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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하나님 행세를 함(질문, 대답, 설명) 02/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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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1-01-30 02:43 조회5,4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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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하나님 행세를 함

 

2월 6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1분

 

● 연구 범위 : 사 13~14장, 24~27장.

 

● 기억절 :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사 25:9).

 

“어떤 목사가 교만에 대하여 양심을 일깨우는 설교를 하자, 그 설교를 들은 한 여성이 기다렸다가 그에게 말하기를, 자신의 큰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 죄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교만의 죄를 지었는데요, 저는 며칠 전에 거울 앞에서 저의 미모에 감탄하며 한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었답니다.’ 그러자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것은 교만의 죄가 아니라 착각의 죄입니다.’ ”―C. E. MaCartney, compiled by Paul Lee Tan, Encyclopedia of 7700 Illustrations, p. 1100.

힘센 천사의 마음속에서 죄가 생겨난 이래, 교만은 천사나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한정 퍼져나갔다. 영적인 교만을 품은 사람의 마음속보다 죄의 문제가 더 심각하게 나타나는 곳은 없다. 안타깝게도 영적인 존재들 속에 자리 잡은 이러한 속성은 너무도 부패하여 그들을 위해 누군가 무엇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없을 정도였다.

이번 주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교만’과 ‘자고(自高)함’의 기원을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의 심판이 그분의 사랑만큼이나 부인할 수 없는 공의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한다.

느끼기 : 자신을 높이려는 사탄의 정신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시는 예수님의 성품을 앙망한다.

행하기 : 최후의 승리를 보증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여 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➋ 악의 세력이 받는 심판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적극적인 행동입니까? 아니면 그저 죄가 가져오는 자멸의 결과일 뿐입니까?

※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그들이 죄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형벌하시는 것이다. 

➌ 사탄의 정신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죄와 파멸의 시발점이 되었습니까?(사 14:12~15)

※ 교만인데 곧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하려는 정신고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낸 것이다.

➍ 바벨론의 종교는 어떻게 사탄의 정신과 유사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정신이나 하나님을 믿는 은혜의 종교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창 11:4, 빌 2:5~8, 창 28:12~17)

※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늘을 얻어서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정신은 겸손과 섬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있게 하는 것이다. 

➎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날에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요?(사 26:1~8)

※ 정직과 신실함과 하나님의 이름을 항상 사모하는 정신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이다. 

 

결론 : 선과 악의 대쟁투 사이에는 중립지대가 없습니다. 우리가 따르고 섬기기로 선택한 것이 우리가 받을 심판의 결과를 결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게도 그분께서 이미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분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1월 31일(일) 열국에 임한 심판 (이사야 13장)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사 13:6).

 

사 13:1은 이사야를 저자로 소개하는 머리말이다(1:1, 2:1과 비교). 여기서 이사야서의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사야 13~23장은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의 계시를 담고 있다.

 

1. 여러 나라에 대한 예언이 바벨론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바벨론은 이 여라 나라를 정복하고 굴복시킬 장래 세력이며, 특히 유다를 정복하고 국민을 포로로 잡아갈 세력이기 때문이다.

 

앗수르에 대한 심판은 이미 사 10:5~34에서 선언되었다. 앗수르는 이사야 당시에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래서 앗수르를 무너뜨리기 위한 여호와의 계획은 사 14:24~27에서 잠깐 되풀이 될 뿐, 13~23장에서는 주로 다른 나라들, 특히 바벨론에 대해 다룬다.

풍부하고 오래된 문화, 종교, 정치적 유산을 부여받은 바벨론은 후에 유다를 정복하고 포로로 잡아가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한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이사야 당시의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이사야가 사역했던 시대는 대부분 앗수르가 바벨론을 지배하던 시기에 있었다. 디글랏 빌레셀 3세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바벨론의 왕을 ‘불루’(Pulu; 왕하 15:19과 대상 5:26에는 ‘불’로 언급됨)라는 이름의 왕좌 아래 둔다고 선언했던 기원전 728년 이래, 앗수르 왕들은 바벨론을 여러 번 정벌했다(기원전 710, 702, 689, 648년). 그러나 바벨론은 마침내 그 지역의 초강대국이 되었고, 유다 왕국을 몰락시키는 세력이 되었다.

