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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야곱-이스라엘-(간단한 Q&A+보충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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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5-30 13:12 조회1,5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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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야곱- 이스라엘>

                                          (2022년06월04일 (안) 07시49분)


(日) 05월29일  <하나님과 씨름함 >


(Q)~(창세기 32:22~31)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던 경험(經驗)이 필요(必要)했던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하나님과 싸우는 야곱(창세기 32:24~32)>

형(兄)을 속이고 도망자(逃亡者)의 지난 일들로의 괴로움 가운데에서 이제는 많은 가족(家族) 구성원(構成員)을 이룬 가운데 이제는 피(避)할 수 없는 현실(現實)이 코앞에 닦아온 시점(時點)에서 야곱은 지난 동안에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문제(問題)들을 해결(解決)하려 하였으나 얍복강가에서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前)에 야곱은 그의 아내들과 아이들을 도와 강(江)을 건너게 하고 혼자 있고 싶어, 홀로 남아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다시 한 번 털어놓고 기도(祈禱)를 드렸다.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고 밤이 맞도록 씨름했을 때 (간절(懇切)히 기도(祈禱)했을 때) 천사가 그를 붙잡았다. 이에 야곱은 그의 죄가 용서(容恕) 받았음에 대한 속이는 자(사기꾼)에서 그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 이스라엘(하나님이 통치(統治)하신다)로 바꿔 주신다.


(月) 05월30일  <다시 만난 형제(兄弟) >


(Q)~(창세기 33:01~17) “야곱”과 “에서”의 화해(和解)의 모습(貌襲)속에서 배우게 되는 용서(容恕)에 관(關)한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 사기꾼 야곱은 하나님과 형(兄) 에서로부터의 용서(容恕)가 무엇인지 깊이 경험(經驗)하였고 은혜(恩惠)라는 것이 무엇인지 진심(眞心)으로 경험하고 깨달음으로 과거(過去)의 야곱이 아니라 그의 삶과 신분(身分)과 인격(人格)에 대한 극적(極的)인 변화(變化)가 주어졌음을 암시(暗示)해 주고 있다. 즉 (1).인간적(人間的)인 실패(失敗)의 이름이 영적(靈的)승리(勝利)의 이름으로 축복 받은 것을 뜻하며 (2). (창28:10-15)에 근거(根據)한 야곱이 실질적(實質的) 언약(言約)의 후계자(後繼者)로서 하나님에 의해 정식(正式)으로 비준(批准)된 것을 의미(意味)한다.


(火) 05월31일  <디나가 수치(羞恥)를 당(當)함 >


(Q)~(창세기 34장) “에서”와의 화해(和解)이후에 가나안땅에 평화(平和)롭게 정착(定着)하려던 야곱의 계획(計畫)에 어떠한 문제(問題)와 사건(事件)이 있었으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과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A)~○. 형(兄) 에서와 화해(和解)한 야곱은 평화롭게 가나안 땅에서 정착(定着)하여 살고자 했지만 뜻하지 않는 히위 족속(族屬)중 하몰의 아들 세겜으로 인하여 발생(發生)한 딸(디나)의 수치(羞恥)로 인(因)한 아들 시므온과 레위의 속임수를 사용하여(할례(割禮)받으면 용서(容恕)해주고 통혼(通婚)을 수락(受諾)해준다는 위장(僞裝)조건을 내세워) 살인(殺人) 보복(報服)하는 사건(事件)이 발생하여 더 이상 세겜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경솔(輕率)한 아들들의 무례(無禮)한 행위는 파멸(破滅)과 살육(殺戮)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을 교훈(敎訓)해주신다.


(水) 06월01일  <만연(蔓延)한 우상숭배(偶像崇拜) >


(Q)~(창세기 35:01~15) 야곱이 그의 가족(家族)들과 다시금 벧엘로 올라가는 사건(事件)은 참된 회개(悔改)와 예배(禮拜)에 관하여 어떠한 교훈(敎訓)을 가르쳐 주며 얻을 수 있습니까?


(A)~ ○. <(창세기35:2) 이방신상(異邦神像)을 버리고.>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을 바라보면서 철저(徹底)한 개혁(改革)이 이루어졌다. 야곱과 그의 가족이 여호와를 뵙기 전에 해야 할 많은 일이 있었다(참조 암 4:12; 요일 3:3). 

전(前)에는 야곱이 그의 아내들을 배려(配慮)하는 마음에서 야곱은 그들의 장막(帳幕)에 우상(偶像)들이 존재(存在)하는 것을 묵인(黙認)했다. 그러나 얍복강변에서의 개심(改心)후에는 야곱은 마음을 겸비(謙卑)히 하고 가족들에게도 스스로 마음을 낮추고 모든 단장품(丹粧品)들을 제(除)하라고 명(命)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가족들에게서 잘못을 제거(除去)하려는 야곱의 노력(努力)을 가납(嘉納)하시고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를 축복(祝福)하시고 그에게 하신 언약(言約)을 새롭게 하셨다(3영적 137). (창 35:2, 화잇주석)


(木) 06월02일  <하나님과 씨름함 >


(Q)~(창세기 35:16~29) 야곱은 그의 가정(家庭)에서 있었던 많은 문제(問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되나요?


