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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그 땅에 거할 때(질문, 대답, 설명) 12/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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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12-05 05:36 조회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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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그 땅에 거할 때

(12월 1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14분)

    

연구 범위: 수 22:; 엡 6:7; 요 7:24; 민 25:; 잠 15:1; 벧전 3:8, 9

 

기억절: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공동체 생활은 때때로 갈등과 긴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교회처럼 서로 다른 배경과 사회적 계층, 때로는 완전히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이 한 목적을 위해 함께 생활하고 일하는 공동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번 주 우리는 여호수아 22장을 살펴보면서 백성들 사이의 큰 오해에서 비롯된 난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책의 초반부에 여호수아는 일부 지파들에게 요단강을 건너 요단강 서쪽 지파들과 함께 정복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다(수 1:12–18). 그 임무는 완수되었고 그들은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요단강 동편에 도착한 이들이 쌓은 제단 때문에 요단강 서편 지파들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왜 위험한 일인가? 어떻게 할 때 교회에서 연합을 이룰 수 있는가? 우리의 부르심이라는 더 큰 관점을 마음에 새기고 주변의 방해물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번 주는 이런 질문들을 다루어 볼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연합을 무너뜨리는 주변의 방해물 앞에서 우리는 부르심이라는 큰 관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느끼기: 선한 일을 할지라도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기에 항상 소통하고 유순한 말로 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행하기: 결단이나 징계의 마지막 수단을 쓰기 전에 모든 방법으로 부르심을 따라 연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TMI 위로

2. 요단강으로 나누어진 양편의 지파들이 연합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습니까?(엡 6:7)

*답: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믿음 때문이다. 모든 것을 주님께 하듯했다.

3. 동편으로 돌아간 지파들을 향한 고발의 근본적인 내용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수 22:11)

*답: 하나님 예배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4. 서쪽 지파들이 제단을 쌓은 행위를 염려하며 민감하게 말한 원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수 22:16) 

*답: 하나님께 범죄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순복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염려였다.

5. 그들을 향한 잘못된 비난에도 동편 지파들은 어떤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습니까?(잠 15:1)

*답: 온유와 겸손으로 자신들의 의도를 납득하도록 설명했다.

6. 당신은 교회의 연합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원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벧전 3:8, 9)

*답: 벧전 3:8, 9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결론: 연합을 무너뜨리는 주변의 방해물 앞에서 우리의 부르심이라는 큰 관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분리하게 만드는 요단강 앞에서도 양편이 연합하고 충성을 유지한 비결은 동료만이 아닌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함께 섬겼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할지라도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기에 서로 소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유순한 말은 비난과 어려움 앞에서도 연합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연합은 진리를 희석하고 포기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기 전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부르심을 따라 연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2월 7일(일) 헌신

 

여호수아 22:1–8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헌신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수22:1~8]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3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4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5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6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7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모세가 바산에서 기업을 주었고 그 남은 반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요단 이쪽 서쪽에서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기업을 준지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8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

*답: 요단 동편 지역을 기업으로 받은 두지파 반 장정들은 그들의 임무를 충성으로 다했고 여호수아는 그것을 인정하고 칭찬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준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 건너편의 지파들이 이스라엘의 전체 대의를 위해 크게 헌신하고 희생하여 모세와 자신이 정한 의무를 온전히 이행했다고 확언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형제들과 함께 전쟁했는데, 실제로 약 6-7년에 해당하는 기간이었다(수 11:18, 수 14:10, 신 2:14 참조). 아내와 자녀들을 요단 동쪽에 남겨둔 채, 그들은 전쟁에서 부상과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형제들과 함께 충성스럽게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 구절들은 민족과 영토의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동시에 이어지는 이야기, 곧 궁극적으로 연합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요단강이라는 뚜렷한 자연적인 경계를 사이에 두고도 이스라엘 지파들은 하나의 민족으로 연합할 것인가? 지리적 분단이 그들의 국가적 정체성마저 분리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한분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공통된 예배가 그들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신정의 인도하심 아래 강하게 연합하게 할 것인가?  

여호수아는 이러한 충성이 가능했던 유일한 방법을 설명한다. 그들은 동료 이스라엘 백성을 섬긴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 

우리는 신약에서도 이와 동일한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같이 섬기라고 권면했다(엡 6:7, 골 3:23, 살전 2:4). 궁극적으로 우주의 창조주이신 분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더 높은 소명이 어디에 있겠는가? 