 

이사야 13장 전체를 읽어보라. 왜 사랑의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하시며,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가? 이렇게 하면 분명히 무고한 백성이 고통을 당하지 않겠는가?(사 13:16).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말씀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언급하는 모든 성경절은 죄악의 참혹한 본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답: 이것은 이런 지경에 이르는 나라와 백성들의 생각의 결과를 보여주신 것이다. 재앙은 사람들의 생각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아주지 않으실 뿐이다. 그들이 막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이렇게 반응하셨다는 사실은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가 아닌가?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 이러한 경고를 발하신 분이 용서하고 고치며 호소하고 권고하시는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탄식하신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렘6:19).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은 그들의 생각의 결과이다.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유지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잠시라고 가리시면 세상은 무서운 파괴에 빠질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뱀을 만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에 대하여 대단히 불평했기 때문이다. 광야는 평탄한 환경이 아니다. 거기는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건조한 땅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렘2:6). “남방 짐승에 관한 경고라 사신들이 그 재물을 어린 나귀 등에 싣고 그 보물을 약대 제물 안장에 얹고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및 날아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위험하고 곤고한 땅을 지나 자기에게 무익한 민족에게로 갔으나”(사30:6). 이스라엘 백성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애굽을 찾아가는 상태를 묘사한 말씀인데, 그들이 가는 따은 역시 옛날에 그들이 지나온 땅이다. 광야를 건너 애굽에 도움을 구하러 가는데 그 땅이 불뱀이 나오는 위험한 땅이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은혜와 자비의 손으로 막아주시면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다. 그런데 백성이 그 길에 대하여 대단히 불평한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보호하시던 손을 거두자 불뱀이 나와서 그들을 물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로1:28). 이것이 이사야 13장의 예언의 바탕이다. 

 

교훈 :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죄의 심각성을 증명하며 공의는 사랑만큼이나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2월 1일(월) 큰 성 바벨론 (사 13:2~22)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 그곳에 거주할 자가 없겠고 거처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사 13:19~20).

 

기원전 626년에 갈대아 사람 나보폴라사르는 스스로 바벨론 왕이 됨으로써 신바빌로니아 왕조를 세웠다. 그는 메디아와 함께 앗수르를 정복하고 바벨론의 옛 영광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은 유다를 정복하고 그 백성을 유배시켰다.

 

1. 바벨론의 도성은 결국 어떻게 멸망했는가?(다니엘 5장 참고)

 

답: 벨사살 왕 때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정복하였다. 고레스는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하여 벨사살 왕이 연회를 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연합군이 바벨론 시내에 진입하여 돌연히 망하였다.

 

바벨론은 기원전 539년에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키루스)가 그 도성을 점령했을 때(단 5장 참고), 영원히 주권을 잃고 말았다. 기원전 482년에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는 바벨론이 페르시아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을 난폭하게 진압했다. 그는 바벨론의 주신(主神)인 ‘마르둑’의 신상을 제거하고, 몇 개의 요새와 신전을 완전히 파괴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주전 331년에 페르시아로부터 전투 없이 바벨론을 빼앗고 잠시 동안이나마 그곳을 제국의 동쪽 수도로 만들고자 구상했지만, 그 후 몇 세기 동안 바벨론은 쇠퇴해 갔다. 기원후 198년에 로마인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그 도시를 발견했을 때 바벨론은 완전히 황폐해진 상태였다. 그렇게 위대한 도성은 끝내 버려졌다. 오늘날 몇몇 이라크 주민들이 고대 바벨론 도성의 일부 지역에 살고 있지만 그곳을 이전처럼 재건하지는 않고 있다.

