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마지막 때(질문, 대답, 설명) 0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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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8-31 03:49 조회2,641회 댓글0건본문
제10과 마지막 때
(9월 7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52분)
연구 범위: 막 12:41~44, 막 13:1~32, 단 9:24~27, 단 7:25, 살전 4:13~18
기억절: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막 13:26~27).
마가복음 12장은 예수께서 한 과부의 작은 행동에 대해 뜻깊은 선언을 하시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번 주는 그 이야기로 시작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그 이후에 관한 놀라운 예언이 담긴 마가복음 13장까지 다룰 것이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의 평행 구절과 함께 이 장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이후, 나아가 세상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가복음 13장에서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이 예언이 선지자의 때부터 예수님 그리고 종말, 즉 예수님의 재림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예언을 과거에 이루어진 것이나 먼 미래에 국한된 것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와 달리 "종말 예언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법을 따르는 것이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본문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질문이나 오해에 대한 답변의 형식을 띤다. 이러한 질문이나 오해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경험에 필수적인 진리를 가르칠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미래를 예언할 뿐만 아니라 그때, 그리고 오늘날의 제자들에게 다가올 시련에 대비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가르치신다.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의 재림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며 그분은 외형보다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느끼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시험을 당할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성령이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행하기: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영광의 사건인 예수님의 재림에 참여할 수 있도록 깨어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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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자의 많은 금액보다 과부의 적은 금액을 칭찬하신 것은 그분에 대해 무엇을 말해줍니까?(막 12:43)
*답: 사람은 양으로 보시지 않고 질로 평가하신다는 것을 말해준다.
3. 성전을 보며 주신 예언은 대부분 어떤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막 13:5~13)
*답: 예루살렘과 말세에 있을 역사적 사건과 구약 예언의 성취를 뜻한다.
4.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어떻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까?(막 13:14~18)
*답: 로마군의 공격으로 이루어졌다.
5. 주께서 고난의 시간을 감하시는 데는 어떤 섭리가 있습니까? 그것은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막 13:20)
*답: 종교 개혁과 많은 사람들의 구원과 연결되었다.
6.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이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막 13:32)
*답: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결론: 과부의 적은 헌금을 칭찬하신 예수님은 외형보다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 아름다운 모습의 성전이 무너진 것처럼 바른 신앙에 서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멸망할 것이다. 예루살렘의 박해보다 더 큰 어려움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을 것이지만 성령이 환난 중에 인도하실 것이기에 두려워하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분의 예언은 분명하고 그대로 성취될 것이며 마침내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영광의 사건,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다.
9월 1일(일) 주께 드린 적은 동전 두 개
마가복음 12:41~44절을 읽어 보라. 과부는 얼마를 헌금했으며 예수님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막12:41~44]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답: 두 렙돈을 헌금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활비 전부였다. 에수께서는 그가 부자들보다 다 큰 헌금했다고 판단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성전산은 도시를 압도하는 위용을 갖추었고, 성전을 건축하는데 사용된 거대한 돌은 오늘날까지도 경이로움을 자아내는데, 그중 일부는 무게가 수백 톤에 달한다. 성전과 성전산의 개축과 확장은 기원전 20년경 헤롯 대왕 때 시작되었지만, 구조물의 건축과 장식은 서기 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큰 헌물을 가져와 성전 근처 여인의 뜰에 있는 13개의 상자에 드렸다. 예수님은 이곳에 앉아 계시다가 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을 드리는 것을 보셨다. 여인의 헌금은 일용직 노동자의 통상 임금인 데나리온의 32분의 1에 해당하는 아주 적은 액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의 헌금에 깊이 감동 받으셨다. 많은 부자들이 거액을 헌금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헌금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 과부가 드린 헌금은 주님께서 칭찬하셨다. 그분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드렸다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예수님은 다른 사람은 풍족한 가운데 드렸지만 그녀는 가난한 가운데서 드렸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많은 것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드렸다. 비록 금전적 가치는 적었지만 이 사실이 그녀의 헌금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이 이야기에는 자원과 재정 관리에 대한 깊은 교훈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드리는 헌금은 지도자의 행동의 타당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성전의 종교 지도자들은 부패했지만 예수님은 헌금을 보류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를 말한다면 이 시기의 지도자 가야바와 안나스는 그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예수님도 그것을 알고 계셨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원을 사용해야 할 신성한 책임을 진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리는 사람은 여전히 복을 받는다.
