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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 예수 영혼의 닻 -(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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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2-08 00:50 조회1,4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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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과-예수, 영혼(靈魂)의 닻>

                                                  (2022년02월12일(안)일몰 18시08분)

 

(02월06일(일) <하나님의 선(善)한 말씀을 맛봄>

 

(Q)~(히브리서 6:4~5)에서 “하나님의 선(善)한 말씀을 맛본” 신자(信者)들에게 즉 복음(福音)의 진리(眞理)를 개인적(個人的)으로 경험(經驗)한자들에게 히브리서 저자(著者)는 어떠한 경고(警告)를 주고 있나요?

 

(A)~⑴.(경고(警告)의 목적(目的))

   이 무서운 경고(警告)의 목적(目的)이 무엇인지 주의 깊이 생각(生覺)해 보아야 한다. 

전후 문맥(前後文脈)에서 저자(著者)는 수신자(受信者)들의 영적(靈的)인 나태(懶怠) 및 미성숙(未成熟)에 대한 염려(念慮)를 피력(披瀝)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경험(經驗)에서 그 때쯤에는 이미 선생(先生)이 되어야 했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도 그리스도교 도(道)의 초보(初步)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참조 히 5:11∼6:2). 

사도(使徒)는 그들의 방만(放漫)한 믿음 생활에 부흥(復興)을 일으키라고 촉구(促求)하면서 (히브리서 6:4∼6)에 포함(包含)된 무서운 경고(警告)를 발한다. 

저자(著者)는 이런 엄(嚴)한 경고(警告)를 발(發)한 후 보증(保證)을 주는 기별(寄別)로 다시 돌아와,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救援)에 가까운 것을 확신(確信)하노라.”(9절)고 사려(思慮) 깊게 말한다. 

다시 그는 그들에게 “동일(同一)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所望)의 풍성(豊盛)함에 이르”고 게으르지 말라고 권고(勸告)한다(11, 12절). 

따라서 이 두려운 말씀들은 수신자(受信者)들이 영적(靈的)으로 건강(健康)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사도(使徒)의 염원(念願)의 틀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사용(使用)하여 낙담(落膽)하고 낙심(落心)케 하는 것은 원래(元來) 문맥(文脈)과 의도(意圖)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 있다.

 

⑵.(이 구절(句節)을 이해(理解)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質問)을 염두(念頭)에 두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묘사(描寫)된 사람들은 한때 신실(信實)한 신자(信者)였는가, 아니면 가짜 그리스도인이었는가?

   ㉯.그들의 “타락(墮落)”의 성격(性格)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배도(背道)는 전면적(全面的)이었는가, 아니면 부분적(部分的)이었는가?

   ㉰.타락(墮落)한 자들은 회개(悔改)하여 절대(絶對) 회복(回復)될 수 없는가, 아니면 그들이 그 배도(背道)에서 돌이키면 다시 한 번 그리스도교의 신앙(信仰)을 회복(回復)할 수 있는가?

   ㉱.이 구절(句節)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죄(罪)가 무엇을 의미(意味)한다고 말하는가?

 

⑶.사도(使徒)는 이 경고(警告)들(어떤 것은 매우 두려운 경고(警告)임)을 이용(利用)하여, 출애굽한 이후(以後)에 광야생활(廣野生活)의 경험(經驗)과 반역(叛逆)에 대한 교훈(敎訓)들을 망각(忘却)하지 말고, 그리스도교의 신앙(信仰)으로 다시 돌아와 좀 더 결정적(決定的)인 헌신(獻身)의 삶을 살라고 권고(勸告)한다. 

 

(02월07일(월) < 다시 새롭게 할 수 없음 >

 

(Q)~(히브리서 6:6절)에서 “타락(墮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悔改)할 수 없나니”라고 한 말씀의 의미(意味)는 무엇입니까?

 

(A)~⑴.이 사람들이 지금은 그리스도교의 신앙(信仰)에서 배도(背道)한 상태(常態)에 있으나 한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헌신(獻身)된 삶의 축복(祝福)을 누렸었다. 

사도(使徒)는 이들의 경험(經驗) 가운데서 현재(現在)의 상태(常態)를 네 가지 구절(句節)을 사용(使用)하여 표현(表現)한다. 

 

이 사람들은 (1) “빛을 받고” (2) “하늘의 은사(恩賜)를 맛보고” (3) “성령(聖靈)에 참여(參與)한 바 되고” (4) “하나님의 선(善)한 말씀과 내세(來世)의 능력(能力)을 맛”본 적이 있다. 

 

이 구절(句節)들을 액면(額面) 그대로 읽으면, 이들이 한때 온전(穩全)한 그리스인이고 그리스도교 신앙(信仰)의 가장 고귀(高貴)하고 거룩한 축복(祝福)들을 누린 적이 있었다는 결론(結論)을 얻게 된다.

