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내 백성을 위로하라(질문, 대답, 설명) 0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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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02-13 07:04 조회5,751회 댓글0건본문
제8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월 20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16분
● 연구 범위 : 사 40장
● 기억절 :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40:9).
“1945년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라는 일본군은 괌의 밀림 속에 숨어 있었다. 미군이 살포한 전단에는 평화가 도래했다는 선포가 있었지만 요코이는 다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천황에게 바친 충성서약을 기억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바깥세상과 접촉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밀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연명해야 했다. 전쟁이 끝난 지 27년이 지난 1972년의 어느 날, 사냥꾼들은 우연히 물고기를 잡고 있는 요코이를 발견했다. 그는 그때서야 평화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동료들이 기나긴 평화를 누리는 동안 요코이는 혼자 궁핍과 긴장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Roy Gane, Altar Call (Berrien Springs, Mich.: Diadem, 1999), p. 304, adapted.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그분의 백성이 겪고 있는 압박과 시련의 때가 정말 끝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사 40:1~2).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자.
※ 학습 목표
깨닫기 : 인류에게 가장 절실한 필요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말씀에서 비롯된 위로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춘다.
행하기 :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도록 복된 소식을 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➋ 바벨론으로 붙잡혀 간 유다 백성에게 이사야의 예언은 어떤 위로가 되었을까요?(사 40:1~2)
※ 회복의 소망이 되었다.
➌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했을까요?(사 40:3~5)
※ 높은 산은 낮추어야 하고 골짜기는 돋우어야 했다. 회개해야 했다.
➍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분이 창조주라는 사실은 얼마나 큰 용기와 힘이 됩니까?(사 40:25~31)
※ 피곤한자에게 힘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곤비하지 않고 피곤치 않다.
➎ 그대는 이런 위로의 기별과 복된 소식을 전하는 일이 어떤 사람들에게 위임되었다고 생각합니까?(사 40:9, 행 1:8, 계 14:6)
※ 남은 자손 진리를 깨닫고 생활하기를 원하는 사람 남은 자손에게 위탁되었다.
➏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준비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소식을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요?
※ 진정한 회개와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지혜와 그것을 실천하는 인격과 생활로 할 수 있다.
결론 :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고, 그분에게 우리를 구원할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2월 14일(일) 미래를 위한 위로 (사 40:1~2)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사 40:1~2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징벌’의 시간은 마침내 끝났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징벌’을 말하는가?
[사40:1,2]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답: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적으로 당한 여러 침략과 정복의 경험들을 말한다. 또한 미래에 있을 바벨론의 압제에 관하여서도 예언적으로 해당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다양하다. 그들의 역사에는 하나님이 진노의 막대기(사 10장)로 사용하신 앗수르에 의한 징벌이 있었다. 반면 하나님은 기원전 701년에 산헤립의 군대를 치심으로 유다를 건지셨다(사 37장). 또한 거기에는 바벨론에 의해 집행된 징벌도 있었다. 히스기야가 므로닥발라단의 사신들에게 그의 보물들을 다 보여주었던 탓에 유다는 많은 성물과 백성을 빼앗겼다(사 39장). 또한 거기에는 이사야가 경고의 기별을 보냈던 이방 민족들 중 하나에 의해 집행된 형벌도 있었다(사 14~23장).
사 7:17에서 38:6까지는 앗수르 또는 앗수르 사람(들)이라는 단어가 무려 43번 등장한다. 반면에 그 뒤로는 오직 한 번, 과거에 있었던 애굽의 압제와 ‘앗수르’의 압제에 대해 언급하는 사 52:4에서만 등장한다. 이사야서의 후반부에서는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이 언급되는데(사 43:14, 47:1, 48:14, 20), 유다의 포로들을 해방시킨 사람은 기원전 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 왕 고레스이다(사 44:28, 45:1, 45:13).
이사야 1~39장은 기원전 701년에 있었던 앗수르로부터의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사야 40장부터는 그로부터 약 150년을 뛰어넘어 기원전 539년에 있을 바벨론의 종말과 그 후에 있을 유대인들의 귀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이라는 주제는 이사야서 앞부분의 어떤 내용과 연결되어 있는가?