바벨론에 임한 심판(사 13장 참고)은 그 나라에 의해 억압받던 야곱의 자손들을 해방시켜 주었다(사 14:1~3). 이 일은 기원전 539년에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함으로 성취되었다. 비록 고레스는 그 도성을 파괴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바벨론에 임할 종말의 시초가 되었으며, 그 도성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사야 13장은 바벨론의 몰락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극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 성을 정복한 용사들은 하나님의 도구였다(2~5절). 심판의 시기를 가리켜 ‘여호와의 날’(6, 9절)이라 불렀으며, 하나님의 진노는 너무나도 강력하여 하늘의 별들과 해와 달과 및 온 천지에 영향을 미친다(10, 13절). 이를 사사기 5장과 비교해보라.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여호와가 나오실 때에 땅이 흔들리고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고 묘사한다(삿 5:4). 삿 5:20~21은 이방 압제자와 싸우는 과정에서 별을 포함하여 천연계의 요소들을 등장시킨다.

 

<부가설명> 신바벨론의 멸망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의 예언에 기록되었다.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소선지서들에도 기록되었다. 바벨론에 관한 예언이 이렇게 많이 기록된 것은 바벨론은 영적 바벨론의 표상이 되는 나라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벨론 왕은 또 루시퍼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바벨론의 멸망은 루시퍼와 그의 나라가 멸망할 것은 상징한다. 이사야 14:12부터 기록된 내용은 바벨론의 멸망을 빗대어 루시퍼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고, 루시퍼가 하늘에서 어떻게 반역했는지 간단한 기록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예언의 신의 증언으로 루시퍼 사건은 자세히 묘사되었다. 그가 하늘에서 쫓겨내려와서 신바벨론의 왕들을 충동해서 유대나라와 민족을 극도로 핍박하였다. 그것은 루시퍼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극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상징한다. 그러나 바벨론이 망한 것처럼 루시퍼와 그의 나라가 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예언의 성취를 통하여 마지막 때에도 영적 바벨론이 망하고 성도들이 나라를 얻는다는 예언을 굳게 믿고 예수 안에서 충성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유다를 멸망시키고 그 백성을 억압하며 큰 고통을 가했던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에 의해 멸망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해방이 임했다.

 

 

2월 2일(화) 산(山) 왕의 몰락 (이사야 14장)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2).

 

이사야는 사 14:4~23에서 바벨론의 멸망(사 13장)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사 14:1~3)에 반응하여 비유적인 조롱으로 바벨론 왕에 대해 말한다(미 2:4, 합 2:6 참고). 죽은 왕들이 구더기와 지렁이가 뒤덮여 있는 음부에서 동료에게 인사하는 장면(9~11절)은 그저 시적인 표현일 뿐이므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 오만했던 왕들이 이전의 다른 군주들처럼 낮아질 것임을 보여주는 극적인 표현 방식일 뿐 결코 사후 상태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1. 사 14:12~14은 어떻게 바벨론 왕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

[사14:12~14]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민족들을 약하게 만든 자야, 네가 어찌 끊어져 땅으로 떨어졌는가 13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도다.  

 

답: 이 구절은 루시퍼에 대하여 가르쳐주는 계시인데, 지상의 바벨론 왕을 상징적 대역으로 말슴하신 것이다. 바벨론 왕의 왕권을 주장하는 상태가 그와 같기 때문에 적용한 것이다. 

 

바벨론 왕들은 자존감의 부족으로 괴로워하지 않았다(단 4~5장).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오만하여 심지어 “지극히 높은 이”(사 14:14)처럼 되려는 열망을 품었다. 왕들은 신들과의 강한 연대를 주장하면서 그 신들을 추앙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매년 있었던 바벨론의 신년제 기간 중 제5일에 극적으로 표현되었는데, 왕이 마르둑 신상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왕의 복식(服飾)을 제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왕위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아주 작은 신이라도 제거하는 것은 무모한 자살 행위였다.

에스겔 28장에서도 이사야 14장에서처럼 감히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한 왕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 기록된 묘사도 지상의 군주에 대한 묘사를 뛰어넘는데, 그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그 신원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교만한 군주는 에덴동산에 있었고, 하나님의 성산에서 그분을 보좌하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었는데,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완전했지만 죄가 드러남으로 하나님께 쫓겨나서 끝내 불에 소멸된다(겔 28:12~18).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화려한 용어들은 인간에게 적용하기에는 무의미해 보일 정도로 상징적이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2:7~9을 보면 자기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어 쫓긴 한 강력한 존재가 나온다. 그는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이며,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속였던 자이다(창 3장). 사탄은 이런 망상을 품고 있다.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겔 28:2). 그의 죽음은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달리 사탄은 불못 가운데서 멸망하여 다시는 우주를 미혹하지 못할 것이다(계 20:10).