일상에서 우리는 종종 낙담하게 하고 영적 투쟁을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도전과 어려움을 직면한다. 때로는 그렇게 하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당신이 요구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구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신 더 높은 부르심을 항상 기억한다면, 타락한 이 땅에서 겪는 불가피한 어려움과 낙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교훈> 요단강에 의해 갈라진 이들이 연합하며 충성을 유지한 비결은 그들은 동료 이스라엘을 섬긴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그 당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분리가 가능했던 사실에도 불구하고 분리하지 않은 이 장면은 대단히 암시적인 복음 교훈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표상하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사건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경로를 거쳐서 하늘에 이르게 되는지를 나타내는 예언적 사건이다. 여호수아서의 이 장면은 교회가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표상한다. 분리될 때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고후11:4) 작용했을 때만 가능할 것이다. 한 하나님, 한 주닌, 한 성령님의(엡4:4~6) 지도를 받는다면 어떻께 분리할 수 있겠는가? 같은 진리 같은 신조 같은 믿음 같은 소망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과 하나되는 거룩함으로 교회를 유지할 것이다. 여호수아서의 이 장면은 교회가 분리되면 안 된다는 것을 강력하게 계시하고 있다. 성경의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잘 따라가는 교회가 되도록 성령님의 압도하는 감화가 우리 재림교회에 충만하기를 바란다.

 

12월 8일(월) 고발

 

여호수아 22:9-20에 기록된 돌아온 지파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 요단강 서쪽 지파들이 동쪽 지파들을 향해 어떤 고발을 제기했는가? 이 고발에는 어느 정도 타당한 근거가 있었는가?

[수22:9~20]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 10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11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12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13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길르앗 땅으로 보내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를 보게 하되 14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지도자씩 열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하게 하니 그들은 각기 그들의 조상들의 가문의 수령으로서 이스라엘 중에서 천부장들이라 15 그들이 길르앗 땅에 이르러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아가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16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서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 너희가 오늘 여호와께 거역하고자 하느냐 17 브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18 오늘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오늘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19 그런데 너희의 소유지가 만일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거역하지 말라 20 세라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의 죄악으로 멸망한 자가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느니라 하니라.

*답: 지도자들과 상의 없고 허락도 없이 다른 제단을 쌓는다는 고발을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동쪽에 있는 족속들을 평소와 같은 형태(르우벤 족속, 갓 족속, 흠정역)로 부른 1절과 달리, 11절은 그들을 “르우벤 자손,” “갓 자손,” “므낫세 반지파”라는 다른 표현으로 부른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수 22:11)과 대조되며 다른 실체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온 회중(the whole congregation of Israel, NKJV)이라는 표현은 요단강 서쪽의 아홉과 반 지파만을 지칭하며, 두 집단 사이의 일어난 균열을 강조한다. 실제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강 동쪽의 지파들을 이스라엘 자손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동편으로 돌아간 지파의 이야기가 순조롭게 끝날 것을 기대하겠지만, 동쪽 지파들이 요단 경계에 제단을 쌓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긴장이 고조된다. 본문은 이 행위의 이유를 밝히지 않고, 제단의 기능이나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 제단의 의미에 관한 모호함은 3장과 4장에서 나오는, 요단강을 처음 건너던 장면을 되돌아볼 때 더욱 깊어진다. 그때는 온 이스라엘이 요단강가에 도착해 가나안 본토로 건너갔다. 반면 지금은 이스라엘의 일부가 요단 지역으로 왔고, 이번에는 강을 반대 방향으로 건너려 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돌로 된 구조물이 세워진다. 첫 번째는 기념비로 사용되었고, 두 번째는 인상적인 제단처럼 보인다. 

필연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은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수 4:6, 22 참조).  제사를 위해 세워진 것인가, 아니면 그저 기념물일 뿐인가? 동편의 지파들은 이미 배교에 빠지기 시작한 것인가? 

여호수아, 엘르아살, 또는 지파의 지도자들과 상의가 없었기에 자칫하면 끔찍한 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오해의 여지가 생겼다. 