반면에 지도자의 행동이나 어떠함에 따라 십일조나 헌금을 드리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헌금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 아닌 사람의 행동에 따라 좌우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 강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훈> 그분은 여인의 적은 헌금이 다른 이들보다 많다고 하셨다. 다른 이는 풍족한 가운데 드리고 남은 것이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드렸다.
<부가설명> 헌금은 하나님의 일, 곧 예배 회복과 복음 전파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것을 관리하는 책임은 교회에게 맡겼다. 그런데 교회가 이 헌금을 성경의 원칙대로 집행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럴 때 헌금한 신자들이 볼멘 소리를 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지도자들의 잘못을 나무라면서 자기도 잘못한다. 헌금은 교회에 내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것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질 것이다. 그러나 헌금을 드리는 사람은 정직하게 하나님께 드리면 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하게 처리하실 것이다. 때때로 신자들은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 잘못에 올라타고 자기도 잘못하는 자리로 달린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항상 바른 자세로 생활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자아를 굴복시키자.
9월 2일(월) 돌 위에 돌 하나도
마가복음 13:1~13을 읽어 보라. 성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으며 그분이 그들에게 하신 대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막13:1~13]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답: 건물과 건물을 지은 돌들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돌들이 겹놓이지 않을 정도로 무너질 것이며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핍박을 받을 것이며 아울러 예루살렘의 멸망과 말세의 징조들을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성전 단지는 정말 대단한 건축물이었다. 요세푸스는 성전 단지 남쪽의 왕의 행각에 162개의 기둥이 있는데, 각 기둥은 세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 닿을 수 있는 둘레였다고 기록한다(Antiquities, 15.11.5, 413). 예수님은 이것이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놀라운 건축물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은 듣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종말처럼 들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관심이 성전의 장엄함을 향하실 때에 거절 받으신 분의 말로 표현하지 않은 생각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예수님 앞에 전개된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그분은 슬픔 가운데 그 결국이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건물들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너희는 이 벽이 결코 파괴될 수 없다고 말하나 내 말을 들으라. 날이 오리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시대의 소망, 627).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언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고 싶어했다. 마가복음 13:4에서 작은 그룹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는 예수님께 그 시기를 묻는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날 때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 알고 싶어한다.
마가복음 13:5~13에서 놀라운 점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설명하기보다는 제자들에게 초기 기독교 교회를 세우는 역사 중에 예상되는 일에 대해 경고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신다는 것이다. 그 일 역시 쉬울 것 같지 않다.
실제로 제자들은 박해를 받고 재판에 세워지고 일부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소란스러운 사건에 속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가족과 친구들이 그들을 버릴지라도 성령께서 필요한 때에 그들에게 할 말을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예언의 서두에 주신 이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의 백성은 난리와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을 환난 중에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
<교훈> 그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난리와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성령이 환난 중에도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깨어 있어야 할 것이었다.
<부가설명> 세상은 사망이 주관하고 있다. 아담 자손으로 출생한 사람은 예외없이 사망으로 종신한다. 역사 현장에 생존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전3:11).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성경이 가르친다. 그래서 장생불로하려는 욕망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그래서 세상의 종말이 있는가? 종말이 오면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무의식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견고하게 건축된 성전이 돌 한도 돌 위에 겹놓이지 않을 정도로 무너진다는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때가 바로 세상의 종말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 그런 일이 있을 것이며 이것이 이루어지려 할 때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 물었다. 마태복음에는 ‘세상 끝에는’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질문으로 미루어보면 성전이 그렇게 무너질 때는 세상 끝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엿볼 수 있다. 과연 성전을 그러게 무너졌다. 그래도 제자들은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세상 끝이 성전 무너질 때가 아니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했다. 전파하는 동안 핍박과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었다. 지금은 많이 조용한 시대다 그러나 요즘도 복음 때문에 사람들이 한 해에 11만명 가까이 죽는다고 어느분이 말했다. 사망은 생명을 싫어한다.