<(A)~○. (창세기35:1~29)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야곱의 생애(生涯)>

  특히 야곱은 지금까지의 경험(經驗)과 체험(體驗)을 통하여 자기주변(自己周邊)에 만연(蔓延)된 죄와 악(惡)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이 성취(成就)되리라는 온전(穩全)한 믿음의 신뢰(信賴)를 하였다는 사실(事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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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깊이 있는 학습(學習)>  


 

(日) 05월29일  <하나님과 씨름함 >


(Q)~(창세기 32:22~31)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던 경험(經驗)이 필요(必要)했던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창세기32:22) 얍복>

갈릴리 호수(湖水)와 사해(死海) 중간에 위치(位置)한 요단강의 동쪽 지류(支流)로서 우기(雨期)에만 집중적(集中的)으로 물이 흐르는 간헐천(間歇川)이다. ‘싸우다’란 의미(意味)를 지닌 ‘야바크’에서 유래(由來)한 ‘씨름꾼’이란 이 개천(開川)의 이름은 이곳에서 겪은 야곱의 신비(神秘)한 경험(經驗)을 기념(紀念)하여 후대(後代) 사람들이 붙인 것 같다. 오늘날에는 ‘맑고 푸른 강’이란 뜻인 ‘와디 젤카’(Wadi ez Zerka)로 불리운다.


⑴.  <(창세기32:28) 야곱 … 이스라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삶과 신분(身分)과 인격(人格)에 극적(極的)인 변화(變化)가 주어졌음을 암시한다. 특히 그 이름을 명명(命名)하는 자는 그 대상(對象)에 대한 소유권(所有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이처럼 야곱의 이름이 바뀐 것은 

  ①. 인간적(人間的) 실패(失敗)의 이름이 영적승리(靈的勝利)의 이름으로 축복(祝福)받은 것을 뜻하며 

  ②. 벧엘 언약(言約)(28:10-15)에 근거(根據)하여 야곱이 실질적(實質的) 언약(言約)의 후계(後繼)로서 하나님에 의해 정식(正式) 비준(比準)된 것을 의미한다. 한편 

  ③. ‘이스라엘’이란 ‘우세(優勢)하다’, ‘싸우다’, ‘왕비(王妃)’라는 뜻의 ‘사라’와 전능자(全能者)이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이 결합(結合)된 형태(形態)로서 ‘하나님이 통치(統治)하신다’(Kalisch)는 뜻도 있으나 대체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란 뜻으로 이해(理解)된다. (창 32:28, 만나주석)


⑵. <하나님과 싸우는 야곱(창세기 32:24~32)>

우리는 여기에서 (호세아 12장 4절)에 언급(言及)되어 있는 야곱이 천사(天使)와 씨름하여 이겼다고 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읽게 된다.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前)에 야곱은 그의 아내들과 아이들을 도와 강(江)을 건너게 하고 혼자 있고 싶어, 홀로 남아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다시 한 번 털어놓고 기도(祈禱)를 드렸다. 우리는 끊임없이 매(每) 순간(瞬間)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결코 피곤(疲困)하면 안 된다. 자주 기도하고 쉬지 않고 간구(懇求)하면 하나님께서 은총(恩寵)을 허락(許諾)해 주실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고 간절(懇切)히 기도(祈禱)했을 때 천사가 그를 붙잡았다. 그 천사(天使)가 어떤 자이든 간에 분명(分明)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 천사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 이다(출 23:21). (창 32:24, 만나주석). 


(2).야곱과 이 천사가 어떻게 어울렸는가를 알아보자  

   ①. 이 씨름은 어떤 보조자(補助者)도 없는 일대일(一對一)의 싸움이었다. 

       그 천사와의 만남에서 이긴 결과(結果)는 무엇이었는가?

   ②. (창세기32:1). 야곱은 자기 위치(位置)를 빼앗기지 않고 지켰다. 


⑶. <(창세기32:3). 천사는 말할 수 없이 겸손(謙遜)하게 자기를 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26절).>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대로 하게 하라" 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강(强)한 천사가 야곱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겠는가? 그는 그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야곱의 신앙(信仰)과 기도(祈禱)를 존경(尊敬)했고 또 야곱이 얼마나 지조(志操)가 있는지를 시험(試驗)하고 싶었던 것이다.


⑷. <(창세기32:4). 야곱은 거룩한 떼씀을 계속(繼續)했다.>

"하나님이 내게 축복(祝福)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자기가족(自己家族)이나 이 긴 여행(旅行)이 어떻게 되든 간에 그는 자기의 순리(順理)가 가져다 준 이점(利點)을 놓치지 않고 이 기회(機會)를 최선(最先)의 것으로 만들어야 갰다고 결심(決心)한 것이다.


