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존귀한 평강의 왕 - (한글-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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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1-01-26 21:33 조회3,079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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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존귀(尊貴)한 평강(平康)의 왕(王) 2021, 01/30
(1월 24일 (일) : <갈릴리에서 불행(不幸)이 끝남 (사 9:1~5)>
(Q)~이사야 선지자의 (사 9:1~5) 예언(例言)에 전에는 고통(苦痛)받던 자들에게 흑암(黑暗)이 없고 후(後)에는 해변(海邊) 길과 요단 저쪽 이방(異邦)의 갈릴리를 영화(榮華)롭게 하셨느니라. 는 이 예언(豫言)의 뜻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A)~(이사야 8:21~22)은 참 하나님 대신 이교신앙(異敎信仰)으로 향(向)하는 자(者)들의 절망적(絶望的)인 타락(墮落) 상태(常態)에 대해 묘사(描寫)하였고, 이에 인간(人間)의 잘못된 선택(選擇)으로 말미암아 전쟁(戰爭)과 포로(捕虜)와 고난(苦難)을 경험(經驗)한 이들 민족(民族)에게, (이사야 9:1~5)의 예언(豫言)의 이중적(二重的) 의미(意味)는 ①.타락(墮落)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및 유다의 죄악상(罪惡相) 고발(告發)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歷史的) 심판(審判)에 대한 예언이며 ②.이스라엘 및 유다의 국가적(國家的) 멸망(滅亡)을 극복(克服)할 남은 자(Remnant)의 구원(救援)에 관하여 말씀하시며 ③.영적(靈的) 이스라엘을 영원(永遠)한 터 위에 세워주실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豫言)하고 계십니다.
<참조>: 선지자와 왕 373 참조 (갈릴리 호수지역(湖水地域)은 아하스의 지원요청(支援要請)에 의해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이스라엘의 영토(領土) 중에서 제일 먼저 정복(征服)된 지역(地域)이며 가장 먼저 구원(救援)을 볼 것이라는 기별(奇別)을 선포(宣布)했던 지역(地域)으로 묘사(描寫)되었으며,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救援)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갈릴리 봉사(奉仕)를 시작하시는 것으로 성취(成就)되었다.)
(1월 25일(월) : <우리를 위(爲)한 아들 (사 9:6~7)>
(Q)~(이사야 9:6~7)에 나오는 이 아기의 특별(特別)한 점과 이 세상에 오신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이사야는 온 세상의 왕으로서 정사(政事)를 메신 메시아의 명칭(名稱) 몇 가지를 소개(紹介)하고 있다.
①.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신적(神的) 권위(權威)를 ②. “기묘자(奇妙者)” “모사(謀士)”는 통치자(統治者)로서의 능력(能力)을 ③. “평강(平康)의 왕(王)”은 통치자(統治者)로서의 덕성(德性)과 사랑을 의미(意味)한다. 즉 하나님 백성의 나라를 굳게 세우는 그 기본 방법(方法)은 정의(定義)와 공의(公義)이고 그 동기(動機)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熱心)임이 시적(詩的)으로 묘사(描寫)되어있다. “여호와의 열심”이란 세속적(世俗的)으로 표현(表現)하자면 “신의(信義)와 정열(情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표현(表現) 속에서 우리를 향(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강(强)한 것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 이사야는 다가오는 평화(平和)로운 시대(時代)의 모습을 위대한 평화(平和)의 왕이 등장(登場)하는 놀라운 예언(豫言)으로 마무리한다. 평화(平和)는 사람의 노력으로는 이 땅에서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는 오시는 왕을 묘사(描寫)하면서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통치자(統治者)들에게도 붙여지지 않는 용어(用語)들을 사용하고 있다. (성경주석, 사 9:6)
○. 여기에 언급(言及)된 표현(表現)들을 완전(完全)하고 적절(適切)하게 적용(適用)할 수 있는 분은 분명 한 분 외에는 없으며,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세상의 구주(救主)와 오시는 왕을 묘사(描寫)하는 데 그 사상(思想)의 높음과 표현(表現)의 아름다움 그리고 감정(憾情)의 강렬(强烈)함을 성경에서 이보다 더 잘 나타낸 곳을 찾을 수 없다. (성경주석, 사 9:6)
예수님은 근본(根本)적으로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永存)하신 아버지이시다. 생명 자체(自體)이신 분이 아담의 사망(死亡)을 대신 당하시고 부활(復活)하셔서 그분이 구주(救主)이심을 증명(證明)하셨다. 구주(救主)이신 그분을 믿을 때 우리도 부활(復活)의 생명(生命)을 얻을 수 있게 하신 것이다.