9월 3일(화) 멸망의 가증한 것
마가복음 13:14~18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있는 어떤 단서를 주셨는가?
[막13:14~18]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5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7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답: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는 말씀으로 그 사실은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마태복음에는 다니엘서라고 밝혔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기록의 중심에 이르렀다. 그분은 "멸망의 가증한 것"을 말씀하시며(막 13:14) “읽는 사람은 깨달”으라고 하신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다니엘서를 가리키고 계신다. 이 표현은 다니엘 9:27, 11:31, 12:11에 등장하며 다니엘 8:13에도 유사하게 기록되었다.
다니엘 9:26, 27을 읽어 보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누구이며 장차 올 "한 왕"은 누구인가?
[단9:26,27]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답: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한 왕은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로마 황제다.
다니엘 9:26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 마쉬아(māšiaḥ)이며 메시아를 말한다. 다니엘 9:24~27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보면 이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져올 "한 왕"은 누구인가? 이 성은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파괴되었다(그는 이후에 황제가 되었다: 역자주). 따라서 그가 다니엘 9:26, 27에 언급된 장차 올 "한 왕"이라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메시아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도시의 멸망이 결정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예언과 연결된다.
그러면 예수님이 다니엘을 언급하며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많은 학자들은 이 가증한 것이 기원전 2세기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모독한 일을 가리킨다고 믿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은 "멸망의 가증한 것"을 자신의 지상 사역 이후에 일어나는 일로 묘사하기 때문에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2세기 전에 일어난 일을 가리킬 수는 없다.
대신, 그 가증한 것은 기원후 60년대 후기에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동안 이스라엘에 이교 로마의 깃발을 꽂은 것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이는 기독교인들에게 도망가라는 징표였고, 그들은 말씀을 따랐다.
<교훈> 다니엘서에서 말한 멸망의 가증한 것은 예수님 때 이후의 일이며 예루살렘에 이교의 깃발을 꼽은 일을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유의해야 할 징표였다.
<부가설명> 성경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자를 찾는다. 마태 24장은 마가 13장과 같은 예언 장이다. 마태는 말세 사건을 예언하시면서 때랄 따라 양식을 나누어줄 자가 누군지 물었다(마24:45). 복음은 때를 따라 그때에 합당하게 전파되어야 한다. 지금 노아의 홍수 기별을 전하면 안 된다. 지금 성전봉사의 양을 잡아야 한다고 전하면 안 된다. 그것은 그렇게 해야할 때에 합당한 기별이다. 지금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와 관련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영원한 복음 세 천사의 기별이다. 거룩한 곳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진 때는 오래 전이다. 재림성도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 아직도 그 표가 표면화되지 않았다. 그것이 법적으로 표면화 되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도망해야 한다. 도망가야 할 날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하루하루를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을 수 있게 신앙생활해야 할 것이다.
9월 4일(수) 큰 환난
마가복음 13:1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막13:19]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답: 전무후무한 환난이 닥칠 것을 예언하셨다.
마가복음 13장은 “멸망의 가증한 것”을 말하는 14절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마가복음 13:19도 전환점이 된다. 이 말씀은 창세 이후로 전례 없는 큰 환난을 말한다. 이는 예루살렘의 함락 때보다 더 크고 더 광범위한 박해가 일어날 것을 예고한다. 또 마가복음 13:19은 미래시제로 전환하여 예수님 시대보다 더 멀리 있는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마가복음 13:14이 다니엘 9장의 예언과 짝인 것처럼, 마가복음 13:19~23에 묘사된 큰 박해는 작은 뿔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을 "한 때와 두 때 반 때"(단 7:25) 동안 핍박한다는 다니엘 7장과 8장의 예언을 나타내고 있다. 1,260일의 예언 기간은 문자 그대로의 1,260년에 해당한다(민 14:34, 겔 4:6). 이 기간은 서기 538년에서 나폴레옹이 교황을 포로로 잡기 위해 장군을 보낸 서기 1798년까지 이어진다. 이 1,260년의 기간 동안 작은 뿔의 세력은 교회 통치 체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다.