 

⑵.그러므로 한때 충실(忠實)한 신자(信者)였던 이 사람들의 현재 상태(現在常態)를 다시 말하자면 이렇다. 

 

이들은 지금 그리스도교의 신앙(信仰)으로부터 “타락(墮落)했”다. 또한 다소(多少) 난해(難解)한 표현(表現)이지만 저자(著者)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辱)되게”(6절) 하였다고 말한다. 

 

이들이 자신(自身)들의 이전(以前) 생활 방식(生活方式)으로 다시 돌아오려고 그리스도교의 신앙(信仰)에서 조용히 돌아섰던 것 같진 않다. 

 

이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인 경험(經驗)과 거기서 배도(背道)한 것을 신자(信者)들을 경멸(輕蔑)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힌 메시야를 따르는 것은 순진(順進)하고 바보 같은 짓이라고 비아냥거렸을 것이다. 

 

⑶.예수를 배신(背信)한 유다의 전철(前轍)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런 묘사(描寫)를 통해서 사도(使徒)는 이 무리의 전면적(全面的)인 배도(背道)를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過去) 신앙(信仰)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지금은 사도(使徒)가 신실(信實)한 것으로 여겼던 자신들의 이전(以前) 신앙(信仰)에 대해서 도전(挑戰)하고 있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敎會)에서 영원(永遠)히 잃어버림을 당한 자들이다.

 

⑷.그들은 저희 자신(自身)의 생애(生涯)와 다른 이들의 생애(生涯) 가운데서 하나님의 강(强)한 능력(能力)을 목격(目擊)했다. 그들은 유대인처럼 자신의 권위(權威)와 권력(權力)에 위협(威脅)이 된 존재(存在)인 예수를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아 죽인 것처럼 선악(善惡)의 쟁투(爭鬪)에서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本質)을 부인(否認)하고 자아(自我)가 십자가(十字架)에 죽는 경험(經驗)을 거절(拒絶)하고 배교(背敎)하는 자들로서 예수그리스도와 개인적(個人的)인 관계(關係)를 단절(斷切)하기로 선택(選擇)한 자들은 하나님께서도 다시 새롭게 하실 수 없다는 말씀이다.

 

(02월08일(화) <다시 속죄(贖罪)하는 제사(祭祀)가 없고>

 

(Q)~(히브리서 10:26절)에서 “다시 속죄(贖罪)하는 제사(祭祀)가 없고”라는 말씀은 용서(容恕)함이 없는 죄(罪)라는 것인데 어떠한 죄에 대해서는 속죄하는 제사(祭祀)가 없다는 의미(意味)인가요?

 

(A)~⑴.우리가 진리(眞理)를 아는 지식(知識)을 받은 후(後) 짐짓 죄를 범(犯)한즉 다시 속죄(贖罪)하는 제사(祭祀)가 없고. ‘진리(眞理)’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구원(救援)의 개시(開始)를 의미(意味)하며 ‘죄를 범(犯)한’의 헬라어 ‘하마르타논톤’은 현재 분사(分詞)로 계속적(繼續的)으로 범죄(犯罪)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救援)하시는 계시(啓示)와 그리스도를 통해 드려진 희생제사(犧牲祭祀)의 효력(效力)을 거부(拒否)하고 계속적(繼續的)으로 고집(固執)스럽게 범죄(犯罪)하는 자는 더 이상 속죄(贖罪)할 수 있는 제사(祭祀)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는 의도적(意圖的)이며 자발적(自發的)으로 배교(背敎)하였으며 유일(唯一)한 구원(救援)의 방법(方法)인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사역을 계속(繼續) 거부(拒否)하기 때문이다.

 

⑵.문맥(文脈)이 보여 주듯이(히10:29절), 고의적(故意的)으로 죄(罪)를 계속(繼續) 짓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가증(可憎)스런 성품(性稟)에 대하여 충분(充分)히 인식(認識)하면서 범(犯)한 단순(單純)한 죄(罪)된 행위(行爲)들이 아니라, 고의적(故意的)으로 그리스도를 부인(否認)하고, 구원(救援)을 거부(拒否)하고, 성령(聖靈)을 거절(拒絶)할 때 나타나는 마음의 태도(態度)를 언급(言及)한 것이다. 이는 고의적(故意的)이고, 완고(頑固)하고, 거만(倨慢)한 죄(罪)이다. 

 

⑶.그리스도 안에서 구원(救援)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에게 자신(自身)의 마음과 생애(生涯)를 굴복(屈伏)하기로 한 이전(以前) 결심(決心)을 숙고(熟考) 끝에 역전(逆轉)시킨 행위(行爲)이다. 

이는 계획(計劃)된 배도(背道)요, 사(赦)함을 받을 수 없는 죄로 이끈다.(마 12:31, 32 주석참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叛逆)이 계속(繼續)되는 상태(常態)를 말한다. 