(1월 26일(화) <진노(震怒)의 막대기 (사 9:8~10:34) >
(Q)~(사 9:4)의 “그 압제자(壓制者)의 막대기를 주(主)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하셨음이니 이다”라고 하신 막대기를 꺾으신다는 의미(意味)는?
(A)~하나님께서 징계(懲戒)의 막대기를 드시는 것은, “하나님이 몇 번이고 그분의 사랑과 성품(性稟)을 나타내시며 호소(呼訴)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시련(試鍊)과 고통(苦痛)과 혼돈(混沌)과 두려움 등 잘못된 결정(決定)의 결과(結果)를 맛보게 하시는 것은 그분에게서 등을 돌린 결과(結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使用)하는 자(者)들에게는 화(禍)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죄의 사슬을 부서뜨리시고 무겁게 짓누르는 죄악(罪惡)과 근심의 짐으로부터 사람을 해방(解放)시켜 주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의 타락(墮落)한 세계(世界)를 비추는 하늘로부터 온 모든 빛은 다 그리스도를 통(通)하여 주신 것이다. 각 시대(各時代)를 통(通)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인류(人類)에게 선포(宣布)한 모든 일꾼에게 말씀하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셨다.
○. 하나님이 징계(懲戒)의 막대기를 드시는 것은 계속 자비(慈悲)의 음성(音聲)을 거절(拒絶)하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돌아서도록 끝까지 호소(呼訴)하고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결과(結果)는 사망(死亡)으로 종결(終結)되는 것일 뿐이다.
(1월 27일(수) <뿌리와 한가지 (이사야 11장)>
(Q)~(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結實)할 것이요”이 말씀의 “이새의 줄기(그루터기)”에서 나는 “싹”은 누구인가?
(A)~(이사야 11장)에는 예수님의 초림(初臨)과 재림(再臨)이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동전(銅錢)의 양면(兩面)처럼 하나로 결부(結付)되어 있다. 구원(救援)의 계획(計劃)은 초림(初臨)과 재림(再臨)이 다 있어야 완성(完成)된다. 초림(初臨)은 이미 이뤄졌고 이제 우리는 모든 소망(所望)의 결정체(結晶體)인 재림(再臨)을 기다린다. 즉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이자 가지로서 다윗의 조상(祖上)이시며 또한 자손(子孫)이시다. 뿌리와 가지는 곧 예수님이시다.
(1월 28일(목) <주께서 나를 안위(安慰)하시오니 (사 12:1~6)>
(Q)~(이사야 12:1~6)의 찬양(讚揚)과(노래) (계시록 15:2~4)에 나오는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와 비교(比較)해 보면서. 두 노래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찬양(讚揚)하는가?
(A)~ 하나님의 의(義)로우심과 참되심과 자비(慈悲)와 사랑을 찬양(讚揚)하고 있다.
구원(救援)에 대한 감사(感謝)와 찬양(讚揚)으로 목전(目前)에서 횡행(橫行)하고 있던 유대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審判)과 구원(救援)의 선포(宣布)가 일단 이사야 12장을 정점(頂點)으로 끝나게 되지만 그 끝이 이처럼 감사(感謝)와 찬양(讚揚)의 권면(勸勉)으로 끝나는 것은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하나님께서 결국(結局) 사랑과 구원(救援)을 먼저 주셨기 때문에 그분의 일시적(一時的) 책망(責望)은 그야말로 더 큰 사랑을 위한 단계(段階)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이사야 12장은 시편(詩篇)의 여러 찬양시(讚揚詩)와 마찬가지로 극심(極甚)한 위기(危機)에서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救援)된 자들의 감격(感激)을 잘 묘사(描寫)하고 있다. (시편 75, 100, 107, 108편 등 참조)
○. 아담의 후손(後孫)으로 출생(出生)한 사람들은 다 사망(死亡)이다. 우리가 구주(救主) 없이 살아간다는 표현(表現)은 사실은 죽어간다고 표현(表現)해야 정확(正確)한 표현(表現)이 아니겠는가? 오직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아담 후손(後孫)의 몸을 가진 우리는 날로 후패(朽敗) 곧 썩어져가지만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날로 새롭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救援)은 결국 평강(平康)과 능력(能力)의 왕이신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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