 

<교훈> 동편으로 돌아간 지파들이 제단을 쌓았을 때 그들의 동기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서편의 지도자들과 상의 없이 한 일이기에 오해가 생길 수 있었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교인들은 지도자들과 의논하는 것을 중요하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화했기에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물어서 지시하는 대로 일을 시행했다. 백성들도 그것을 알았기에 모세의 말을 즉시 순복했다. 그랬으나 그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결과는 늘 비참했다. 지금은 모세와 같은 선지가 없다. 그래서 교회에 지도자들을 세우셨다. 교회에서 해야할 일은 반드시 의논을 거치고 기도하면서 중지(衆智)를 모아 시행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어야 한다. 요17장에 있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가시기 전에 드린 마지막 기도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분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 배치(背馳)되는 것이다. 그래서 판단은 신중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 아래서 올바르게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12월 9일(화)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여호수아 22:13-15을 민수기 25장을 참고하며 다시 읽어 보라. 이스라엘 백성이 둘과 반 지파에게 보낼 대표단의 수장으로 비느하스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22:13~15] 이스라엘 자손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길르앗 땅으로 보내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를 보게 하되 14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한 지도자씩 열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하게 하니 그들은 각기 그들의 조상들의 가문의 수령으로서 이스라엘 중에서 천부장들이라 15 그들이 길르앗 땅에 이르러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아가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답: 비느하스는 엘르아살이 죽은 후에 대제사장이 되었고, 전에 발람의 꾀로 이스라엘이 음행을 저질렀을 때 심판한 경험이 있는 주의 종이었다.

 

두 번이나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언급된 아홉과 반 지파는,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소문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 제단의 의도와 의미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한다. 이 대표단에는 대제사장 엘르아살이 죽은 뒤에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비느하스가 포함되었다(수 24:33). 비느하스는 이미 바알브올에서 이스라엘의 방탕함을 종식시킨 제사장으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민 25:7, 8). 

비느하스는 분명히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른 대표들은 요단 서편의 아홉과 반 지파의 대표자들이었으며, 각자 이스라엘의 지파 안에서 말 그대로 조상의 ‘집의 우두머리’(흠정역)로 알려진 지파의 수장이었다. 

대표단은 공식적인 선지자의 표현인 “OO가 이같이 말한다”를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신성모독과 반역에 대한 혐의 제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온 회중”(수 22:16)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돌아서서 반역하였다고 고발한다. 

여기 “범죄”라는 용어는 아간의 죄를 설명한 것과 동일한 히브리어이며(수 7:1), 모세오경에서 수차례 나타난다(레 5:15; 레 6:2; 민 5:6, 12 참조). 아간은 배반을, 바알브올은 반역을 나타내는 선례로 제시된다. 또한 이들은 무단으로 제단을 쌓는 행위가 배교, 우상숭배, 부도덕으로 이어져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것이라는 아홉과 반 지파의 염려를 말한다. 

 

<교훈> 이스라엘 자손은 대표를 구성하여 동편 지파에 대한 책망을 시작한다. 그들은 민족 전체에 영향을 끼친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염려하고 있었다. 

 

<부가설명> 자라(鼈=자라별)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과거에 죄를 지은 경험과 그 죄로 당한 고난이 있으면 현재와 미래에 비슷한 사건이 생길 때 놀라고 걱정하게 되는 것이 인생의 한 생애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므로 겪은 고난이 많았다. 그중에 아간의 일도 있고 발람으로 인한 고통도 있었다. 비느하스가 여기서 말한 것은 과거의 이 두 경험을 들어 동쪽 두 지판 반의 제단 쌓은 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데 이 두 사건과 동일한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전혀 하나님을 거역하는 제단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위하고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했다고 대답했다. 이 제단은 그들이 이스라엘에 속한 자라는 것을 후대에 전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경배하도록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온 이스라엘의 기쁨이 되었다. 분열의 염려가 뭉치어 하나가 되는 사상을 가져왔기에 그들은 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뻐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표징으로 나타나는 일을 기쁨이 될 수밖에 없다.

 

<적용>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는 우리가 과거의 잘못된 경험 때문에 지금의 이웃을 대하는 방식을 규정하지 않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12월 10일(수) 유순한 대답

 

여호수아 22:21–29을 잠언 15:1을 참고하여 읽어 보라. 동쪽 지파들의 답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수22:21~29]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22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를 거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께서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시옵소서 23 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또는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또는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거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 24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25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26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제 단 쌓기를 준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27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의 번제와 우리의 다른 제사와 우리의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들이 후일에 우리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다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8 우리가 말하였거니와 만일 그들이 후일에 우리에게나 우리 후대에게 이같이 말하면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이 지은 여호와의 제단 모형을 보라 이는 번제를 위한 것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한 것도 아니라 오직 우리와 너희 사이에 증거만 되게 할 뿐이라 29 우리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 외에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고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 하리라.