⑸. <(창세기32:5). 천사(天使)는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줌으로써 영원(永遠)한 영예(榮譽)의 징표(徵標)를 야곱에게 주었다(27~28절).>

"너는 용암(勇敢)한 투사(鬪士)다" (하고 천사는 말한다). "영웅적(英雄的)인 결단(決斷)이 있는 사람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하고 그는 말한다. "속이는 자"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좋다 이제부터는 절대(絶對)로 그렇게 물리어져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는 네가 재주나 교활(狡猾)한 수단(手段) 때문에 칭송(稱頌) 받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보여준 참된 용기(勇氣)를 인하여 칭송(稱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곧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이 이름은 이 땅 위에 있는 어떤 위대(偉大)한 사람의 이름보다도 더 위대(偉大)한 것이다. 그는 승리자(勝利者) 곧 하나님을 이긴 승리(勝利)자였다. 


⑹. <(창세기32:6). 야곱은 축복(祝福)을 받고 천사(天使)를 놓아준다(29절).>

야곱은 천사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그가 이루어주는 일을 보고 그를 존중(尊重)하기 위해 서였다(삿 13:17). 그러나 이를 거절(拒絶)했다 야곱이 나는 어느 천사를 이겼다든가 자기가 소원(所願)한 바를 이루어 놓도록 어느 천사를 복종(服從)시켰다고 하면서 교만(驕慢)해지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거절(拒絶)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내 이름을 묻는가, 그 이름을 알아서 무엇이 유익(有益)하겠는가?" 야곱은 죽을 때가 임박(臨迫)해서야 그가 실로라고 불린 천사임을 알게 된다. 


⑺. <(창세기32:7). 야곱은 그 자리를 새 이름으로 불렀다.>

그는 그 자리를 버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그가 그 곳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뵈었고 하나님의 은총(恩寵)을 받았기 때문이다. 


⑻. <(창세기32:8). 야곱은 이 사건의 흔적(痕迹)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가 환도 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31절). 어떤 사람은 그가 죽을 때까지 환도 뼈로 인하여 절었을 것이라고 생각(生覺)한다. 아마 그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야곱은 그 아픔과 불편(不便)을 결코 불평(不平)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⑼. <야곱은 인내(忍耐)하고 결심(決心)하였기 때문에 승리(勝利)하였다.>

그의 경험(經驗)은 끈질긴 기도(祈禱)의 능력(能力)을 증거(證據)한다. 우리가 힘 있는 기도와 불굴(不屈)의 신앙(信仰)의 교훈(敎訓)을 배워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나 그리스도인 개인들의 가장 큰 승리(勝利)들은, 재능(才能)이나 교육(敎育)이나 부(富)나 인간의 호의(好意)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열렬(熱烈)하고 번민(煩悶)하는 믿음이 능력(能力)의 강(强)한 팔에 매달릴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기도(祈禱)의 밀실(密室)에서 얻어진다.


<(창세기32:26) 결정적(決定的)인 노력(努力)과 믿음이 그 핵심(核心)임.(마 11:12)>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승리(勝利)를 얻으려고 애쓸 때에는 두렵고 고통(苦痛)스러웠다. 그는 그 거룩하신 손님을 적(敵)으로 잘못 생각하고 그의 힘이 다 없어질 때까지 싸웠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자비(慈悲)에 자신을 내어 던졌을 때에 그는 원수(怨讐)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無限)하신 사랑의 팔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對面)하여 보았고 그의 죄는 용서(容恕)를 받았다. “천국(天國)은 침노(侵擄)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에 침노(侵擄)한다는 말은 온 마음을 다한다는 것을 말한다. 두 마음을 품으면 안정(安定)이 없다. 준비(準備)하는 일을 하려면 결심(決心), 자아부정(自我否定), 헌신적(獻身的)인 노력이 요구(要求)된다. 예지(叡智)와 양심(良心)이 한데 어우러져야 하겠지만 의지(意志)가 그 일을 착수(着手)하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失敗)하고야 말 것이다. 열렬하고 진지한 기도가 나태(懶怠)함과 무관심(無關心)을 대신(代身)해야 한다. 열렬하고 결정적(決定的)인 노력과 그리스도의 공로(功勞)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는 승리(勝利)할 수가 있고 하늘 왕국(王國)을 얻을 수가 있다. 일할 시간은 짧다.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다. (청년 지도자 1900. 5. 24).(창 32:22~31, 화잇주석)


(月) 05월30일  <다시 만난 형제(兄弟) >


(Q)~(창세기 33:01~17) “야곱”과 “에서”의 화해(和解)의 모습(貌襲)속에서 배우게 되는 용서(容恕)에 관(關)한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 사기꾼 야곱은 하나님과 형(兄) 에서로부터의 용서(容恕)가 무엇인지 깊이 경험(經驗)하였고 은혜(恩惠)라는 것이 무엇인지 진심(眞心)으로 경험하고 깨달음으로 과거(過去)의 야곱이 아니라 그의 삶과 신분(身分)과 인격(人格)에 대한 극적(極的)인 변화(變化)가 주어졌음을 암시(暗示)해 주고 있다. 즉 (1).인간적(人間的)인 실패(失敗)의 이름이 영적(靈的)승리(勝利)의 이름으로 축복 받은 것을 뜻하며 (2). (창28:10-15)에 근거(根據)한 야곱이 실질적(實質的) 언약(言約)의 후계자(後繼者)로서 하나님에 의해 정식(正式)으로 비준(批准)된 것을 의미(意味)한다.