답: 이사야 39장의 히스기야 왕의 실수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바벨론 문병 사절단에게 그를 치료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소개하는 것을 망각하고 자기 보물 자랑으로 자기 영광을 높이는 실수를 한 것이다. 그때 이사야가 바벨론의 침략을 예언했다.
이사야 39장은 히스기야의 자손 중 몇 명이 바벨론에 사로잡혀갈 것에 대해 예언함으로써(6~7절) 이어지는 장들의 전환점 역할을 한다.
더욱이 사 13~14장과 21장은 바벨론의 함락과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져다줄 해방을 예언한다. 하나님은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그들의 땅에 두시리니…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네가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사 14:1)실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 왕에 대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할 것이었다(사 14:3). 사 40:1~2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고난이 끝날 것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사 14:1~4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주목하라.
<부가설명> 이사야 39장까지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주신 예언이고 40장무터는 미래에 관한 예언으로서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을 뛰어넘어 영적 하나님의 백성들과 관련된 예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사야 66장을 성경 주성에 비견해서 말한다. 구약이 39권이고 신약이 27권으로서 구약은 예수님 이전의 사실을 바탕으로 주신 예언이고 신약은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주신 복음인 것처럼, 이사야 39장까지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한 내용이고 40절부터는 미래의 이루어질 복음적 사실을 예언한 기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옛날 이스라엘을 주위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마침내 해방하여 고국에 돌아오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의 세상, 사망의 권세에 고통을 당하지만,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그분의 재림으로 영원한 세상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을 아름다운 필치로 기록하였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사야서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옛 이스라엘을 이방 권세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망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새 하늘 새 땅에 살도록 이끄시는 구원의 복음을 이사야 서에서 분명히 배울 수 있다.
교훈 : 앗수르가 공격했을 때도,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켰을 때도 하나님은 고통받는 그분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구원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2월 15일(월) 임재, 말씀, 길을 예비함 (사 40:3~8)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사 40:4).
1.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위로를 받는가?(사 40:1~8).
[사40:1~8]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답: 고난의 때가 끝났고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 말로 위로 하였다. 이런 약속을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이기 때문이 그 말씀을 믿고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위로하였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오신다(3~5절). 인간은 풀처럼 시들어도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는 선포가 들린다.
하나님의 백성은 시내산에서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며 말씀을 받았다. 그러나 배교로 말미암아 이내 그분의 임재와 말씀을 잃었다가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난 후에 그것들을 되찾았다. 그분의 임재와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의 기본 요소들로서 둘 다 성소에 간직되었다(출 25:8, 16). 그러나 그들이 언약을 위반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전을 떠나셨다(겔 9~11장). 그런데 이제 다시 오실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구원과 소망을 가져다준다.
2. 주님의 오심을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사 40:3~5)
[사40:3~5]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답: 사막과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해야 한다. 곧 모든 땅을 고르게 하여 평지의 대로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회개로 주님의 임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거친 길은 어떤 왕에게도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왕이 오기 전에 평탄하게 되어야 한다. 하물며 왕 중의 왕을 위해서라면 어떻겠는가! 그분은 포로 기간 동안 일종의 성소가 되셔서 그들과 함께 계셨으므로 분명히 동쪽에서 오실 것이었고(겔 11:16), 따라서 그쪽의 지형이 고르게 되어야 했다. 다이너마이트와 불도저를 써서라도 예루살렘 동쪽의 울퉁불퉁한 언덕을 지나는 고속도로 수준의 토목 공사가 진행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굽은 데를 곧게 할”(사 42:16) 하나님뿐이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룹들이 이끄는 하늘 병거를 타시기 때문에 교통수단을 위한 도로는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겔 1, 9~11장).
신약은 분명하게 이사야의 예언을 침례 요한의 설교를 통한 영적인 평탄작업에 적용한다(마 3:3). 요한의 기별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였고, 그가 베푼 침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막 1:4)였다.