마가복음 13:20~23을 읽어 보라. 박해의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어떤 소망을 주셨으며, 박해가 끝나갈 때와 관련해 어떤 경고를 주셨는가?
[막13:20~23]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21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답: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환난 날을 단축해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또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나서 택한 자들을 미혹하려할 것이니 삼가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13:20은 하나님 백성을 위해 박해의 시기가 단축될 것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에 박해의 불길이 잦아들면서 고난의 시간이 단축되었다. 작은 뿔의 힘이 약해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개혁에 동참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3장의 예언에 따르면 작은 뿔은 다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 13:21~23은 또 다른 위협인 예수님의 재림 전에 일어날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에 대해 경고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일에 주의하라고 알려주셨다.
<교훈> 그분은 예루살렘 함락보다 더 큰 박해가 있을 것을 예고한다. 이후 박해의 때는 감해지고 작은 뿔의 세력이 약해지지만 그는 이내 세력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
<부가설명> 창세 이후로 세상에 닥칠 전무후무한 환난은 1260년 간의 환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날들을 단축시키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육체가 없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이기간에 핍박의 대상, 즉 환난 받는 대상이 누군가? 일반적으로 진리를 따르는 참 성도들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단축한 날들을 생각해보면 환난의 초점이 성도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말씀 환난에 대하여 계시록 11장에 예언했다. 거기에는 두 선지자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11:3)라고 기록했다. 두 선지자는 구약과 신약 성경이다. 성경은 구약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표현했다(눅24:27,44, 눅16:16). 선지자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지만 또한 구약의 선지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을 선지자라고 은유한 것이다.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한다. 성경이 환난당하는 것을 표상한 기록이다. 1260년 동안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면 누가 예수님을 알고 믿겠는가? 그래서 그 전무후마한 환난, 그 날들을 단축시켜주신 환난의 주 대상은 성경인 것을 알 수 있다. 루터가 종교개혁하는 것으로 성경은 환난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았다. 중체 카톨릭은 사람이 성경을 가지는 것도 금지했고 가지면 추방당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으로 성경을 가질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안티오쿠스가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예수님 당시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안티오쿠스는 예수님 탄생 전 사람이다. 혼동하지 말고 바르게 깨닫는 은혜를 누리자.
9월 5일(목) 인자의 임하심
마가복음 13:24~32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어떤 위대한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막13:24~32]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답: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마가복음 13:24~32에 묘사된 위대한 사건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이다. 그 앞서 해와 달과 별의 징조가 나타날 것이며 신약성경은 이 놀라운 사건을 가리키는 예언으로 가득 차 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3~18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들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말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도 재림 때 있을 죽은 자의 부활의 실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3~13에 그 큰 날을 묘사하며 주님의 약속은 더딘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하신다고 설명한다. 요한계시록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계 1:7, 계 6:12~17, 계 14:14~20, 계 19:11~21).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은 인격적이고, 실제적이며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게 이루어진다고 일관되게 가르친다. 주께서 오실 때 모든 사람이 그분을 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와 "그 날" 또는 "그 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씀은 많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였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대는 분명히 죽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제시되었다. 어떤 사람은 "세대"라는 단어가 한 인종을 지칭할 수 있으며 이는 유대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 말씀은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에는 유대 민족이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된다. 또 다른 해석은 모든 징조가 성취된 것을 보는 사람들의 세대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세대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간단한 해결책은 예수님이 마가복음 13:30의 "이 세대"에는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고, 마가복음 13:32에서는 "그 날과 그 때"에서는 "그"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을 주목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3장에서 "이"라는 단어(houtos, hautē, touto)는 1~13절에 더 자주 등장하며,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그"라는 단어는 이 장의 후반부에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세대"는 마가복음 13:30에 묘사한 것처럼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격한 1세기 사람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마가복음 13:32은 "그"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 세대보다 더 먼 “그 때”에 일어날 사건을 말하며 1세기보다 더 먼 미래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고 있다.