 

○. <(창세기33:10) 내가 형님(兄任)의 얼굴을 뵈온 즉.>

에서의 우호적(友好的)인 인사를 받을 때 최근(最近)에 야곱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約束)이 떠올랐으며, 에서의 얼굴에서 그것의 은혜(恩惠)로운 성취(成就)를 읽을 수 있었다. 야곱의 이 말은 그의 길에 동행(同行)하였던 명백(明白)한 하나님의 임재(臨在)에 대한 깊은 감사(感謝)를 반영(反映)한다. (창32:30). 자기 곁에 주야(晝夜)로 섭리(攝理)의 손길이 함께 있음을 깨달은 이 사람은 얼마나 행복(幸福)한 사람인가!(욥 33:26; 시 11:7). (창 33:10, 재림교주석)


○.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兄)의 얼굴에 나타난 따뜻하고 친절(親切)한 우애(友愛) 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恩惠)의 빛을 보았다. 왜냐하면 복수심(復讐心)에 가득찬 형(兄) 에서의 마음을 그처럼 부드럽게 변화(變化)시켜 자신을 영접(迎接)토록 주장(主張)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창세기 33:1-4)야곱과 에서의 우정(友情) 있는 상면(相面)>

A. 야곱은 에서가 마중 나오는 것을 발견(發見)했다. (창33:1절). 

"눈을 들어 보았다" 고 하는 표현(表現)은 낙심(落心)한 표정(表情)과는 전혀 반대(反對)인 즐거움과 신뢰(信賴)의 표정(表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의 모든 사정(事情)을 기도(祈禱)를 통해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그의 "표정(表情)이 이 이상 더 슬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삼상 1:18). 자기의 모든 근심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그 문제의 결과(結果)가 어떻게 되던, 마음의 흡족(洽足)함과 평정(平靜)을 지니고 다가올 일들을 기다릴 수가 있다. 어떤 것도 하나님께 고정(固定)되고 그분을 의지(意志)하는 마음속에는 끼어들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記憶)하자. 야곱은 자기 자신을 자기의 기도(祈禱)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應答)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려고 높은 파수(把守)대 위에 올려놓았다(합 2:1).


B. 야곱은 자기의 가족(家族)들을 가장 훌륭하게 정돈(整頓)하였다. 

그리하여 에서가 친구로서 나올 때는 겸손(謙遜)을 보일 수 있게 하고 적(敵)으로서 다가올 때는 그 식구들의 안전(安全)을 구(求)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에서가 어떤 태도(態度)로 오든지 기꺼이 맞이할 수 있었다(1, 2절). 이 두 형제(兄弟)가 얼마나 서로 다른가를 살펴보자. 에서는 400명의 시종들을 거느리고 크게 보이려 하고 있다. 그런데 야곱은 어쩌면 귀찮기 도한, 자기가 일일이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여인(女人)들과 아이들을 길게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도 야곱은 그들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그들의 안전(安全)을 살펴주고 있다. 그런데 실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장자(長子)의 권리(權利)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결국 모든 것을 지배(支配)한 사람이요, 어떤 면에서나 에서보다 큰 사람인 것이다. 자기 가족에게 늘 관심(關心)을 가지고 일일이 개인적(個人的)으로 참여하는 것이 결코 위대(偉大)한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이거나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야곱은 에서가 자기 군대(軍隊)의 우두머리로서 보여준 것보다 더 훌륭한 예를 자기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보여 주고 있다.


C. 그들은 서로 만나 그들 사이에 가능(可能)한 최선(最先)의 태도(態度)로 친절(親切)하게 대했다.

(1). 야곱은 에서에게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창33:3절). 

비록 에서가 적(敵)이기 때문에 두려웠지만 그를 형으로 맞아 경의(敬意)를 표한 것이다. 아마 그는 아벨이 그의 형 가인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동생으로서의 의무(義務)와 경의(敬意)를 형에게 결(缺)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가인의 손에 부치였었다는 사실을 기억(記憶)했을 것이다. "죄의 소원(所願)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注目)하자.


○. 깨어진 평화(平和)를 회복(回復)하는 길은 우리 자신의 의무(義務)를 수행(遂行)하고, 결코 평화(平和)가 깨졌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어떤 경우(境遇)에나 존경(尊敬)을 표(表)하는 일이다. 친구간(親舊間)에 서로 갈라지고 그 갈라짐을 영구(永久)하게 하는 것은 그 일을 늘 기억하고 반복(反復)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신뢰(信賴)하고 고난(苦難)의 날에 그에게 부르짖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당연(當然)한 문제들이 자기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호전(好戰)되는 것을 종종 발견(發見)하게 된다.


(2). 에서는 야곱을 껴안았다(4절) "에서가 달려와서" 라는 것은 미워서 쫓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달려 온 것이다. 