 

<부가설명> 이사야 당시는 바벨론은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는 작은 나라였다. 그러나 그 통치자들은 세계를 제패하고 모든 권세 위에 뛰어나는 권세를 가지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신으로 여기도록 백성들에게 군림하려는 사상을 키우고 있었다. 고대의 왕들은 대부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황제들이 그랬던 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다.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사례이다. 그처럼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샤 등의 군주들이 다 그랬다. 그것은 그들 안에 사탄이 자리 잡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이런 사실을 하나님은 잘 아신다. 그래서 장차 세계의 패권국이 될 바벨론 왕을 표상으로 루시퍼의 상태를 계시하신 것이다. 에스겔도 마찬가지이다. 거기는 두로 왕을 표상으로 루시퍼의 상태를 묘사하였다. 사람들은 작게 크게 사탄의 어떤 면을 나타낸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때로 사탄의 대리자 노릇을 한다. 그때마다 우리는 곧 주님께 굴복해야 한다. 자신이 사탄의 대리자 노릇 한 것을 회개하고 주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받아 누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바벨론 왕이 루시퍼의 대리자가 된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자주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는 우리의 이야기인 것 같다. 주님 붙들어주소서.

 

교훈 :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분의 백성을 괴롭혔던 바벨론의 왕들은 처음으로 죄를 품고 세상을 미혹하여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했던 사탄을 상징하기도 했다.

 

 

2월 3일(수) 하늘의 문 (이사야 13~14장)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4).

 

이사야 14장에는 떨어진 아침의 아들 ‘계명성’(사 14:12, 루시퍼), 곧 사탄에 대한 조롱과 바벨론 왕에 대한 조롱이 뒤섞여 있다. 왜 그런가? 계 12:1~9을 보면 사탄으로 확인되는 용(9절)은 아기 예수(5절)가 태어나면 즉시 그를 삼키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자는 헤롯 왕이었다(마 2장 참고). 용은 헤롯으로 대표된 사탄과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데, 이는 사탄이 인간 대리자들을 통해 일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바벨론 왕과 두로 왕의 배후 세력이었다.

 

1. 어떻게 ‘바벨론’이 나중에 로마(벧전 5:13) 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악한 세력을 가리키는가?(계 14:8, 16:19, 17:5, 18:2, 10, 21).

[계14:8] 또 다른 천사가 뒤따르며 이르되, 저 큰 도시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이는 그녀가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자기의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즙을 마시게 하였기 때문이라, 하더라.

[계16:19] 그 큰 도시가 세 조각으로 갈라지고 민족들의 도시들도 무너지며 또 큰 바빌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되어 그분께서 그녀에게 자신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 잔을 주시니라.

[계17:5] 그녀의 이마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계18:2,10,21] 그가 우렁찬 음성으로 힘차게 외쳐 이르되, 저 큰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그녀가 마귀들의 처소가 되고 모든 더러운 영의 요새가 되며 모든 부정하고 가증한 새들의 집이 되었도다./ 10 그녀가 받는 고통을 두려워하므로 멀리 서서 이르되, 가엾도다, 가엾도다, 저 큰 도시 바빌론이여, 저 막강한 도시여! 너에 대한 심판이 한 시간 내에 이르렀도다, 하리로다./  힘센 천사 하나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며 이르되, 저 큰 도시 바빌론이 이같이 세차게 던져져서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답: 바벨론이라는 말은 ‘하늘 문’이라는 바벨론어로는 뜻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의 놀력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늘을 차지하려는 정신이 루시퍼의 정신과 같기 때문이다. 