길을 평탄하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와 임재의 위로를 얻기 위해 기꺼이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를 의미한다. 렘 31:31~34은 유다 포로들이 하나님을 위해 길을 평탄하게 하는 작업의 영적인 본질을 이해하도록 한참 동안 똑같은 영적인 기별을 선포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원하는 자들에게 새로운 출발 곧 새 언약을 약속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마음에 그분의 법을 기록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서약하신다. 그들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안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오도록 길이 수축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으로 하여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오시는 왕을 맞을 준비로 사람들은 회개해야 한다고 외친다. 우리가 구주를 초청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 약속은 구원받을 사람들과 의논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결정이고 통지였다. 그러나 구원받아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약속을 받아들이고 구주를 맞을 준비는 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는 구주가 없이는 생명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죄 사함을 받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주를 영접할 길을 닦는 것이다. 우리가 괭이와 삽을 들고 나가서 산을 깍고 골짜기를 메우는 일을 하는 노역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자기 마음을 그렇게 다스리면 된다. 그것도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깨우칠 때 가능하므로 인간의 노력은 낄 자리가 없다. 성령님의 감동과 이끄심을 받아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쉽지 않은가? 그런데 죽을 인간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서 이것이 잘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도 진심으로 주님께로 돌아가서 재림하실 주님을 위하여 길을 닦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죄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에서 비롯된 위로와 구원이며 왕이신 하나님을 모시기 위한 회개와 겸손이다.
2월 16일(화) 전도의 기원 (사 40:9~11)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사 40:9).
1.사 40:9~11에는 어떤 종류의 사건이 묘사되어 있는가?
[사40:9~11]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답: 여호와께서 강한 자로 임하셔서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실 것이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아름다운 소식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건이다.
원어 성경을 보면 예루살렘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남성 선구자가 이사야서의 후반부에 나타난다(41:27, 52:7). 그러나 사 40:9에서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산에서 선포하는 선구자는 여성이다.
시 68편에서 다윗은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6절)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기에서 언급된 내용은 애굽에서 경험한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키지만, 이사야는 같은 개념을 두 번째 ‘출애굽’인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에 적용한다.
이사야의 이 예언은 신약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
신약은 이사야 40:3~5을 자기 백성 가운데 육체로 오시는 영원한 말씀(요 1:14)이신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던 침례 요한에게 적용한다.
물론 요한보다 더 일찍 그분이 오셨다는 소식을 전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 나이 많은 시므온과 안나가 있다. 그들은 아기 예수께서 성전에 봉헌되실 때에 그분을 만났다(눅 2:25~38). 이사야서에 나오는 선구자들처럼 그들은 남성과 여성이었다.
시므온은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눅 2:25~26). 이사야의 예언에 비추어 볼 때, 여선지자 안나가 성전이 있는 산인 시온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눅 2:38)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 강림하셨다는 복음의 전파, 곧 기독교 전도의 기원이다. 나중에 그리스도께서는 지구에 대한 그분의 선교 사명이 완수되었음을 인증했던 부활의 소식을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에게 맡기셨다(요 20:17~18). 육체는 풀과 같으나 육신이 되신 거룩한 ‘말씀’은 영원하시다(사 40:6~8 참고).
<부가설명> 히브리어가 남성 단어인지 여성 단어인지 살펴서 9~11에 소식을 전하는 자가 여성이라는 것을 가려주었다. 실제적으로 안나가 여선지자였고 부활의 소식을 맨 먼저 알고 제자들에게 전한 자도 여자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러나 성경에서 나라들은 다 여성 단어이다. 그러므로 여성으로 표현된 것은 상징적으로는 이스라엘 나라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교회도 여성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여성으로 표현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후반부에 남성도 참가하는데, 복음을 전하는 신자 개별적으로 나타낼 때 남성이 전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겠는가. 동시에 복음을 전파하는 주인이 남자이신 예수님이신 것도 암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복음은 남녀 구분없이 전파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 구성원들을 보면 여성들이 많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구성원 개개인이 목자적인 사명을 수행하면 주님의 교회는 활성화 될 것이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가 크게 분내서 혼신을 다하여 복음을 방해하고 있다. 여자의 남은 자손들도 혼신을 다하여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이사야 40장의 예언대로 왕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백성을 속량하신다는 아름다운 소식은 평범한 남녀들에게 위탁되어 전파되었다.