참으로 마음 깊이 화해(和解)하고 그는 상상(想像)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의 표시(表示)를 통하여 그에게 대했다.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었다." 어떤 사람들은 에서가 400인을 이끌고 나온 것은 돌아오는 동생을 가장 정중하게 맞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악(惡)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生覺)하기도 한다. 그런데 야곱이 자기 시종의 전언(傳言)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 분명(分明)하다. (창32:5, 6). 야곱은 생각이 깊고 의지(意志)가 꿋꿋한 사람이었다. 야곱이 근거(根據)도 없이 그처럼 두려워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聖靈)께서도 그러한 상상적(想像的)인 두려움 속에서 그렇게 기도(祈禱)하도록 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에서의 마음속에 이처럼 놀라운 변화(變化)가 지금 일어난 것이 아니고 본래 그랬었다면,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겨 사람과도 겨루어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과의 씨름을 통해 얻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자기 손에 넣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남몰래, 아무 소리 없이 그리고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으로 그 마음들을 바꾸어 놓으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울에게, 하나는 참는 은총(恩寵)을 통하여(삼상 26:21, 25), 또 다른 사울은 새롭게 하시는 은총(恩寵)을 통하여(행 9:21, 22), 하셨듯이 갑자기 적(敵)을 친구로 바꾸실 수가 있는 것이다.


②. 하나님을 신뢰(信賴)하고 고난(苦難)의 날에 그에게 부르짖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당연(當然)한 문제들이 자기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호전(好轉)되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③. 그들은 둘 다 울었다. 야곱은 그렇게 두려워한 형이 그처럼 친절(親切)하게 맞아주어 너무 기뻐서 울었고, 에서는 자기가 동생에게 계획(計劃)했던 악(惡)한 생각을 이상스럽게도 설명(說明)할 수 없게 되고 실행(實行)할 수 없게 되자, 그런 악(惡)한 의도(意圖)를 품었던 것이 부끄럽고 슬퍼져서 울었을 것이다. 


○. <야곱과 에서의 대화(對話) (창세기 33:5-15)>

우리는 여기에서 두 형제가 서로 만나 옛날의 싸움은 다 잊고 허심탄회(虛心坦懷)하고 우애(友愛) 있게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옛날의 싸움에 대해서는 일체(一切) 언급(言及)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方法)이다.


1.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膳物)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여호와께서 허락(許諾)하신 재산(財産)인 것이다(시 128:3, 112:9, 107:41).


2. 훌륭한 선택(選擇)된 선물(膳物)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을 그는 하나님의 자비(慈悲)로운 은총(恩寵)에 의하여 얻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아이들이 많고 돌보는 일이 힘들고 넉넉히 먹이고 입히지 못하면서도 그는 그 아이들은 큰 축복으로 생각했다. 그는 그의 아내들과 아이들이 차례로 나와 자기가 그들보다 먼저 그랬던 것처럼 인사를 드리게 하였다(창33:6, 7절). 가장이 존경(尊敬)을 표하는 사람들에게 온 집안이 존경(尊敬)을 표하는 것은 당연(當然)한 일이기 때문이다.


(1) 야곱은 겸손(謙遜)한 사람이다. 

체면 때문에 시종이 필요 한 사람은 아니다. 불필요(不必要)한 종자(從者)들을 거느리면서 자기의 육신(肉身)을 화려(華麗)하게 보이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하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많은 것으로 치장(治粧)하는 것은 공허(空虛)한 허영(虛榮)이고 가식(假飾)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記憶)하자.


(2) 야곱은 하나님의 보호(保護)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安全)을 위한 시종들이 필요 없었다. 

하나님을 수호자(守護者)로 모시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군병(軍兵)들의 보호(保護) 아래 어떤 위험(危險)도 없는 안전(安全)한 보호(保護)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매일 아침 하나님을 무기(武器)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은 구태(舊態)어 칼을 잡을 필요가 없다. 야곱은 이렇게 덧붙여 말하고 있다. "나로 내 주께 은혜(恩惠)를 얻게 하소서.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얻는 것, 그것만이 제가 필요(必要)한 모든 것이고, 내가 하나님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자기형의 선의(善意)를 그렇게 귀(貴)하게 여겼다면 하나님의 선의(善意)를 우리가 얼마나 더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1) 이곳에서 그는 밭을 산다(창33:19절). 

비록 가나안 땅이 약속(約束)에 의하면 그의 것이긴 하였지만, 그것을 자기 소유(所有)로 할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거주(居住)하는 사람들과 논쟁(論爭)을 피(避)하려고 그는 돈을 주고 자기 땅을 사는 것으로 만족(滿足)했다. 소유권(所有權)은 은총(恩寵)에 근거(根據)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記憶)하자. 하늘을 값없이 얻었다고 해서, 땅조차 그렇게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2) 그는 제단(祭壇)을 쌓았다(창33:20절).

[1] 섭리(攝理)로 그를 인도(引導)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感謝)하기 위(爲)한 것이었다. 

그는 그저 말로만 감사한다고 하는 것으로는 만족(滿足)할 수가 없어 실제(實際)로 그 감사(感謝)를 표현(表現)한 것이다.