 

⑷.<다시(는)]…제사(祭祀)가 없고>. 라는 말씀은,

   ☞. 모세의 법(法)은 완고(頑固)하고 고집 센 배교자(背敎者)에 대하여는 제사(祭祀)가 아닌 사형(死刑)을 명(命)하였다. 나답과 아비후(레 10:1~5절 참조), 고라, 다단, 아비람 그리고 그들과 공모(共謀)했던 250인이 그런 자(者)들이었다(민 16:1~35 참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제사(祭祀)를 가납(嘉納)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사(祭祀)는 그들이 회개(悔改)한 마음을 나타낸 만큼만 가치(價値)가 있기 때문이다. 

 

⑸.구원자(救援者)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誹謗)하고 조롱(嘲弄)하며 그의 구속(救贖)의 원리(原理)를 보고 배우고 알면서도 강퍅한 마음으로 성령(聖靈)을 거부(拒否)하는 자에게는 다시는 속죄(贖罪)하는 제사(祭祀)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02월09일(수) <더 좋은 것들>

 

(Q)~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더 좋은 것들은 무엇이며” 또한 변함없이 나타내야 할 특징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A)~⑴.(히브리서 6:9절)에서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救援)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는 말씀에서 ‘이보다 나은 것’에 해당(該當)하는 헬라어 ‘타 크레잇소나’은 저자(著者)가 (히6:4-8절)에서 언급(言及)한 배도 자(背道者)의 상태(常態)와 관련(關聯)된 것으로 수신자(受信者)들을 배도자(背道者)와 비교(比較)할 때 훨씬 좋은 상태(常態) 즉 배도자(背道者)들이 받는 저주(詛呪)의 상태(常態)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축복(祝福)을 받는 상태(常態)에 있음을 시사(時事)하며, 예수님의 보혈(寶血)의 공로(功勞)와 이름으로 실행(實行)하는 사랑과 믿음과 인내(忍耐)를 특징(特徵)으로 볼 수 있다.

⑵.절대적(絶對的)인 확신(確信)은 소망(所望)에 대한 절대적(絶對的) 확신(確信)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완전(完全)한 확신(確信)은 큰 열심(熱心)과 끝까지 견디는 인내(忍耐)에서 이르게 되는 것이다.

 

⑶.믿음의 성도(聖徒)들에게 진정(眞正)한 소망(所望)은 참으로 중요(重要)하지만 이 소망(所望)에 대한 것을 지식적(知識的)으로만 배우는 것에서 머물러있는 것은 아무런 가치(價値)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진정(眞正)한 소망(所望)이 있는 자는 사랑의 행실(行實)로 드러나게 마련인데 이는 믿음을 통해서 진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02월11일(목) <예수, 영혼(靈魂)의 닻>

 

(Q)~(히브리서 6:19절)에서의 예수님께서 “영혼의 닻”으로 비유(譬喩)한 배경(背景)과 의미(意味)는 무엇입니까?

 

(A)~⑴.(히브리서 6:19절)에서 본 절에서 닻의 비유(譬喩)가 사용(使用)되는 것과 같이 ‘삶’을 ‘항해(航海)’에 비유(譬喩)하는 것은 고대문학(古代文學)에 있어서 흔히볼 수 있는 표현(表現)이었다(Hilgert). 그러나 신약성경(新約聖經)에서 이와 같은 비유(譬喩)는 오직 본 절(節)에서만 나타난다. 이 ‘닻’의 비유(譬喩)는 헬라 문학(文學)에서도 그러했듯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Lane). 저자(著者)는 소망(所望)이 ‘영혼(靈魂)의 닻’과 같은 역할(役割)을 한다는 표현(表現)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소망(所望)하는 종말론적(終末論的) 구원(救援)의 성취(成就)가 확고(確固)한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본 절의 ‘영혼(靈魂)’에 해당(該當)하는 헬라어 ‘프쉬케스’은 인간(人間)을 ‘육(肉)’과 ‘영혼(靈魂)’으로 분리(分離)하는 헬라 철학(哲學)의 이원론적(二元論的) 개념(槪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本質的)인 생명(生命)을 나타낸다(Morris).

 

⑵.닻은 폭풍(暴風) 가운데서 배를 붙들어 주며 암초(暗礁) 위로 표류(漂流)하지 않도록 지켜 준다. 그러나 닻이 미끄러질 때도 있다. 하지만 “소망(所望)”의 닻은 그렇지 않다. 닻에 관한 비유(譬喩)는 성경(聖經) 가운데서 오직 여기에만 나온다. 그러므로 불변(不變)하시는 예수그리스도께 신앙(信仰)의 밧줄로 믿음의 밧줄로 단단히 매여있으로 좌(左)로나 우(右)로나 치우치지 않는 믿음의 승리자(勝利者)가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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