 허물들을 사유하시는 값도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것이다. 우리의 죗값을 누가 받았는가? 언젠가 한 번 말한 기억이 있지만, 죗값은 아버지 하나님께 드렸다. 죄은 하나님께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14절에 분명히 기록하였다. 우리가 진심으로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사유 받는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결단코 죄를 짓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용서를 믿고 고의적으로 죄를 계속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속죄로 내야 할는지 모른자. 계속적으로 고범죄를 짓기 때문이다.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19:13). 아멘.
교훈 :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3월 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 유한한 존재가 속할 수 없는 것이라면 죄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신성만이 처리하실 수 있는 것이라면 과연 그 저주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증언한다. … 아, 성령의 감동으로부터 그들을 완악하게 하고 도덕적인 감각을 억누르는 강력한 미혹의 세력이 있단 말인가?”(엘렌 G. 화잇, Our High Calling, 44).
“하나님의 정부의 율법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으로써 높임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의 짐을 지시게 되셨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그러한 성육신(成肉身)과 사망을 통해서이다. 그분은 신성으로 견디셨기에 고난을 참으실 수 있었다. 또한 주님은 불충성의 오점이나 죄가 전혀 없으셨으므로 인내하실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징벌의 공의를 짊어지시고 인류를 위하여 승리하셨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높이고 고결하게 하심으로 인류에게 생명을 보증하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0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사 53:7~9은 심연의 깊은 곳까지 내려갑니다. 즉 하나님의 종이 죽어서 장사됩니다. 이 말씀에서 얼마나 많은 내용이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성취되었습니까?(마 26:57~27:60, 막 14:53~15:46, 눅 22:54~23:53, 요 18:12~19:42)
※ 예언한 내용이 문자대로 성취되었다.
➋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율법을 존귀하게 한다는 엘렌 G. 화잇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그분의 죽음이 율법의 영속성을 증명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죄의 본질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폐하지 않는 한 율법을 범한 죗값을 지불해야 한다. 지불하는 것은 율법이 폐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요약 : 이사야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의 탄생과 신원과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침내 우리에게 소망을 안겨준 가장 큰 비극적인 사건을 밝혔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길을 잃고 방황하며 구제하기 어려운, 우리 같은 자들을 구하시기 위해서 자원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과 형벌을 짊어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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