<교훈>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사건은 예수의 영광스러운 재림이며 마가복음 13:32은 "그"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더 먼 미래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고 있다.
<부가설명> 저자의 지시사(指示詞) 설명은 말씀을 깨닫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의 때오 관련하여 ‘이(후토스)’와 ‘그(에케이노스)’로 구분하여 때에 관한 이해를 바르게 하도록 설명해서 대단히 감사하다. 아무튼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므로 우리가 알려고 할 이유가 없다(행1:7). 이것을 알려고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다. 재림교회는 재림하실 날짜를 정한 재림 운동의 후예들이 되어서 연대 예언에 민감한 것 같다. 그래도 성경에 분명하게 그날과 그 시는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고(마24:31),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다고 분명히 계시했는데, 재림 시기에 관하여 건드리는 것은 루시퍼의 발자국을 따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징조에 유의해야 하지만 징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이라는 하루를 주님의 뜻을 따르며 생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확실히 재림하신다. 그분께서 초림으로 이루신 모든 것을 볼 때, 또 예언한 말씀들이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볼 때 재림은 너무나 확실하다. 오늘 하루를 자아를 죽이고 주님만 살도록 굴복하며 생활하자.
9월 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69장 “감람산에서”를 읽어 보라.
세계 각지에서 혼란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정말 불안해하고 있다. 이런 사건에 대한 일종의 '내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예수님 안에 있는 소망과 그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분이 오시는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하므로 깨어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37). 주의 오심을 바라는 자들은 막연한 기대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를 경외하게 하며 죄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하게 한다. 그것은 주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를 거절하는 큰 죄에서 그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주를 기다리는 자들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저희 영혼을 순결하게 한다. 그들은 깨어서 기다리며 열심히 일한다. 그들은 주께서 문 앞에 이르신 줄을 알기 때문에 열심을 내어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업에 거룩한 지혜자들과 협력한다. 이들은 주의 자녀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눅 12:42)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들이다. 그들은 오늘날을 위하여 가장 적절한 진리를 전파한다.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가 각각 그 시대에 알맞는 진리를 전파한 것처럼 지금 그리스도의 종들도 이 세대를 위한 특별한 경고를 발할 것이다"(시대의 소망, 634).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우리는 주님의 일을 위해 헌금을 드린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여 헌금하는 것은 그와 다른 것이다. 무엇이 다르며 그 차이점은 왜 중요한 것인가?
*답: 자신을 희생하며 드리는 헌금은 자아가 주님 안에서만 생존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이다.
2. 하나님은 왜 수 세기 동안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분의 백성에 대한 핍박을 막지 않으시는가? 대쟁투의 주제는 박해가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답: 아직도 사탄이 자기 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자기 권리를 행하는 것이다.
3. 현재 세상에서 특별히 당신의 눈에 띄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는 무엇인가?
*답: 전쟁과 전쟁 소문이고 소돔 같고 노아 때 같이 강포와 동성애가 창궐하다.
4. 죽은 자의 상태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죽은 자들이 잠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 죽어서 눈을 감으면 그다음에 그들이 경험하는 것은 어떤 일이겠는가? 이 생각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이 항상 각 개인에게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답: 재림이 가까운 것은 각 개인의 수명과 관계된 기별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사람은 하루만 산다. 그가 죽음의 잠을 자다가 재림을 맞으면 그는 하룻밤만 자고 아침을 맞는 것과 같다. 죽은 자에게는 시간이 없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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