[2] 자기 가정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며 신앙(信仰)을 지켜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장막(帳幕)을 치는 곳이면 언제나 그 곳에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단(祭壇)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記憶)하자. 우리가 집을 짓는 곳에는 언제나 교회(敎會)도 있어야 한다. 그는 이 제단(祭壇)을 "엘. 엘로헤. 이스엘" 곧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최선(最先)의 존재(存在)이시고 최초(最初)의 원인이신 분을 위해 바쳤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해서 바친 것인데 이는 자기와 계약(契約)을 맺어주신 하나님을 뜻한다. 하나님께 예배(禮拜)를 드릴 때, 우리는 자연적(自然的)인 신앙(信仰)의 깨달음과 계시(啓示)된 신앙(信仰)의 깨달음에 의(義)하여 함께 인도(引導)되고 지도(指導)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記憶)하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최근(最近)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이제 야곱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다. 비록 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긴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그의 주님(主任)이요 그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의 영예(榮譽)는 그 영예(榮譽)가 하나님의 영예(榮譽)에 의하여 성별(聖別)될 때에만 참다운 영예(榮譽)가 된다는 것을 기억(記憶)하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광(榮光)인 것이다.


(火) 05월31일  <디나가 수치(羞恥)를 당(當)함 >


(Q)~(창세기 34장) “에서”와의 화해(和解)이후에 가나안땅에 평화(平和)롭게 정착(定着)하려던 야곱의 계획(計畫)에 어떠한 문제(問題)와 사건(事件)이 있었으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과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A)~○. 형(兄) 에서와 화해(和解)한 야곱은 평화롭게 가나안 땅에서 정착(定着)하여 살고자 했지만 뜻하지 않는 히위 족속중 하몰의 아들 세겜으로 인하여 발생(發生)한 딸(디나)의 수치(羞恥)로 인(因)한 아들 시므온과 레위의 속임수를 사용하여(할례(割禮)받으면 용서(容恕)해주고 통혼(通婚)을 수락(受諾)해준다는 위장(僞裝)조건을 내세워) 살인(殺人) 보복(報服)하는 사건(事件)이 발생하여 더 이상 세겜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경솔(輕率)한 아들들의 무례(無禮)한 행위는 파멸(破滅)과 살육(殺戮)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을 교훈(敎訓)해주신다.


○. 디나에게 일어난 비극적(悲劇的) 사건(事件)을 통해 (창세기 34장)은 궁극적(窮極的)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디나 이야기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디나에게 일어난 사건(事件)은 야곱이 서원(誓願)을 지켜서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정착(定着)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며 서원(誓願)의 이행(移行)에 관한 교훈(敎訓)을 주는 본문(本文)일까? 또는 낯선 지역(地域)에서 디나의 조심스럽지 못했던 태도(態度)나 분노(忿怒)를 절제(節制)하지 못했던 시므온과 레위와 관련하여 도덕적(道德的) 교훈(敎訓)을 주는 것이 목적(目的)인가? 창세기 34장은 본문(本文)에 내재(內在)된 ‘원인론적(原因論的) 요소(要素)들’(Etiological elements)로 인(因)해 야곱 가족에게 있었던 하나의 비극적(悲劇的) 사건(事件)의 차원(次元)을 넘어서서 공동체적(共同體的)인 의미(意味)를 가진 본문(本文)으로 이해(理解)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민족(民族)의 차원(次元)에서 창세기 34장의사건(事件)이 후대(後代)의 상황(狀況)과 어떤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 <디나 이야기(창 34장)>는 창세기의 다른 본문(本文)처럼 ‘유래(由來)(또는 기원(起源))를 설명하는 내용(內容)’(원인론(原因論), Etiology)을 포함(包含)하고 있다. 시므온 지파(支派)와 레위 지파의 시조(始祖)인 시므온과 레위의 무용담(武勇談)을 담고 있으며, 훗날 이스라엘 역사(歷史)에서 종교적(宗敎的)으로 중요(重要)한 도시(都市)였던 세겜이라는 성읍(城邑)의 기원(起源)을 전(傳)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창세기 34장은 이방인(異邦人)들과의 상호결혼(相互結婚)(intermarriage)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民族)의 거부감(拒否感)과 배타성(排他性)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드러나는 본문(本文)으로서 훗날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通婚)이나 조약(條約)을 맺는 것을 금지(禁止)하는 율법(律法)(출 34:16;신 7:1-4 등 참조)에 대한 내러티브(narrative)적 근거(根據)를 제공(提供)한다.


○. 거룩함의 세속화(世俗化)의 결말(結末)과 물질(物質)에 대한 탐욕(貪慾)과 권모술수(權謀術數)의 결말(結末)로 한쪽 집안은 몰락(沒落)하게 되며 다른 한쪽 집안은 두려움과 공포(恐怖)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두려움과 염려(念慮)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水) 06월01일  <만연(蔓延)한 우상숭배(偶像崇拜) >


(Q)~(창세기 35:01~15) 야곱이 그의 가족(家族)들과 다시금 벧엘로 올라가는 사건(事件)은 참된 회개(悔改)와 예배(禮拜)에 관하여 어떠한 교훈(敎訓)을 가르쳐 주며 얻을 수 있습니까?