[잠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답: 동쪽 지파 사람들은 그들의 의도를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로 설명했다. 결과 서쪽 지파 지도자들이 다 이해하고 화목하고 돌아갔다.

 

고발당한 이의 대답은 고발만큼이나 직설적이고 강력하며, 주제적, 구조적으로 이 장의 핵심을 이룬다. 지금까지 이 지파들은 고발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제기된 혐의에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었다. 고발의 심각성을 생각할 때, 그들의 인내는 모범적이며,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는 잠언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준다(잠 15:1).

변론의 첫 문장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일컫는 이름 엘, 엘로힘, 여호와(수 22:22)를 나열한다. 이스라엘을 내전으로 몰아갈 뻔했던 의심과 거짓 고발을 불식시키기 위한 엄숙한 맹세를 하면서 이 이름들은 더 강한 어조로 두 번 반복하여 사용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온전히 알고 이해하신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며, 현재의 대표단도 같은 결론에 이르기를 희망한다. 둘과 반 지파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앞에서의 의무를 인정하고, 만약 자신들에게 실제로 죄가 있다면 벌하시기를 요청한다(신 18:19, 삼상 20:16 참조). 

제단은 그저 희생제사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는 놀라운 진리가 드러나며, 서쪽 지파들의 고발의 근거가 무효한 것을 증명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동쪽 지파들의 진정한 동기를 보여준다. 그들은 배교한 것이 아니며 이스라엘과 분리될 것에 대한 염려가 행동의 진짜 이유였다. 따라서 제단을 쌓은 것은 배교의 증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서쪽 지파들과 같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 연합의 참된 기반은 지리적 여건이나 유업의 물리적인 범위가 아니라 주님의 요구에 대한 영적인 충성심이다. 

요단강 서쪽 지파들의 진정한 관심은 동쪽 지파들의 결백함이 확인되었을 때 그들이 보인 진심 어린 기쁨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형제들과의 논쟁에서 패배감을 느끼기보다는, 자신들의 주장과 의심이 틀렸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기뻐한다. 내전의 위기는 극복되었고 민족의 연합은 공고해졌다. 

 

<교훈> 고발에 대한 유순한 대답은 다시 연합하게 이끌었다. 그들은 분리를 염려하여 제단을 쌓았기에 배교의 증거가 아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임을 증명하였다.  

 

<부가설명> 요단 동쪽 두 지파 반 사람들은 그들이 제단을 쌓은 이유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분히 설명한 것 같다. 비느하스를 비롯한 서쪽 아홉지파 반 대표들이 그들의 설명을 다 납득하고 기쁨으로 돌아갔고 온 이스라엘이 기뻐했다. 성령께서 그들을 주장하시고 역사하셨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해명해야 할 어떤 경우를 만났을 때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여부를 먼저 생각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인간의 이해관계와 자존심이나 명예로 하나님을 뒷전으로 돌리고 과격한 어조로 이해와 화해보다 정죄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회 일을 할 때 종종 겪는 다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자기의 생각을 관철하려는 것인지 스스로 잘 판단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때때로 주님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자기를 위하는 언사나 태도를 버려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의 영광과 주님의 일을 올바르게 이루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의논과 해결이 있어야 할 것이다. 

 

12월 11일(목) 갈등 해결 

 

여호수아 22:30–34을 읽어 보라. 이 사건 전체는 갈등 해결과 교회의 연합을 공고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어떤 통찰을 제공하는가?(시 133; 요 17:20–23; 벧전 3:8, 9 비교)

[수22:30~34]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한 회중의 지도자들 곧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긴지라 31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고 32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지도자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을 떠나 길르앗 땅에서 가나안 땅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아와 그들에게 보고하매 33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거주하는 땅에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34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시133:1~3]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요17:20~23]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벧전3:8,9]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답: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여호수아 22장은 가정, 교회, 지역사회의 일상적인 인간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의사소통의 원칙을 담고 있다. 

1. 일이 잘못되거나 잘못되는 것처럼 보일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폭발할 때까지 지켜보는 것 대신 서로 소통하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할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관심한 태도를 지니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요단강 동쪽의 지파들이 제단을 세우려는 의도를 미리 소통했었다면 이 모든 문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더라도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피해야 한다. 요단강 서쪽 지파들은 귀에 들어온 소문을 성급히 믿었고 동쪽 지파들이 이미 배교했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3. 실제 문제이든,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이든 결론에 따라 행동하기 전에 우선 이야기해 보라. 