 

고대 바벨론처럼 로마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은 교만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잔인한 세력이다. 특히 계 17:6에 보면 그들은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반역했는데 ‘바벨론’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런 개념을 암시한다. 바벨론어로 그 성의 이름은 ‘바빌리’인데, 이는 신의 영역으로 접근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신(들)의 문’이라는 뜻이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아 올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대한 어떤 책임도 면제받는 신의 수준에 오르려고 했다.

야곱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를 꿈에서 본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하나님의 집’이 곧 거룩한 영역으로 접근하는 길인 ‘하늘의 문’임을 주목하라. 야곱은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 곧 ‘벧엘’이라 하였다. 벧엘에 있던 ‘하늘의 문’과 바벨론의 ‘신(들)의 문’은 거룩한 영역에 이르는 정반대의 길이다. 야곱의 사다리는 하늘에서 비롯되었으며, 위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 나타났다. 그러나 바벨론의 탑들과 ‘지구라트’ 신전들은 인간에 의해 땅으로부터 지어져 올라갔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로 대표되는 대조적인 구원의 경로를 상징한다. 모든 참된 종교는 겸손한 벧엘의 모델에 기초한다. 우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엡 2:8)다. 반면 율법주의와 세속적인 인본주의를 포함한 모든 거짓 종교는 교만한 바벨론의 모델에 기초한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이 둘의 대조적인 접근 방식을 보라(눅 18:9~14).

 

<부가설명> 바벨론은 고대에 이미 강국으로 존재했던 나라다. 하무라비법전으로 유명한 것이 고대 바벨론의 유산이다. 하무라비는 고대 바벨론의 왕이었다.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을 역사에서 ‘신 바벨론’이라고 부른다. 이 바벨론은 다시 영적 바벨론으로 재생되었다. 신 바벨론 정신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바벨론이라는 이름이 또한 하늘가는 문이라는 뜻이 있고,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그것을 이루려고 했다. 이런 모든 것이 루시퍼를 상징하기에 알맞은 것이다. 게다가 666이라는 숫자는 바벨론 제사장의 가슴에 붙이는 부적에 적은 숫자인데 그 수를 가로, 세로 어느 쪽으로 합해도 다 666이 되도록 하였다. 그래서 666은 바벨론 신전 제사장을 표상하는 수열이다. 바벨론은 6진법을 썼고 오늘날 한 시간이 60분이 된 것도 바벨론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느부갓네살이 만든 우상의 고가 60규빗이고 너비가 6규빗인 것도 그들이 6진법을 쓴 까닭이다. 그들은 바벨탑을 쌓을 때부터 사탄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나 영적 바벨론의 행태가 모두 루시퍼를 상징하기에 알맞은 이 세상에 존재한 왕국이다. 저자의 말대로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거절하고 자신이 하늘을 탈취하려는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다. 

 

교훈 :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신앙은 자신을 높여 하나님과 같은 지위에 이르고자 했던 바벨론의 정신 곧 사탄의 정신과 같다.

 

 

2월 4일(목) 시온의 최후의 승리 (이사야 24~27장)

 

“그날에 말하기를…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사 25:9).

 

각 나라에 대한 심판의 기별을 다룬 이사야 13~23장 뒤로 이사야 24~27장은 하나님의 원수들이 당하는 전 세계적인 규모의 결정적인 패배와 그분의 백성을 위한 구원을 묘사한다.

 

1. 황폐한 세상을 묘사하는 이사야 24장과 재림 후에 있을 천년기의 사건을 묘사하는 계시록 20장이 비슷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이사야는 세상의 황폐를 모사하여 바벨론 세력 곧 루시퍼의 세력이 망하는 무저갱의 상태를 표상적으로 나타냈다. 