(A)~○. 자신들의 힘으로 선민(選民)의 명예회복(名譽回復)을 추구(追求)하다가 끝내 피의 복수자(複數者)와 약탈자(掠奪者)라는 오명(汚名)을 쓰게 된 야곱 가정(家庭)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傳達)되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를 죄악(罪惡)과 위경(危境)의 올가미로 묶어버린 야곱 가정(家庭)에 찾아오셔서 그들의 허물을 정확(正確)히 지적(指摘)하시고 그에 대한 해결방안(解決方案)을 제시(提示)하셨다. 태초(太初)부터 선포(宣布)되고(창1:3), 택(擇)한자에게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들려주시는(창6:13, 12:1, 26:2)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엘로힘)의 말씀만이 죄악(罪惡)의 진 흙속에 빠진 인간(人間)을 구원(救援)하며 새 삶을 살게 한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잊고 있는 우리의 의무(義務)를 몇 번이고 양심(良心)을 통해서나 어떤 섭리(攝理)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을 통해서나 간에, 이런 저런 방법(方法)으로 회상(回想)하도록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


○.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맹세(盟勢)를 했으면 그 맹세(盟勢)한 일을 지체(遲滯)해서는 안 된다(전 5:4). 그러나 그래도 완전(完全)히 지키지 않는 것보다는 좀 늦더라도 실천(實踐)하는 것이 더 좋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가서 거기서 정착(定着)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야곱만이 아니라 야곱의 온 가족이 야곱의 헌신(獻身)에 참여(參與)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살기를 원해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記憶)하자(시 27:4). 하나님의 집 벧엘은 여관(旅館)이 아니라 내 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직접적(直接的)으로 그 서원(誓願)을 기억(記憶)하게 하시지 않고 그가 서원(誓願)을 했던 그 때 사정(事情)을 회상(回想)하도록 하시었다. "네가 네 형(兄) 에서의 낯을 피(避)하여 도망(逃亡)하던 때에" 라고 말씀하셨다. 이전(以前)의 고난(苦難)을 기억하면서 그 고난(苦難) 속에서 우리의 영혼(靈魂)이 어떠한 일을 했는가를 생각해 내야 한다(시 66:13, 14).


○.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우상(偶像)과 미신적(迷信的)인 것들을 모두 갖다 버렸다(4절). 만약 야곱이 더 좀 일찍이 그렇게 하게 했더라면, 양심적(良心的)으로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그들은 좀 더 일찍이 그 모든 것을 버렸을 것이다. 


○. <(창세기35:2) 잘못을 제거(除去)하려는 야곱의 노력(努力)이 받으신바 됨>

―야곱은 마음을 겸비(謙卑)히 하고 가족들에게도 스스로 마음을 낮추고 모든 단장품(丹粧品)들을 제(除)하라고 명(命)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희생제물(犧牲祭物)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들의 죄를 속(贖)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떠나시지 않도록 간구(懇求)함으로써 다른 족속(族屬)들에게 멸절(滅絶)을 당하지 않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가족들에게서 잘못을 제거(除去)하려는 야곱의 노력(努力)을 가납(嘉納)하시고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를 축복(祝福)하시고 그에게 하신 언약(言約)을 새롭게 하셨다(3영적 137). (창 35:2, 화잇주석)


○. <(창세기35:1) 벧엘로 올라가서.>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가 술수(術數)로 세겜인들을 학살(虐殺)한 것에 대해서 근방(近方)의 다른 가나안인들이 복수(復讐)를 감행(敢行)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연로(年老)한 족장(族長)은 그 두려운 행동과 이에 예상(豫想)되는 결과(結果)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또한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당황(唐惶)해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또다시 그에게 나타나서 그의 가족을 보호(保護)하기 위해서 취(取)해야 할 행동(行動)에 대해 지시(指示)하였다. 라반의 분노(忿怒)와 에서의 적대감(敵對感)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었던 동일(同一)한 신(神)의 팔이 계속(繼續)해서 그를 보호(保護)하고 보존(保存)시켜 주겠다는 보증(保證)을 받았을 때 야곱의 마음이 얼마나 행복(幸福)하였겠는가!


○. <(창세기35:2) 이방신상(異邦神像)을 버리고.>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을 바라보면서 철저(徹底)한 개혁(改革)이 이루어졌다. 야곱과 그의 가족이 여호와를 뵙기 전에 해야 할 많은 일이 있었다(참조 암 4:12; 요일 3:3). 그의 아내들을 배려(配慮)하는 마음에서 야곱은 그들의 장막(帳幕)에 우상(偶像)들이 존재(存在)하는 것을 묵인(黙認)했다. 이 이방신(異邦神)들 가운데는 아마도 라헬이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훔친 드라빔(31:19)과 그의 종들의 우상(偶像)들, 또한 세겜의 탈 취물(奪取物) 중에서 그의 아들들이 소유(所有)하게 된 것들이 포함(包含)되었을 것이다.