2월 17일(수) 자비로우신 창조주 (사 40:12~31)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사 40:26).
1. 이사야 40장은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발전시키는가?
답: 본문에 있는 답을 읽어보자.
이사야 40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이라는 주제는 서로 얽혀있다못해 섞여 있다. 왜냐하면 이 둘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분은 강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아래가 1번 질문의 답이다.
A 자비(1~5절) : 위로,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여호와
B 능력(3~8절) : 영광, 영원하심과 인간의 연약함을 대비
A′ 자비(9~11절) :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 백성들의 목자
B′ 능력(12~26절) : 비할 데 없는 창조주
A″ 자비(27~31절) :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창조주
이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분의 영광과 영속성이라는 용어를 이용하여 소개한 다음(3~8절), 이 땅과 인간을 지으신 그분의 능력과 탁월한 지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12~17절). 땅과 땅에 속한 것들에 관한 생생한 묘사와 수사학적인 질문을 사용하는 이사야의 문체는 마치 욥에게 하신 하나님의 대답처럼 들린다(욥 38~41장 참고).
2.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사 40:18)라는 이사야의 수사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사40: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답: 그분은 창조주시라는 것이 답이다.
욥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사야에게도 그 대답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는 없다’이다. 하나님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하나님은 우상과 같다’는 식으로 행동했던 수많은 이들의 대답을 지적한다(19~20절).
이러한 관념에 대해 이사야는 응답한다. 우상을 하나님의 형상처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이미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요점을 확실하게 파악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분이 거룩한 창조주시라는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을 끌어들인다(21~26절).
하나님은 그분의 기별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주신다. 욥처럼 고난을 당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혼란스럽게 여기며 낙담했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성경의 하나님은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여호와는 그 뜻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풀어주셨는데, ‘스스로 있는 자’이다. 스스로 있다는 말은 그 존재가 자기 이외의 어떤 존재에게 전혀 의존되지 않고 자기 안에 존재 근원이 있다는 뜻이다. 우상은 사람이 만든다. 우상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창조하실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구원하실 수 있다.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생명자체라는 뜻이 있다. 그분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시면 누구에게든지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이성이 있는 말을 할 수 있다. 발람의 당나귀가 말한 것이 그 예이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그래서 피조물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 그분이 피조물을 존재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이유를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가르친다(느9:6, 계4:11). 어찌 우상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 하나님 외에 경배하는 것은 다 우상이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 구원을 의탁하는 그것도 다 우상이 된다.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다 우상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성경의 하나님 삼위일명 여호와만 믿고 경배하고 순복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의 신앙이다. 아멘.
교훈 :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피조물들을 아끼시는 창조주로서 능력과 자비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다.
2월 18일(목) 우상숭배의 문제점 (사 40:19~20)
우상숭배는 하나님과의 유일하고 친밀한 관계를 파괴하고, 그 밖의 다른 것으로 그분을 대신하게 한다(출 20:4~5, 사 42:8). 그래서 선지자들은 우상숭배를 영적 ‘간음’이라고 칭했다(렘 3:6~9, 겔 16:15~19).
1. 사 41:29을 읽어보라. 이사야는 우상의 특징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그대는 그의 설명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어떤 우상에 대해서도 그러한 설명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41:29]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
답: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라고 했다.
고대의 우상숭배자들은 우상의 형상과 상징물들을 통해 자신이 힘 있는 신적인 존재를 숭배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떤 신을 상징하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고 한 첫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금송아지(출 32:4~5)같이 설령 어떤 우상이 참되신 하나님을 대표하려는 의도로 사용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그분의 형상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으며(신 4:15~19), 어떤 것으로도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영광과 위엄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상은 그 자체로 어떤 신의 기능을 하며, 그것을 섬기는 것은 첫째와 둘째 계명을 범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성전을 통해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셰키나)가 있기 때문에 우상이 필요하지 않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그분의 실제적인 임재를 우상으로 대신함으로써 그분의 임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2. 오늘날의 교회 안에는 어떤 우상이 더욱 교묘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가?