 

이사야 13~14장에서처럼, 문자적인 바벨론의 특징들은 이후의 세력들에 적용되고, ‘바벨론 왕들’은 인간 통치자들의 연합체와 그들의 배후 조종자인 사탄을 상징한다. 그래서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소식(사 21:9)은 후에도 반복되며(계 14:8, 18:2), 사탄은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멸망한다(계 20:10). 고대 바벨론의 파멸이 “여호와의 날”(사 13:6, 9)에 이른 심판이었던 반면에 또 다른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욜 2:31, 말 4:5, 습 1:7)이 다가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사 24:23)리라는 이사야 24장의 이상은 선지자에게 익숙한 시대의 상황과 맞는다. 그래서 이사야는 의심 없이 그 이상이 자기가 아는 예루살렘에 적용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시록은 그것이 실제로 새 예루살렘(계 21:2)에서 성취된다고 설명한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

 

2. 하나님은 정말로 악한 자들을 멸하시는가?

 

답: 악한 자들의 악이 그들을 멸망하게 했기 때문인데, 예수께서 구원의 길을 완전히 준비했지만 거절했으므로 그들의 결정대로 집행하실 수밖에 없다. 

 

사 28:21을 보면 그러한 파괴 작업은 하나님께는 낯선 행동이다. 그 일이 그분께 이상한 일인 까닭은 원치 않게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죄가 자멸의 씨앗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약 1:15).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과 죽음의 궁극적인 권세를 가지셨으므로, 최종적인 멸망의 시기와 장소와 방법을 결정하신다(계 20장). 따라서 하나님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자연적인 인과법칙에 따라 죄의 저주를 끝내신다는 주장은 무의미한 것이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반역에 가담한 세상을 멸절하신다. 그들의 생각의 결과로 내리는 재앙이지만 그 재앙이 내리도록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주의 통치자이기 때문에 반역하는 세력을 멸하시므로 우주를 창조의 목적대로 운영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통치하신다는 외침이 복음이 되는 것이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화평을 선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구원을 선포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 복된 좋은 소식, 곧 구원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소식이다. 그곳에는 사랑이 본질인 하나님의 생명만이 주관하는 곳이다. 그래서 사랑과 평화와 행복만이 있는 곳이다. 지금 세상은 사탄, 곧 사망의 성질이 주장하는 곳이다. 모든 것이 사망으로 종결된다. 파괴와 고통과 질병과 전쟁 등등 모두 사망이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사망으로 끝난다. 사망 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는 길을 여셨기 때문에 그분을 믿을 때 사망해도 다시 사는 생명을 얻는다. 이사야는 이 사실도 분명히 기록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26:19).

 

교훈 : 이사야서는 요한계시록과 마찬가지로 바벨론으로 대표되는 사탄과 악의 세력이 최종적으로 멸망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승리할 날을 예언한다.

 

 

2월 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조건에 의한 것인가? 그것은 결코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간 다음에는 어떤 조건이 있는가? 그 조건은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의 보혈의 공로에 우리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의의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죄인을 부르시고 초청하실 때에는 조건이 없다. 그분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초청에 의한 것이지, 그분께 가기 위해 행하는 우리의 반응에 의한 것이 아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오면 갈보리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신다. 바로 그곳에 그가 이전에 소유했다고 생각했던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난 사랑이 있다”(엘렌 G. 화잇, Manuscript Releases, vol. 6, p. 3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에 인용한 엘렌 화잇의 글에서 믿음과 행함의 요소가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그녀는 믿음과 행함을 어떻게 구분하였습니까?

※ 예수님을 믿는데는 무조건이고, 믿고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자기를 예수님께 내려놓아야 하는 조건이 있다고 구분했다.

 

➋ 교만과 자만이 그처럼 위험한 죄인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을 버리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들의 속성 자체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해서 그것들을 버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이 어떻게 교만과 자만의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치유책이 될 수 있을까요?

※ 예수님께 나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게 되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된다. 그 생명의 역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 되는 것이다. 부활의 생명은 이것을 늘 묵상하게 한다. 그것이 이 생명력의 능력이고 효력이다. 

 

➌ 이사야는 다른 민족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보았습니까?(사 25:3, 6, 26:9 참고; 계 19:9 비교)

※ 당연히 그렇다.

 

요약 : 이사야는 앗수르에 이어 바벨론이 유다를 정복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엡 6:12)이 인간 대리자들을 통해 활동하고 하나님과 겨루고자 할지라도, 하나님이 결국 그들을 이기시고 불안한 이 세상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오실 것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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