○. 야곱이 그의 가족들에게 내린 지시(指示)가 후에 시내산에서 내려졌던 지시(指示)와 매우 흡사(恰似)한 것으로 보아(출 19:10),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르러 온 구체적(具體的)인 지시대로 행동하였거나 혹(或)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운 절차(節次)대로 행했을 것이다. 신체(身體)를 외모적(外貌的)으로 정결(淨潔)하게 하고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은 정신(精神)과 마음의 도덕적(道德的) 및 영적정결(靈的淨潔)을 상징(象徵)하였다(사 64:6; 61:10).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적합(適合)한 준비(準備) 없이 임(臨)하지 말 것이다(참조 눅 14:28).


○. <(창세기35:14) 야곱이…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야곱은 기념석(紀念石)을 세움으로써 이 신적(神的) 현시(顯示)에 대한 기억(記憶)을 영속(永續)시켰다. 약 25년 혹은 30년 전에 세웠던 “기둥”은 아마 넘어졌거나 사라졌을 것이다. 기둥을 세우는 일은 야곱이 좋아하는 습관(習慣)이었던 것 같다(28:18; 31:45; 35:20). 하나님께 바친 각각(各各)의 “기둥” 위에 그는 포도주의 “전제(奠祭)”를 드렸거나, (올리브)기름을 부었거나 혹은 두 가지를 모두 부었을 것이다. (창 35:1~15, 재림교주석)


(木) 06월02일  <하나님과 씨름함 >


(Q)~(창세기 35:16~29) 야곱은 그의 가정(家庭)에서 있었던 많은 문제(問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되나요?


<(A)~○. (창세기35:1~29)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야곱의 생애(生涯)>

본 창세기35장은 출생(出生)과 죽음 그리고 신앙(信仰)과 범죄(犯罪)가 혼합(混合)된 우리 인간사(人間事)의 축소판(縮小版)이라 할 수 있다.

너무나도 인간적(人間的)이면서도 신앙(信仰)의 사람이었던 야곱을 중심으로 (창35장)은 ①.신앙(信仰)의 회복운동(回復運動)과(창35:1~15) ②.막내아들 베냐민의 출생(出生)과 장자(長子) 르우벤의 치욕적(恥辱的)인 서모(庶母)빌하와의 통간(通姦)사건 (창35:16~22)과 그리고  ③.사랑했던 세 사람, 즉 어머니의 유모(乳母) 드보라와 총애(寵愛)하던 아내 라헬과 그리고 아버지 이삭의 죽음과 장례(葬禮)등(창35:8, 19, 29절)의 장면(場面)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이처럼 야곱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고달픔 생애(生涯)(창47:9)는 그대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廣野生活)로 이어지고 동시(同時)에 오늘날의 교회(敎會)와 성도(聖徒)들의 삶을 연상(聯想)시키지만 그래도 그는 ①.변(變)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언약(言約)과 ②. 가나안 땅에 대한 불타는 꿈과 ③.여인(女人)의 후손(後孫)으로 지칭(指稱)된 영광(榮光)된 메시아의 소망(所望)을 소유(所有)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結局)은 야곱의 생애(生涯)는 승리(勝利)의 삶으로 승화(昇華)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 특히 야곱은 지금까지의 경험(經驗)과 체험(體驗)을 통하여 자기주변(自己周邊)에 만연(蔓延)된 죄와 악(惡)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이 성취(成就)되리라는 온전(穩全)한 믿음의 신뢰(信賴)를 하였다는 사실(事實)이다.


○. <(창세기 35:16-20)라헬의 죽음 → 라헬은 심한 진통(陣痛)을 겪었다.>

보통 있는 산고(産苦)보다는 더 심한 산고(産苦)로 괴로움을 받았다. 이는 죄의 결과(結果)다(창세기 3:16). 인간의 삶은 슬픔과 더불어 시작(始作)하고, 장미꽃의 즐거움은 가시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 장례(葬禮)에 대한 자세(姿勢)한 이야기는 언급(言及)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分明)히 야곱이 가장 애통(哀痛)했을 것이다. 커다란 고통(苦痛)이 때로는 커다란 위로(慰勞)가 있는 직후(直後)에 닥친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야곱이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의 환상(幻像)을 뵙고 너무 기고만장(氣高萬丈)하여 들뜰까 봐 그를 겸허(謙虛)하게 하시기 위해 육신(肉身)의 가시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임(臨)하는 특별한 은총(恩寵)을 누리는 사람들은 인간의 자녀에게 흔히 있는 모든 고통(苦痛)도 또한 당하리라고 각오(覺悟)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창35:29) 이삭이…기운이 진하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葬事)하였더라. >

에서와 야곱은 당시 거의 23 년간 온전히 화해(和解)하고 지내왔다. 그러므로 그들의 존경(尊敬)하는 아버지를 위한 마지막 의식(儀式)에 에서가 야곱과 연합(聯合)한 것을 보는 것은 이상(異常)한 일이 아니다. 이와 유사(類似)한 상황(狀況)에서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매장(埋葬)에 협력(協力)하였다(25:9). 이삭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敬虔)하고 겸손(謙遜)하게 복종(服從)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동료 인간들에게는 양순(良順)하고 관대(寬待)한 인물(人物)이었다. 그의 아들 야곱의 품성(稟性)과 비교(比較)해 볼 때 그의 품성(稟性)은 훨씬 탁월(卓越)했다.” (창 35:29, 재림교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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