답: 신학적 이론과 종교적 활동이 구원에 필요한 요소라는 사상이 아닐까?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대신한 것은 확실히 우상이다.
고대의 문헌들을 보면 우상숭배는 매력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물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 형식을 사용함으로써 우상숭배자들은 그들이 믿는 세력들이 그들에게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구(自求)적인 신앙에 불과했다.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가 회복의 기별을 전하고 길이 예비되어 주께서 다시 오시기 직전에(말 4장 참고), 우리는 이사야의 시대처럼 창조주를 경배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을 경배할 것인가(계 13~14장 참고)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쨌든 무엇인가를 항상 숭배하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마지막 시대만이 아니고 기독교 역사적으로 4세기에 교회 안에 들어온 이교적 사상이 오랜 세월 교회 안의 우상으로 자리 잡았고, 이제는 그것이 마치 성경의 진리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어버린 굳어진 우상이 되었다. 그래도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던 시대로 여기시고 오래 참으셨다. 그러나 예언하신 때가 되었을 때 그 우상을 타파하라고 확실하고 엄중한 기별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주시고 그것으로 예수 믿음을 지키도록 하셨다. 이 기별을 거절하면 또 한 번 우상숭배를 고집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때는 자비가 없는 진노의 포도주가 부어질 것이다. 주신 기회를 계속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자비와 은혜의 손길을 거두실 것이기 때문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에게 직통으로 노출 될 것이고 그래서 사망의 세력의 사망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세력은 우리를 삼키려고 호시탐탐(虎視眈眈) 노리고 있다. 성경대로 하면 사시탐탐(獅視眈眈)이다. 즉 우는 사자처럼 삼킬자를 찾는 마귀 사자에게 삼키고 말 것이다(벧전5:8). 우리는 정신 차리고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고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 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고후13:8).
교훈 : 우리가 비록 눈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망각한 채 다른 것에 애정을 빼앗긴다면 그것이 우리가 숭배하는 우상이 된다.
2월 1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선지자와 왕>, 311~321 ‘너희 하나님을 보라’를 읽어보라.
“이사야의 시대에 인류의 영적 지각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로 인하여 어두웠다. 오랫동안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창조주를 죄와 고통과 죽음의 장본인으로 여기게 하려고 애써 왔다. 이와 같이 사탄에게 기만을 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엄하고 가혹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죄인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위해 감시하는 분이시며 죄인을 돕지 않을 합법적인 구실만 있으면 그를 받아들이기 싫어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대기만자에 의하여 하늘을 다스리는 사랑의 율법이 사람들의 행복을 제한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들이 피하기를 원하는 무거운 짐으로 오인되었다. 대기만자는 그 계명들은 순종할 수도 없고 그것을 범한 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은 독단적으로 가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선지자와 왕, 31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사 40:12~31의 기별을 여러분의 언어로 요약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시각적으로 제시해 줄 수 있는 과학적인 사실들을 사용해 보십시오.
※ 무엇이든지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올바르게 섬기지 않게 하는 요소들은 다 우상이다. 우주만상은 창조주가 계심을 증명한다(롬1:20). 집마다 지은이가 있듯이 만물을 지으신분은 하나님 여호와이시다(히3:4).
➋ 이사야는 말씀의 영원함을 인생의 무상함과 어떻게 대조했습니까?(사 40:6~8) 그것은 그대가 품고 있는 부활의 소망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욥 19:25~27, 단 12:2, 고전 15:51~57, 살전 4:13~18)
※ [사40:6~8]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인생은 풀과 꽃과 같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은 영원하다고 대조했다.
➌ 사 40:12~31의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교만과 자만의 문제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요?
※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굴복하는 인격과 믿음으로 살게 될 것이다.
요약 :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고통받는 자들에게 위로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고난의 시간은 끝났으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아오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과 혼란을 겪는 대신 창조의 능력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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