4.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이 희생할 준비를 갖추라. 요단 서쪽 지파들은 요단강 건너편에 자리 잡은 것이 배교라고 생각된 일의 원인이라면, 그 지파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자신의 땅 일부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5. 합당하게 혹은 부당하게 비난을 받을 때, 분노를 가라앉히는 온유한 대답을 하라. 비난에 맞대응하는 것은 결코 평화로 이어질 수 없다. 이해받으려 하기 전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6. 평화가 회복될 때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둘과 반 지파의 진정한 동기를 알게 된 후 이스라엘의 회중이 진정한 기쁨을 경험하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못할 정도로 오만하지 않았다.

요단 동쪽 지파들이 배교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요구를 이행했을 것이다. 연합은 결코 진리를 희석하거나, 성경적 원칙까지 포기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가치가 될 수 없다. 다만, 교회의 징계는 항상 마지막 수단이 되어야 하며 화해의 노력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목회적 노력이 실패한 후에야 실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단순한 원칙들이 일관되게 지켜진다면 우리 교회는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교훈> 연합은 진리를 희석하고, 원칙을 포기하면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징계는 마지막 수단이며 먼저 화해와 말씀에 근거한 목회적 노력이 우선이다. 

 

<부가설명> 우리에게는 바른 것을 행한다고 하면서 불화를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른 주장을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 빠지지 않아야 한다. 상대방도 그의 입장에서 바른 생각으로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주님 안에서 일이 바르게 되도록 하려는 정직한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좋은 일을 위하여 분위기를 나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성경의 지혜가 아니다. 아이가 아침 가족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늦잠을 자고 있을 때 예배에 함께하라고 윽박질러서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아이만 상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이 다 함께 상한다. 어쩌면 주님께서도 마음 상하시지 않을까? 교회의 일을 잘 되게 하려는 열심히 교회 분위기를 분열로 몰고 간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차라리 그 일을 하지 않고 교회가 화목하고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정말 기뻐하실 것이 어떤 것일지 깊이 생각하는 정신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의논하고 일해야 할 것이다.

 

12월 1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부조와 선지자 48장 “가나안의 분배” 517–520을 읽어 보라. 

“죄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한편으로는 느슨함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가혹한 판단과 근거 없는 의심을 피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

르우벤 지파와 그 동료들이 나타낸 지혜는 본받을 만하다. 참된 신앙의 대의를 장려하기 위해 진실하게 노력하다가 잘못된 판단을 받고 심한 비난을 받았지만, 그들은 분노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변론을 시작하기 전에 형제들의 비난을 예의바르고 인내심 있게 들은 후에 자신들의 동기를 충분히 설명하고 결백을 입증했다. 그리하여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뻔한 문제가 평화롭게 해결되었다. 

의로운 자들은 거짓 비난 아래서라도 침착하고 사려 깊게 행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잘못 해석된 모든 것들을 잘 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사정을 안전하게 위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의 죄를 찾아내신 것처럼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의 사정을 반드시 옹호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행하는 자들은 오래 참고 온유하게 행하는 사랑을 소유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사이에 연합과 우애가 있기를 원하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드리신 그리스도의 기도는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어 세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장 감동적이고 놀라운 기도가 시대를 거쳐 우리 시대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진리의 한 원칙도 희생해서는 안되지만 이러한 연합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우리의 끊임없는 목표로 삼아야 한다”(부조와 선지자, 519).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바울의 권면(빌 2:3)은 형제자매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지 않도록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답: 이 권고가 실행된다면 반드시 은혜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2. 우리의 과거의 실패나 실수 때문에 종종 어떤 상황에 과도하게 반응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이런 경향을 피할 수 있겠는가?

*답: 자기의 허물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트라우마가 생겨서 그렇다. 예수님 안에 자아를 굴복할 때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3. 타인의 관점에 귀 기울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토의해 보라.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 안에 경청하는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약 1:19 비교)

*답: 전죄하려는 정신과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하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4. 우리는 직업, 가족, 교회 관련, 그 외 여러 가지의 요구사항들이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 가운데 모든 것을 주님께 하듯 하라는 원칙을 따르는 것은 어떻게 우리를 더 책임감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답: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주님을 대하는 것과 같이 하는 마음을 가지고 훈련하는 생활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성령님이 주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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